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자도 방송할 수 있습니다-85화 (85/233)

85화

“으아아아아!”

파인즈는 완전히 이성을 잃었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그가 노리던 기회까지 홀라당 말아먹은 것도 모자라 재기 가능성조차 짓밟혔다. 자업자득인 면도 없잖아 있지만, 본인 입장에서 보면 일단 정신줄 놓기 좋다.

“너만은 죽인다!”

그 분노는 고스란히 그의 계획을 망친 자에게로 향했다. 이미 되돌릴 수 없게 망한 것, 혼자 죽지 않겠다는 마음일 테다.

“형, 이걸 써!”

선원이 가지고 있던 검이 다니엘에게 날아왔다. 컷신이 거기서 종료되며 감각이 돌아왔다.

“내가 이 유산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걸 희생했는데!”

패배자의 칭얼거림이 배경음으로 흘러내렸다.

“네놈이 그걸 다 망쳤어!”

챙!

은우의 검이 파인즈의 검과 부딪쳤다. 시작부터 공격이 들어오는 게 과연 최고 난이도답다.

“이게 보스전인가 보네요.”

그렇지만 딱 그것뿐이다. 은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좀 부족한데

─맨손패링빼곤 너무 허전한데....

─정보) 최고난이도 파인즈 1트클은 외국에도 별로 없다

─켄 액션에 너무 길들여져서 그럼;;

시청자들도 그와 비슷한 심정인 듯하다.

“이렇게 끝나면 너무 아쉬운데.”

그는 두 번째 검격을 피하며 검을 선상에 떨어트렸다. 팅. 날카로운 검 끝이 플라스틱 갑판에 닿았다가 옆으로 무너졌다.

“너와 네 동생만은 죽이고 말 테다!”

파인즈가 연계 공격을 했다. 동작이 커서 얻어맞으면 타격이 제법 클 것이다.

“맨손으로도 타격이 들어가죠, 이거?”

그렇지만 그가 맞아 줄 이유는 없다. 은우는 손가락에 새를 얹듯 칼을 얹으며 스윽 들어 올렸다. 칼날의 방향이 바뀌며 제멋대로 튀어 나가고, 은우의 발은 반 걸음 나아갔다.

“다행히 되돌아가진 않네요.”

순식간에 파인즈의 품속으로 파고든 그는 파인즈의 다리를 걸고 넘어트리며 손으로 파인즈의 어깨 쪽 옷을 잡았다.

균형이 무너진 파인즈가 넘어지려할 때, 옷을 잡은 손이 반원을 그리듯 휘둘러졌다. 은우의 뒤편으로 이끌린 파인즈가 그대로 내동댕이쳐졌다.

“이, 포기할 때를 모르는 개자식이!”

휘청이며 난간에 몸을 기댔던 파인즈가 찌르기 자세로 검을 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내달렸다.

은우의 몸이 검을 피해 오른쪽으로 기울며 오른팔을 뻗었다. 파인즈의 검을 든 팔을 옆에서 밀고 왼팔로는 그의 옆구리 쪽을 파고든─지나치려는?─파인즈의 턱과 머리를 잡고 뒤로 꺾을 것처럼 밀었다.

“크악!”

“원래 이렇게 하는 게임이 아니라서 그런가…….”

은우는 대처가 엉망인 파인즈를 보며 흐린 숨을 내뱉었다. 그러곤 상대가 회복하기도 전에 다가가 검을 든 손을 낚아채고, 그 반대쪽 다리에 발을 걸었다.

정신을 차린 파인즈가 뭘 하기도 전에 은우의 손이 파인즈의 머리를 뽝, 때렸다. 휘청이며 뒷걸음질 치기엔 발과 손이 은우에게 묶여 있다. 파인즈는 일방적인 폭력에 노출되었다.

─원래 이렇게 하는 게임이 아닌 걸 알면서 이렇게 하는 인성....

─알면서 하는 거냐고ㅋㅋㅋㅋㅋㅋㅋㅋ

─여윽시 학살좌ㅋㅋㅋㅋ

“제가 뭘 했다고.”

은우는 뻔뻔스럽게 나가며 파인즈를 한 대 더 때렸다. 체력이 다 닳았는지 갑작스레 이벤트 신으로 전환되었다.

다니엘은 헉헉 숨을 몰아쉬며 그가 제압한 파인즈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곤 들고 있던 검을 내던졌다.

─검 다시 생김ㅋㅋ

─보통 검든 대상을 두고 맨손 싸움을 하진 않으니까...

─제작사의 예상을 뛰어넘어버려ㅋㅋㅋㅋㅋㅋㅋㅋ

시청자들이 이벤트 신의 오류에 깔깔 대는 사이, 다니엘이 파인즈를 보며 외쳤다.

“이걸로 끝이야.”

그는 상처투성이 몸으로 돌아섰다.

“형, 괜찮아?”

무기가 없어 함부로 접근하지 못했던 톰이 다가왔다.

“당연히 괜찮지!”

다니엘이 부러 해사하게 웃었다.

“이제 돌아가자.”

그들을 막는 건 아무것도 없다. 이제 도심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된다.

“돌아가서 평범하게 살자. 네가 부탁한 대로 이 짓에는 손 털 테니까.”

동생과도 화해했겠다, 돈도 더는 필요 없겠다, 톰이 원하는 대로 이 짓거린 관둘 거다. 대신 톰을 따라 정식의, 합법적인 일거리를 하는 것도 좋겠지.

“그래, 그러자.”

톰도 말갛게 웃었다. 선원은 배를 조종하기 위해 조종석에 앉은 상태다.

그리고 그 선원이 배의 시동을 켰을 때, 톰이 비명과 같은 소리를 질렀다.

“저 미친 놈이!”

뒤돌아본 곳에선 파인즈가 킥킥대며 무언가를 들고 있었다. 칼과 지포라이터 그리고 폭탄. 하필이면 그가 서 있는 곳은 배의 모터 바로 옆이었다.

“뛰어!”

다니엘이 톰을 감싸안고 난간 너머로 뛰어내렸다. 퍼어어엉! 그들이 뛰어내리는 순간 폭발이 선상을 휘감았다.

▣ 085. 다음부터는 무조건 헬멧

“진짜 죽을 뻔했네.”

톰은 헉헉 숨을 몰아쉬며 해안가 모래에 몸을 묻었다. 망망대해에서 죽을 순 없으니, 섬까지 다시 헤엄쳐 돌아온 것이다.

“그 사람은 죽었겠지?”

“…….”

“대니?”

“…….”

“대니, 장난치지 말고… 형?”

톰은 자신과 함께 뭍까지 헤엄쳐 온 형을 돌아보았다. 형은 모래사장에 엎드린 채였고, 그의 등은 타 버린 옷과 짓물러진 살로 가득하다.

팔과 다리도 엉망이었는데, 특히 왼쪽 다리는 살점이 파헤쳐지다시피 한 상태다.

“형!”

톰이 다니엘에게 다가가 그 몸을 감싸는 것으로 카메라 워크가 점점 멀어졌다. 육체를 상실한 은우 역시 제3자의 시점이 되어 그것을 지켜보았다.

세계가 시야의 가장자리부터 어두워지더니 완전한 검정으로 변했다.

《Epilogue. 에필로그》

사각거리는 소리와 함께 제목이 떠올랐다.

짝!

동시에 등짝이 얼얼한 느낌이 들었다. 시야가 밝아졌다.

“아파!”

들려온 칭얼거림은 다니엘의 목소리다.

“다 나은 주제에 뭐가?”

“아직 다 안 나았어!”

다니엘은 톰에게 왁왁거리곤 아프긴 아픈지 낑낑거렸다. 다만 그의 왼팔에는 고급 목발이 부착되어 있고, 왼쪽 다리는 여전히 깁스가 둘러진 상태다.

그 꼴에 마음 약해진 톰이 쓰읍 소리를 내며 봉지가 건네주었다. 햄버거와 감자 튀김이 잔뜩 있는 세트였다.

“먹고 싶다던 거.”

“오!”

그 말에 다니엘은 반색하며 받아 들었다. 그래픽을 아주 들이부었는지 종이 봉지 속에서 나온 햄버거는 유난히 맛깔나 보였다.

바닥에 깔린 적은 양의 채소와 그 위에 얹어진 싱싱한 토마토의 선홍색. 두꺼운 고기 패티는 데리야끼 소스에 졸인 것처럼 검갈색 윤기를 자르르 흘렸는데, 그 위에 있는 치즈가 아주 샛노랬다. 갓 만든 햄버거답게 녹진녹진 흐른 치즈는 채소에까지 닿았다.

“와앙.”

그것을 다니엘이 한 입 베어 물자 소스와 치즈가 울컥 솟아올랐다. 채팅 창에서 괴성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아ㅏㅏㅏㅏ

─한입만 줘요ㅠㅠㅠ

─맛있겠다

─으아아악

은우도 조금 햄버거가 탐났다. 야식은 좀 그렇고, 내일 아침은 햄버거다.

“맛있냐?”

“병원식만 먹어 봐라, 이게 안 그리워지나.”

다니엘은 큼직큼직하게 햄버거를 베어 먹더니 끝에 가선 손에 묻은 소스까지 쪽쪽 빨아 먹었다. 먹을 줄 아는 놈이었다.

“그래서, 이제 뭐 할 거야.”

“글쎄에. 일단 회전목마를 타야지.”

그런 물음이 아닌 걸 알면서도 다니엘은 질문을 유연하게 피했다. 참고로 그들이 있던 장소는 새로 개장한 유원지였다.

다니엘은 끙, 하고 목발을 짚으며 일어섰다. 깁스를 두른 게 불편할 법한데도 목발을 대신해 걷는 것이 제법 익숙해 보인다.

“어렸을 때 널 여기 한번 데려오려고 아등바등했는데… 이 나이 먹고서야 오네.”

그 중얼거림에 톰이 움찔거렸다.

“…그때도 왔었잖아.”

“남이 타는 것만 구경한 게 뭐가 온 거냐? 기구를 타야지, 기구를.”

“멍청아, 난 그때 탔어. 대니, 너만 구경한 거거든?”

“아, 그랬나?”

타박을 준 건 톰이었지만, 슬픈 눈을 하는 것도 톰이었다.

“돈이 부족해서 나만 태워줬지.”

그 중얼거림은 안타깝게도 제3자인 시청자에게만 닿았다.

“자, 그럼 어서 놀러 가자!”

“…사실 형이 오고 싶었던 거 아냐?”

“들켰냐?”

다니엘은 낄낄 웃곤 손짓했다. 빨리 가자. 말하진 않았으나 의도는 선명히 전해졌다. 톰은 입술을 가늘게 깨물며 다니엘 옆으로 다가갔다.

“회전목마를 탄 후에는 뭐 할 건데.”

“글쎄, 슈퍼맨 롤러코스터 탈까?”

“그다음은.”

“바이킹도 좋고, 관람차도 좋지.”

“그다음에는.”

두 사람을 느긋하게 걸었다. 유원지에는 사람들이 많았으나 묘하게도 그들 주변만큼은 없다.

다니엘이 톰을 다시 돌아보았다. 은우가 설정한 값을 빌린 다니엘의 얼굴은 에메랄드색 눈동자가 유독 반짝거렸다.

“은퇴해야지.”

“…….”

“절름발이는 더 이상 도굴꾼 짓을 할 수 없으니까.”

뭐임, 절름발이 됨? 후유증 생겼나 보네. 많은 댓글이 채팅 창을 스쳐 지나갔다.

“그런 표정 하지 마. 애초에 은퇴를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어.”

“그렇지만…….”

톰의 말에 다니엘은 안 되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러곤 이내 씩 웃었다.

다니엘의 손이 들어 올려졌다. V자로 벌어진 검지와 중지 사이에는 넙데데한 원형의 판이 끼워져 있다. 햇빛을 받으면 치즈와는 또 다른 누런색으로 반짝인다.

남들이 보면 다만 기념품인가 할 그것은 아는 사람들에 한해서 그 가치가 확연히 보였다.

“분명히 해 두는데, 내가 너보다 돈 많다, 동생아?”

“…미치겠네.”

자고로 도둑이란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를 정도의 은밀함이 필요한 법이다. 주로 형이 그곳의 보물 한 주먹 정도 챙겨도 동생이 눈치 못 채는 정도의.

“투자해 달라고 빌어 봐, 어서.”

“꺼져.”

“아, 빌어 보라고.”

“필요 없다고!”

결국 톰마저 웃었다. 약간의 손실은 있지만, 꽉 들어찬 해피 엔딩이었다.

쿵, 하는 BGM과 함께 화면이 새까매지며 제작사의 로고가 떠올랐다.

“아.”

이어지는 건 엔딩 크레딧이라. 오롯이 제작 참여자들의 명단만 나열되었기에 구경하는 맛은 없다. 여운은 제법이었지만.

“이렇게 엔딩이네요.”

콘솔이나 PC에선 스킵이 불가능하나, VR은 가능한 경우가 종종 있다. 은우는 엔딩 크레딧을 뛰어넘고 게임을 종료했다.

“이렇게 ‘Unknown Raider 4: 최후의 여정’ 끝을 보았습니다.”

은우는 대기실로 돌아와 건조한 박수를 쳤다. 게임을 사 놓고 할 시간이 없어서 못 한 자들이나 방송 보려고 게임 구매한 자들도 동참했다.

“플레이 타임이 길지 않다더니 정말로 긴 편은 아니네요.”

그는 박수를 마치며 숨을 푹 내쉬었다.

“이틀 만에 끝났네.”

─ㅋㅋㅋㅋㅋㅋㅋㅋ

─언바~

─??: 하씌....게임 뭐하냐

─게임추천 게시판에 글 올리러가겠읍니다

─^^7

─언바

그가 잘라서 그렇지, 방송을 조금 길게 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면 하루 안에 끝났을지도 모른다.

은우는 숨을 가늘게 내뱉었다. 다음은 뭐 하지. 흡사 내일 식사거리를 고민하는 주부의 고민과 다를 게 없다.

“이벤트 신이 많고 긴 게 흠이긴 한데 게임 자체는 재밌었네요.”

─고건 인정합니다

─플탐이 짧긴 한데ㅋㅋㅋ뭔가 많았다

─잘만들긴 잘만들었음

“딱히 피지컬을 요구하는 게임이 아니라서 클라이밍류에 손만 안 꼬이시면 어렵지 않게 클리어가 가능할 것 같네요. 시간 나면 한번 해 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어차피 다들 구매한 사람들. 은우는 한번 해 보라는 말투로 적당히 영업했다. 클라이밍 이야기 때문에 넘어가는 이들은 많지 않을 것 같다.

“그럼 오늘 방송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아왜ㅠㅠㅠ

─형 아직 12시야

「‘밤은아직멀었어’ 님이 ‘1,000원’ 투척!

초심 잃었따」

─딴겜 조금만 더 하자

“밤이 늦었습니다. 그리고 내일 월요일이잖습니까. 여러분들 등교랑 출근해야죠.”

은우는 거기까지 말한 후 헬멧 안면에 손가락을 대었다. 대충 입이 있을 만한 위치였는데, 가운데로 모인 손가락이 양쪽으로 뻗어 나가며 곡선을 그렸다.

만약 그 선이 진짜로 새겨졌다면 대충 웃는 입이 그려졌을 거다.

“참고로 잊으셨을까 봐 말씀드리는데, 내일 방송은 없어요. 저, 휴일입니다.”

─안돼ㅋㅋㅋㅜㅠㅠㅠ!!!

─아, 좀 더 놀고가아ㅏㅏㅏ

─라떼는 말이야,,,,,,씌이이불,,,,밤도 사ㅣㅆ다고,,,,~~!!

─하....벌써 월요이류ㅠㅠ

“화요일에 뵙겠습니다. 행복한 월요일 되세요.”

─ㅠㅠ켄바

─구바

─내일,,,,깜짝선물이라고 와줬음 조켔다,,,,ㅎㅎ,,,

─켄바~

은우는 직장인과 학생을 피해 황급히 방송을 종료했다. 이제 달콤한 휴일이다. 비록 아직 정리할 게 많아 푹 쉬진 못하겠지만.

* * *

희수는 예상대로 현관까지만 구경하고 돌아갔다. 그녀가 가져온 집들이 선물은 콜라 한 박스였다.

아직 많이 비어 있는 냉장고에 콜라만 그득그득 채워졌다.

은우는 그 꼴을 보며 냉장고에 식재료를 채울 필요를 느꼈다. 사 먹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그놈의 광공처럼 살고 싶지 않다. 은우는 아직도 그 순간의 충격을 잊지 않았다.

하는 김에 아직 텅텅 빈 집에 장식도 더 들이고… 아, 그러고 보니 내일은 오현 관장님과 약속을 잡았지.

그는 그가 오늘, 내일 할 일을 정리했다. 아직 어수선해서 할 게 꽤 많다. 느긋이 해도 문제가 없으니 다행이다.

은우는 가장 먼저 식재료부터 사러 갔다. 며칠간 주문 음식만 먹었더니 물려서 못 살겠다.

솔직히 전생에 음독을 경계하느라 죽어 나갔던 것을 떠올리면 외부음식이 탐탁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자각 전 자주 사 먹었던 기억과 배달 음식이 맛있다는 점만 아니었어도 안 사 먹었을 거다.

다만, 그래. 전생 때문에 외면하기엔 치킨과 콜라의 조합이 너무 맛있었을 뿐이다. 배신당해 죽는 건 용납 못 해도 음독당해서 죽는 건 괜찮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그는 가까운 마트로 향했다. 주변 사람들이 어김없이 흠칫거렸지만, 최대한 외면했다.

고기랑 채소, 유제품류, 소스, 향신료……. 맨땅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보니 사야 할 게 너무 많다. 전자 노트에 찍힌 리스트가 길게 늘어졌다.

그러고 보니 형은 뭘 좋아했지? 은우는 잠깐 고민에 휩싸였다.

아무래도 그때의 그는 서러웠던 것 같다고, 그걸 말하고 싶은데 그러려면 형이 집에 오게 될 것 아닌가. 술은 안 마시겠지만, 혹시 또 모르니.

그때 서러웠다는 걸 왜 말하고 싶은지는 그도 모른다. 다만 형이 오해해 버릴지 누가 아나? 다니엘이 말하지 않아서 착각해 버린 톰처럼.

“…….”

뭐, 이것저것 사 가면 그중 하나쯤은 걸리겠지. 어차피 제가 뭐든 잘 먹으니 남는 걸 해치우는 것도 문제없고.

은우는 깊게 고민하지 않고 적당히 제품 코드들을 노트에 찍었다. 얼마나 골랐는지 노트 위에 홀로그램을 띄우면 카트가 꽉 차 있다.

여기까지만 고르자. 부족한 게 있다면 인터넷으로 주문하면 된다. 은우는 슬슬 쇼핑을 마치고 계산대에 섰다.

짐이 많으므로 들고 가기 보단 배달을 시킬 셈이다.

그러고 보니 이 백화점 안에 팔리스 커피가 있지 않았나? 가 볼까?

그는 이사 기념 선물로 받은 기프티콘을 떠올렸다. 놀랍게도 박 팀장이 보낸 게 아니라 레드바 같은 스트리머들이 보낸 게 꽤 된다. 은우는 그게 합방하자는 무언의 압박인가 싶었다. 받았으면 그만큼 돌려줘야 하는 게 보편적인 사회생활이었으므로.

“…슬슬 한 번 해야 하나.”

저번 합방으로부터 한 달도 안 된 것 같은데. 은우는 혀를 찼다. 이건 박 팀장에게 상담해 봐야겠다.

“세모도 형, 또 뭐 더 사야 해요?”

“너는 채널도 다른 놈이 왜 우리 합방에 끼어들어서……. 과자 더 챙겨.”

“데헷.”

“아, 저 초코X임도 넣어 주심 안 됨까?”

“뭐 어때. 덕분에 청일점 탈출이잖아.”

“그건 그래…….”

순간 그의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꽂혔다. 그의 고개가 살짝 돌아갔다. 계산대 너머로 아직 쇼핑 중인 남녀 무리가 보였다. 다들 어디서 본 적 있는 얼굴들이다.

“어?”

은우의 기민한 눈치는 개중 까불거리는 남자의 얼굴이 레드바와 흡사함을 알아챘다. 또한 청일점 탈출이란 말을 한 여성이 스트리머 검은양이란 것도 바로 알아냈다. 세모도는 G페스티벌에서 그의 맨얼굴을 우연찮게 본 그 남자 스트리머고.

“왜 그래?”

합방은 해 줘도 얼굴 공개는 시기상조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 자리를 떴다.

“아니, 방금 켄 행님이랑 비슷한 체구를 봐서.”

“진짜?”

“아니겠지?”

“그 체구가 흔하진 않을 텐데……?”

여기 근처에 사는 건지, 놀러 온 건지는 모른다. 그렇지만 다음부터는 무조건 헬멧 쓰고 와야겠다. 은우는 그것을 다짐했다.

『박 팀장님> 좋은 월요일입니다 *^^* 혹시 이번 주에 할 게임 리스트는 벌써 다 정하셨나요? 아직 안 정하셨다면 이건 어떠십니까?』

그리고 그가 백화점에서 탈출하기 직전, 박 팀장에게서 문자가 왔다.

『박 팀장님> 위얼휴먼 정식 발매가 코앞이잖습니까.』

그도 아는 이야기였다. 아무렴 ‘I'm HUMAN’의 후속작, ‘We are HUMAN?’의 정식 발매 소식은 사람들의 집중을 단단히 끌고 있었다. 발매일이 겹친 다른 게임이 불쌍할 정도로.

『나> 안 그래도 할 예정이었습니다만…….』

물론 후속작, 그것도 시퀄Sequel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주목을 받은 건 아니다. 단지 그들이 이번 작 데모 버전─은우는 하지 않았지만─에서 증명한 것이 있어 이목을 끄는 게 가능했을 뿐이었다.

아임휴먼의 제작사는 지금껏 어떤 게임에서도 해내지 못한, ‘실제 육체와 다른 육체를 조작했을 때 느끼는 이질감’을 해결해 냈다.

등장 인물 시점을 바꿈으로써 PC나 콘솔에서는 선보일 수 있는 드라마틱한 전개가 저 이질감 하나로 VR에서 막힌 걸 생각하면 엄청난 일이었다.

『나> 그건 금요일 자정에 열리잖습니까?』

어쨌거나 화제의 신작인 이상 은우도 ‘We are HUMAN?’을 할 의향은 있었다. 다른 사람 다 하는데 빠지는 것도 애매하고, 그라면 세계 최초 엔딩을 볼 가능성도 있었으므로 포기하긴 아까웠다.

발매 시간이 어중간하단 점이 걸림돌이었을 뿐.

『박 팀장님> 그 문제 때문에 연락드린 겁니다.』

그렇지만 말한 사람이 박 팀장이었다.

『박 팀장님> 다른 분들은 다 자정에 시작하실 때, 은우 씨만 3시간 일찍 시작할 수 있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을 박 팀장이 구태여 다시 언급할 때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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