소설리스트

환생자도 방송할 수 있습니다-97화 (97/233)

97화

“으어.”

건우는 얼음 뭉치를 눈가에 얹으며 홧홧한 열기를 식혔다. 슬쩍 얼음 뭉치를 들면 그를 빤히 보는 동생이 있다.

뚱한 건지 덤덤한 건지 화난 건지 분간 안 가는 표정은 평소랑 다를 게 없다. 울었다고 대놓고 광고하는 것처럼 눈시울이 붉은 그와 달랐다.

그에 서건우는 몰아치는 창피함과 부끄러움 느꼈다. 자동으로 목소리가 커진다.

“다른 데 좀 봐라!”

“…왜?”

“왜긴 뭔 왜야!”

한낮에, 스물일곱 먹고 동생 앞에서 체면 잊고 펑펑 운 것도 쪽팔리는데, 그러면서 한 말도 어지간히 창피한 부류다. 물론 시간이 돌아간다 해도 똑같은 말을 하겠지만… 그래도 부끄러운 건 부끄러운 거였다.

서건우의 귀가 새빨개졌다. 결국 은우가 먼저 고개를 돌렸다.

달칵.

건우는 얼음을 들고 빼꼼 눈을 내밀었다. 동생은 주방으로 다시 들어가 냉장고를 열고 있다. 꺼내진 건 콜라다.

“콜라 적당히 마시라니까.”

“…어.”

눈을 데구르르 굴리는 꼴이 빈말이란 걸 잘 알려 준다. 서건우는 혀를 차며 얼음을 내려 두었다. 솔직히 손이 너무 시렸다.

어색한 침묵이 해일처럼 몰려왔다.

건우는 고개를 데구르르 돌려 그의 가방을 보았다.

할 게 없는데… 가져온 게임기라도 꺼낼까? 아, 근데 매일 방송에서 게임하는 애한테 이런 거 시켜도 되나? 거기에 오늘 저녁에도 당장 게임을 할 텐데…….

그는 심각해졌다. 사실 형제라도 해도 성인 남자 둘이 주말에 모여서 할 게 뭐가 있겠나. 동생 방송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저녁에 갈 거긴 하지만, 낮만 해도 시간이 길다.

때문에 친구를 닦달해서 2인용 게임을 추천받아 왔다. 할 게 없어 어색해지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다음에 게임 한번 하자고 했던 건 단순히 다가와도 된다는 무언의 의미가 아니었을까? 말뜻 그대로가 아니라. 만약 그게 진짜라면 어떻게 하지?

서건우가 심각하게 고민하는 사이, 은우는 시시각각 변하는 형의 얼굴을 관찰했다. 딱히 할 것도 없었고, 솔직히 확확 바뀌는 얼굴이 좀 웃겼다.

그보다 감정 표현에 더 능한─많은?─사람인 건 알지만, 저 정도인 줄은 몰랐다. 저러면 사회생활 어렵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아!”

고민이 끝났나 보다. 은우는 잠깐 형의 사회생활에 대해 생각해 보다가 도로 형을 보았다.

안색이 확 나아진 형은 눈에서부터 빛이 반짝반짝 났다. 그와는 별로 친하지 않은 눈이다. 싱그러운 풀 내음이 날 것 같은 순수의 눈.

“드라이브 갈래?”

왜 하필 드라이브인지는 모르겠지만, 은우는 거절하지 않았다.

▣ 097. 만무강수

은우는 창을 열고 팔을 걸쳤다. 비록 그가 직접 운전하는 건 아니었지만, 흘러드는 바람이 퍽 기분 좋았다. 지나치는 광경도 마찬가지였다.

집에 콕 박혀 있을 때와 별다를 게 없다가도 묘하게 탁 풀리는 것이다.

이런 걸 생각하면, 귀찮아서 따지 않은 운전면허가 고파진다. 남는 시간에 따 둘까. 물론 크루 러시처럼은 못 달리겠지만…….

그는 겨울철 보닛 위 고양이처럼 늘어졌다. 덩치로 인해 곰 한 마리가 조수석에 앉아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다만 특유의 뚱한─무표정한─표정은 그대로였기에, 건우는 그런 동생을 힐끗힐끗 살폈다. 목적지만 설정해 두면 차가 알아서 움직여 주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만일을 대비해 운전석에는 반드시 한 사람이 앉아 있어야 하지만.

“…자냐?”

“아니.”

다행히, 혹은 덜 다행히 동생은 자지 않았다.

건우는 자동으로 돌아가는 운전대를 괜스레 톡톡 쳤다.

묘하게 집돌이일 것 같은 동생이라, 바깥바람 좀 쐬어 줄 겸 그만의 비밀 장소를 공개해 어색함을 없애 보려 나온 건 좋다. 근데 이동하는 과정을 생각 안 했다. 멍청이였다.

그는 필사적으로 대화거리를 떠올렸다.

방송에 대해서 물어볼까? 다만 그건 그에게 너무 어려운 주제였다. 동생이 방송인이란 걸 안 이후로 알아보긴 했으나, 그간 인터넷 방송과 벽을 치고 살아온 삶이 너무 길었다.

그렇다면 뭐가 낫지. 지뢰가 되지 않을 주제가 뭐가 있을까!

“아, 맞다. 너, 면허 없댔지?”

“…어.”

서건우는 가까스로 해답을 찾았다. 운전면허. 차에 탄 상황에서 물어보기 딱 좋은 이야깃거리였다. 완벽했다.

“딸 생각 없어?”

“없진 않아.”

“그래. 있어서 나쁠 거 없어. 반년에 한 번 정도 실기 점검 해야 하긴 한데… 그거 빼곤 다 괜찮아.”

“실기 점검?”

운전면허를 땄거나 준비하는 사람이 아니면 의외로 모르는 사항이었기에 건우는 쉬이 설명해 주었다.

“별거 아냐. 수동 운전 가능 여부를 알아보는 거니까.”

“아.”

“왜, 자동 운전 시스템에 오류가 나거나 사고가 났을 때는 사람이 수동으로 해야 하니까.”

만일이라는 수식어가 그렇듯, 자주 벌어지는 일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래서 더욱 점검이 필요한 법이었다. 안전 불감증만큼 위험한 건 없으므로.

“좀 귀찮긴 한데 사고 나는 것보단 나으니까 어쩔 수 없지. 그래도 그렇게 어려운 시험은 아냐. 평상시에 수동으로 해 놓고 운전 몇 번 해 보면 다들 통과하니까.”

운전석에 반드시 사람 한 명─면허가 있는─이 있어야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인적이 없는 지역에 한해서 야밤의 택시에는 기사가 없는 경우도 있지만, 그건 택시지 일반인 얘기가 아니다.

“그런 것도 있네.”

“그렇지. 그래도 야, 예전엔 한 달에 한 번이었어.”

물론 그건 건우 세대가 아니라 그의 아버지 세대 일이었다. 그땐 자동 운전이 심심하면 문제를 일으켜서 차라리 수동 운동을 하는 사람이 더 많았다던가.

대충 3, 40년 전, 자동차 주행 중 화재 사건이 일던 만큼이라고 보면 된다고 들었다. 많은 듯하면서도 적고, 적은 듯하기에는 심심찮게 기사에서 나오던.

“안전을 위해서긴 하지만, 역시 한 달에 한 번은 너무 많지.”

실기 점검을 이유로 회사가 하루 일 빼 주는 것도 아니고. 결국 아까운 휴일을 써야 한단 건데 어떤 직장인이 반길까.

“가뜩이나 우리 회사는 휴일도 없는데.”

“없어?”

“어… 안 준다기보단 일이 많아서 가기가 힘들지. 난 아직 입사 2년 차고.”

그는 휴일 이야기가 나온 김에 그의 회사 이야기도 꺼냈다. 한 번 말문이 터지니 어색함은 사그라들고 할 말만 계속 튀어나왔다.

“내가 있는 덴 영업부인데… 대충 계약 체결을 담당한다고 보면 돼. 음, 그러니까 우리 회사에서 이런 이런 걸 해 줄 수 있다, 너흰 이걸 해 줬으면 좋겠다, 이렇게 타협 본 뒤 계약하는 역할? 그래서 외근이 되게 많아.”

세세히 따진다면 조금 다르지만, 건우는 뭉뚱그려 설명했다. 어차피 은우는 직장 생활을 한 번도 한 적 없는 애였다. 깊게 들어가 봐야 머리만 아프다.

“힘들겠네.”

“좀 그렇긴 한데, 그래도 나쁘진 않아.”

나중에 외국이나 그런 데까지 나갈 걸 생각하면 체력이 버텨 줄까 싶지만, 그렇게 나쁘진 않았다. 건우가 지금까지 겪은 바론 그랬다.

“근데 왜 휴일이 없어.”

“아니, 그게…….”

건우는 머리를 벅벅 긁다가 이야기를 들려줬다. 먼저 입사해서 대리를 달았던 사람보다 더 늦게 대리를 단 사람이 팀장이 됐다는 것. 근데 그게 하필 그가 있는 팀 일이라는 것. 그래서 사무실 분위기가 개판이라는 것 등등.

“와, 나 진짜 열받는다니까. 주말에 왜 부르는지 모르겠어. 그러니까 팀장을 늦게 달지. 나 같아도 그런 사람은 진급 안 시킨다.”

직장 생활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게 어느새 불만 성토의 장으로 변했다. 사실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쌓아 뒀던 불만을 풀 기회가 쉽게 찾아오진 않으니까.

무엇보다 동생은 부모님처럼 극성으로 걱정하는 편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이야기하면 괜찮은 거냐며 호들갑을 떨지 않는다. 뒤에서 우리 아들 너무 힘들어서 어쩌냐며 걱정하지도 않을 거고. 아마, 그럴 거다.

“…아, 미안. 내가 너무 내 얘기만 했지.”

서건우는 뒤늦게 그의 실수를 깨달았다. 그들의 거리감은 아직 서로의 짐을 떠넘길 정도로 가깝지가 않을 텐데. 멋대로 선을 넘어 버린 기분이다.

“아냐.”

그는 힐끗 동생의 눈을 살폈다. 조금 더 까매졌나 싶다가도 본래 검은 눈이라 별 차이를 못 느끼겠다. 건우는 팀장님보다 표정을 더 읽기 힘들다며 혀를 찼다.

“…겪어 본 적 없어서, 그냥 신기해.”

“사내 정치 같은 건 안 겪어 보는 게 낫지.”

건우는 괜히 마음이 찔려서 핸들을 톡톡 건드렸다. 내비게이션을 보면 다행히 곧 도착이다.

“산?”

“위에 올라가면 절이 있는데, 거길 가자는 건 아니고… 올라갈 때 보이는 풍경이 근사해서.”

풍경을 강조하자 동생이 상체를 슬쩍 내밀었다. 좌석을 최대한 뒤로 빼낸지라 창문에서 시선이 살짝 비껴 나간 탓이다.

물론 창문 너머는 아직 건물로 가득했고 사람은 더 많았다.

“사람이 너무 많은데.”

“주말이라서 그런가 보다.”

그들은 사람 사이를 헤쳐 어떻게 주차장을 찾았다. 차 안에선 풍경을 볼 수 없다는 건우의 주장 때문이었다.

그들은 유료 주차장에 차를 댄 후 천천히 산을 올랐다. 나름 등산이었지 경사가 낮아서 산을 오른다는 느낌은 적었다. 초반 부분이 산책로처럼 트여 있는 탓도 있을 거다.

옆에 도로가 있고, 반대쪽에는 계곡물이 흘러서 더욱 그랬다.

“참고로 중간에 내려올 거다.”

등산은 질색이라며 서건우는 미리 백기를 들었다. 그의 동생이라면 자연스럽게 절까지 가는 걸 산책으로 받아들일 것 같아서다. 틀린 예상은 아니었다.

“중간에 슈퍼랑 식당이 있는데, 거기서부턴 완전 등산길이거든.”

“상관은 없는데. 가 본 적 있나 보네.”

“대학교 동아리에서…….”

뒷말은 붙지 않았으나 누구라도 쉽게 알아들을 수 있을 것이다. 건우는 그때를 상기하며 이마를 붙잡았다. 하필 볕이 뜨거울 때 가서 정말 죽을 맛이었다.

대신이랄지 사진은 많이 건졌지만…….

그는 힐끗 동생의 얼굴을 살폈다. 사진 찍어 줄까 했는데, 별로 안 좋아하겠지? 그는 아까도 사진 찍는 걸 이해 못 하던 동생을 떠올렸다. 다음에 찍는 게 좋겠다.

“숲이라서 시원하긴 한데, 위쪽은 경사가 심해서… 너무 힘들더라.”

“그래.”

더운데 시원하고 시원한데 덥고 지치고……. 등산을 왜 좋아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래도 엄청 높은 편은 아니니까, 나중에 가볍게 산 오를 생각 있으면 여기 와.”

운동 좋아하는 동생은 또 모르지만.

“심심하면.”

“…등산 안 싫어하나 보네.”

“뭐…….”

은우는 머리를 긁적였다.

“별거 아니니까.”

괴수가 즐비한 혹한의 산도 타 본 사람의 말이었다.

“여기 와 봤어?”

“아니. 여긴 처음.”

“그렇구나.”

건우는 고개를 주억였다가 잠깐 얼굴이 창백해졌다. 동생이 산을 싫어하지 않는다면… 친해지기 위해서 그도 산 가는 버릇을 들여야 하나……?

“운동 좀 해.”

“네가 직장 다녀 봐라… 그게 쉽나.”

아침에 출근하고 저녁에 퇴근해서 밥 먹고 나면 침대가 그렇게 좋을 수 없다. 건우는 자기가 나태한 게 아니라며 필사의 항변을 했다. 당연히 먹히진 않았다.

“엄청 짧네.”

계곡을 끼고 걷는 건 건우가 말한 슈퍼가 나온 시점에서 끊겼다.

“뭐, 반쯤은 등산로니까.”

그들은 왔던 길을 도로 내려왔다. 건우가 보여 주고 싶었던, 엄청나게 넓은 물웅덩이나, 수심이 어마어마하게 깊은 지점도 다시 보았다.

“저기 물고기.”

“어디? 어디?”

“저쪽 돌무더기에 까만 거.”

그들은 다른 등산객들이 그랬듯 산책로길 난간에 달라붙어 계곡을 구경했다.

“여긴 진짜 물이 맑다. 엄청 깊어 보이는데 바닥이 다 보이네.”

“그러게.”

형처럼 감성적이진 않은지라 은우는 반 발자국 떨어져서 적당히 감상했다. 문득 조금 떨어진 곳에서 또다른 형제가 그들처럼 계곡을 구경하는 게 보였다.

동생 쪽이 구경하는 형의 등을 치며 놀렸다. 화들짝 놀란 형이 ‘아, 깜짝아!’ 따위의 말을 지껄였다. 곧 형 쪽이 동생 쪽에게 한 소리 하긴 했지만, 마무리는 결국 웃음이었다. 그가 희수에게 곧잘 당하는 일이었다.

“…에도 물고기가 있어. 보여? 대박 커.”

은우는 형의 등을 물끄러미 봤다. 해 볼까?

“왁.”

세게 쳤다가 진짜 난간에서 떨어지면 안 되므로, 정말 톡 치듯 밀었다.

“으악!”

그렇게 세게 민 것도 아니건만, 밀렸다는 느낌이 들자마자 형이 비명을 질렀다. 그 잠깐 사이에 난간을 콱 끌어안고 주저앉는 게 형도 반사신경이 제법이다 싶다.

“어…….”

은우는 생각보다 강렬한 반응에 역으로 당황했다. 주저앉은 형이 그를 올려다보더니 이내 울컥한 표정을 지었다.

“얌마!”

건우는 은우에게 헤드록을 시도하려다가 키 차이로 실패했다. 결국 그는 ‘상체 낮춰!’란 말을 내뱉고 나서야 동생에게 보복을 가할 수 있었다.

“미안.”

“미안하면 다냐, 이 자식아!”

은우는 엉겁결에 상체까지 굽혀 주고 헤드록도 당해 줬다. 희수라면 모를까, 형에게 당해 본 건 처음이라 퍽 당황스럽다. 나쁜 기분은 아니라 가만히 있었지만.

사실 건우의 힘이 너무 약해서 별 느낌 없는 것도 한몫했다. 일부러 힘을 뺀 건지 정말 약한 건지는 몰라도.

“나 이런 거 쥐약이란 말이야. 다음부턴 절대 하지 마. 진짜 하지 마.”

“응.”

그는 고분고분 답했다. 드디어 헤드록에서 풀려났다. 지나가던 등산객들이 그들을 보며 사이가 좋다며 껄껄 웃어 댔다─물론 은우랑 눈을 마주치면 흠칫하며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뒤늦게 창피함이 몰려왔는지 건우가 뺨을 문지르며 가장자리로 비켜섰다.

“하, 진짜…….”

그리곤 심장 마사지를 하며 놀란 가슴을 달랬다. 은우는 할 말이 없어 목덜미만 문질렀다.

“미안.”

“아니, 그렇게까지 사과할 건 아니고…….”

은우는 눈을 껌뻑이다가 앞에 사람이 그러는 걸 따라 해 봤다고 실토했다. 그것을 가만히 듣던 건우가 곧 화색이 되었다.

“됐어. 그보다 아래쪽에 카페 있는데, 거기 갈까?”

기분 좋아졌다는 건 알겠는데, 왜 좋아진 건지는 모르겠다. 은우는 묘하게 기뻐 보이는 형의 얼굴을 보며 재차 눈을 끔뻑였다.

뭔진 모르겠지만 좋아하니까 됐다.

“별로야?”

“아니, 좋아.”

“오케이. 그럼 어서 내려가자.”

그들은 서둘러 걸음을 재촉했다. 카페는 중간에 조경돼 있는 작은 공원 옆에 있었다.

“헐, 저거 놀이터야? 오진다.”

카페에서 음료를 각각 사 들고 나왔을 때 보인 건 공원에 있는 놀이터였다.

“우리집 근처엔 이런 거 없었지 않아?”

“없었지.”

놀이터가 어찌나 큰지 공원의 절반을 잡아먹었다. 심지어 산이라 경사진 점을 이용해 엄청난 기링의 미끄럼틀도 있었다. 솔직히 저 정도되면 애들보단 성인용이 아닐까 싶다.

“하, 내가 스무 살만 됐어도 저거 타 볼 텐데.”

형의 말에 스무 살 동생은 목덜미만 쓸었다.

“맞다, 너 스무 살…인데 역시 안 되겠지?”

“…애들이 울 것 같은데.”

지금도 그쪽을 보며 뒷걸음질 치는 애들이 있는데 저기에 끼어들었다간 어떻게 될까. 아니, 애들이 없었어도 그의 덩치쯤 되면 못 논다. 미끄럼틀 너비만 봐도 그가 타면 어깨가 낄 거다.

“그렇게 무서운 얼굴은… 아니지 않나?”

“의문문이 나온 시점에서 무서운 축에 드는 거 아닐까.”

하여간 이놈의 덩치와 얼굴은. 은우는 시무룩해져서 음료만 빨았다. 민트 초코향이 입에 퍼지면 그럭저럭 기분이 괜찮아진다.

“뭐야, 삐졌냐?”

“안 삐졌어.”

아까 당한 것 때문인지 형은 옆에서 계속 물어 왔다.

은우는 미간을 살짝 좁히며 조금 강하게 말했다. 무의식적으로 힘이 들어가자 분위기가 제멋대로 싸늘해졌다.

“안 삐졌어.”

형이 바로 입 다물었다.

“…정정해야겠다. 무섭긴 하네.”

“…….”

은우는 그 말에 상처를 약간 받았다. 무서워 하는 사람이 하도 많아서 익숙해지긴 했는데, 형이 그러니까 이건 이것대로 상처다.

“…나도 알아.”

차라리 전생처럼 작았으면 좋았을 텐데. 그는 제 이마와 미간을 더듬었다. 그러자 이번엔 건우가 이런 반응을 예상 못 했는지 당황한 얼굴을 했다.

“아니, 아니. 그렇게 안 무서워. 진짜 안 무서워.”

“…그래.”

그런 말이 더 슬프다. 은우는 ‘차라리 헬멧이라도 쓰고 올걸.’이라며 후회했다. 방송할 때마다 착용하다 보니 이젠 일상에서도 무의식적으로 찾게 된다.

“…갈까?”

“그래.”

그들은 그냥 더 둘러보다가 돌아가기로 했다.

“헤헤, 나 못 잡지……!”

“야, 뒤!”

스케이트보드를 타던 애가 그들에게 돌진하지만 안 했어도 바로 그랬을 것이다.

은우는 반사적으로 음료를 들고 있던 팔을 멀리 뻗고, 상체를 낮췄다. 발은 타이밍에 맞춰 보드를 밟고, 음료를 들지 않은 팔로는 아이의 허리를 휘감아 들어 올렸다.

“왁.”

“와, 반사 신경 대박.”

그의 가슴팍에 애가 머리를 박긴 했지만, 그냥 부딪치는 것보단 나았다. 은우는 발로 밟아서 위로 바짝 선 보드를 천천히 내리며 애도 바닥에 내려 줬다.

그걸 가까이서 지켜본 건우는 감탄부터 했다. 그리곤 몸을 낮춰 아이와 키를 맞췄다.

“이런 건 앞에서 눈을 떼면 안 되지. 방금처럼 사람이랑 부딪치잖아.”

“죄송함니다…….”

아이는 코를 문지르며 고개를 살짝 수그렸다. 전자는 은우 몸에 부딪힌 것 때문에, 후자는 자기가 잘못한 걸 알아서 그런 것 같다.

“야! 괜찮아?”

뒤쪽에서 애들 목소리가 가까워졌다.

“사과는 부딪힌 사람한테 해야지?”

“네에.”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곤 은우 쪽으로 몸을 틀었다. 키 차이가 너무 극심한지라, 아이는 뒤로 넘어갈 것처럼 고개를 젖혀야 했다.

“죄…….”

그리고 어렵사리 고개를 든 결과, 부딪혔던 아이는 무표정하고, 날카롭고, 마치 옷 아래에 문신이 있을 것 같은 얼굴─전지적으로 아이 시점에서─을 마주할 수 있었다. 놀랍게도, 비슷한 타이밍에 뒤에서 달려오던 애들도 끼긱 멈춰 섰다.

“죄, 죄송합니다!”

얼굴을 보자마자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아이는 엄청난 성량으로 사과했다. 심지어 90도로 허리를 꺾기까지 했다.

“제가 신세 져씁니다!”

“…그래.”

“감사합니다! 만, 만, 만무강수하세요!”

아이는 그 말까지 내뱉은 후,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쳤다. 보드조차 잊어 먹은 채로.

“…….”

“…….”

이번에 처음 겪어 본 것이 아니었던지라 은우는 마른세수를 했다. 옆에 서 있던 건우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형.”

“으, 응.”

“그냥 웃어.”

“아니, 안, 푸흐흡.”

건우의 몸이 격추당한 제트기처럼 추락했다. 웃으면 동생이 상처받을 것 같아서 안 웃으려고 했는데, 방금 애가 한 인사가 너무 웃겼다.

“만무, 만무강수래…….”

인사도 안 하고 도망갔다면 예의 없는 거지만, 일단 인사는 했으니……. 심지어 신세 졌다랑 만무강수까지.

건우는 바들바들 떨며 웃었다. 아니, 이쯤 되면 울음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보드 안 가져갔는데.”

건우가 격침당한 사이, 은우는 바닥에 덩그러니 놓인 보드를 들어 올렸다. 애기용이라서 그런지 진짜 작다.

“형.”

“만, 만무강수…….”

“그만하고 이거.”

애가 만수무강을 잘못 말할 수도 있지 그게 뭐가 웃기다고. 은우는 보드를 대신 가져다주길 부탁하려다가, 계속 바들거리는 건우를 보며 결국 포기했다.

보드야 애들이 받으러 오든, 어른을 불러서 오든 그네들이 알아서 하겠지.

“그렇게 웃겨?”

“만, 만무강수라잖아…….”

형이 웃는 모습에 기분 상했다가도, 저렇게까지 웃으니 화가 안 난다. 은우도 결국 픽, 웃고 말았다.

나름 괜찮은 드라이브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