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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자도 방송할 수 있습니다-87화 (87/233)

87화

방송 시작 전, 저녁을 소화시킬 겸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던 은우의 전자 노트가 울었다.

『형> 갈게!』

『형> 뭐 사 들고 가? 필요한 거 있어?』

은우는 주말에 놀러 올 거냐고 물어봤다가 곧바로 온 답장에 잠시 고민했다.

“본인이… 먹고 싶은 식재료?”

『형> 식재료? 먹을 게 아니라?』

“해 먹게.”

『형> 너, 요리 잘해?』

형의 물음에 그는 목덜미를 주물렀다. 머리카락이 손을 찌르는 게 아무래도 미용실에 가야 할 것 같다.

“중학교 때부터 내가 알아서 해 먹고 살았는데.”

『형> 미안…….』

“사과받으려고 한 말 아니야.”

『형> 그래도 미안…….』

본의 아니게 형에게 1패배를 적립시켜 주었다. 은우는 떨떠름한 얼굴로 ‘주재료만 챙겨.’라는 당부만 재차 주었다.

▣ 087. 아군이 죽었는데도

“오늘은 좀 늦게 뵙네요.”

─착-석

─켄하~

─위얼휴먼하는 거져??

─ㅎㅇㅎㅇ

평소보다 방송을 좀 늦게 켠 은우는 여상스럽게 사람들을 맞이했다.

공지에 늦는 이유를 딱히 명시하지 않았음에도 사람들이 왜 늦었느냐 채근하는 일은 적었다. 다들 오늘 자정이 ‘We are HUMAN?’의 출시일임을 알아서다.

─왜 하필 12시임??

─미국 발매 시간에 맞춰서 그럼

─좀 빨리 열어주면 안 되나?

─그랬다가 지금은 망한 얼폭사 꼴 난다ㅋ

─얼음폭풍ㅋㅋㅋㅋ

─얼폭하니까 와생각난다ㅠ 그건 VR 안나오나

─와가 뭔데 씹덕아

─씹덕이 아니라 틀딱임ㅋㅋ

워싱턴주의 발매 시간을 기준으로 잡는 바람에 한국은 자정에 열리게 됐다. 사람들은 시간이 오래 흘렀음에도 아직 전설로 남은 6시간 클리어 사건을 떠들며 아쉬움을 표했다.

“다들 제가 그걸 하실 거라 확신하시네요.”

─머임 아님?

─그거 하려고 늦게 한 거 아녔음?

─엥 위얼휴먼 안 해요?

“아뇨, 맞습니다.”

─ㅁㅇㅁㅇ~ 애간장 태우지 마~

─???: 그치만....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시청자들이 관심을 주지 않는걸!

─켄은 그런 대사 안함 캐붕으로 리폿합니다

─ㅋㅋㅋ캐붕은 킹정이지ㅋㅋㅋㅋ

은우는 느긋이 웃으며 계단처럼 무너져 있는 콘크리트 기둥에 몸을 기댔다.

포스트 아포칼립스풍의 폐허에서 가벼운 셔츠 차림에 오토바이 헬멧을 쓴 인간이 존재하는 꼴은 대기실임을 상기해도 어딘가 신비로운 구석이 있다.

“위얼휴먼의 정식 발매를 기다리는 동안 할 게임은…….”

─오겜무?

─ㅇㄱㅁ?

─오늘 게임은?

─ㅇㄱㅁㅇㄱㅁ?

“위얼휴먼입니다.”

그 신비로움에 잠시 녹아들었던 사람들은 이어진 말에 정신이 바짝 들었지만 말이다.

“말실수한 것 아닙니다.”

은우는 일부러 9시가 아니라 8시 50분에 방송을 켠 의도를 고스란히 내보였다.

손을 휘저으며 게임 리스트를 불러내면 위얼휴먼이 떡하니 자리 잡고 있으니. 해당 게임 옆에 적힌 타이머는 [03:06]이 아니라 [00:06]이다.

“아임휴먼 히든 엔딩 최초 클리어 특전으로 3시간 더 빨리 게임을 켤 수 있게 됐거든요.”

은우가 최초로 히든 루트를 개척한 이후, 오랜 도전 끝에 그를 따라 깬 자들이 나오긴 했다. 그렇지만 제작사에서는 그런 그들보다 최초로 밝혀낸 은우의 공을 높이 샀다.

이번 후속작이 히든 엔딩을 기준으로 이어지는 게임이라 더욱 그랬다.

하여 제작사는 은우에게 감사를 표하며 3시간 더 빨리 시작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만일 은우가 평범한 게이머였다면 별 쓸모 없었을 것이나, 스트리머라는 점에서 굉장한 이익이었다. 그 3시간으로도 어지간한 스트리머들의 시청자를 뺏어 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일례로 발언한 지 1분도 되지 않아 시청자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기 시작했다.

─왜 3시간임? 24시간도 아니고ㅋㅋ

─ㅈㄴ 애매한데ㅋㅋ

─점심시간 3번밖에 안 되잖아?

─그럼 긴 거 아님?

─멍청아 비수는 점심을 안 먹고 저녁부터 먹는다고

“24시간도 아니고 고작 3시간 일찍이냐면, 글쎄요. 24시간을 주면 제가 그사이에 엔딩을 볼 것 같았나?”

─아, 이건 킹능성 있다

─24시간 엔딩 켄이면 쌉가능

─최초클 노리는 놈들 울겠누

“말해 놓고 나니 정말 가능할 것 같긴 합니다만.”

24시간 자체야 불가능하겠지만, 작정하고 달린다면 아무리 길어도 3, 40시간 내에 깰 수 있을 것이다. 검은기사가 대충 그쯤이었던 것 같으니까.

결정적으로 그는 이틀을 밤새워도 별 문제 없는 건강맨이었다.

「‘이때다’ 님이 ‘1,000원’ 투척!

기회조차 주지 말고 쓱싹해버리죠 형님」

─ㅁㅇㅁㅇ 켠왕 기대해도 되는거야?

─근데 3시간 일찍 해서 최초클 의미가 있나?

─프로불편러들 나올 각인디

“켠왕은 안 합니다.”

사소한 문제가 있다면 그가 ‘켠 김에 왕’이라는 콘텐츠를 시도할 생각 자체가 없다는 것이다.

“제가 원래 그런 쪽을 지향하는 방송은 아니지 않습니까.”

사나흘짜리를 하루 이틀 만에 끝냈을 때 보는 손해보다 세계 최초 클리어로 얻을 수 있는 이익을 더 크긴 하다. 다만 그가 3시간 일찍 시작하는 특전을 받은 게 문제였다.

박 팀장은 그가 켠왕을 통해 세계최초 클리어를 한들 그놈의 3시간이 위상을 손상시킬 거라 판단했다.

그러니까 켄에겐 친근하면서도 절대 범접할 수 없는 업적이 어울리지, 흠집 낼 여지가 있는 업적은 없는 게 더 낫다나? 최초 클리어를 못 할 거란 생각은 절대 하지 않는 모양이다.

“대신 내일 낮부터 방송 켤 예정입니다.”

그래서 낸 답안이 중간에 끊고 하는 것이었다. 그로 인해 세계 최초 클리어를 놓친다면 아쉬운 일이지만, 딱 거기까지다. 자의로 기권한 거지 실패한 쪽이 아니니까.

무엇보다 최고 난이도 최초 클리어는 은우에게 약속된 것이나 다름없다. 명성이 떨어질 일은 없는 거다.

그렇지만 쉬고 난 후에도 그가 세계 최초를 해낼 수 있다면? 3시간 일찍 시작한 건 메리트가 되지 못할 정도로 휴식을 취한 후에 최초를 노린다면 어떨까.

박 팀장은 노 리스크 하이 리턴을 노렸다. 그 결과가 지금이었다.

“그러니 여러분도 오늘 방송 적당히 보다가 푹 주무시고 내일 낮에 다시 뵙죠.”

─시청자들의 밤도 챙겨주는 스트리머ㅗㅜㅑ,,,

─밤을,,,챙겨줘,,,,? 퍄퍄ㅑ;;;

─일상생활 불가능한 놈들 뭐이리 많음

「‘비수들을위해’ 님이 ‘1,000원’ 투척!

최초클을 포기하는 스트리머가 있다?! 루삥뽕삥뽕」

─세계최초클 가능할 것 같은데ㅠㅠ 아쉽

“켠왕은 다음에 기회가 되면 제대로 해 보겠습니다.”

은우는 시청자들을 살살 달래며 방송 제목을 바꾸었다. 히든 엔딩 최초 클리어 특전, 위얼휴먼 방송. 대충 그런 식으로 적어 두면 질문이 덜 들어올 것이다.

“전작과 다르게 오픈 월드 형식을 채용했고, 전투의 비중이 상당히 늘었다는데… 이건 어떨지 모르겠네요. 잠입 요소는 완전히 뺐으려나?”

─완전히 사라진 것 같진 않던데요

─설마 뺏겠음??

─아임휴먼 잠입 ㅈㄴ 재밌었는디

─안 사라졌어요 데모에 있었음

“데모 하셨던 분들은 스포 말아 주시길 바랍니다.”

그는 시간을 보내기 위해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주제는 당연히 곧 해야 할 게임에 대한 것밖에 없다.

“이제 시간이 다 됐네요.”

남은 시간이 1로 줄었을 때, 은우는 본격적으로 태세를 갖췄다. 채팅 창은 갱신 속도가 너무 빠른 나머지 오래된 구독자들만 채팅을 칠 수 있도록 설정된 상태다.

살아남은 자들이 거드름을 피우거나 패배자들을 향해 눈웃음 마크(^^)를 쏘아 올렸다.

“갑니다.”

그리고 [00:00]이 되었다. 은우의 손가락이 ‘We are HUMAN?’을 터치했다. 그가 밟은 대지부터 사각형으로 금이 가며 아래로 흘러내렸다. 큐브 조각들이 떨어지는 그 아래는 새까만 어둠이다.

치지지지직-

노이즈와 함께 시야 앞에 하얀 글자가 새겨졌다.

We are HUMAN? 우리는 인간인가요? 그 흰 글자는 새겨진 이후에도 노이즈가 끼며 부서지고 지직거리길 반복했다.

배경은 빛바랜 철골의 대지다.

“시작부터 아포칼립스의 느낌이 물씬 나네요. 전작에서 수백 년이 흐른 뒤라더니.”

안드로이드와 인간이 화합한 세계에서 수백 년이 흘렀을 뿐인데 배경이 폐허라. 이런 장면이 연출되기 위해 대체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은우는 게임 제목을 눌렀다. 글자가 순간적으로 확장됐다가 한 점으로 압축되더니 회색 창을 펼쳐 냈다.

『이름을 입력해 주세요.』

월례 행사처럼 익숙한 일이기에 그는 거침없이 적고 넘겼다.

『난이도 설정을 해 주세요.

❙❘ ■ 입문자

❙❘ ■ 경험자

❙❘ ■ 숙련자

❙❘ ■ 전문가

*게임 중에도 옵션에서 변경 가능합니다.』

은우는 망설임 없이 마지막을 골랐다.

『적의 공격력과 체력이 늘어납니다. 탐지 능력이 상승합니다. 캐릭터의 체력이 적어집니다. 체력 바가 표기되지 않습니다.

악몽을 이겨 내고 싶다면 도전하십시오.』

그 아래 적힌 설명 따윈 알 바 아니었다.

─숙련자만 해도 괜찮을 텐데ㅋㅋㅋ

─전문가 난이도 추가됐네

─최고난도로 세계최초클 가능할까...?

「‘세상에이런일이’ 님이 ‘1,000원’ 투척!

알림이 뜨면 바로 들어와야하는 생방, 그곳에서 전해져온 놀라운 제보....3시간 일찍 플레이할 수 있는 권한을 받아놓고 최고난이도를 고르는 남자가 있다?!」

─뉴비들 채팅 가능했으면 왜 최고난이도 고르냐고 ㅈㄹ했겠다ㅋㅋㅋㅋ

─ㅇㅈㅋㅋㅋㅋㅋ

방송 초기부터 함께한 자들만 채팅이 가능하도록 설정해 둔 탓일까. 사람들은 그가 최고 난이도 고르는 것에 아무런 지적도 하지 않았다.

은우의 얕은 웃음소리가 폐허 위를 잔잔히 울렸다.

“중도에 변경이 가능하다니 일단 전문가 모드로 가 보겠습니다. 중간에 너무 어렵다 싶으면 단계 낮출 테니 걱정 마세요.”

─이래놓고 절대 안 낮춤 ㅅㄱ

─스포일러 불-편

「‘켄의속마음’ 님이 ‘5,000원’ 투척!

중간에 너무 어렵다 싶으면 단계 낮출게요 = 응. 절대 낮출 일 없어~」

─켄잘알 시청자ㅋㅋㅋ

─스포 선 넘네

─이쯤되면 다 알 때 됐잔어~

그를 너무 잘 아는 채팅에 은우는 피식 웃으며 게임 시작을 눌렀다. 시야가 가운데부터 새하얗게 물들기 시작했다.

〚인간과 안드로이드를 가르는 기준은 뭘까. 우리는 오래전 그 답을 찾았다.〛

건조한 여성의 목소리가 독백하고, 새하얀 시야 사이로 희미한 실루엣이 보였다. 대충 하얀 바탕에 그림을 그려 두고 그림만 불투명도를 10%로 낮추면 저런 어렴풋함이 나올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에서 기계가 된 안드로이드와 처음부터 기계였던 존재를 가르는 기준은 무엇일까. 기계가 감정을 품고 자아를 갖춘다면, 그건 기계의 육신을 가진 인간과 무엇이 다를까?〛

대충 보이기로는 그것은 한 여자와 여자아이였다. 여자아이와 여자의 흐릿흐릿한 그림이 사라지며 대신 떠오르는 그림은 완전히 성인인 여성이다.

〚우리는 감히 진리를 허물고 생명체의 경계를 무너트렸으니.〛

여성은 무언가를 들어 올렸다. 길고 곧은 검이었다.

〚이것은 우리가 저지른 죄에 대한 벌이자, 저주이리라.〛

뿌옜던 장면이 안개 개듯 완전히 밝아졌다.

“인디고B, 각성.”

“로얄B, 각성.”

“마린B, 각성.”

“프러시안B…….”

주변 광경은 어느 연구소였다. 전작의 트리니티 기지와 언뜻 닮은꼴의 기지는 좀 더 어둡고 묘한 액체들이 차 있는 기둥형 수조들이 있었다. 은우가 있는 곳도 그중 하나의 속이었다.

“B부대 전원 각성 완료. 아바타 정착 실패 개체 0. 전원 링크 성공했습니다.”

“배양액 제거를 실시합니다.”

은우는 눈을 껌뻑이며 그가 잠겨 있는 액체를 휘저었다. 물보다는 점성이 있는데, 움직임엔 어려움이 없다. 입에 뭘 끼고 있지도 않건만 숨도 안 막혔다.

“시작이 신기합니다.”

배양액이라는 건 아무래도 이 액체를 말하는 모양인지, 그가 잠겨 있는 푸른 액체가 서서히 빠지기 시작했다.

은우는 그동안 제 몸과 수조를 살폈다. 몸은 일단 본래의 몸과 동일했고 옷은 검정색 타이즈가 손과 발, 얼굴을 빼고 전부 감쌌다.

심지어 추가로 트렁크 비슷한 것도 입혀져 있어 노출에 민감한 사람들도 크게 신경 쓰일 것 같지 않다. 여성의 경우도 비슷하게 위아래 다 존재했다.

─삼인칭으로 보는데 근육 실화냐;;

─ㅗㅜㅑ....

─왜 옷 다 입혀져있음ㅡㅡ

─윗놈 Hoxy....?

─남자 몸에 왜 관심 갖냐ㅋㅋㅋ그래서 왜 옷 입힘?

─하,,,오빠몸 볼 수 있었는데,,,,아깝;;

“뭘 아까워하십니까.”

배양액이 거의 빠져나가자 수조에 문이 생겼다. 은우는 그곳으로 내려갔다.

놀랍게도 배양액은 그의 몸을 적시거나 몸에 묻어나거나 하지 않았다. 덕분에 그는 뽀송함 그 자체였다.

“인디고B, 지상에 내려온 걸 환영합니다.”

아무래도 그가 맡은 캐릭터의 이름은 인디고B인 모양이다. 이럴 거면 왜 이름을 입력하라 한 거지? 은우는 조금 궁금해졌으나 일단 얌전히 스토리를 따랐다.

“무장실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아임휴먼보단 좀 친절한 것 같네요. 제가 그것도 최고 난이도로 깨서 그런진 모르겠습니다만.”

깨어난 B부대원들은 앞의 연구원 한 명을 따라 이동했다.

무장실로 안내한다는 말이 무색하지 않게, 곧 도착한 방은 옷과 무기 몇 자루가 존재했다. 참고로 개인 방이라서 다른 NPC들과 같이 있을 필요도 없었다.

“전작에선 임무 뺑뺑이를 돌아야만 무기를 구매할 수 있었는데… 여기도 비슷한가 보네요. 몇 개 없네.”

일반적인 검과 도끼, 메이스. 딱 세 종류뿐이다…가 문제가 아니다.

“여러분.”

은우는 감격했다.

“헬멧이 있습니다.”

─아ㅋㅋㅋㅋ골때리네ㅋㅋㅋ

「‘헬멧집착광공’ 님이 ‘1,000원’ 투척!

헬멧이 있어서 다행이야!」

─이쯤되니 나도 헬멧이 반가워짐

─세뇌된 자가 나왔다!! 다들 대피하라!

─형, 헬멧 좀 벗고 다녀;;

은우는 감격에 벅차 옷을 재빨리 장비한 후 헬멧을 썼다.

“시작부터 헬멧 주는 게임이 어째 오랜만인 것 같네요.”

어쨌든 헬멧을 쓰니 안정된다. 은우는 주는 것만 입었을 뿐인데 언제나처럼 검은색 일색의 차림으로 무기를 쥐어 들었다.

『모든 무기는 인벤토리에 탑재할 수 있습니다. 인벤토리에 탑재된 무기는 언제든지 교환할 수 있습니다.』

“아, 무기는 하나만 쓸 수 있는 게 아니라 실시간으로 교환이 가능한가 봅니다. 이건 마음에 드네요.”

─그럼 이번 겜에서도 켄 전투신 기대해도 됨?

─저번 겜은 전투가 없어서 넘 심심했어

─정보) 언노운에서도 학살했었다

─켄 전투는 학살이 아니지ㅋ

“뭐, 전투가 어떨지는 가 봐야 알지 않겠습니까.”

얼마 없는 무기 중 마음 편히 검을 골라 쥐자 나머지 무기들이 허공에 떠올랐다.

그것이 둥실둥실 떠올라 거치되는 곳은 바나나를 길게 자른 후 그 단면을 보는 것처럼 오묘한 곡선을 지닌 판이었다. 판에 난 홈 사이로 무기들이 장착되는 것이다.

[무기 설정 완료. 인벤토리 비가시화.]

아무래도 인벤토리라 불리는 듯한 그 판때기에는 구 형태의 기계가 붙어 있었다.

그 기계가 빛을 한 번 껌뻑이자 인벤토리가 투명해졌다.

『지원용 로봇 V2053을 통해 언제든지 인벤토리를 가시화, 비가시화 할 수 있습니다.』

“장비 완료. 이제 나가겠습니다.”

여기까지 소요한 시간은 5분. 은우는 무지막지하게 늘어난 시청자 수를 슬쩍 보았다가 신경을 바로 껐다. 만 명이 보든 천만 명이 보든, 어차피 숫자 상관없이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게 도리다. 볼 이유 없다.

모두가 장비를 완료하고 무장실 앞에 도열하자 아까 그 안내원이 입을 열었다.

“이번 지상 링크의 목표를 다시 한번 공지드립니다. B부대의 목표는 사막지대에 나타난 특수 기계장치의 파괴입니다.”

그는 다시 B부대를 다른 곳으로 이끌었는데, 이번엔 아주 커다란 격납실이었다. 곳곳에 놓인 것들은 건담이나 상기시키는 기체들이다. 사람이 아무래도 그 안에 탑승할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헠...헠......메카닉 실화냐....?

─ㅗㅜㅑ 저거 탈 수 있음 당장 겜 사러 갑니다

─무쳤네 무쳤어;; 개간지난다

이런 류에 열광하는 자들이 헉헉대며 게임 구매를 외치는 사이, 안내원이 기체에 탑승하길 지시했다.

은우는 설치된 계단을 타고 마련된 자리에 착석했다. 몸이 고정되고 앞부분이 닫혔다.

시야는 조금 제한됐으나, 곧 사방이 투명해지며 시야를 탁 트이게 해 주었다. 기계 안에 들어왔다는 걸 알려 주는 것은 등에 닿은 시트의 촉감과 손에 쥐어진 조작기밖에 없다.

“이런 건 처음인데…….”

딱히 메카에 대한 로망이 없던 은우는 조작기를 매만지며 신기해했다. 이런 기계들이 현실에는 존재할까? 존재하겠지? 느낌이 묘하다.

─와ㅠㅠㅠㅠ 개멋있다ㅜㅠㅠ

「‘하.....’ 님이 ‘1,000원’ 투척!

일인칭이냐 삼인칭이냐......어떤 시점으로 봐야 잘봤다고 소문이 날까....」

─마치 짜장이냐 짬뽕이냐 같은 고뇌

─이집은 짜장맛집입니다 손님^^

─짬뽕이 쥑이는 거 모름?

금방 이런저런 이야기가 끝나고 출격 시간이 되었다.

[목표 지점 설정. 자동 항행 시작.]

아까 무장실에 나올 때부터 기체에 탑승할 때까지 따라오던 V2053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기체 어딘가에 장착된 모양이다. 또한 지원용 로봇답게 이런저런 것들 처리해 주는 것 같고.

“아직까지 조종은 따로 할 필요가 없는 것 같네요.”

“미래를 위하여.”

“뭐, 이렇게 말하면 꼭 직접 해야 할 일이 생긴다 합니다만.”

격납고 문이 열리며 대략 2m 정도 되는 기체들이 전부 비행을 시작했다. 격납고를 벗어나자마자 시야를 가득 메우는 건 거대한 방벽이다.

방벽에 나 있는 철문들이 좌우로 열리며 구멍을 몇 개 만들어 냈다. 기체들이 그것을 훅훅 통과하자 본격적으로 시작 화면에서 보았던 폐허가 눈에 비치기 시작했다.

탁 트인 시야는 폐허를 훅훅 지나쳤다.

“…꽤 괜찮은데.”

바이크나 갈고리 타고 타잔처럼 노닐 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은우는 레이싱 게임 광고를 찍을 때 맛보았던 해방감을 다시 한번 느꼈다. 비록 그 당시 창문을 열면 흘러들던 바람은 없으나, 속도감은 여실히 전해졌다.

폐허는 모래가 가득 쌓인 폐허에서 녹음이 자라난 폐허로, 다시 사막으로 광경을 바꾸었다.

“장난 아니네요.”

─그래픽 쪼끔 낮긴 한데 ㅈㄴ 멋있다

─벌써부터 휴먼마렵네;;

─방송 보려고 게임 구매한 거였는데 이제 VR캡슐까지 사게 생김ㅋㅋ

시작부터 구매욕을 자극하는 비행기동이라니. 은우는 너무 발전된 기술을 썩 좋아하지 않는 주제에 나름 만족스러워졌다.

물론 그 이면에는 아까 주어졌던 병기들이 죄다 검이나 창 같은 원시무기라는 점이 한몫했다. 그는 총이나 레이저 빔 같은 무기로 싸우는 게 싫은 거지 기계장치랑 싸우는 걸 싫어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는 로얄B. 목표지까지 750km, 공격 형태로 대열을 변경하겠다.]

[브라이트Y, 보고 확인. 이행하십시오.]

[로얄B, B부대는 각자의 위치로 이동한다.]

탁 트였던 시야 한쪽에 창이 떠올랐다. 그건 그의 기체 위치와 아군의 기체 위치를 위에서 내려다보며 표기한 작은 그림이다.

V2053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동 조종 시스템으로 전환 완료.]

『왼손의 스틱으로 전후좌우 이동 가능.

왼쪽 스틱의 위쪽 버튼을 누르면 상승.

아래쪽 버튼을 누르면 하강.』

수동 조종은 이렇게인가. 은우는 위치를 확인하며 이동해야 할 자리로 기체를 움직였다.

삼인칭 지도에 그가 이동해야 할 자리가 초록색으로 표시되었기에 조종에는 망설임이 없다.

그때, 저 멀리서 붉은 광선 같은 것이 쏘아져 나왔다.

[전원 산개!]

은우는 재빠르게 광선을 피해 스틱을 기울였다. 덕분에 그의 기체는 광선에 얻어맞지 않았으나, 안타깝게도 아군의 기체는 아니었다.

[여기는 로얄B. 마린B, 다운.]

[브라이트Y, 사막의 특수 기계가 보낸 적 기체가 접근 중입니다. 광선을 조심하고 특수 기계와 적 기체를 섬멸하십시오.]

[롸저.]

“아군이 죽었는데도 별로 슬퍼하지 않네요.”

사실 그였어도 슬퍼하기보단 냉정하게 이후 상황을 잴 테지만, 보통의 인간은 그러지 못한다는 걸 안다. 은우는 어깨를 으쓱였다. 배양액에서 나온 걸 보면 어쩌면 인간이 아닌지도.

그사이에 적 기체가 그들에게로 접근했다. 육안으로도 확인할 수 있고, 위쪽에서 내려다보는 시점 화면으로도 볼 수 있다.

적들이 총알을 발사하기 시작했다.

『오른쪽 스틱으로 공격 가능.

기울인 방향으로 공격 사출.

버튼을 누르면 강공격.』

─뭐임ㅋㅋㅋ탄막 슈팅 게임임?

─급 장르변경ㅋㅋㅋㅋㅋ

─아임휴먼이랑 시스템이 너무 다른데….

─아 그래도 재밌어보인다ㅠㅠ

─어서 열렸으면

시청자의 말마따나 시스템이 너무 다르긴 하다. 그래도 재밌으면 된 거겠지만.

“첫 슈팅 게임을 여기서 경험하네요.”

은우의 손가락이 오른쪽 스틱을 꾹 밀었다. 총알이 발사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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