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톰은 다니엘의 말에 어이없다는 듯 반응했지만, 유달리 대신할 수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더군다나 다니엘은 말만 엿 먹이기라 표현했을 뿐, 그 이후까지 고려해 발언한 것이었다.
먼저 그들이 이곳을 탈출하려면 코스트라인의 장비를 훔쳐야 했다. 코스트라인과 부딪쳐야 한다는 말이다.
물론 그들의 능력을 감안했을 때 훔치는 것 자체야 그다지 어렵지 않다. 문제는 그 이후였다.
거의 다 찾은 상태인 만큼 파인즈가 유산을 찾는 건 시간문제다. 그리고 유산을 찾은 파인즈는 거리낄 것 없이 그들을 찾아내 죽일 테다. 그들이 입힌 피해가 피해니까.
장비만 훔치는 건 결국 생존을 연장시키는 수준에 그친다는 거다.
반면 유산을 모조리 수장시키면 파인즈는 막심한 손해를 본다. 이번 일에 들인 돈이 돈이었으므로 어쩌면 몰락까지 이어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파인즈가 허무맹랑한 유산에 매달리고 있는 이유가 요즘 사업이 이래저래 망쳐서임을 고려하면 그 가능성은 더욱 높다.
부자는 망해도 3대는 간다고, 남은 돈으로 암살자를 고용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돈이 아주, 아주아주 많은 상대보단 돈이 아주 많은 상대가 더 낫지 않겠나.
두 사람은 결국 대모험가가 남긴 유산을 찾아 움직였다.
놀랍게도 수백 명이 달려들어 수색하는 것보다 두 사람의 추적이 더 빨랐다.
파인즈의 부하들은 그들보다 단 한 발짝 빨리 움직일 뿐, 정작 중요한 것들은 죄다 놓친 것이다.
그러니까, 앞서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되 유산을 찾질 못한다 이거다.
“길이 참 여러 갈래네요.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는데.”
대신이랄지 등가교환이랄지. 단서를 잘 찾는 대신 다니엘과 톰은 길을 헤맸다. 전부 은우 탓이었다.
그가 길치여서는 아니다. 다만 피지컬이 너무 좋다는 게 문제였다.
은우는 가면 안 되는 길도 그의 컨트롤로 통과했다. 정해진 경로가 있는데 그걸 마구잡이로 흐트러트린 거다.
그러다 보니 반드시 찾아야 하는 단서를 놓쳐 버리기 일쑤니. 순서가 꼬여 길을 돌아간 게 벌써 세 번째였다.
“뭐, 멋대로 가면 어떻습니까. 모로 가든 도로 가든 통하면 되겠죠. 지금도 유적지에 왔잖습니까?”
─그건 그럼;;
─수집용 보물들 싹다 무시하긴 했지만 애초에 공략방송도 아니고ㅋㅋ
─애초에 켄은 업적 같은 거 일부로 안 찾잖어ㅋㅋ
─서순 망가져도 속도가 빨라서 뭐ㅋ
은우는 톰을 버리고 유적지를 향해 움직였다. 어차피 시스템 구조상 톰은 그에게서 멀리 떨어질 수 없으므로, 뒤돌아보면 잘 따라다님을 알 수 있다.
“갑니다.”
그는 풀숲 사이를 뛰며 바로 앞에 있는 담벼락─치곤 높은─을 박찼다.
돌진하던 힘을 빌려 두 걸음까지 수직으로 상승한 그의 손이 튀어나온 벽돌을 붙잡았다. 그러곤 아직 완전히 가시지 않은 힘을 발에 심어 더 뛰어올랐다.
턱
작게 나 있던 창문에 손이 걸렸다. 은우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몸을 끌어 올린 후 더욱 위로 올라갔다. 마지막으로 도착한 곳은 울퉁불퉁한 벽의 위쪽 단면이다. 무려 3층 높이였다.
폭이 좁고 높낮이가 일정하지 못한 그곳에서 은우는 아슬아슬하게 섰다. PC나 콘솔이었다면 서는 게 허락되지 않았을 영역이나 반현실인 VR은 그것을 막지 못했다.
“경치 좋네요.”
은우는 바람 때문에 흔들리는 몸까지 계산에 넣어 적당히 균형을 잡았다. 미묘하게 좌우로 흔들리긴 해도 휘청이지 않는 안정감에 사람들이 겨우 평온을 찾았다.
“길, 찾은 것 같습니다. 뛰어내릴게요.”
─ㄴㄴㄴㄴㄴㄴ
─아아ㅏ아잔간마나야요
─끼요요요ㅛㅛ옷
물론 그 평안은 순식간에 박살 났다. 3층 위에 있던 은우의 몸이 순식간에 바닥을 향해 떨어졌다.
▣ 083. 어차피 죽을 거라면
“이런 일에 너무 익숙해 보이네.”
톰의 말에 다니엘은 멋쩍은 듯 볼을 긁었다.
“세 번이나 겪어 봤다니까.”
그의 대답은 썩 좋은 결과를 이끌어 내지 못했다. 톰의 고개가 침중해졌다.
“왜.”
“어, 화났어?”
“꼭 그래야만 했어?”
다니엘은 할 말이 없어 앞으로 나아갈 길만 찾았다. 톰이 채근했다.
“다른 방법은 없었던 거냐고.”
다니엘은 결국 톰을 돌아보았다.
“내가, 내가…….”
말이 그저 소리로만 나오고, 소리는 다시 언어가 되었다.
“내가 널 데려오려면 그 수밖에 없었어.”
톰의 눈동자가 커졌다.
“나는 가진 게 없는 스무 살 애송이였고, 네가 있던 곳은 부유한 귀족의 저택이었잖아. 너를 데려오기 위해선 돈이 정말로, 정말로 많이 필요했어.”
다니엘은 먼지투성이가 된 머리카락을 벅벅 긁었다.
“하지만 그렇잖아? 어떤 직장이 나 같은 놈을 고용해 주겠냐고. 기껏해야 공장이나 간단한 일거리가 전부인데. 그걸론 널 데려올 돈을 모을 수 없단 말이야.”
“그래서…….”
“물론 중간엔 나도 이 일이 주는 재미에 빠지긴 했지만… 적어도 나만을 위해 시작한 일은 아니었어. 정말이야.”
그는 주먹을 그러쥐었다.
“우습게도 돈을 다 모았을 땐 네가 자립할 나이가 돼 버렸지만…….”
다니엘은 쓰게 웃었다.
“내가 너무 늦었지?”
그 미소에 톰의 입술이 열렸다가 도로 다물렸다. 차마 말을 함부로 덧붙일 수 없었다. 그사이 다니엘은 뒤로 돌아 찾아낸 길에 몸을 올렸다.
“그래. 너무 늦어 버렸어…….”
“…….”
“가자.”
그 대화를 끝으로 감각이 다시 돌아왔다. 그렇지만 은우는 쉽게 말을 잇지 않았다. 그러지 못했다. 너무 늦어 버렸다고 뒤도는 꼴이, 울면서 가라고 말하던 형과 지독히 닮아 있었다.
늦은 건 그의 탓이 아닌데, 모른 건 형의 잘못이 아니었는데.
은우의 시선이 다니엘의 말에 끝내 대답하지 못한 톰에게 닿았다.
그렇지만 그로 인해 아팠던 사람에겐… 그게 이유가 될 수 있는 걸까?
은우는 눈을 느리게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그가 형과의 해묵은 일들을 풀기 전까지 느꼈던 모든 ‘괜찮지 않음’은 영원히 채워지지 않을 거다. 부모님을 온전히 등지기로 한 지금도 그 어린 날의 빈집이 아리듯.
“계속 갈까요.”
은우는 지금껏 괜찮지 않음이라 불러 왔던 그 아린 기분을 뭐라 불러야 할지 고민해 보았다. 그가 형에게 모르겠다고 말했던, 결여를 향한 감상이 무엇인가 깊이 생각해 보았다.
문득 국어사전에서 얼핏 보았고 수능을 대비하느라 문학 공부할 때 접했던 단어 하나가 떠올랐다.
아마도 그건 설움일 것이다.
* * *
“이건… 일지네.”
중간중간 톰은 그가 발견 못 한 수집거리를 찾았다.
“여긴 상업 지구일까? 모험가는 도시를 지어 가면서까지 무엇을 지키려 했던 걸까.”
그의 대사들은 고고학자로서 품는 의문들로 가득했다.
그러나 조금만 시각을 달리하면 그건 미치도록 어색한 순간을 이겨 내려는, 혹은 현실에서 눈 돌리고 싶어 하는 사람의 발악임을 알 수 있다.
그래 봤자 그는 결국 사람 손에 설계된 NPC에 불과하다마는.
“길, 찾았네요. 여길 뛰어 넘어가면 될 것 같습니다.”
은우는 담쟁이넝쿨을 붙잡고 담을 올랐다. 3m 좀 못 미치는 벽을 타고 올라 훌쩍 넘어가자 시청자들이 뭐라 말했다.
“아래 구멍이요?”
은우의 고개가 돌아갔다. 담쟁이넝쿨들이 파헤쳐지며 무언가가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톰이었다.
“…이걸 못 봤네요.”
그는 담쟁이넝쿨을 치워 볼 생각을 하지 않은 자신을 탓했다.
쉬운 길을 두고 어려운 길로 와서 그런 것은 아니다. 단지 자존심에 금이 갔을 뿐이다. 딴생각 좀 했다고 감각이 녹슬었다는 게 열받기도 하고.
과거의 그가 서러웠다고 지금 최선을 다하지 않는단 건 핑계에 불과하다.
은우는 입술을 삐뚜름하게 늘렸다. 평소의 얼굴에서 크게 달라지진 않았으나 미묘하게 찌푸려진 미간이라거나 양쪽이 내려간 입꼬리는 그의 심기가 불편함을 알 수 있다.
하물며 그는 지금 헬멧도 쓰고 있지 않다. 일인칭뿐 아니라 삼인칭도 그의 표정을 볼 수 있다는 거다.
시청자들이 그의 표정을 확인하자마자 깔깔대며 웃었다.
그는 사람들이 웃는 것에 불쾌하다가도─순전히 자존심 때문이었다─끝내 미약한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저들 때문에 그의 심기도 나아졌거니와, 시청자들이 웃으면 장땡이지 않나 싶던 것이다.
슬슬 스트리머 다 됐네. 은우는 멋대로 그런 생각을 해 보았다.
아무렴, 이젠 거의 시청자들을 우선시하고 있다. 저들이 기뻐하면 그걸로 만족하고 있고.
이 정도면 훌륭한 스트리머는 못 돼도 최소한의 요건은 충족하게 됐지 않나 싶다. 아무리 못해도 단순히 인기를 끌 수 있을 건 같단 이유로 직업에 대한 열정도 없이 시작했던 때보단 나을 테고.
“여길 좀 봐.”
한참 나아가다 보니 유적지의 한가운데에 도달했다. 유적지 중 성에 가까운 저택에 들어온 상태였는데, 이런저런 단서들을 찾다 보니 저택의 깊은 곳까지 들어온 것이다.
“어딘가 이상하지 않아?”
그곳은 홀이라고 하기엔 작은, 그러나 유달리 칭할 단서를 모르겠는 공간이었다. 복도에서 반원 형태로 톡 튀어나와 있으니 어쩌면 테라스로 분류될지 모르겠다. 딱히 창문이 넓은 것도, 상층인 것도 아니지만.
“아까 그 단서에 표시되어 있던 비밀 통로 입구가 이곳에 있을 거야. 분명해.”
톰은 이상한 이유에 대해 꼬집으며 그들이 아까 찾은 단서를 언급했다.
『◈ 저택 중심부
→ 숨겨진 비밀 통로를 찾자.』
“이런 건 별로 자신 없는데.”
지능형 퍼즐이야 풀 수 있다. 다만 숨겨진 비밀 스위치 같은 건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
“전 도둑이 아닌데 말입니다.”
그나마 상호작용이 있어서 다행이다. 찾아야 할 범위가 줄어들지 않았나.
은우는 가까이 다가가면 희미하게 흰빛을 머금는 물건들에서 스위치 비슷한 것을 찾았다. 책장 앞에 섰을 때는 혹시 책인가 싶어서 일일이 꺼내 보기도 했다.
“대니! 찾은 것 같아!”
해당 공간에서 상호작용 할 수 있는 모든 물건을 탐색했을 때, 톰이 발언했다.
“이 서랍이었어.”
은우의 얼굴이 이걸 어찌해야 할지 고민하는 이의 것으로 변했다.
─ㅋㅋㅋㅋㅋㅋ똥깨훈련ㅋㅋㅋㅋ
─이걸 이제 찾는다고?
─절대 고의임ㅋㅋㅋㅋㅋ
“…뭐, 오래 걸릴 수 있죠.”
최고의 보물 사냥꾼이란 다니엘도 못 찾았는데─비록 조종하는 게 다른 사람이지만─톰이라도 찾은 게 어디인가. 은우는 뭔가 당한 것 같으면서도 일단 톰이 연 길을 따라 내려갔다.
비밀 통로는 어둡고 덜 다듬어져 있었다.
“위 건축물들은 저세상 기술력이었는데, 여긴 또 제대로 다듬지도 않았네요.”
그는 손전등을 들고 나아갔다. 간간이 톰이 떠들었지만, 그건 알 바 아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동굴이라서 길이 정해져 있다는 점인가.”
─길 잃기 싫다 이거야~
─킹직히 길찾기 귀찮긴 함
─ㅇㅈㅇㅈ
─동굴은 길이 하나뿐이잔어ㅋㅋ
길은 많은데 검은기사처럼 세세한 디테일까지 챙긴 게임은 아니다 보니 선택지가 많으면 길 찾기 곤란하다. 그런 점에서 동굴은 나쁘지 않은 장소였다.
은우의 손전등이 벽에 닿을 때마다 울퉁불퉁한 바위 벽면을 비추었다. 횃불이 있으면 불을 붙일 수 있을 것 같은 벽 횃불이 주기적으로 붙어 있다.
그렇지만 손전등이 있으니 됐다. 그들은 천천히 나아갔다. 가끔 쏟아지는 함정이야 별거 아니었다.
발목이 잡히기 전에 발을 뺀 후 총으로 앞에서 짓쳐 드는 가시 추를 무너트렸다. 가시 추 자체는 총알에 부서지지 않지만, 그 위 연결부는 아니기 때문이다.
“워.”
그는 톰의 감탄사를 들으며 가시 추의 잔해를 피해 옆으로 톡톡 걸었다. 물웅덩이를 피해 가는 소년처럼 통과하면 또 다른 함정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질주할 시간인 것 같습니다.”
함정을 ‘피해’란 단어가 사라진 질주의 시간이었다.
“길이를 모르니 적당히 숨 조절 하세요.”
은우는 마지막으로 숨을 고르고 본격적으로 함정 밭에 뛰어들었다. 바닥이 무너지고, 화살이 쏘아지며, 옆에서 도끼날이 좌우로 운동하는 등 함정들이 그의 목을 노리기 위해 달려들었다. 심지어는 폭발 소리도 있었다.
“헤로도토스, 이 미친 자가!”
고고학자가 고대 위인을 욕했다.
은우는 나름 조종하는 캐릭터의 동생이었으므로 그에 관해 모른 척해 주기로 했다. 물론 시청자들은 아니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것은 마치 역사 공부를 할때 위인을 욕하게 되는....
─역사 공부는 적어도 목숨이 걸리진 않았잖아ㅋㅋㅋ
─나라도 욕했을 거다.
시청자들의 무자비한 놀림을 보며 은우의 발이 벽을 박찼다. 덕분에 앞에서 쏘아지는 가시 추를 훌쩍 뛰어넘을 수 있었다.
톰은 애초에 함정이나 적 NPC들의 공격에 대미지를 입지 않으므로 굳이 파괴하지 않아도 괜찮다. 은우의 몸이 빠른 속도로 함정을 돌파했다.
『도전 과제를 달성함! -상하좌우는 잘 살폈니?』
『숨겨진 도전 과제를 달성함! -평지처럼 달려 봐!』
스토리를 진행하면 반드시 얻을 수 있는 도전 과제와 숨겨진 도전 과제가 연달아 달성됐다. 두 번째는 5분 안에 함정 지대를 돌파하면 얻을 수 있는 업적이었다.
거리가 꽤 되기에 방금 은우가 한 것처럼 한 번도 안 맞고 뛰어야만 얻을 수 있다.
시청자들이 역시 켄이라고 칭찬하는 사이 갑작스레 컷신으로 돌입했다. 콰앙! 하고 통로의 천장 일부가 무너지며 햇살이 들어오는 컷신이었다.
당연하지만 거기서 들어오는 녀석들은 전부 파인즈의 부하, 코스트라인의 직원이었다.
“달려, 형!”
코스트라인이 들어온 지점이 그들 뒤편이었으므로 다니엘과 톰은 죽어라 달려야 했다. 뒤쪽에서 계속 총질을 해 대는 탓에 중간중간 엄폐물에 몸을 숨기고 총을 쏘며 견제도 해 줘야 했다.
다니엘과 톰. 육체 통제권을 되돌려 받았으므로 어쩌면 은우와 톰이라 봐도 되는 그들은 2인조라는 점을 십분 활용했다.
한 사람이 견제하는 동안 다른 한 사람이 후퇴하고, 후퇴한 이가 견제해 주는 동안 다른 한 사람이 움직이는 전략이었다.
총알이 넉넉한 다른 난이도와 달리, 최고 난이도의 경우 굉장히 아슬아슬하게 주어지므로 사격은 아껴서 해야 했다.
은우는 그 방법으로 전원 헤드 샷을 꽂았다. 비록 주어진 총은 연달아 발사하는 자동소총류였으나, 한 발, 한 발 가늠좌를 통해 겨누면 그럭저럭 버틸 수 있다.
탕, 하는 소리가 한 번 울릴 때마다 적들이 쓰러지거나 그 헬멧이 벗겨졌다. 은우는 그것을 보며 손을 몇 번 구부렸다가 펴길 반복했다.
“총은 손맛이 없어서 아쉽습니다.”
상대가 죽는 걸 확인할 순 있지만, 손에 남는 감각은 없다. 방아쇠를 당기는 검지에 얕게 남는 총기의 서늘함은 금세 체온에 먹히고 만다.
칼로 베면 육중한 저항감이 남는 것과는 달랐다. 방아쇠를 당기는 힘은 사람을 베거나 꺾을 때에 비하면 사소하다 싶을 정도로 약했다. 하물며 무기를 맞대며 싸울 때 얻는 치열한 사투와는 더욱 거리가 멀다.
은우는 새삼 제가 무기를 가리는 건 상대와 만족스러운 싸움을 통한 승리를 얻기 위해서지, 너무 쉬운 승리를 가지고 싶어서가 아니었음을 이제야 깨달았다.
전생에선 일방적인 약자의 입장이었던 데다가 상대를 손쉽게 죽일 만한 무기가 없어서 몰랐다.
이제 와 깨달은 건, 글쎄. 그간은 싸움이라도 할 수 있는 게 어딘가 싶었고 그 이후엔 총 쓰는 게임이 없어서? 엔크는 그 외 무기가 많았으니 예외로 치자.
“역시 근접 무기가 좋네요.”
─헤드샷 쏘면서 그런 말 하지 말라고ㅡㅡ
「‘뭘물어봐요’ 님이 ‘1,000원’ 투척!
저도 형이 근접무기 쓰는게 젤 좋아요ㅋ」
─나도 켄이 대검 쓰는게 제일 좋다.
─러시아 좌 취향 확고한 것 보소ㅋㅋㅋ
시청자들이 떠드는 걸 보며 그는 어깨를 으쓱였다. 탕! 물러나기 전 마지막으로 쏜 총알은 어김없이 적의 안면 어딘가에 박혔다.
“저는 쌍검 좋아합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차였어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런.
─취향차이ㅋㅋㅋㅋㅋㅋㅋ
“형!”
뒤로 무사히 물러난 톰이 교대를 외쳤다. 은우는 빠르게 후퇴했다. 곧 암석 통로의 끝이 보였다.
“형, 나와!”
암석 통로 입구에서 몸을 숨긴 채 엄호하던 톰은 은우가 나가자마자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거기서 이벤트 신이 또 시작되었다.
“달려!”
그들이 나온 지상은 협곡 속이었다. 다니엘과 톰은 해당 협곡을 빠져나가기 위해 맹렬히 달렸다. 그 뒤를 코스트라인이 바짝 쫓았다. 쏟아지는 총성이 언제 그들의 등에 닿을지 몰라 다리에는 바짝 힘이 들어가고 등 근육은 긴장에 딱딱히 굳었다.
“워어어어어오!”
다만 그 도주는 어이없이 끝을 맺었다. 협곡의 끝이 벼랑이었던 탓이다.
가까스로 떨어지는 걸 면한 다니엘이 손을 휘저으며 뒷걸음질 쳤다. 벼랑 아래로 돌가루가 바스스 흘러내렸다. 철썩거리는 파도 소리가 이렇게 증오스럽긴 처음이다.
“빌어먹을!”
그들은 욕설을 지껄이며 지푸라기라도 잡기 위해 이곳저곳 살펴보았다. 건너편에 또 다른 협곡이 있긴 하지만, 그 사이를 연결했을 다리는 무너졌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심지어 갈고리를 걸 만한 곳도 없고, 협곡을 타고 오를 길도 없다.
“이런 제길.”
두 사람은 들려오는 총성에 이를 악물었다. 절망적인 상황은 그들의 얼굴에 체념과 오연한 슬픔, 분노를 복잡하게 수놓은 상태다.
“형.”
개중 톰이 결연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형은 늦었어.”
다니엘은 처음에 그게 뭔 뜻인가, 하다가 뒤늦게 알아차렸다. 그건 아까 나눈 대화의 답가였다. 다니엘의 표정이 회한으로 사무쳤다. 죄인의 고개가 아래로 수그려졌다.
“내가 그렇게 기다렸는데. 아니, 기다리는데.”
그리고 숙여졌던 고개가 다시 들렸다. 다니엘의 푸른 눈동자가 일순 희망으로 반짝였다.
“죽는 날에야 겨우 돌아와 주는 게 어디 있냐고.”
다니엘의 입이 벌어졌다.
“토…….”
투다다다. 쏟아지는 총알이 그들의 대화를 강제로 끊었다.
총알을 남발하며 다가오는 적들의 모습에 다니엘이 마음을 단단히 다잡았다.
“톰.”
“뭐.”
“어차피 죽을 거라면 마지막 희망에 걸어 보자.”
총알 세례가 그들을 덮치기 전, 다니엘이 톰을 끌어안고 절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파란, 아주 새파란 파도와 포말, 암초들이 그들의 시야를 꽉 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