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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자도 방송할 수 있습니다-86화 (86/233)

86화

방송은 방송이고 약속은 약속이다.

하물며 그는 오현 관장 덕분에 제 형제 문제에 관한 실마리를 잡았다. 이미 돌아온 직후 한차례 봐주긴 했지만, 그건 입막음에 대한 대가였지 감사의 의미가 아니었으므로 노카운트다.

그런 의미에서 은우는 오현 관장의 도장에 방문했다.

“아, 왔나.”

“사흘 만에 뵙습니다.”

오현 역시 은우를 반겼다. 처음 마주했을 때 느꼈던 위압감 따윈 열정 앞에 스러졌다. 오현의 눈이 세월의 때를 벗어 던지고 젊은이의 것처럼 반짝거렸다.

“큼큼, 어서 앉게.”

그는 제가 주책맞게 굴었다는 것을 인지하고 헛기침을 했다. 정결한 움직임에 맞춰 찻잔에 차가 따라졌다. 같이 나온 다과는 유독 단맛이 강조된 종류다.

미국에 있을 때 은우가 단 음식을 종종 사 먹길래 준비해 본 것이다. 과연, 서은우는 거부감 없이 꽃 모양 과자를 입에 물었다.

“기분 좋아보이십니다.”

“그렇게 보이나?”

은우의 지적은 정확했다.

미국에서 수급이 잘려진 것을 기점으로 오현이 쌓아 온 경지는 모조리 무너졌다. 동시에 더 나은 상태로, 그가 바라던 형상으로 차근차근 쌓이고 있다. 기분이 안 좋을 수가 없다.

“아시겠지만, 무리하시다가 리듬 깨지는 것이 더 안 좋습니다.”

“자중하지.”

새파란 젊은이가 다 아는 사실을 꼬집는 꼴이나, 오현은 기분 나쁘지 않았다. 은우란 존재를 더 이상 나이로 판가름하지 않는단 것도 한 이유지만, 그보단 찔리는 구석이 있어서다.

아무렴 그는 그제 조금만 더, 조금만 더를 외치다가 밤까지 샜다. 마치 검을 휘두르는 것 자체가 너무 좋아 미칠 것 같던 어린 시절로 돌아간 심정이었다.

오늘이야 은우가 방문한다 했으므로 꾸역꾸역 잠을 잤지만, 그렇다고 밤샌 사실이 사라지진 않는다.

“성과는 있으셨습니까?”

“물론이네.”

나이가 역전된 모양새군. 오현은 안달 내는 자신과 담담한 은우를 보며 쓰게 웃었다. 새삼 자존심이 무너지는 건 아니지만, 조금 우습긴 하다.

“그럼, 한번 보죠.”

아니다. 우습지 않다. 배움에는 나이가 없고, 그가 바라던 것은 어떤 형태로든 다가와 주었다. 오현은 이 기적을, 혹은 기연을 놓치지 않기 위해 주먹을 꽉 쥐었다.

▣ 086. 휘젓지 않은 것보다 훨씬 낫다

“자네를 상대할 수 있는 자가 있을까? 갑자기 궁금해지는군.”

기기에 접속한 직후, 오현은 그런 질문을 던졌다. 순수한 궁금증이었다.

“글쎄요.”

서은우는 카롬사에게서 받아 온 무기 데이터로 하여금 구현된 무기를 집었다. 오현이 쓰는 것과 비슷한 직검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날이 세워지지 않아 대련에 적합하단 점이다.

“일대일에선 못 봤습니다.”

현실에서 입고 온 옷을 그대로 연동해 오는지라 그는 가벼운 셔츠차림이었다. 바지 안에 셔츠 자락을 깔끔히 넣은 주제에 목 쪽은 단추 두어 개를 푼 모습이 단정함과 사나움 어딘가의 분위기를 풍긴다.

“그럴 것 같았네.”

오현은 그런 은우를 두고 검을 들었다. 은우가 느긋하게 늘어트린 것에 비하면 그의 자세는 본격적이다 못해 벌써부터 긴장을 뚝뚝 흘리고 있다.

“제가 움직여야 합니까?”

예부터 고수가 하수를 상대로 먼저 움직이는 경우는 없다. 적어도 대련에서는.

“그럴 리가.”

그런 의미에서 첫 발짝은 언제나 오현의 몫이었다. 그는 맹렬하게 돌격했다. 언제 올라왔는지 모를 검이 그의 것과 찌르르 맞닿았다.

문득 목과 오른쪽 어깨가 잘려 나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오현은 흠칫거리며 몸을 틀었다. 오른쪽 어깨에 미약한 타격감이 들었다. 완전히 피하진 못했으나 비껴 나간 것이다.

“이제 곧잘 느끼시는군요.”

스포츠에서 선수들은 승리를 위해 상대의 동작을 일을 필요가 있다. 상대가 치고 들어오는 방향을 알아야 그에 맞춰 대비할 수 있으니 당연하다.

싸움도 비슷했다. 상대의 움직임을 읽음으로써 공격이 들어올 방향을 알아야 한다. 다만 그 움직임을 숨기거나 읽어도 소용없을 정도로 빨라질 지경이 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렇게 얻어터졌으니… 당연하지!”

노릴 지점을 강하게 의식하면 살의와 닮은 기세가 전해지니. 그것으로 미루어 공격을 예측해야 한다. 예민한 사람들이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리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었다.

본능에 맞겨야지, 동작을 확인하고 이성으로 판단해 움직이면 늦는다. 일반인을 벗어난 자들의 싸움이란 그런 것이었다.

오현의 검이 옆구리를 노리는 검을 막아 세웠다. 벌처럼 쏘아졌던 그것은 한 마리의 뱀처럼 느물거리며 뒤로 다시 물러난다.

그리곤 다시 교활하게 덤벼들었다. 인격이 대체 몇 개인가 싶을 정도로 휙휙 바뀌는 스타일 중 오현이 제일 까다롭다 여기는 검이 오늘 당첨된 모양이다.

쥐새끼처럼 잽싸고, 구렁이처럼 유연하다. 그건 기세로 치고 들어올 지점을 안다고 해서 쉽게 막을 수 없는 지독함을 자랑했다.

검합이 대여섯 번 더 마주친 후에야 은우가 뒤로 물러났다.

“체력 되돌리세요.”

숨 한 번 고르지 않은 채로 은우는 명령했다. 오현은 따를 수밖에 없었다.

“자네의 체력 분배는 갈수록 소름 돋는군.”

“실력 차이가 나서 그런 겁니다. 관장님도 문하생을 상대하실 때 별로 안 지치시잖습니까?”

할 말이 없었다. 오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관장과 문하생 차이만큼 저 젊은이와의 차이가 벌어졌다라.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오현이 형편없는 거 아니냐고 비웃을지도 모르겠다.

“이건 할 때마다 기분이 묘하군.”

설정을 조작해 몸 상태를 되돌리자 호흡이 절로 가다듬어지고 욱신거리던 몸이 깔끔하게 나아졌다. 정작 그의 뇌는 여전히 숨을 헐떡거리고 고통을 호소하고 있는데 말이다.

오현은 그 괴리감을 좁히기 위해 잠시 명상했다. 은우는 그것을 방관했다. 보통의 인간은 저런 것도 하지 못한다. 어떤 신체든 받자마자 적응하는 그가 이상한 거다.

노래에 한해선 도저히 어떻게 할 방도가 없긴 하지만.

“됐습니까?”

“됐네.”

곧 오현이 몸을 일으켰다. 은우는 자세를 잡았다. 오현은 방금 가벼운 대련으로 그의 실력이 나아졌음을 입증했다. 하면 이제 그 이상을 보여 줄 차례다.

“한 단계 나아가겠습니다.”

오현은 은우의 말을 듣자마자 침을 삼키며 냉정을 꾸몄다. 배움에 대한 흥분은 열정을 불태우기 좋지만, 배움 자체를 그르친다.

머리는 차갑고 가슴은 뜨겁게. 오랜 격언을 곱씹으며 그는 검을 들었다.

“이번엔 제가 먼저 갑니다.”

서은우가 천천히 다가왔다. 마치 맹수가 다가오는 감각에 오현은 발과 발 사이를 넓히고, 검을 쥔 손에 힘을 더욱 실었다. 은우의 검이 허공을 가르기 시작했다.

왼쪽 옆구리에 욱신거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쪽이구나. 오현은 본능을 따라 그쪽으로 검을 움직였다.

퍽!

통각을 50% 정도로 맞춰 둔지라 둔탁한 고통이 신경을 타고 올라왔다. 그의 예상과 달리 서은우의 검은 그의 오른쪽 어깨를 찌른 것이다.

“다시.”

현실이 아니므로 고통이 가시면 별다른 후유증은 없다. 오현은 고통을 무시하고 자세를 가다듬었다.

다시 오른팔에 찌릿한 예감이 들었다. 퍽! 이번엔 왼팔 오금을 맞았다. 공격이 올 것 같은 장소와 실제로 오는 장소가 달랐다.

뭘까, 대체 뭘까. 그는 사흘 전 얻어터지며 겨우 기세를 깨달았던 그때처럼 맞기를 반복하며 깨달음을 갈구했다. 피격 때마다 생각이 끊겼지만, 그것마저 그가 감수해야 할 페널티였다.

서은우는 자원봉사자가 아니고 절대 오랜 시간을 내주지 않는다. 최대한 많은 것을 얻어 가고 싶다면 그만큼 빨리 깨달아야 했다.

단순히 반대쪽을 때리는가? 가설을 세우며 느껴지는 바의 반대쪽으로 휘둘러 보았지만, 상대는 그를 놀리듯 다른 부위를 때렸다. 다리였다.

“큭!”

오현이 겪은 바론, 은우는 천재치고 가르치는 데도 제법 재능 있는 편이었다. 정말 무자비하고 엄격한 게 문제라면 문제일까.

상대가 혼자 해낼 수 있다는 판단이 들면 힌트를 주는 법이 없다. 적어도 대련 도중에는 절대 입을 열지 않았다.

그가 입을 열 땐 자세를 교정해 주거나 자존심을 긁기 위해 팩트로 내려찍을 때밖에 없다.

“아이고야.”

결국 깨달음보다 체력이 먼저 동났다. 휩쓸리듯 당하기만 하던 초반과 다르게 마지막에 가선 몇 번 막아 내긴 했으나, 그건 요행이었다. 아직 원리를 모른다.

오현은 무의식적으로 허리를 통통 두드렸다.

“나이를 먹으니 삭신이 쑤시는군.”

“그렇습니까.”

나이를 먹어 본 적 없는 은우는 어깨만 으쓱였다. 그도 저렇게 늙으면, 40대가 되고 50대가 되면 관절이 아리고 몸이 굳을까. 잘 상상이 안 갔다.

그는 30대조차도 되어 본 적 없었으므로.

“방금 그건 어떻게 한 건가?”

은우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오현은 그의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질문했다.

눈꼬리가 치켜올라간 것도 아닌데 유난히 서늘한 눈매가 그를 지그시 응시했다. 정확힌, 눈매는 그 흔한 움찔거림도 없이 눈동자만 도르륵 굴려 오현을 보았다. 그 실력과 마찬가지로 퍽 인간미 없는 형상이다.

“이미 깨달으셨을 텐데요. 그냥 속임수입니다.”

그건 안다. 단지 그 원리를 모를 뿐이지.

“…만약 이걸 깨닫는다면 다음 배울 건 뭔가?”

“아마…….”

다음 배울 것을 안다면 무언가 알 수 있지 않을까. 만약에 걸어 보니 은우는 친절하게 이야기해 줄 것처럼 굴었다.

그 순간 섬뜩한 감각이 엄습하며 위기 경보를 내렸다. 왼쪽 어깨, 오른쪽 허벅지, 명치 조금 아래, 팔을 들면 갈비뼈가 도드라질 지점, 오른쪽 쇄골, 미간.

반사적으로 검을 들었으나 막지 못했다. 막아야 할 게 너무 많았다. 정면에서 짓쳐들어오는 상대의 움직임을 눈으로 쫓아도 마찬가지였다. 읽을 수 없다.

톡.

미간에 대련용 검이 살짝 닿았다. ‘힘 조절 하난 정말 귀신이다.’라는 생각과 ‘대체 어떻게 한 거지?’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이것일 겁니다.”

검을 거둬들이며 은우는 가벼운 설명을 덧붙였다. 드문 일이었다. 애당초 은우에게 배움받은 일이 몇 번 없긴 하지만.

“동작을 확인하고 움직이는 건 이성을 통하기 때문에 느립니다. 반면 기세를 통해 대비하는 건 본능 단위이니 좀 빠르죠.”

“그렇겠지.”

그래서 빠르게 합을 주고받는 경지의 싸움꾼들이 그런 방식을 사용하는 거다. 빠르니까.

“그렇지만 본능에 휘말리면 방금처럼 됩니다.”

무수한 가능성에 무엇이 진짜인지도 구별하지 못하고, 하다못해 가짜 살의에 반응해 진짜 공격을 대비하지도 못한다.

“…이성과 본능의 저울을 겨우 맞췄나 했더니, 그게 아니었군.”

“저번에 가르쳐 드린 건 저울을 맞춘 게 아닙니다. 본능 쪽을 먼저 기른 거지.”

이 일이 가능한 원리는 아직 알 수 없으나, 적어도 그가 배워야 할 것은 알게 되었다. 오현은 앓는 소리를 냈다.

이성과 본능의 저울을 다시 맞추라니. 말은 쉽지, 그게 가능하긴 한 건가.

“어렵구먼.”

그렇지만 그렇게 말하는 그의 눈은 절대 빛을 꺼트리지 않았다. 생생히 삶의 의미를 드러내는 눈동자에 은우는 검을 바닥에 버렸다.

“일단 쉬죠.”

마침 점심시간이었다.

* * *

도장의 사범으로 일하고 있는 이가 요깃거리를 내왔다. 은우를 보는 그의 눈은 경외감에 젖어 있다. 은우와 오현 간의 대련 장면을 봐도 되노라 허락받은 까닭이다.

비단 그뿐만이 아니다. 영상을 봐도 된다 허락받은 나머지 세 사람 역시 비슷한 눈이었다.

그들보다 어린 그인 만큼 질투할 법도 한데 어떻게 네 사람 다 순수하게 선망의 눈을 한다. 애초에 그런 성격임을 오현이 장담해서 허락을 내린 거지만, 그래도.

“…잘 먹겠습니다.”

“식사 맛있게 하십쇼!”

“맛있게 하세요!”

부담스럽다. 은우는 물잔을 들며 생각했다. 진짜 부담스럽다.

“일이 있으면 부를 테니 물러나 있거라.”

“네!”

여성 둘, 남성 둘. 30대 셋, 20대 하나. 한국인 둘에 외국인 둘.

성별도, 나이도, 국적도 고루 갖춰진 사범들이 점심상을 두고 우르르 나갔다.

은우의 숨이 탁 풀렸다.

“이런 걸 부담스러워할 줄은 몰랐군.”

“얻어먹는 건 별로 안 부담스럽습니다.”

“응? 아하.”

얻어먹으면 그가 전에 뭘 해 줬거나, 뭘 해 주면 되니 그 행위 자체는 괜찮다. 근데 저들은 그게 아니지 않나.

저들은 오현의 제자였다. 은우는 남의 제자를 함부로 가르치는 건 그들의 스승을 향한 모독이 됨을 잘 알았다. 그렇기에 그는 절대 손을 뻗지 않았다.

다만 그렇다고 배경으로 외면하자니 눈이 너무 반짝거렸다. 저런 순수한 열망은 부담스럽지만 외면하기 어렵다. 레리나 슬리퍼, 산호를 무시하지 못했던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남의 제자라서 뭘 해 줄 수도 없고, 외면하자니 너무 순수해서 마음에 걸린다. 사면초가였다.

“나중에 마음 내키면 좀 봐주게. 나보다 자네가 더 잘 볼 테니.”

“실례가 아니라면.”

“오히려 의외로군. 나는 자네가 이해득실에 철저한 편이라고 생각했거든. 비난은 아니니 기분 나빠 말고.”

“정확히 보신 것에 기분 나쁠 이윤 없습니다.”

은우는 향긋한 나물 반찬을 젓가락으로 집었다. 이 나란 정말 온갖 것을 맛있게 먹도록 만들어서 참 좋다. 전생엔 이런 풀떼기를 먹어 볼 생각도 안 했는데.

“내가 제자 복 하난 좋네.”

“인정하죠.”

박기철도 그렇지만, 오현은 눈치가 빨라서 대화하기 편하다.

은우는 제 이해타산에 순수한 사람들이 빠진다는 걸 알아채고 제자 자랑이나 하는 오현을 보며 콧숨을 내쉬었다.

그 녀석이 살아 있었다면 제자 자랑 대회에선 그가 이겼을 거다.

“그러고 보니 문제는 마무리됐나?”

은우는 그 문제가 제 가족 관련임을 눈치챘다. 오현이야 그 대상이 가족인지까지는 모르겠지만.

“글쎄요…….”

그보다 그게 마무리된 건가? 아직 말하고 싶은 게 남아 있는데, 그렇지만 나아졌는데.

“아마도 그렇지 않을까 합니다만.”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가 서러웠다는 걸 굳이 말해야 할까? 말하지 않아도 그와 형 사이는 더 이상 착각할 여지가 없는데.

“‘아마도 그렇다’는 ‘그렇다’와 많이 다르지.”

“…그렇죠.”

“아직 나눌 대화가 남아 있는가 보지?”

은우는 한 숟갈 크게 떠 우물거렸다. 타고나길 조금 날카로운 편의 이들이 밥알과 찬들을 짓이겼다.

“아마도.”

“남에게 적당히 흐려 말하는 건 자네 버릇인가? 뭐, 나는 상관없네만… 중요한 상대랑 대화할 땐 정확히 해 두게.”

오현은 여상스럽게 충고했다.

“마음을 표현한다는 것은 추상적인 것을 언어로 번역하는 것과 다르지 않네. 번역하는 과정에서 소실되는 어감이 있을진대, 그 번역마저 이상하게 해 버리면 되겠나.”

마음을 전달한다는 행위 자체를 해 본 적 자체가 없었기에 오현의 충고가 크게 다가왔다.

은우는 새삼스레 형을 떠올렸다. 이건 싸움이 아니다. 정보 유출을 걱정해서 부러 어렴풋하게 말하는 화법은 필요 없다.

그렇지만 애초에 말하는 것 자체를 고민하고 있는 상황에서 저 조언은 쓸모가 있나?

어제는 말해 보자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난 오늘은 그 필요성에 재고하게 된다. 은우는 잠시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오현은 묻지 않고 기다려 주었다.

“…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는 게 있습니다.”

한참 만에 고해성사하듯 토해 내진 말은 여전히 불확실하다. 오현은 약간의 고민 끝에 물었다.

“어떤 종류의?”

“제가 당시에 품었던 생각이나 감정.”

은우는 덧붙였다.

“그 종류는 정확하진 않습니다. 저도 모르기 때문에.”

무지를 시인하는 말은 담백했다.

“말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나?”

“달라지지 않습니다.”

“말하면?”

“아마 미안해할 것 같습니다.”

“사과받고 싶은 건가, 자네는?”

“이미 받았는데 더 받고 싶진 않습니다.”

오현은 물잔을 들고 한 모금 들이켰다.

“그럼 자네는 위로받고 싶은 게로군.”

놀랍게도 오현은 질문자도 몰랐던 무지의 본질을 꿰뚫었다.

“…제가 말입니까?”

“상대가 미안해한다는 건 잘못한 게 있어서겠지. 그렇지만 자네는 사과받고 싶진 않다고 했잖나.”

사과 받고 싶지 않음에도 타인의 잘못을 끌어내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건 절대 사과하라는 압박이 아니다.

“그럼 그때 자네가 어떤 심정이었는지 알아주길 바라는 거겠지.”

단지 알아주기를 바라는 거다. 그때의 억울함, 슬픔, 아픔 등을. 이미 용서했지만 용서했다는 이유로 혼자 묻어 버리기엔 너무 거대한 무언가를.

“나는 말하는 걸 권하네. 상대가 마음의 빚을 지겠지만, 그건 자업자득이지.”

숟가락으로 국을 휘휘 저었다. 배추속대국의 가라앉았던 된장이 퍼지며 국물색이 짙어졌다.

“관장님의 경험담입니까?”

“경험담은 경험담인데 자네가 생각하는 것과는 좀 다를 걸세.”

“……?”

“자네 같은 입장이 아니라 상대 입장이었으니까.”

그건 자업자득했단 소리였다.

“그래서 더 말하길 권하네. 자네는 후련해질 테고, 상대는 속죄할 기회를 얻을 수 있으니.”

은우는 결국 희미하게 웃었다.

“검은 계속 봐드려야겠군요.”

“달가운 말일세.”

그는 그릇 채로 장국을 들이켰다. 휘저어 뒤섞은 속대국은 짭짤하면서도 시원했다. 휘젓지 않은 것보다 훨씬 나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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