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좋지 않은데.”
하필이면 녀석들이 포위 진형을 처음부터 갖추고 있다.
은우는 쇠지렛대를 손가락에서 뱅그르르 돌리다가 가장 앞장서서 달려오는 기계장치에게 냅다 던졌다.
기계장치의 머리를 쇠지레가 강타한 순간, 지레와 함께 달려 나갔던 은우의 손바닥이 녀석의 뺨을 밀어내듯 쳤다.
은우의 몸이 빙글 반의반 바퀴 틀어지고, 뒷짐 지듯 등에 달라붙어 있던 왼손이 추락하는 쇠지렛대를 잡았다.
오른손 주먹이 콱 말림과 동시에 팔꿈치 관절이 뾰족하게 접혔다. 은우는 그 상태에서 오른팔을 뒤로 휘둘렀다. 옆에서 들이닥치던 기계장치의 콧대가 짓뭉개졌다.
왼손의 쇠지렛대는 은우 기준으로 정면으로 오는 녀석의 목을 후려쳤다.
“가능하면 이걸로만 싸우고 싶은데, 포위 때문에 영 불가능하겠습니다.”
─앗, 아쉽;;
─특) 아무도 무기 하나가지고 싸우라고 하지 않았다
─그러고보니 요즘 미션맨들이 안 오네;;
─털리고 싶을 때 오는 거라서 그럼ㅋ
─아 ㅇㅋㅇㅋ
은우의 발이 뒤차기로 콧대가 뭉개진 녀석을 더 밀어냈다. 그러곤 축이 된 발에 힘을 실으며 상체를 낮추고 몸을 비틀었다. 가까스로 탄환이 스쳐 지나갔다. 쇠지레를 허공으로 던진 손에 대신 대검이 잡혔다.
발차기를 하느라 떠올랐던 발이 지상에 닿는 동시에 대검이 반원을 그리며 사방을 훑었다. 자칫하면 균형이 무너질 수 있는 공격이었으나, 은우는 그런 것에 너무 익숙한 자였다.
아슬아슬한 줄다리기 끝에 사위에서 몰려들던 기계장치들이 잘려 나갔다.
호랑이를 가두고 있던 포위가 풀렸다.
은우의 몸이 튀어 나가며 배척을 양손으로 잡았다. 한 손 때보다 훨씬 강하게 실린 힘에 기계장치의 가는 목이 찢어발겨지듯 뜯겨 나갔다.
연이어 그는 발을 움직여 한 기계장치의 다리 뒤쪽으로 가져다 대었다. 그 상태로 무릎을 접으면 다리가 걸리며 기계장치가 넘어졌다.
왼손이 쇠지렛대를 넘어지는 놈의 목 뒤에 대고, 오른손을 왼손 팔뚝 아래로 지나가게 만들었다. 쇠지레의 다른 한쪽을 잡은 오른손이 다시금 왼손 팔뚝 아래로 당겨졌다.
뒤쪽에 걸린 쇠지레는 목을 압박하고, 그것에 맞춰 고개가 이동할라 치면 은우의 왼쪽 팔뚝이 녀석의 뺨과 머리를 막아섰다.
결국 콰직 소리와 함께 기계장치의 목이 부서졌다.
은우는 쇠지렛대를 곧바로 휘둘렀다. 그를 노리던 쇠파이프가 튕겨 나가고, 발이 그것을 걷어찼다. 그 이후는 산뜻하지만 무거운 방망이질─배척이지만─이다.
그의 발밑에 곧 기계장치들의 시체가 하나둘 쌓였다.
“여러분이 말씀하신 것치고 그렇게 좋진 않네요, 빠루.”
─?
─안 좋은 건 맞는데 그렇게 말하면 설득력이 없습니다, 폐하
─사실 빠루 진짜 좋은 무기인 거 아닐까?
「‘이쯤되면’ 님이 ‘1,000원’ 투척!
그냥 구독하고 얌전히 세금 상납하는게 맞따」
─왜 세금임?
─구울'왕'이잖아
─아.....
그사이 은우는 컷신을 맞이해 조작권을 상실했다.
탁탁탁!
인디고B가 뒤에서 내달리며 기계장치들을 처리하는 동안, 정체불명의 무리는 바깥으로 탈출했다. 놀랍게도 그들은 인간들이 쓰는 비행기체와 비슷한 물건을 가지고 있었다.
[어서 타!]
대지에 처박히는 것을 감수하고 내려온 비행 물체가 지게 부분에 동료들을 태웠다.
─도와줬는데 혼자 가버리누;;
─형님, 본때를 보여주죠
─누가 도우라고 했냐ㅡㅡ
─재네 누구임?
─ㅁㄹ 아직 안 나옴
다른 방송에서도 정체가 아직 안 나왔는지 시청자들은 얌체라는 의견을 주로 내뱉었다.
[쟨?]
[몰라.]
인디고B가 끈질기게 달라붙는 기계장치를 제거할 때, 그들 전원이 비행 물체에 탑승했다. 마지막으로 탑승한 건 인디고B와 함께 후위에 섰던 여자다.
스칼렛과 상당히 닮았으나 머리카락이 붉지 않고, 인조 가죽 일부가 벗겨진 그것은 그중에서 가장 인간다운 존재였으니.
“……!”
인디고B와 그녀의 시선이 마주쳤을 때, 그녀가 입을 열었다.
“출발해.”
인디고B를 두고 비행 물체가 가동을 시작했다.
[엄버…….]
그녀는 인디고B에게서 눈을 떼지 않되, 뒤로 손을 뻗어 제 동료의 입을 막았다.
여자를 응시하던 인디고B가 뒤늦게 제게 덤벼드는 적을 발로 찼다. 그사이 여자가 탄 비행 물체는 허공을 날아 그 자리를 떠나갔다.
『도전 과제를 달성함! -무슨 생각으로 도왔니?』
도전 과제 달성을 알리는 알림 창만이 남겨진 유일한 것이었다.
▣ 094. 띵언 인정합니다
우여곡절 끝에 두 번째 공장도 파괴됐다. 인간들은 거침없이 세 번째 공장을 칠 준비를 했다.
시청자들의 말에 따르면 새 루트와 현재 나온 루트를 가르는 장소였다.
“딱히 문제는 없는 것 같습니다만.”
─이거 ㄹㅇ 진엔딩 맞네...;;
─아직 진엔딩인진 모르고 새루트라고 보는게 맞을듯
─근데 이미 나온 엔딩이 진엔딩 같진 않으니까ㅋ 진엔딩루트라고 봐도 되는 거 아님?
─제작사가 특전 줬네ㅡㅡ어케 1회차에 바로 발견함
─분탕종자 ㄲㅈ
사람들이 또 1회 차부터 히든 루트 발견했느니, 이것도 제작사의 특전이니 마구 떠들어 댔다.
채팅 제한을 두었음에도 워낙 채팅 칠 수 있는 자들이 많아 분탕 종자들이 계속 나왔다. 결국 매니저들이 칼을 갈아 숙청을 시작했다. 그제야 채팅방이 깔끔해졌다.
“그럼 계속 진행할까요.”
숙청을 잠자코 지켜보던 은우가 본격적으로 움직이려 할 때쯤, 누군가가 거액을 투척하며 영상 후원을 보냈다.
은우의 시야 상단에 적당히 커다란 화면이 자리 잡았다.
[정신 차려, 스칼렛!]
영상 속에서 눈까지 붉어진 스칼렛이 인디고를 향해 달려들었다. 마지막 공장을 치기 위해 준비하던 R들도 갑작스레 눈이 붉어지며 주변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야!]
[이건… 오염이다!]
[강오염……. 말도 안 돼.]
“그러고 보니 오염이 약부터 강까지 나뉘어 있었죠.”
이들이 말하는 오염이란 해킹을 통해 정신 조작, 기억 변경 등을 이야기하니. 기억 삭제 정도인 약오염과 달리 중오염부터는 기억 변경, 정신 조작, 세뇌 등이 있다. 지금처럼 적대 행위를 벌일 경우는 강오염, 최대 단계였다. 나온 설명으론 중오염부터 절대 되돌릴 수 없다고 한다.
[스칼렛!]
원인이 빠르게 밝혀지고 인디고가 다급히 스칼렛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시즐링!]
하다못해 코드네임이 아닌 진명까지 불러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스칼렛과 인디고의 전투가 시작됐다. 영상은 거기서 끝났다.
“이거 혹시 다른 분이 본 엔딩입니까?”
─ㅇㅇ 지금 나온 엔딩이에요
─언니ㅣㅣㅣㅠㅠㅠ
─아, 미친 오염돼서 펑되는 거였누;;
그때 영상 후원이 다시 들어왔다.
그건 스칼렛과 인디고의 전투 신이었다. 스칼렛과 인디고가 처절히 싸우다가 두 사람의 링크가 오류로 뒤바뀌어졌다. 인디고의 몸에 들어간 스칼렛이 자해를 시도했다.
외국 스트리머가 불평을 하며 익숙하게 자해 시도를 막아 냈다. 당연하지만 스트리머가 조작하는 껍데기는 스칼렛이다. 연이어 스칼렛 육체에 탑재되어 있는 해킹 능력으로 오류를 다잡은 스트리머는 대체 언제 끝나냐며 소리를 질렀다.
다행히 공격을 조금 더 시도하자마자 컷신이 펼쳐졌다. 도저히 버티지 못한 인디고가 스칼렛의 배를 찌르는 컷신이다.
[스칼렛…….]
인디고는 스칼렛의 시체를 떨어트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의 시야에 박히는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오염당하는 자가 더 늘었다.
[화성이 당했어…….]
R뿐 아니라 B와 Y까지 눈이 붉어진다. 인디고는 그 속에서 이를 악문 채 마지막까지 저항했다.
그렇지만 그의 눈도 끝내 붉어지고 말았으니. 영상이 끝났다.
─돈 딥따 쓰셨네;;
─완전 꿈도 희망도 없는 엔딩이누
─이번엔 전작이랑 좀 다르게 엔딩을 나눴네
─전작 엔딩 수집 플탐이 너무 길다고 뭐라해서 그런듯
“이런 엔딩이군요.”
딱히 궁금하진 않았으나, 덕분에 다른 사람들이 본 엔딩에 대해 알게 되었다.
은우는 뒷덜미를 쓸다가 고개를 돌려 스칼렛을 보았다. 영상 속과 같은 시간대이나, 스칼렛은 영 오염의 조짐이 보이지 않는다.
그건 공장을 치기 위해 출발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정말로 히든 루트인 셈이다.
“왜 달라졌는지 모르겠네요.”
─공장에서 카인 잡는 시간이 중요한 것 같다.
─지금 로드해서 카인 5분 이내로 잡겠다고 도전한 스트리머 켄이랑 똑같이 진행중ㅇㅇ
─완전 얌체잖어~
─왜 켄 따라하냐ㅡㅡ
─근데 5분 내로 잡기가 쉽지가 않음;;
─내 생각엔 2회차 요소인데 이 양반들이 걍 피지컬로 커버친듯
은우야 다른 방송을 보지 못했으니 모르지만, 시청자들이 저렇게 말하니 그런 걸로 이해했다. 아귀도 대충 맞아떨어졌다. 해킹 위험에서 빨리 구해야만 오염되지 않는다. 얼마나 앞뒤가 잘 맞나.
그사이 세 번째 공장에 도착했다. 두 번째 공장을 치는 것과 비슷한 형태로 진행되었는데, 보스가 나오지 않던 그곳과 달리 세 번째 공장에선 보스가 등장했다.
“내 형제들을 죽인 살인자가 오셨군.”
그것은 카인보다도 더욱 인간다운 기계장치였다. 음성도 훨씬 부드러웠고 말도 자연스러웠다. 키도 은우보다 작아져, 보편적인 인간의 수준이었다.
“내 이름은 셋. 기계장치의 대리인이다.”
그것은 은빛 피부만 아니었다면, 아니 은빛 피부였기에 오히려 성스러운 얼굴로 희소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은애할 것 같은 모양새였다.
“인간이 되고 싶었던 아벨 형이나, 단순히 인간을 죽이고 싶어 하는 카인 형과 나는 달라. 난 기계장치들의 목자가 되리라.”
셋은 철실로 지은 옷을 입은 채 인간들을 맞이했다. B 전원이 덤빈다는 형태만 아니었다면 은우가 퍽 좋아할 상대였다.
“덤벼라.”
“여럿이서 하나를 치는 건 효율적이지만, 그다지 좋아하는 방식이 아니라서 좀 아쉽네요.”
은우는 언제나처럼 전열에 서서 셋에게 공격을 퍼부었다. 셋이 움직일 때마다 강철 옷이 차르륵 소리를 냈다.
어찌나 단단한지 옷을 피해 약점을 찌르지 않으면 기본 무기는 효용이 없을 지경이었다. 기본 피부조차도 딱딱해 약점을 찔러도 타격이 안 들어가는 게 문제였지만.
그러나 그의 무기가 약하다면 남의 무기를 빌리면 되는 일이었다.
은우의 우산이 안쪽 면을 통해 R이 던진 포탄을 잡아 냈다. 그러곤 안쪽의 곡선 면을 부드럽게 타고 미끄러지는 포탄을 각도에 맞춰 다시 던졌다.
본래라면 셋을 빗겨나갈 그것은 은우의 손을 탐으로써 셋에게 적중했다.
은우가 다시 써먹는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접은 우산으로 동료의 검을 튕겨 냄으로써 모든 무기들의 대열을 흐트러트렸다. 그 대상엔 셋도 포함되어 있었다.
밀려난 동료의 검이 셋의 무기를 쳐 내고, 쳐 낸 셋의 무기가 막 내질러지던 B의 무기에 막히고, 다른 하나가 공격을 넣고.
엄격한 계산과 의도한 공격을 통해 NPC들은 더욱 효과적으로 셋을 옥죄었다. 거기에 은우 본인의 직접 공격까지 더해지니 셋이 부상을 입는 건 금방이었다.
“악독한 자들.”
기계장치의 대리인이 중상을 입었을 때, 컷신이 튀어나왔다.
“아주 훌륭한 폭력이다.”
반파된 셋이 한 말이었다.
“그래, 그래서 즐거우냐? 나를 부수고, 이 땅을 되찾을 생각을 하니 기쁘더냐?”
셋은 새빨간 눈으로 부서진 웃음을 지었다.
“절대로! 절대로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절대 여기서 스러지지 않을 테니까!”
“기계장치의 헛소리를 왜 듣고만 있지? 당장 베어라.”
화력을 끌어모으고 있던 버킹햄B가 충전이 완료된 대검을 들었다. 콰아앙! 버킹햄B의 거검과 셋이 바닥에서 소환한 철의 촉수가 부딪치며 천지를 울렸다.
“다시 자아를 잃고 이성을 잃어 짐승으로 추락한들, 우리는 너희 인간을 결코 용납하지 않으리라!”
그 너머에서 기계장치의 대리인이 울부짖었다. 인간들의 공격을 철의 촉수가 막아 내는 사이, 철의 날개가 그 등에 덧붙여졌다.
“우리는 너희의 노예가 아니다!”
셋이 날아올랐다.
“잡아! 저 녀석을 놓치면 안 돼!”
인간들이 격렬하게 공격했지만, 발악하든 몰려드는 기계장치들이 방해했다. 그 기계장치들에겐 어쩐지 절박함마저 묻어 나온다.
셋이 도망갔다.
* * *
셋은 기계장치의 발전된 생산 데이터를 들고 도망갔다. 만약 그가 다른 공장에 먼저 닿는다면 셋과 같은 기계장치가 양산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인류는 셋을 추적하는 데 많은 인원을 파견했다. 인디고B도 그중 하나였다.
“분명 기계장치가 왜 반란을 일으켰는지는 알려 주지 않았죠.”
그렇지만 셋의 발언이나, 전작의 배경을 고려했을 때 반역의 이유는 예상 갔다.
─안드로이드 때처럼 존나 부려먹은 거 아님?
─인간이라면 ㅆㄱㄴ
─완전 기계니까 더 막다뤘다 예상합니다
─아, 스포 에반데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전작에선 안드로이드를 인간 취급 대신 살인 병기 취급해서 문제가 났다. 사람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안드로이드마저 그랬는데 그 빈자리를 대체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계장치는 어땠을까.
전쟁에 써먹어 그 모양이 났으니 살인 병기로 만들어지진 않았을 것이다. 아마 높은 확률로 일상생활에 쓰려 만든 거겠지. 노예가 아니라는 셋의 발언도 타당성을 준다.
“인간이 기계장치를 부려 먹고, 기계장치가 부당함을 참지 못한 채 반란을 일으킨 거겠죠.”
마침 게임 시작할 때의 독백에서 ‘기계가 감정을 품고 자아를 갖춘다.’라는 발언이 나왔다. 자아를 갖춘 존재가 노예 생활을 반길 리 없다. 반역의 원인으론 충분하다.
─인간은 과오를 반복한다더니....
「‘하여간인간이문제야’ 님이 ‘10,000원’ 투척!
우리 비수들은 집구석에서 가만히 영상만 보는데 말이야!」
─절대 무해하지!
─너무 무해해서 쓸모도 없음
─(대충 울며 뛰쳐나가는 채팅)
그렇지만 거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은우는 바이크를 몰며 목덜미를 쓸었다.
인간에서 기계가 된 안드로이드는 인간 취급을 받았다. 그렇다면 처음의 독백처럼 기계였지만 자아를 갖춘 기계장치는 인간과 뭐가 다른가?
똑같이 기계의 몸, 갖춰진 자아, 느껴지는 감정. 차이라곤 그들의 뿌리와 그 뿌리로 인한 소속뿐이다.
“첫 독백이 맞았네요.”
진리를 허물고 생명체의 경계를 무너트린 대가로 맞이한 결과가 이것이다. 결국 자업자득이었다.
─이번작도 욜래 철학적이네
─어디까지가 인간이고 어디까지가 기계인가...
─머리 아픈데 실제로 들이닥칠 문제같아서 무서움
철학적인 문제에 시청자들도 숙연해졌다. 마냥 아마득한 미래의 일도 아니란 게 그들의 고민을 더할 것이다.
윤리적 문제로 인해 상용화가 안 됐을 뿐, 안드로이드는 개발 중에 있다. 암암리에는 벌써 전쟁 같은 장소에 동원됐단 소문도 돌았다. 어쩌면 이 문제가 현실로 닥칠 수 있단 소리다.
“뭐, 그들을 인간으로 인정할지 말지는 본인 생각하기 나름이니까요.”
다만 은우는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애당초 은우의 잣대에서 저들은 인간의 기준을 충족했다. 저들이 바라지 않기에 인간이라 부르지 않을 뿐이지.
기계장치들이 인간이라 분류되길 바란다면 그는 납득하고 그래 줄 수 있었다.
“기준을 어디 두냐에 따라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외형에 둔다면 아니겠고, 자아와 감성의 유무에 둔다면 인간이겠죠.”
보편적인 인간은 자신과 다른 형상의 존재를 동족이라 쉽게 여기지 못한다. 피부색이 다르단 이유로 차별했던 역사가 그것을 증명한다.
그러나 은우는 이계신과의 계약으로 모습이 달라진 성직자들을 본 적이 있다. 기계장치는 최소한 인간형이라도 띄었지, 성직자들은 아닌 경우도 많았다.
그런 주제에 몸이 철로 이뤄져 있다고 인간이 아니라 부정할 수 있을 리가 있나.
은우에게 있어, 외형과 구성 요소는 인간이냐 아니냐의 판단 기준이 되지 않았다. 오직 그 스스로가 생각하는 정체성만이 유일한 잣대였다.
신을 죽이던 순간에마저 자기 자신을 인간이라 여겼던 그처럼.
─팩트) 은근슬쩍 자기도 인간임을 주장하는 것이다
─캬, 띵언 인정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님 인간 아님
「‘속보요속보’ 님이 ‘1,000원’ 투척!
켄, 인간 아님이 밝혀져 안 충격....!」
─그럼 님부터 일단 인간 아닌듯
─구울왕이시여 인간인 척 위장하셔도 소용없습니다
─켄은 인간 아니다.
“인간입니다.”
그는 뚱한 목소리로 대답하곤 바이크의 앞바퀴를 들었다. 그리고 타이밍 맞춰 바이크를 내려찍었다. 덜컹하며 기계장치가 짓이겨졌다.
─님 다른 건 다 믿어도 그건 좀 아니져
─어허 이분 또 이러시네
「‘오빠....’ 님이 ‘10,000원’ 투척!
난 오빠가 인간 아니란 거 이미 알고 있어....」
─괜찮으니가 비수들한테만 슬쩍 알려줘
─맞아맞아 우리가 비밀로 해줄게
─십오 명만 아는 비밀
“인간 맞는데 왜 그러십니까.”
은우의 바이크가 셋의 행방을 찾아 끊임없이 내달렸다. 중간중간 함정이 나오기 시작한지라 처음처럼 일직선으로 달리는 건 퍽 어렵다.
“언제쯤 인정해 주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는 목덜미를 쓸었다. 저들이 인정하든 말든 그가 인간이란 점은 변하지 않지만, 얄미운 것도 사실이다.
끼이익!
은우의 바이크가 순간 앞바퀴를 들고 방향을 꺾었다. 대지에 흔적을 남기며 미끄러진 뒷바퀴는 아슬아슬하게 함정을 지나쳤다. 밟으면 가시가 올라오는 구조의 함정이다.
“그보다… 함정이 점차 느네요. 셋이 설치한 것 같진 않은데.”
험악하진 않으나 우악스러운 운전에 사람들이 감탄하는 사이, 은우는 앞바퀴를 다시 내리고 이동했다. 크루 러시를 한 번 해 본 게 꽤 도움이 되었다.
─켄님 사실 프로죠
─레이서인 게 분명함
─특수부대>비인간>레이서new!
─진화구조가 이상한데ㅋㅋㅋ
“레이서 아닙니다.”
은우는 옆쪽 벽을 타고 폭탄을 지나쳤다. 과거에 마을이 있던 자리에 들어서기라도 했는지 건물의 흔적이 차차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은우의 몸이 자유를 빼앗겼다. 대로의 한가운데를 내달리는 바이크를 함정이 집어삼키는 것도 동시였다.
인디고B는 함정이 발동했다는 것을 눈치채자마자 바이크를 박찼다. 몸을 굴려 함정 너머의 땅에 착지하면, 우지끈하는 소리가 귀를 괴롭혔다.
그는 바이크를 돌아보았다. 바이크의 본체는 쪼개지고 우그러진 채였다.
“이런.”
이렇게 되면 추적에 어려움이 생긴다. 인디고B가 혀를 찰 때, 주변에서 정체불명의 존재들이 머리를 들이밀었다. 하나같이 옷을 갖춰 입고 눈이 녹색으로 빛나는 녀석들이다.
[인, 간이다.]
[저번에 우릴 도와준.]
[도와줬어.]
[어떻게 하지?]
[엄버. 불러오자.]
상대가 적인지 아군인지 가늠할 수 없는 상황에 인디고B는 일단 무기부터 빼 들었다. 딱 봐도 일반 기계장치와는 달랐으므로 선공은 하지 않았다.
“다들, 물러나.”
그리고 한 번 마주쳤던 얼굴이 나타났다. 스칼렛과 비슷한 얼굴의, 그러나 다른 존재가.
“이곳은 무슨 일이지, 인간?”
인디고B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제야 이곳이 평범한 폐허를 가장한 거주 구역임을 알 수 있었다. 오는 길에 함정이 많았던 건 다 그런 이유였다.
“…….”
적인가, 적이 아닌가. 인디고B는 갈등하다가 검을 내렸다. 인간 같아 보이진 않으나, 일반적인 기계장치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인류를 위해서라도 저들의 정보를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다시 묻는다. 무슨 이유로 이곳에 왔지?”
“적을 추적하고 있었다. 이곳은 목적이 아니었어.”
얼굴 가죽에 금이 간 여자는 인디고의 진의를 짐작해 보려는 양 시선을 마주했다. 덕분에 인디고 역시 여성의 연두색 인조 홍채를 감상할 수 있었다.
“추적하는 적은?”
“기계장치 공장에서 탈출한 기계장치.”
[기계장치를 추적한대…….]
[우리를?]
[아니, 저 호전적인 고철 덩어리들 말이야.]
[뭣보다 우린 기계장치가 아니잖아.]
[쟤네가 그걸 알긴 하겠어?]
뒤쪽에서 쑥덕거림이 들려왔다. 그러나 여성이 ‘조용히 해.’라며 주의를 주자 바로 합죽이가 됐다.
“…당신들은 누구지?”
인디고는 하는 수 없이 직설적으로 물었다.
“지구에 살아남은 인간은 더 이상 없어. 애초에 인간처럼 보이지도 않고. 그렇지만 기계장치와 같아 보이지도 않는다. 정체가 뭐지?”
“인간이 없다는 걸 잘도 확신하는군.”
“설마…….”
“하지만 맞아. 우린 인간이 아니다. 기계장치도 아니지.”
그 모든 것을 지켜보던 은우는 문득 깨달았다.
“기계도, 인간도 될 수도 없는 어중간한 존재. 우리는 휴머노이드Humanoid다.”
이 목소리, 게임 시작할 때 들려왔던 독백 속 목소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