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드디어 새집으로 이사 갈 때가 되었다. 근 나흘간 호텔과 다이아박스 사옥 그리고 오현의 도장에서 산 은우는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갔다. 미국에 있던 일주일과 호텔에서 산 나흘을 합치니 꼬박 열하루 만에 돌아가는 집이었다.
주말이었기에 형은 아마 집에 있을 거다. 은우는 멋쩍음에 목덜미를 쓸며 현관문을 열었다.
“어…….”
역시나 형이 있었다. 부모님은 나가신 듯 보이지 않는다.
“짐, 챙기려고.”
은우는 어색함에 눈만 데굴데굴 굴리다가 일단 방으로 들어갔다. 형이 어물쩍 뒤따랐다가 방문 앞에서 멈춰 섰다.
“…손은 괜찮아?”
“어.”
“…도와줄까?”
불쾌하다면 아예 집에서 나가 줄 태도였다.
은우는 가느다란 형의 체구과 그가 챙길 짐들을 번갈아 살폈다. 도움을 받을 필요는 없는데… 거절하면 그가 나갈 때까지 안 돌아올 것 같다.
“…그러든가.”
은우는 챙겨 온 상자를 방문 앞에 펼쳤다.
“뭐부터 넣으면 돼?”
“어, 옷……?”
옷은 그나마 가벼우니까. 은우는 게임 관련 상품들이나 제품들을 챙기며 말했다. 짐을 다 쌀 때까지 침묵이 방에 맴돌았다.
“이거밖에 안 챙겨?”
“어어.”
어차피 웬만한 가구들은 어제 다 맞췄다. 컴퓨터랑 캡슐은 따로 옮겨 주는 사람이 와 줄 거고. 책상이나 그런 건 여기에 버려 두고 갈 거다. 치우든 말든 그건 여기 살 사람들 몫이다.
“…그렇구나.”
건우가 씁쓰름하게 중얼거리며 싼 짐을 확인했다. 스무 해를 이곳에서 살아온 것에 비해 나온 짐은 두 상자도 채 못 채운 상태다.
그는 그것을 개의치 않아 하는데 건우가 마음 쓰는 게 보여서 덩달아 불편해진다. 은우의 눈이 데구르륵 굴렀다.
문득 치우지 않은 컴퓨터에 시선이 닿았다. 조금만 시선을 내리면 책상 유리판 또한 보인다. 금 하나 없이 깔끔한 것이.
은우는 그것을 쓸었다. 아까 책 치울 때도 봤지만… 볼 때마다 기분이 묘해진다. 목에 무언가가 탁 막히는 그런 기분이다.
“…있어.”
“……?”
“태워다 줄 수 있냐고.”
그는 시선을 피한 채 상자를 들었다. 무겁지 않아서 나머지 상자에 있던 물건 몇 개를 그의 것에 더 담았다.
“어, 나?”
“나, 운전면허 없어.”
은우는 눈동자를 상하좌우로 돌렸다가 정면으로 고정했다. 건우와 그의 눈빛이 얽혔다.
“안 되면 버스 타고 가고.”
“어, 아냐, 아냐! 태워 줄게!”
형의 표정이 밝아졌다. 방금 전 표정보단 훨 나았다.
▣ 078. 냉장고에 에비앙만 있을 것 같은
짐은 뒷좌석에 두고 조수석과 운전석에 나란히 탄 채 이동했다. 도착한 집은 제법 멀다. 가격 때문에 시외로 잡아서다.
“왔다 갔다 하기 불편하지 않겠어?”
“별로…….”
운전면허를 따긴 따야겠지만, 그래도 교통편이 나쁘지 않다.
뭣보다 한쪽 방에 운동 기구를 둔지라 웬만한 운동은 여기서 다 해결할 수 있다. 헬스장에 갈 필요가 없는 거다.
그의 외출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일정이 사라졌으니 시외란 것쯤이야 문제없다. 살다 보면 의견이 또 바뀔지 모르지만.
“와, 크다.”
“지하도 있어.”
“헐.”
집들이라며 부득불 마트에서 휴지를 사 온 건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은우는 상자를 양쪽 옆구리에 낀 채 현관문을 열었다. 집주인이란 걸 인식만 시켜 주면 자동으로 열리는 문이라 굳이 손을 쓸 필요 없다.
“왜 안 들어와.”
“어, 들어가도 돼?”
“…돼.”
은우는 현관문 앞에서 어정쩡하게 서 있는 형을 채근했다.
“실례하겠습니다.”
동생 집 들어오는 건데 괜히 격식을 차린 형이 어색하게 발을 들였다.
“…어둠의 자식이야?”
중문을 열자 건우가 내린 평이었다. 주인이 집에 들어온 걸 안 인공지능이 알아서 불을 켰는데도 그랬다.
“너무 어둡게 꾸민 거 아니냐.”
“…….”
“라디광공 집이 여기 있네.”
나름 대화라도 시도하려 했던 건우의 시도는 안타깝게도 불발이 되었다. 로맨스 소설 읽는 게 취미인 그와 달리 은우는 그 비유를 몰랐다.
“그게 뭔데.”
“냉장고에 에비앙만 있을 것 같은 캐릭터의 집……?”
“……?”
사람이 왜 냉장고에 비싼 물만 넣어 두는 거지. 맨날 외식하나? 간식이나 음료수 안 먹어? 사람인가?
스스로 해 먹는 것과 달다구리 으적거리는 게 일상이 된 남자는 라디광공 캐릭터에 대한 내적 거리감을 느꼈다. 대략 1겁 정도 되는 거리감이었다.
“휴지는 저기.”
짐은 천천히 풀어도 되기에 대충 거실 한쪽에 밀어 넣었다. 형이 쭈뼛거리며 휴지를 다용도용 창고에 집어넣고 나왔다.
계속 말 붙이고 태연한 척 굴지만, 여전히 긴장한 모양이다. 그가 기회를 주고 있다는 게 실감이 안 가는 건지 아직도 미안함이 많이 남아 있어서인지는 모르겠다.
“…….”
“…….”
또다시 어색한 침묵이 찾아왔다. 은우는 잠시 고민하다가 희수에게 들은 조언을 떠올렸다.
“배고파?”
“어? 그, 글쎄다. 왜?”
“배고프면 짜장면 시키게.”
그녀 왈, 집들이엔 자고로 짜장면이었다.
“내가 쏠게. 형이 돼서 동생한테 어떻게 얻어먹냐.”
“괜찮은데.”
“됐어. 돈 많이 들었을 텐데 이거 하난 해 줄 수 있어.”
형이 먼저 짜장면을 주문했다. 오는 내내 가구라도 하나 장만해 주려 했던 사람인지라, 은우는 그냥 내버려 두었다. 가구를 받느니 짜장면 얻어먹는 게 더 마음 편하다.
“난 볶음 짬뽕 먹을 건데 넌 뭐 먹을래?”
“…쟁반 짜장?”
“그거 2인분부터인데…….”
건우의 시선이 은우의 체격에 닿았다.
“안 부족하겠어?”
은우의 손이 목덜미를 쓸었다.
“그럼 탕수육도.”
“볶음밥도 시킨다.”
은우는 굳이 말리지 않았다. 다만 조금 나올 가격을 생각했다. 가구보단 이게 훨씬 싸긴 한데…….
“그냥 내가 살게.”
“가구 받는다고?”
“…….”
그는 목덜미를 매만지다가 툭 내뱉었다.
“나, 돈 잘 벌어.”
형과 다시 시선이 엉켰다.
“…그래도 지금까지 제대로 사 준 적 없으니까.”
어딘가 억눌린 목소리는 은우의 뒷말을 막았다. 불쾌하진 않은데 불편한 기류가 그들을 휘감았다. 오랫동안 돌지 않은 톱니바퀴는 겨우 돌아가기 시작했음에도 그간 슨 녹 때문에 삐걱거린다.
은우는 속이 조금 답답해져서 주방으로 들어가 콜라를 가져왔다.
“방송 일 해.”
칙. 플라스틱 뚜껑이 돌아가자 탄산이 샜다.
“응?”
“스트리머라고, 나.”
은우는 그걸 마시려다가 건우가 있음을 떠올리곤 컵도 새로 가져왔다. 술 대신이다.
“…몰랐어. 그럼, 그동안 밤에 공부한 게 아니라…….”
방송한 게 나쁜 일은 아니건만, 왠지 어감이 묘하다. 은우는 눈을 데굴 굴렸다.
“예명은 뭐야?”
“켄.”
그는 고민하다가 말을 덧붙였다.
“어디 가서 말하고 다니면 안 돼. 비밀이니까.”
폰을 들어 검색하던 형이 ‘응.’ 하고 대답했다. 약속을 어기는 사람은 아니니까 떠들고 다니진 않을 거다. 말을 안 하면 자랑하고 다녔겠지만.
“너, 인기 많네.”
“…조금.”
아직 업계 1위인 우유에탄산만큼은 아니었으므로 은우는 겸양을 떨었다. 사실 스트리머의 인기 기준을 알지 못해 많고 적음을 논하기 어려운 탓도 있었다.
“뭔가 신기하다. 동생이 월드 스타였다는 게.”
형은 그가 보는 앞에서 유어튜브 영상을 몇 개 돌려 보았다. 은우는 멋쩍어져서 나중에 풀려 했던 짐을 미리 풀었다.
“게임 진짜 잘한다, 너.”
다 풀고 거실로 다시 나오니 들린 말이었다.
“형은.”
“나? 난… 잘 못해.”
건우는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병원에 있을 때 발컨 소리 엄청 들었어.”
어지간히 몸치인 모양이다.
은우는 그것을 가만히 듣다가 저도 모르게 툭 말을 뱉었다.
“다음에 같이 하자.”
“어, 게임?”
“어.”
방송 때문에 한 말은 아니다. 그냥, 가족인데 이런 것 한 번쯤은 해 봐도 되지 않나 싶었다.
잠시 멍한 표정이던 형이 씩 웃었다.
“그래.”
충동적으로 한 제안이었지만, 막상 받아들여지니 나쁘지 않았다.
* * *
“드디어 이사했습니다.”
은우는 눈에 띄게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남들이 듣기엔 ‘밝다’보다는 배부른 맹수의 나른함에 가까웠지만, 어찌 됐건 기껍다는 감정은 전해졌다.
─ㅊㅊ
─축하드려요~!!
─이사 방송 왜 안해줌??
─집 좀 보여줘요
─이사 가니까 목소리 밝아진 것 보소
사람들은 그의 이사를 축하했다. 목소리가 좋아지니 이사가 정신 건강에 이렇게 좋습니다, 하는 말도 종종 나온다. 꼭 이사 때문만은 아니나, 은우는 구태여 가족 이야길 꺼내지 않았다.
“이사 방송은 그냥 안 했습니다. 사적 공간 공개하는 건 별로 안 좋아해서.”
덕분에 박 팀장도 집들이 겸 방문을 거절당했다.
앞으로 이 집에 타인이 온다면 형이나 고작해야 희수 정도가 다일 거다. 희수의 경우 현관문까지만 들어와서 ‘오, 집 넓네.’라고 감탄한 후 집들이 선물만 던지고 갈 녀석이지만.
“캠방은 글쎄요.”
방송용 방 정도는 내보일 수 있지만, 어차피 중요한 얼굴 공개가 없는데 할 필요가 있을까? 대기실에 앉은 채 은우는 어깨를 으쓱였다.
“해도 헬멧 쓰고 할 것 같습니다.”
─헬멧 집착 광공ㅋㅋㅋㅋㅋ
─집은 공개해도 헬멧은 못 버리지
「‘공강원츄’ 님이 ‘1,000원’ 투척!
이쯤 되면 헬멧이 본체임」
─이거 맞따
슬슬 게임 할 때가 된 것 같다. 은우는 가볍게 손을 부딪침으로써 분위기를 환기했다.
“게임을 슬슬 시작할까요.”
─퍄퍄 드뎌 시작~~
「‘오늘게임은무엇’ 님이 ‘1,000원’ 투척!
오겜무?」
─오늘은 머하세요??
─형 오랜만에 네뷸라 어떰? 랭크 나왔음
“오늘 할 게임은 ‘Unknown Raider 4: 최후의 여정’입니다. 제작사에서 인트로 영상을 뺀 모든 부분에 금제를 걸어 놓았기 때문에, 안타깝지만 시작부터 구매 인증 걸고 방송하겠습니다.”
소개 글에 따르면 ‘Unknown Raider 4’는 전 세계를 누볐던 대모험가, 헤로도토스 티치의 비밀을 찾는 액션 어드밴처형 게임이다.
유서 깊은 Unknown 시리즈 중 최신작임과 동시에 역대 주인공 역을 맡아 왔던 다니엘 스위프트의 은퇴작이기도 하다. 캐릭터에게 은퇴란 말은 죽음 선고나 다름없다마는.
“액션 어드벤처형이지만, 싸움보다는 도망치고 잠입하고 길 찾는 비중이 더 많다네요. 그래도 자동 전투는 꺼 두겠습니다.”
은우는 부서지는 세계와 떠오른 단어들을 확인했다. 당연하지만 난이도는 매우 어려움이다.
조준 보정 미적용, 체력 재생 비활성화, 적의 체력 및 대미지 증가 등 페널티가 잇달아 달라붙었다. 물론 그 누구도 첫판에 최고 난이도를 고르는 은우를 말리지 않았다.
─저 난이도 진짜 눈만 마주쳐도 걸리는데ㅋㅋㅋ
─켄이 첫트에서 최고난도 안 고르는 날이 오긴 할까?
─절대 안 온다.
─ㅋㅋㅋㅋㅋㅋㅋ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세계가 다시 한번 무너지고,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허물어졌다. 다시 눈을 떴을 땐 보트 위였다.
“꽉 잡아!”
순간 몸이 기우뚱했다.
“더 빨리 갈 순 없는 거냐?!”
아니, 몸이 기우뚱거린 게 아니다. 은우는 그가 헬기를 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벤트 신이라 몸이 멋대로 움직였다.
“이게 최고 속력이야!”
“이런 망할!”
옆에서 떠드는 건 누굴까. 극초반인지라 아직 알 수 있는 건 없다. 은우는 몸이 덜컹거리는 걸 느꼈다. 몸의 주인은 바닥에 있는 가방을 열고 총을 들었다. 권총이었다.
“내가 녀석들을 막아 볼 테니 계속 가, 톰!”
“지랄하네! 권총 가지고 되겠어, 대니? 뒤편에 기관총이 있으니까 그걸 잡아!”
캐릭터가 기관총을 집고 헬기의 문을 열었다. 그것이 거치대에 기관총을 설치한 후 자세를 잡았을 때 은우의 몸에 감각이 돌아왔다.
『◈ ???
→ 헬기가 추락하지 않도록 적을 견제하라.』
“시작부터 화끈하네요. 근데 총질은 자신 없는데.”
─엄살ㄴㄴ해
─이분 또 약파시네
─이미 다 들통났어요....
은우는 일단 조준부터 한 뒤 방아쇠를 당겼다. 뒤에 따르던 헬기에 총알 세례가 내렸다.
총열이 새빨개지는 게 눈에 띄었다. 원래 그런 건지, 게임이니까 확인하기 쉽게 만든 건지는 알 수 없다. 그렇지만 총기에 대해 몰라도 여기서 더 쏘면 문제가 생길 거란 건 알 수 있다.
은우는 잠시 방아쇠 당기던 손가락을 거뒀다. 그리고 총열이 식었을 때 다시 쏘았다.
한참을 반복하며 뒤쫓는 이들을 견제하니 스토리가 진행되었다. 날아오는 미사일에 은우가 조종하는 캐릭터, 다니엘이 조종석의 남자를 끌어안고 바닥으로 추락하는 스토리다.
세계가 까맣게 점멸했다.
“──, ─니.”
채팅 창만 보이는 어둠 속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말을 하고 싶었으나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대니!”
다니엘(대니)의 눈이 번뜩 뜨였다.
《Chapter 1. 시작점》
사각거리는 소리와 함께 글자가 새겨졌다가 곧 사라졌다.
“톰?”
스토리 전달을 위해서 컷신은 필요한 것이나, 강제되는 감각은 언제나 답답하다. 다니엘이 고개를 돌려 톰과 시선을 마주했다.
“왜 거기서 자고 있는 거야?”
톰이 삐딱한 표정─조금의 경멸이 섞인 것 같기도 한─으로 말을 걸었다. 참고로 은우가 조종할 캐릭터인 다니엘은 저택의 창가와 연결된 지붕에서 자고 있었다.
“아, 널 기다린다는 게 그만. 잠깐 이야기할 수 있어?”
“말해.”
“일단, 이거 받아.”
다니엘은 가방에서 무언갈 꺼냈다.
“너, 가지고 싶댔지?”
그건 아주 두껍고 낡은 고서였다. 톰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
“…이번엔 뭐야.”
“응?”
“형은 이유 없이 이런 걸 주는 사람이 아니잖아. 뭐 때문이야, 이번에는?”
톰의 말에 다니엘은 입을 열었다가 닫기를 반복했다.
“넌 너무 영리해.”
다니엘은 톰을 바라보며 머리를 쓱쓱 긁었다.
“한동안 이곳을 떠나게 됐어.”
“왜?”
“어…떤 직장을 다니게 됐거든.”
“얼마나.”
“그을쎄? 3년?”
책을 들고 있던 톰의 눈이 단박에 배신감으로 젖어 들었다. 탁. 창가에 책이 놓였다.
“이런 건 필요 없어.”
“말이 3년이지 그것보단 덜 걸릴 거야.”
“이런 건 필요 없으니까 그냥 안 가면 안 돼, 형?”
“톰.”
“나는 이 저택에 혼자 남겨지기 싫어!”
“이 일이면 엄청난 돈을 벌 수 있어. 우리에게 좋은 일이라고.”
“아니, 형에게 좋은 일이겠지. 내가 필요한 건 돈이 아니야.”
톰은 이를 악물더니 창가에 놓인 책을 들고 다니엘에게 던졌다. 다니엘이 가슴팍과 손으로 책을 받아 냈다.
“형은 항상 그게 최선이라고 말하지만, 그런 건 최선이 아니라고.”
다니엘에게 그 말을 내뱉은 톰은 그대로 창가를 닫고 잠금쇠까지 잠근 후 방을 나가 버렸다. 지붕에 있는 다니엘이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창가 앞에 책을 두고 쪽지를 남기는 것 외엔.
그 시점에서 은우는 자유를 되찾았다.
“저택을 나가자.”
컷신이 끝나기 전 다니엘이 남긴 말은 지금 해야 할 상황 지시일 것이다.
『◈ 모건의 저택
→ 저택을 빠져나가자』
혹시라도 플레이어가 못 알아들었을 때를 대비해 알림 창으로 알려 주기까지 했다.
“컷신은 겪어도 겪어도 답답하네요. 그보다 동생이 상당히 작은데… 아까 초반에 나왔던 그 조종사가 방금 그 애랑 동일 인물이 맞습니까?”
─ㅇㅇ
─맞음
─진짜요?? 왤케 못생기게 늙으뮤ㅠ
─세월에 직격타 맞았음ㅋ
은우는 아까 조종사와 방금 본 소년을 매치시켰다. 닮긴 닮았지만, 나이가 다르다. 아무래도 프롤로그와 같은 시점이 아닌 모양이다.
과거로 돌아왔나? 그렇지만 다니엘의 캐릭터─외형은 그의 설정을 따르지만─는 몸이 별반 달라진 게 없다. 다니엘과 톰의 나이 차이가 제법 나는 모양이다.
─다니엘이랑 톰 몇 살 차이임?
─톰 상처받났나봐ㅠ
─다니엘이 7살 많나 8살 많나
─대니 나쁜 형아네ㅋㅋ
은우는 채팅 창을 보고 눈썹을 들었다. 우연이겠지만, 그와 건우 형의 나이 차와 비슷하다. 형과 그의 나이가 7살 차이이니 같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의 손이 목덜미를 쓸었다. 어딘가 떨떠름하다.
“이번에도 헬멧은 없고… 일단 저택을 나갑시다.”
은우는 두 번 몸을 털곤 창문을 위로 올렸다. 그의 몸이 날쌔게 지붕 위로 올라갔다. 신체 능력을 얼마나 좋게 설정해 둔 건지 움직임이 가볍다.
“몸이 무능력자치고 굉장히 가벼운데.”
그는 다니엘의 신체 능력을 칭찬하며 건물 외벽을 타고 올랐다. 근력이 좋고 스태미나가 따로 없어 파쿠르쯤이야 조금도 문제없다.
완벽한 움직임에 사람들이 새삼스럽게 감탄했다. 신체 능력이 좋아도 모든 사람이 저런 움직임을 보이진 않기 때문이다. 아무렴 자주 봐도 자기가 못 하는 일이면 매번 신기한 법이다.
[여긴 지붕이 막혀 있으니…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가 반대쪽 창문으로 나가는 게 좋겠어.]
길 찾기는 내레이션─아마 독백이나 생각 같다─으로 알려 주었다. 튜토리얼이라서 그런지 최고 난이도 임에도 아직까진 친절하다.
“후, 아버진 저딴 꼬맹이를 왜 들인 거야?”
“골탕이라도 또 먹었나 보지?”
“골탕 수준인 줄 알아? 제발 좀 내보냈으면 좋겠어. 제 형처럼 쓰레기가 될 게 분명하다고!”
[엄폐를 통해서 은신 상태를 유지하면 들키지 않겠지.]
─최고 난이도는 찐 현실이랑 비슷하지 않냐ㅋㅋ;;
─ㅇㅇ 머리카락만 보여도 들킴
─오히려 현실보다 더할 걸요? 일반인들도 기척탐지 능력이 저세상 수준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은우는 복도와 연결된 문 바로 옆쪽 벽에 몸을 숨긴 채 상황을 지켜보았다. 물론 고개를 내밀지는 않았다. 자고로 다니엘 스위프트의 설정은 세상 최고의 트레저 헌터(도굴꾼)가 아니던가.
그 정도 이명을 가질 거면 기척 정도야 소리로 듣고 파악할 줄 알아야 한다. 즉, 시청자의 난이도 경고가 없어도 그는 이랬을 거다.
곧 사람들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은우는 그들에게 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확신이 들고 나서야 방을 소곤거렸다. 다른 난이도면 말이라도 내뱉을 수 있을 텐데─시청자의 말로는─최고 난이도는 그의 음성마저 인식해서 오디오 채울 수가 없다.
“이럴 땐 좀 곤란하네요. 여러분과 소통을 할 수가 없으니.”
─뭐 어쩔 수 없져
─이거 건의가 꾸준히 들어가는데도 안 바꿔주더라
─스트리밍 자체를 위해서 만든 게 아니니까...
─가상현실도 나왔는데 목소리 분리 안 되는 거 실화?
들어왔던 방의 건너편 방은 창문이 막혀 있었다. 때문에 은우는 복도를 통해 다른 쪽 방으로 들어가야 했다. 하필이면 아까 떠들던 사람들이 거기 있었다.
은우는 서둘러 숨었다.
‘대충 창가 쪽으로 가면 되겠죠.’
특별히 표식이 없는 게임이나 은우는 잘만 탈출로를 찾았다.
“여기 창문은 누가 열어 둔 거야? 벌레 들어오게.”
“누가 열어 놓고 닿는 걸 까먹었나 보지. 바로 닫지 마. 담배 좀 땡기게.”
“그러든가.”
떠들던 사람들은 담배를 들고 창가에 섰다. 창문이 2개였는데, 그중 방 중심 쪽에 가까운 창가에 선 채다.
적절히 설치된 소파 덕에 톰과 은우는 타이밍에 맞춰 바깥쪽 창문으로 살금살금 다가갔다.
“어이, 거기 한량 둘. 아버지가 부르셔.”
“알았어.”
“간다, 가.”
타이밍 좋게 두 명이 방을 나갔다. 은우는 빠르게 창가로 몸을 던졌다. 지붕 위에 안착한 그는 빠르게 움직였다.
[갈고리를 이용해 내려갈 수 있어.]
“밧줄에 매단 갈고리라……. 굉장히 아날로그 감성이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무래도 좀 옛날을 배경으로 하니까;;
─요즘 시대 기술력은 1인 잠입 절대 불가능하잔어~
─켄이면 쌉가능
─켄이면 가능하다.
─ㅋㅋㅋㅋ아, 이거 맏따ㅋㅋㅋ
─누구도 부정하지 않어ㅋㅋㅋㅋ
“저라도 현대 보안 장치는 무섭습니다만.”
은우는 피식 웃으며 갈고리를 저택 지붕에 걸었다.
손으로 밧줄을 단단히 잡고 발을 벽에 디디면 하강은 어렵지 않다. 물론 게임이니까 근력 보정이 붙어서 가능한 일이지, 보통 악력으로는 절대 안 될 일이다.
그의 몸이 곧 탁, 하고 바닥에 착지했다.
“톰…….”
갑자기 컷신으로 돌입하더니 다니엘이 아련하게 톰이 있는 방을 바라보았다. 그리곤 저택 탈출을 완전히 벗어났다.
시야가 거멓게 물들었다가 곧 밝아졌다.
퍽! 누군가 얻어맞는 소리와 함께 시야가 확, 위로 치켜세워졌다.
통증은 전달되지 않는지라 은우는 반 박자 늦게 얻어맞은 이가 자신─다니엘─임을 깨달았다.
“비실비실한 놈!”
다리는 움직일 수 없었으나 상체는 자유가 주어졌다. 은우는 손으로 목덜미를 쓸었다.
“덤벼라! 이번에야말로 죽여 주지!”
이젠 다리까지 자유가 쥐어졌다.
“아, 아.”
목소리도 풀렸다.
“이 겁 많은 패배자야!”
상대의 목소리에 은우의 눈동자가 미세한 흔들림조차 멈추었다.
“미안, 뭐라고?”
─학살모드 on
─아아....왕이 오신다.....
─도망쳐 엑스트라!
─조졌다ㅋㅋㅋㅋㅋ
튜토리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