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우와아아아악!”
두 사람은 벼랑 아래로 추락하며 비명을 질렀다. 다니엘은 그 순간에도 갈고리를 단단히 붙잡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죽음을 각오했지만, 그래도 죽기 싫은 자의 마지막 발버둥이었다.
그 순간, 그의 시야에 무언가가 잡혔다. 깎아지른 듯한 벼랑에 자라난 나무 하나.
다니엘은 망설임 없이 그것을 향해 갈고리를 던졌다. 철을 다듬어 만들어진 나무에 몇 바퀴고 휘감겼다.
“꽉 잡아!”
다니엘은 동생의 몸을 꽉 끌어안았다. 톰도 제 형의 허리를 부술 것처럼 안았다. 곧 연결된 밧줄이 팽팽하게 늘어지며 그들의 추락을 멈추었다.
밧줄이 성인 남성 두 명을 지탱해? 은우가 밧줄의 재질을 고민할 무렵, 다니엘은 절벽을 살폈다.
“톰! 저기!”
멀지 않은 곳에 두 사람이 숨 돌릴 수 있을 만한 공간이 보인다. 절벽에서 툭 튀어나온 지반이었다.
재수 없으면 그들이 얹어지자마자 무너지겠지만, 절벽을 뛰어내릴 때도 각오했던 죽음이었다. 그들은 몸을 흔들어 그 지반으로 뛰어내렸다.
조금 좁아 보였던 그 공간은 생각보다 넓어 두 사람이 대자로 퍼지는 게 아슬아슬하게 가능하다.
“미안해.”
아무리 온갖 것을 겪어 본 강심장이라지만, 방금 전 일은 고역이 틀림없다. 다니엘은 숨을 몰아쉬며 무릎을 꿇다 못해 손으로 바닥까지 짚으며 쌔근거렸다.
대자로 누워 있던 톰의 숨소리가 잠깐 멎었다.
“다음은 없어.”
용서도 살아야 받거나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잘해.”
톰이 주먹을 들어 올렸다. 머뭇거리던 다니엘이 그것에 제 주먹을 가져다 대었다.
“응.”
두 사람의 주먹이 콩, 맞닿았다.
▣ 084. 사이좋게 참작받자
《Chapter 18. 필사의 추적》
『◈ 절벽 아래
→ 절벽을 탈출하자』
컷신의 종료로 감각이 돌아왔다. 은우는 무릎 꿇었던 몸을 일으켜 세우며 옷을 탁탁 털었다.
늦었어. 기다리는데. 톰의 말이 바늘처럼 상처를 후벼팠다. 아프게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가 미처 몰랐던 고름을 터트리는 바늘이다.
“운 하나는 억세게 좋은 녀석들이네요.”
그는 그 바늘을 인지하면서도 부러 신경을 돌렸다. 싫어서가 아니다. 저 바늘을 곱씹는 건 적어도 방송 끝난 이후가 되어야 했다.
“이게 말이나 되나.”
마침 신경 돌리기 좋은 것도 있었다. 방금 전 전개는 그만큼 어이없었다.
시청자들도 맞장구를 치며 동의해 주었다.
“심지어 탈출하는 길은 반대편이랑 이어져 있고.”
두 협곡은 U자형으로 바다가 들어차 있어 단절된 상태이니. 아래는 그 U자를 따라 돌아가는 길이 있다. 절벽을 올라가는 게 문제일 뿐 건너갈 수는 있었다.
다리가 없단 이유로 적들이 저 위에서 우왕좌왕하는 걸 보면 애매하게 한 걸음 앞선다. 말 그대로 신(제작진)의 농간이었다.
“절벽 올라가는 것도 올라가기 쉽게 절벽이 파여 있네요.”
은우는 발판처럼 계단식으로 파여 있는 절벽을 보며 게임이지만 참 작위적이라며 콧숨을 내뱉었다.
그의 발이 두 걸음 물러났다가 달리기 시작하며 다음 발판을 향해 점프했다.
“그렇지만… 하, 아무리 저라도 이런 암벽 등반은 잘할 자신이 없는데 말입니다.”
그는 두 손으로 모서리를 꽉 잡은 채 몸을 끌어 올렸다. 가장 먼저 팔뚝을 받치고 그 힘으로 상체를 더 올린 후 다리를 얹으면 끝이다.
“대단합니다, 이 형제.”
기 없이 순수한 신체 능력으로 이게 가능했을까. 은우는 고민해 보았다가 역시 그건 무리지 않을까 판단했다. 오르는 것 자체는 가능해도 지금까지의 일정을 한 번에 다 소화하라면 그건 절대 불가능이다.
게임이긴 하지만 은우는 특별한 능력이 없는 주제에 인외의 신체 능력을 내는 형제를 찬사했다. 그가 특히 감탄하는 것은 제작진의 안배로 탄생한 지독한 운이었다.
“운이랑 능력이 다 있네.”
─대신 이 개고생을 하고도 얻는 게 없음ㅋㅋㅋ
─빈털털이로 끝나는 건 시리즈 고유의 불운 아님?
─문화유산 파괴범 쉑
─진짜 이래놓고 또 보물 침수되겠지ㅋㅋㅋ
“뭐… 살아남는 게 어딥니까?”
재물이야 살아 있으면 언제든지 벌 수 있다. 더군다나 완전히 가난한 인생도 아니지 않나.
“절벽 탈출 완료네요.”
은우는 아득바득 절벽을 기어올랐다. 목표가 갱신되었다.
『◈ 절벽 위
→ 보물을 찾자』
목표는 다시 절벽까지 쫓기기 전으로 돌아가, 헤로도토스의 보물을 찾는 것으로 바뀌었다.
“시련 뒤엔 보상이 있는 법이라고 하지……. 형, 이것 봐.”
때마침 톰이 그를 불렀다. 은우는 그곳으로 다가가 톰이 가리킨 것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시체였다. 친절하게도 일지의 한 페이지를, 무려 보물의 위치에 대해 남긴 페이지를 남긴 시체.
“대모험가의 동료야, 이 사람.”
톰은 그 페이지를 집어 자신의 일지에 집어넣었다. 수집한 보물과 마찬가지로 수집 창에 들어가면 볼 수 있는 것이다. 게임 도중 정보가 필요하면 톰에게 말 걸어 잠시 받아 오는 것도 가능하다.
“저 바위 산 아래야.”
톰은 은우와 시선을 마주치곤 물었다.
“갈 거지?”
물어볼 필요도 없는 말이었다.
* * *
몇 번의 전투를 거쳐 그들은 바위산 아래로 접근했다. 그 과정에서 길이 무너져 톰과 다니엘이 헤어졌다가, 코스트라인에게 포위된 톰을 구했다가, 수장시키기 위한 폭탄을 훔치다가, 보트도 겸사겸사 훔쳐서 숨겼다가 하는 일이 벌어지긴 했지만, 어쨌든 그랬다.
이제 그들은 보물 앞에 도달한 상태였다.
“빨리 침수시키고 나가자, 형.”
톰의 채근에도 다니엘은 움직이지 않았다. 새삼스레 눈앞에서 번쩍이는 보물에 대한 탐욕이 생긴 건 아니었다. 다니엘은 보물을 찾고 진실을 밝히는 과정에서 희열하는 타입이지, 재화욕이 크진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미동도 하지 않는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이 해식동굴의 수심은 그렇게까지 깊진 않아.”
“어?”
“여기서 수장시켜도 저놈들이 돌아가서 장비를 갖추고 온다면 말짱 도루묵이란 뜻이야.”
다니엘은 넓디넓은 해식동굴과 배를 보며 빠르게 사고를 돌렸다. 녀석들이 들어왔을 때 매몰시켜야 한다. 답은 빠르게 도출되었다.
“미쳤어? 이 정도 양의 폭탄으론 동굴을 매몰시키지 못해!”
“그렇지만 이 방법은 온전하지 않아!”
쿠웅. 멀리서 거대한 진동이 들렸다. 녀석들이 거의 다 와 간다는 증거다. 비록 올바른 길이 아니라 무식하게 뚫고 들어오는 작전을 쓰고 있긴 하지만.
“아니, 괜찮아. 적어도 지금은 장비가 없잖아?”
“톰?”
“중요한 건 녀석들이 장비를 여기에 가져왔을 때 보물이 없기만 하면 된다는 거야.”
톰이 다니엘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어차피 우리는 이 보물을 가지지 못해. 그렇지 대니?”
“그렇…지?”
“그리고 저 녀석들만 가지지 못하면 그만이야. 맞지?”
“그렇지?”
톰이 손뼉을 한 번 짝, 쳤다.
“그럼 됐네.”
아직 의도를 눈치채지 못한 다니엘이 반문했다.
“뭐가 돼?”
다니엘의 반문에 톰은 씨익 웃었다.
“요컨대, 저놈들이 아닌 다른 놈들이 가지는 건 괜찮단 거잖아?”
“어?”
“공개해 버리자. 이 섬의 위치, 보물이 있는 장소.”
고고학자는 정말 상상하기도 힘든 카드를 꺼내 들었다.
“전 세계 사람들이 전부 모여들면 저 녀석들 따위가 가져갈 보물이 남아 있을 리 없잖아?”
다니엘은 그 어마어마한 배포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럴 경우 벌어질 일을 상정해 보기도 했다.
[그리고 저놈들은 여기를 왕창 부숴 놨지. 우리 둘이 부순 건 티도 안 날 정도로.]
“거기에… 고대 유적을 파괴한 죄까지 더해지면?”
“이곳은 심지어 타국이지.”
“우리도 죗값을 물겠지만, 그거야 보물의 위치를 가지고 딜 하면 될 거고.”
“최소 7억 달러에 지금 밝혀진 바로는 그 이상도 가능해. 절대 거절하지 않을걸?”
“당장 터트리고 튀자.”
내가 못 먹는 감을 남이 먹는다면 화가 난다. 그러나 내가 싫어하는 놈이 먹으려던 감을 뺏어서 생판 남에게 준 거라면?
내가 못 먹는다면 다른 애들이 먹을지언정 너만큼은 못 먹는다. 그들은 그 말을 고스란히 실천하기 위해 배에 폭탄을 설치했다. 정말 못돼먹은 심보였다.
퍼어엉!
“보물이 이제……?”
우연찮게도 그들이 폭탄을 터트린 타이밍은 파인즈가 입구를 개척해 그 해식동굴로 들어온 순간이었다.
수십만 톤의 금은보화를 품은 배가 해식동굴의 애매하게 깊은 바닥 아래로 꼬르륵 가라앉았다. 파인즈와 그 부하들이 보는 앞에서.
심지어 형제가 탄 보트는 막 해식동굴을 빠져나가 부와앙 소리를 내며 바다로 나아갈 때.
“…이, 빌어 처먹을 형제가!”
파인즈의 눈이 뒤집어지며 스위프트 형제를 쫓기 시작했다.
“화끈하네요, 진짜.”
─너무 화끈해서 사탄도 배워야할 듯
─사탄 실직ㅋㅋㅋㅋㅋ
─아아...! 지옥의 왕이시여...!
─파인즈 ㅈㄴ 불쌍하누ㅋㅋㅋㅋ
은우는 톰이 운용하는 보트 위에서 감탄을 토해 냈다.
재화에 대한 탐욕이 크지 않은지라 그 자신이 먹지 못하는 건 괜찮다. 그런데 살기 위해서라지만 보는 앞에서 보물을 수장시키다니? 가히 악마도 울고 갈 인성이었다.
“그런데 설마 보트 추격전이 엔딩입니까?”
그건 좀 아쉬운데.
그는 보트 안에 실어 뒀던 무기 중 저격 총을 들었다. 덜컹거리는 보트는 절대 저격하기 좋은 자리가 아니나, 그의 반사 신경과 계산 속도는 백발백중을 일궈 냈다. 이쪽도 흔들리고 저쪽도 흔들리는 통에 올 헤드 샷 업적은 무너졌지만 말이다.
─그건 아님
─ㄴㄴㄴ
─보스전 남았어요~
─파인즈 이 악물고 오는 중임ㅋ
“아, 보스전이 남았군요. 그거 다행이네요.”
타앙!
한 사람의 어깨를 날려 버리며─실제로 날아가진 않고 그냥 픽 쓰러졌다─은우는 탄피를 빼냈다. 찰칵, 하고 탄피가 튀어나오며 그 자리에 새 탄환이 장착되었다.
“보스는 파인즈일 것 같은데, 셉니까?”
이 게임에선 싸움다운 싸움이 없었으므로 은우는 보스전이란 울림에 기대를 걸었다.
─님 기준으로? 우리 기준으로?
─나한텐,,,,,셌는데,,,,,,
─킹직히 켄한텐 못 갖다대지;;
─님한테 센 게 대체 뭐임
글렀다. 은우는 울적한 숨을 내뱉으며 마지막 탄환을 쏘았다. 저격 총의 총알은 우울하게도 다섯 발이 끝이었다.
“헬멧도 없고… 전투다운 전투도 없고……. 게임은 재밌는데 개인적으로 아쉬움이 많네요.”
─헬멧집착광공ㅋㅋㅋㅋ
─외국에서 헬멧아웃운동도 벌이던데
─헬멧이 본체라서 무리임
─아, 근데 니들도 맨얼굴 궁금하잔아ㅋ
─고건 맞지;;
─헬멧집착광공이라서 불가능할 뿐....
─ㅋㅋㅋㅋㅋㅋㅋ
이쯤 되면 팬덤 이름까지 생성한 구울왕보다 헬멧집착광공이 더 본별명 같다.
은우는 들어 본 적 있지만, 내적 거리감 있는 광공이란 단어를 새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감이 잡히는데 정확하게 모르겠다.
“혹시 광공이나 라디광공의 정확한 뜻이 뭔지 아십니까?”
탕!
접근하던 보트의 운전자가 쓰러졌다. 보트가 그대로 기우뚱하더니 그대로 무너졌다.
─ㅋㅋㅋ?
─그거 어디서 들은 거야 형ㅋㅋㅋㅋㅋ
─볠 용어 아니냐?
─로맨스 쪽에서도 가끔 농담삼아 나오긴 함
「‘라디본사기둥세움’ 님이 ‘10,000원’ 투척!
라디북스라고 전자책 사이트인데 거기서 자주 등장하는 유형의 캐릭터 말하는 거예요ㅋㅋㅋ」
“어떤 캐릭터입니까? 형은 냉장고에 에비앙만 있을 것 같은 캐릭터라던데.”
─에비앙ㅋㅋㅋㅋㅋㅋㅋㅋ
─이거 맞따ㅋㅋㅋ
─형,,,,,설마,,,?
─대체 어쩌다 라디광공 얘기가 나온 거야ㅋㅋㅋ
은우는 자동소총으로 적들을 제거하며 대답했다.
“형이 제 집 보고 ‘라디광공 집이 여기 있네.’라고 한 게 생각이 나서.”
─형 집 흑백으로 꾸며놨냐고ㅋㅋㅋㅋ
「‘라디광공의조건’ 님이 ‘1,000원’ 투척!
부자라서 명품만 쓰는데 이때 귀엽거나 캐쥬얼하거나 그런 물품 절대 안 되고 무채색 물건과 옷만 사용 가능하고 약간 일에 미쳐서 휴식 절대 안 하고 결벽적이라서 군것질이나 분식 같은 불량식품 절대 안 먹는데다가 샤워는 무조건 찬물에 하고 몸은 튼튼해서 두통 외 감기나 배탈 같은 질병 용납 안되는 캐임」
─전세냈냐고 욕하고 싶은데 내용이 너무 미쳤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은우는 채팅을 읽다 말고 미간을 좁혔다. 한 번 더 읽었지만, 여전히 납득이 안 갔다. 그는 뒷덜미를 쓸었다.
“…사람입니까?”
무채색 물건만 쓰고 귀엽거나 캐주얼 디자인 안 되는 거야 취향이라고 칠 수 있다. 그렇지만 질병은 대체 왜?
전생에 그렇게 전장에서 굴러먹느라 단련된 그도 온갖 질병에는 걸렸다. 식중독 때문에 설사하느라 탈수 직전까지 간 적도 있고, 코감기 때문에 훌쩍거린 적도 많다. 그런데 두통 외 질병 용납 안 되는 캐릭터라니, 그게 사람인가? 심지어 불량 식품을 못 먹어?
“콜라도 안 됩니까?”
─검정색이긴 한데 달잖음
─안됨
─콜라 사형
“과자나 마카롱이나…도 안 되겠죠?”
─사형
─무조건 사형
─아, 쌉 사형
─ㅋㅋㅋㅋㅋ광공 미쳤누ㅋㅋㅋㅋㅋ
─광공 왤케 살기 팍팍해ㅋㅋㅋ
지구에서 태어난 후 가장 만족스러웠던 게 단 음식이었던 은우는 1겁이었던 거리감을 2겁으로 늘렸다.
심지어는 광공에 제집을 비유한 형에 대한 배신감도 느꼈다. 아니, 배신감이라고 하기엔 너무 거창한데 그 외 단어를 고르라 하면 안 떠오른다.
은우는 저런 인간 같지도 않은 미친놈이 아니라 그냥 멀쩡한 인간이었다.
“집에 인형 갖다 둬야겠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광공 끔-찍
─켄 광공 싫어하냐고ㅋㅋㅋㅋ
“콜라 못 먹는 삶은 모릅니다.”
전생엔 콜라가 없었다고? 모른다. 그런 삶 모른다. 은우는 콜라와 전생의 손에서 콜라의 손을 들어 줬다.
─켄 콜라 좋아했냐ㅋㅋㅋㅋㅋㅋ
─퍄퍄ㅑㅑ 단거,,,,좋아한다,,,,,메모,,,
─누나가 콜라 한 박스 보내줄까,,,? 말만 해,,,,
─아 근데 콜라는 킹정이지ㅋㅋㅋㅋ
─콜라 없는 인생은 팥없는 찐빵임
그의 입맛이 의외였는지 사람들의 이목이 쏟아졌다. 일부는 귀엽다, 뭐다 떠들고 일부는 인정한다, 뭐다 말했다.
탕. 마지막 보트의 적이 사살됐다.
“다니엘 스위프트!”
은우가 뭐라 말할 새도 없이 컷신에 돌입했다. 나타난 것은 다른 보트보다 두 배는 큰 거대한 배였다. 심지어 앞부분을 강철로 덧댔다. 파인즈가 그 위에서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
“토오옴! 부딪친다!”
“알아!”
톰이 이를 악물며 키를 돌렸다. 간신히 파인즈 배를 피할 수 있었다.
“아주 스릴 넘치는데!”
다니엘이 파인즈 배 위에 잡놈들을 쏴 죽였다. 파인즈의 배가 그들을 따라왔지만, 톰은 요리조리 피하며 다니엘이 뱃전의 놈들을 죽일 시간을 벌어 주었다.
“다니엘!”
그러나 그 요행도 금방 끝났다. 파인즈의 배가 기어코 형제의 보트를 들이받은 것이다.
시야가 잠깐 까매지나 싶더니 거품이 부그르르르 이는 바다가 비춰졌다. 다니엘이 빠르게 수면 위로 올라가 숨을 내쉬었다.
“톰! 톰!”
“여기 있어!”
톰이 조금 떨어진 곳에서 헐떡이며 손을 휘저었다. 그때 다니엘의 눈이 커졌다.
“톰! 피해!”
톰이 그 외침을 듣고 고개를 돌렸을 땐 이미 늦었다.
촤악!
그물이 톰을 휘감았다. 투망 비슷한 것이었는데, 톰이 잠수해서 빠져나가려는 듯 바다로 훅 가라앉았다. 그러나 무슨 연유 때문인지 그는 다시 그물 속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그물이 배로 쭉쭉 끌어당겨지더니 배 위까지 올려졌다.
“어이, 다니엘! 동생을 살리고 싶으면 올라와야지?”
파인즈가 눈이 뒤집혀진 채로 다니엘을 바라보았다. 다니엘이 이를 악물고 그들 배에 다가갔다. 친절하게도 사다리까지 내려졌다.
“올라왔다, 개자식아!”
다니엘은 파인즈의 장단에 맞춰 주었다. 올라간 배에는 한 손에 칼을 든 파인즈와 운전을 멈추고 톰에게 칼을 겨눈 부하 한 명이 있다. 총은 더 이상 남아 있는 게 없나 보다.
“절대… 절대 곱게는 죽이지 않겠다.”
파인즈는 광기로 번들거리는 눈을 한 채 다니엘에게 검을 겨눴다.
“동생 죽는 꼴을 보기 싫다면 절대 반격하지 말아야 할 거야.”
컷신이 거기서 끝났다.
“이걸 뭐라 말해야 하는지.”
졸렬하단 거야 싸움엔 졸렬하단 말을 붙일 수 없으니 됐다. 인질 잡는 건 예부터 전통적으로 내려온 수법이다.
다만, 그래. 그냥 바다에서 떠돌게 만드는 것이 더 고통스러운 죽음 아닌가? 하다못해 그냥 가만히 있으라고 하고 목을 베든가.
파인즈가 검을 휘둘렀다. 패턴은 왼쪽에서 크게 휘두르거나 오른쪽에서 크게 휘두르는 것, 찌르기밖에 아직 없었다.
은우는 그것을 아주 가뿐하게 피했다. 멍청한 파인즈는 반격하지 말라 했지 회피하지 말라곤 안 했다.
“빌어먹을 놈. 아무것도 아닌 주제에 내 계획을 전부 말아먹어?”
“맨손 패링도 반격입니까?”
“네놈을 살려 두는 게 아니었어!”
─아니지 않을가요?
─여기서도 농-락이 나오는가,,,
─진짜 남들은 아직 성공도 못했는데ㅋㅋㅋㅋ
─농락은 역시 맨손패링이죠^^)>
파인즈는 무시하며 맨손 패링이나 언급하는 여유에 사람들이 깔깔대며 웃었다. 그리고 많은 이가 맨손 패링을 요구했다.
은우는 오랜만에 호흡을 가다듬으며 손을 부드럽게 곧추세웠다. 곧 파인즈가 검을 휘둘렀다.
그는 그 선을 가만히 살피다가 그 위에 제 선을 가볍게 얹었다. 마치 화음을 넣기 위해서 조심스레 음을 쌓듯, 그것은 참으로 부드럽고 산들거리는 움직임이었다.
은우의 손등에 얹어진, 혹은 닿은 검날이 슬금슬금 밀리더니 기어코 방향까지 바뀌었다.
“되네요, 이거.”
파인즈의 팔이 화악 벌어졌다. 공격 타이밍이지만, 파인즈가 반격하지 말랬으므로 은우는 하지 않았다.
“내가 말했을 텐데!”
다만 상대의 의견은 아주 조금 달랐다.
“톰을 죽여!”
“형!”
톰의 목을 검이 가르고 시야가 뿌예졌다. 곧 새까매진 화면이 자동 저장 포인트로 그를 되돌려 주었다.
“네놈을 살려 두는 게 아니었어!”
파인즈의 공격이 바로 그를 노렸다.
“패링도 반격 취급이네요.”
은우는 반사적으로 그 공격을 피하며 헛웃음을 지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이건 좀 웃겼다ㅋㅋㅋㅋ
─패링도 반격이다 이거야~
시청자들이 어김없이 웃었다. 클립도 벌써 따였을 거다.
“그냥 진짜 회피만 해야 하나 봅니다.”
은우는 조금 아쉬움을 느끼며 공격들을 피했다.
“언제까지 피하기만 해야 하는지.”
배 난간을 밟고 파인즈의 건너편으로 뛰어넘은 그가 중얼거렸다.
상황의 반전을 알리는 건 동생인 톰의 외침과 컷신이었다.
“형! 반격해!”
“하, 목숨이 아깝지 않나… 뭐야.”
톰이 있는 곳을 돌아본 두 남자는 벙쪘다. 톰의 목숨을 쥐고 있던 파인즈의 부하가 톰을 가두고 있던 그물을 벗겨 내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설마, 넘어간 거냐!”
파인즈가 대로하고, 톰은 침착하게 폰을 들어 올렸다.
“미안하지만, 고고학자들 네트워크에 너희의 짓거리가 그대로 올려져서 말이야.”
그건 아까 보트를 타고 도망칠 때 했던 일이라.
“감방 가기 싫으면 나랑 형을 살리고 사이좋게 참작받자고 했지.”
고고학자가 씨익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