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무술 자문이란 것은 별다른 게 아니다. 인공지능도 처음부터 싸우는 법을 알고 있지는 못하니.
데이터를 수집해 먼저 완성해 둔 가상의 적들을 상대로 움직임을 선보여 제작사가 더 나은 인공지능을 개발하도록 돕는다. 그게 무술 자문을 맡은 이들의 역할이었다.
“좀 더 자세히 듣고 싶습니다.”
『박 팀장님> 혹시 저번에 갔던 도장을 기억하십니까?』
“예. 관장님도 뵈었죠.”
『박 팀장님> 맞습니다. 오현 관장님도 기억하시니 이야기가 빠르겠네요.』
박기철은 천천히 오현 관장에 대한 설명을 해 주었다. 각종 게임사에 무술 자문으로 초청될 정도로 뛰어난 무술가란 것과 이번에 카롬 소프트웨어의 자문으로 초청되었다는 게 주 요점이었다.
『박 팀장님> 그런데 관장님께서 은우 씨만 괜찮으시면 동행하는 게 어떻겠냐고 물어보시더군요. 은우 씨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무래도 박기철은 징검다리 역할인가 보다. 은우는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생각지도 못한 제안이라서 조금 떨떠름하다.
『박 팀장님> 나쁜 일은 절대 아닙니다. 카롬 소프트 쪽에도 미리 문의해 봤는데, 오히려 환영한다 하더군요. 은우 씨가 원하신다면 방송 송출도 일부 허락할 수 있답니다.』
『박 팀장님> 스트리머로서도 좋은 일입니다. 나중에 신작이라도 나오면 홍보로 써먹힐 가능성이 높거든요. 광고주가 카롬 쪽이면 절대 나쁘지 않고.』
『박 팀장님> 아, 무술 자문을 어렵게 생각하시는 거라면 그럴 필요 없다고 관장님께서 말씀도 하셨습니다. 그냥 몇 번 시연만 보이면 끝난다고 하시더군요.』
딱히 어렵게 생각하진 않았다. 오히려 그가 고민하게 되는 것은 그 인공지능이 과연 어디까지 재현해 낼 수 있는가였다.
은우는 전자 노트의 테두리를 톡톡 쳤다. 만약 그의 모든 걸 구현해 낸다면?
심장은 평온한데 이성은 상기되었다. 꿈을 꾼 이후로 갈증 나던 목구멍에 물이 조금 뿌려진 기분이다.
그는 입술이 바짝 마른 것을 느꼈다.
괴수신까진 바라지도 않는다. 대신 그래, 그가 즐겼던 전투들의 반만이라도 따라 할 수 있다면. 그를 성장시켰던 날들을 조금이라도 실현해 낼 수 있다면.
그런 가능성이라도 있는 게 어딜까.
은우는 직감적으로 이번이 마지막 기회임을 깨달았다. 여기서도 찾지 못하면 정말로 더 이상의 방법은 없다.
“일정이 어떻게 됩니까.”
『박 팀장님> 은우 씨가 합류하신다면 날짜를 다시 조율할 겁니다. 그것에 대해선 다시 전달드리겠습니다.』
『박 팀장님> 별개로 머무르는 기간은 1주일 안쪽입니다. 미국 텍사스주에 있는 카롬 본사로 가실 거고요. 물론 도시를 둘러볼 자유 시간도 충분히 주어집니다. 여행 경비는 전부 카롬에서 제공해 주니 주변을 구경하셔도 좋을 겁니다.』
미국. 들어만 봤지 상상은 안 해 본 단어의 등장이었다. 그는 뒷목을 쓸었다. 국내 여행도 안 해 봤건만, 졸지에 국제 여행을 하게 생겼다.
▣ 069. 끝까지 마음에 안 드는
저녁거리를 사 오며 은우는 여행을 위한 준비물 등을 셈해 보았다. 경비는 그쪽에서 대 준다지만 혹시 모르니 어느 정도 돈을 챙겨 가는 게 좋을 거다.
그것 외에는… 여권인가? 여권이겠지? 비자는 필요 없나?
여행 한 번 가 본 적 없는 한국 촌놈은 기대와 긴장을 동시에 했다. 전생에서야 북을 기점으로 나라 곳곳을 오갔었지만, 그건 다 싸움터를 전전한 거였다. 이거랑은 좀 다르다.
그는 현관에서 신발을 벗고 중문을 열었다. 그러자 두 사람이 있는 거실이 보였다.
은우는 그들을 지나쳐 주방으로 들어갔다. 사 온 재료들이 그의 손에 다듬어지고 조리되어 저녁밥으로 탄생됐다.
몇 년간 스스로 차려 먹은 자의 요리 실력은 영상을 보지 않고도 맛있는 밥을 만들어 낼 정도는 된다. 요즘 방송을 하느라 바깥에서 사 먹는 일이 많았다지만, 기본적으로 그는 요리하는 남자였다.
그때 부모님의 기척이 다가왔다. 발소리가 조금 크니 아마 아버지의 것.
은우는 쟁반에 밥과 반찬을 올리며 입술을 더듬었다. 2주 동안 외국에 다녀올 것 같습니다. 문장 하나가 혀에 걸려서 내려오질 않았다.
탁.
그사이 냉장고 문이 열렸다가 다시 닫혔다. 기척이 멀어졌다.
동시에 금이 간 책상 유리판이 어렴풋하게 떠올랐다. 은우는 혀에 맺힌 문장을 삼켰다. 당신들은 내게 관심이 없다.
새삼스러운 사실을 되새기며 그는 방으로 들어왔다. 방음이 완벽한 현대 주거 공간은 문만 닫으면 거실과 방을 철저하게 분리해 낸다. 그가 음주 가무를 즐기다 고성방가를 해도 저쪽은 모른단 소리다.
층간 소음은 물론 벽간 소음 문제마저 없애 버린 기술이었으나, 은우는 가끔씩 아쉬워졌다.
만약 소리가 완벽하게 차단되지 않았다면, 그래서 당신들이 내가 하는 일들을 알았다면.
그땐 어떻게 됐을까.
저들이 친근하게 변하길 기대하는 건 아니다. 다만 그에게 있어 부모님이란 존재는 언제나 미지의 것이었다. 전생에선 어릴 적 괴수에게 살해당했고, 이번 생은 대화 한 번 제대로 나누지 못했다.
그래서 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의문이 들고 호기심이 생긴다. 그뿐이었다. 아마 그럴 것이다.
그는 책상 위에 저녁밥을 내려놓으며 메시지 창을 띄웠다.
“미국 여행 갈 때 준비할 거랑 주의점.”
보낸 대상은 당연히 희수다. 레리나 슬리퍼, 산호에게 보내긴 아직 껄끄러웠다. 애초에 그들이 여행 갔다 온 적 있는지도 잘 모르겠고.
『희수> 미국 가냐?』
“어.”
『희수> 왜? 뭐 하는데?』
“일 때문에.”
『희수> 방송 소재 없어서 미국도 가냐? 일단 어디 가는데.』
“텍사스. 방송 때문에 가는 건 아니야. 게임사에서 초대… 비슷한 걸 해서.”
『희수> 흠. 그럼 걍 여권만 챙겨도 되지 않나? 거기 있는 동안 입을 옷이랑 세면 도구랑 개인적으로 쓸 돈까지 해서.』
『희수> 일 때문에 가는 거면 거기서 숙소는 제공해 줄 거 아냐. 식사도 그렇고.』
타자가 아닌 음성으로 대답하나 보다. 은우는 정상적인 타이핑의 진실을 눈치채며 저녁밥을 숟가락으로 헤집었다.
『희수> 그 외 주의점은 없음. 말이야 번역기 쓰면 되고 음식 입에 안 맞으면 한국 식당 가면 됨. 길 잃어버리면 지도 보고. 솔직히 요즘 외국이 뭐, 외국이냐? 그냥 좀 색다른 동네지. 레이시스트(racist) 만나면 무조건 신고 때려. 벌금 맛 좀 보라지.』
외국에 몇 번 나갔다 온 이가 말했다.
은우는 그 의견에 동의하진 않았으나, 조언으로선 받아들였다. 솔직히 전자 노트 하나만 잘 가지고 다니면 외국 나가도 큰 문제 없는 게 요즘이긴 했다.
『희수> 정 걱정되면 박 팀장님한테 더 물어봐.』
“그래. 조언 고맙다.”
『희수> 올 때 선물.』
“오냐.”
은우는 픽 웃으며 대화를 끝마쳤다. 이제 거리낄 것 없이 밥을 먹으면 된다.
“콜라가…….”
그는 저녁밥과 함께할 음료를 찾았다. 방에 구비해 둔 콜라가 다 떨어졌는지 잡히는 게 없었다. 은우는 혀를 차며 몸을 일으켰다.
“있었네? 밥은, 챙겼어?”
거실로 나가니 형이 있었다. 집에 막 들어왔는지 양말을 벗고 있다.
은우의 눈이 살짝 떨렸다.
그러고 보니 형 직장은 출장이 잦은 편이라고 들었다. 형이야 병약하기도 병약하고, 아직 급이 낮아서 외근 정도만 나간다지만… 적어도 아는 건 있지 않을까.
“…아까.”
물어볼까 말까. 은우는 그냥 말기로 했다. 희수가 알려 준 정도면 충분할 텐데 구태여 귀찮게 만들 필요는 없다.
“그래? 맛있는 거 먹었어?”
콜라를 챙기기 위해 주방에 진입할 즈음, 형이 한 번 더 말을 걸었다. 은우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건우가 뺨과 목을 슬슬 쓸더니 어색하게 웃었다.
“그, 요즘은 캡슐로도 많이 공부한다던데.”
뭘 말하려는 걸까. 캡슐 빌려 달라고? 아니면 공부 잘되냐고? 은우는 냉장고 문을 열었다.
“그러니까 내 말은… 공부하는 것도 좋지만, 너무… 무리하진 말라고. 요즘 새벽까지 하는 것 같아서.”
콜라를 집어 올리던 손이 잠깐 멈추었다.
“아… 혹시 방문 멋대로 열어서 화난 거라면 미안해. 난 그냥… 야식을 사 왔는데 깨어 있으면 너도 좀 먹었으면 해서…….”
은우는 냉장고 문을 닫았다. 그리고 건우와 시선을 마주하기 위해 초점을 좀 아래로 잡았다가, 마주쳐도 읽어 낼 게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눈이 더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속눈썹이 게슴츠레한 눈을 살포시 가렸다.
“다음부턴 적당히 할게. 그러니까 걱정 마.”
부모님처럼 완전히 매몰찼다면 당신이 이렇게까지 불편하진 않았을 거다.
* * *
은우는 숨을 내쉬며 모르포맨의 최종 보스를 마주했다.
그는 현재 여러 에피소드를 거쳐 탈옥한 스왈로우, 지네를 닮은 악당 ‘센티피드’, 부하들을 이끌고 온 플레임갱, 이용당한 킹매머드, 거미 남작과 세력 다툼을 하던 ‘Sir.라이언’을 전부 해치운 상태다.
이제 남은 악당은 단 한 사람, 거미 남작밖에 없다.
“오, 설마 여기까지 네가 올 줄이야. 놀라워.”
거미 남작은 자신의 팔다리 4개와 기계로 만든 8개의 팔을 더해 거미의 형태를 이룬 상태다.
심지어 그는 실도 쏘아 보냈다. 본래 거미는 뒤꽁무니에 있는 실젖이란 기관으로 실을 뽑으나, 외형상 좋지 않다고 판단했는지 손에서 사출됐다.
“그렇지만 나비 따위가 내 거미줄에서 정말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나?”
모르포맨과 마찬가지로 힘을 주는 나비를 찾고 있는 거미 남작. 그는 모르포맨이 나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모르포맨은 정보를 알고 있는 듯한 거미 남작에게서 나비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각자의 목적을 위해서라도 싸움은 이뤄져야만 하니. 거미줄이 곳곳에 드리워진 옥상에서 마지막 보스전이 벌어졌다.
은우는 거미줄을 피해 날았다. 폭발 인분을 쓰면 거미줄을 제거할 수 있으나, 그는 굳이 그러지 않았다.
비단 그게 미션으로 걸려서만은 아니다. 은우는 제발 싸움다운 싸움을 하고 싶었다.
“네놈은 내 상대가 될 수 없다.”
거미 남작의 말에 은우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지금 봐주고 있는 게 누구라고 생각하는 건지.
“오, 그래. 내가 너무 고상해서 너 같은 걸 들이밀긴 좀 아깝지.”
─켄한테 깝치네ㅋㅋㅋㅋ
─맞는 말하네 쳐맞는 말
─켄한테 상대가 될 수 없다고 말하는 빌런이 있다?! 삐슝빠슝뿌슝
─ㅋㅋㅋㅋ아 정해진 대사긴 한데 넘웃김ㅋㅋㅋ
모르포맨이나 시청자들도 같은 의견인 듯하다. 은우는 그들의 수다를 보며 바닥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그 자리로 작은 그물 같은 거미줄이 던져졌으나, 피해 내는 것쯤은 일도 아니다.
그의 부츠가 옥상을 내달렸다. 콘크리트와 철이 뒤섞인 옥상은 굉장히 기묘하고, 보스전을 치르는 장소로 적합했다.
“이번에야말로 네 녀석이 빼앗아 간 나비를 되찾겠다!”
“그런 건 내게 없다고 말했을 텐데!”
은우는 지팡이를 제대로 쥐고 거미줄을 피해 거미 남작에게 접근했다.
거미 남작이 공중에 떠 있도록 받치고 있는 네 개의 기계 팔 외 나머지 한 쌍이 은우를 노렸다. 발톱이 세워진 그것은 제법 위협적이다.
그렇지만 그것을 잘 피해 내면 ‘완벽한 회피’로 인해 세계가 느려진다. 은우는 느려진 세계에서 거미 남작이 원래 팔로 쏘아 보내는 거미줄을 피했다. 그러곤 지팡이를 들었다.
따악!
남작을 지탱하던 네 개의 다리 중 하나가 솟아올라 그를 노렸다. 지팡이가 절묘하게 그것을 쳐 냈다. 마디 부분을 노린 공격은 물리 엔진에 의거해 다리를 좀 더 멀리 밀어냈다.
“패배를 시인하고 항복하는 건 어떻지? 그럼 최소한 네놈을 편하게 보내 줄 의향이 있다만.”
“너야말로 항복하면 최소한 사지 멀쩡히 감옥에 들어가지 않겠어?”
그 상태에서 남작의 바로 앞까지 도달한 그는 지팡이의 고리 부분으로 남작의 앞쪽 옷자락을 걸고 끌어당겼다.
옷이 찢어지거나 단추가 뜯어지지 않는 게임 특성 덕에 남작은 그대로 끌려왔다. 두 팔이 다급히 거미줄을 쏘아 보내려 했지만, 은우는 그걸 봐 주지 않았다.
어깨를 낮추고 고개를 틀어 거미줄 하나를 비껴 보내고, 지팡이를 한쪽 방향으로 확 틀어 당김으로써 나머지 한 팔을 밀리게 만든다. 하면 남작의 팔은 후드득 떨려서 방향이 뒤틀리게 된다. 거미줄이 알아서 다른 곳으로 발사된단 소리다.
은우는 그 상태에서 남작의 기계 다리 하나를 발판 삼아 떠오른 후, 무릎으로 명치를 올려 찼다.
“커헉!”
남작이 충격에 정신 못 차리고 비틀거렸다. 은우는 다급히 지팡이를 회수하고 뒤로 텀블링했다.
촤르르륵-
옥상 위로 미끄러진 그의 몸이 다시금 텀블링하며 뒤로 물러났다. 연이어 남작의 기계 팔이 그곳에 박혔다.
은우는 지팡이의 굽은 손잡이에 손가락을 걸고 빙글빙글 돌리다가 검 잡듯 지팡이를 잡았다. 그러곤 기계 팔을 후려쳐 튕겨 냈다.
─지팡이칼리버ㅋㅋㅋ
─나비지팡이 이제부터 장미칼 급임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켄 진짜 무기 다양하게 쓴다;;
─그는 무술의 천재다.
컷신이 아닌 이상 옷가지나 장비가 파괴당하지 않는 설정 덕에 연출된 장면이나, 사람들은 그럭저럭 마음에 들어 했다. 정장을 입은 채 지팡이로 상대를 몰아붙이는 것 자체가 실로 만화 같은 조합이어서 마음에 든 모양이다.
은우는 바닥 위를 미끄러지며 지팡이로 다리들을 쳐 냈다. 보통은 날개로 날아올라 피하는 패턴이라는 건 알 바 아니었다.
지팡이의 끝은 정확히 다리들의 마디 부분을 찔러 다리를 물렸다. 정확히 8번 맹공을 가한 남작이 뒤로 물러났다.
지금이야말로 접근의 기회다. 은우는 맹공을 가한 후 1초도 안 되는 시간 동안 멈춰 있는 거미 남작의 패턴을 고려해 움직였다.
나비 날개 같은 베일 자락이 공작의 꽁지깃처럼 펼쳐졌다. 지팡이의 끝을 앞세워 달리는 모습은 어쩌면 화살 같기도 하다.
은우는 기계 팔들이 그를 향해 박혀 드는 것에 맞춰서 점프했다. 기계 팔의 칼날이 바닥에 박힐 때쯤이면 그의 발이 기계 팔 위를 내달릴 수 있다.
한 걸음, 두 걸음. 그리고 정확히 점프. 은우는 옆으로 한 바퀴 회전하며 뛰어넘었다. 방금 있던 자리를 스쳐 지나가며 기계 팔이 교차하도록 땅에 박혔다.
거미줄이 쏘아지는 것은 착지할 때 상체를 더 낮추면 피할 수 있다.
그는 상체가 바닥 쪽으로 기울이다 못해 밀착한 것처럼 달린 후 그대로 미끄러졌다.
“장난은 여기까지다!”
“그래, 감옥 가는 게 장난은 아니지.”
거미 남작의 기계 다리 4개 중 왼쪽 다리 2개 사이로 미끄러진 은우의 몸이 일으켜졌다. 지팡이가 기계장치에 걸렸다.
은우는 그 상태에서 팔에 힘을 준 뒤 앞으로 구르듯 상체를 굽혔다. 동시에 발은 대지를 밀어냈다. 물구나무서듯 떠오른 다리가 남작의 목을 휘감았다.
“본래는 여기서 꺾어야 하는데.”
이 게임에선 그게 불가능하다. 은우는 아쉬운 대로 앞쪽에 무게를 실었다. 거미 남작의 상체가 꺾이며 공격하려고 들어 올려지던 팔이 대지를 받쳤다.
은우는 몸이 앞으로 넘어가는 걸 느끼며 다리의 힘을 살짝 풀고 몸을 틀었다. 왼쪽으로 기울어진 채 떨어지는 그가 남작과 시선을 마주했다.
“정수리 마시지로 만족하죠.”
따악! 딱따닥!
지팡이가 남작의 정수리를 후려쳤다. 그것도 세 대.
탁!
은우의 부츠가 바닥과 만나고, 그는 앞으로 굴렀다. 네 개의 다리 사이를 지나치자마자 방금 있던 자리에 기계 팔이 박혔다.
은우의 다리가 남작의 척추를 꺾을 것처럼 강렬하게 등을 후려쳤다.
“멍청한 것! 그 힘은 네 녀석이 가지고 있을 게 아니다!”
─불쌍한 남작.....놀림거리가 돼버렸누...
─사실 가발 심은 거라든가?
「‘ ’님이 ‘1,000원’ 투척!
이쯤되면 거미남작 입장도 들어봐야한다」
─정수리 치면 탈모빔 온다구요ㅠㅠㅠ
─소리 존나 찰져ㅋㅋㅋㅋㅋㅋ
거미 남작을 불쌍하게 여기는 의견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가엽다 말할지언정 은우를 말리는 사람 또한 없었다.
솔직히 말리기엔 너무 귀한 장면들이 아닌가?
“네가 가질 만한 것도 아니지.”
은우는 지팡이의 손잡이 부분으로 내리꽂히는 발톱을 막아 냈다. 굽은 곳에 발톱이 걸렸다.
그는 그 상태 그대로 춤을 추듯 지팡이를 움직였다. 절대 발톱이 풀려나도록 하지 않았다. 기계 팔이 출렁이며 은우가 움직이는 대로 따라왔다.
다른 기계 팔이 은우를 노리려 했으나, 은우의 절묘한 손놀림에 지팡이에게 묶인 기계 팔이 방패가 되었다. 손으로 원을 그리듯 손목을 비틀면, 지팡이를 따라 기계 팔이 원을 그리며 출렁이니.
지팡이를 든 팔이 더는 꺾일 수 없는 각도가 되었을 즈음엔 다른 팔로 지팡이를 넘겨 나머지 원을 그린다. 그러곤 바닥에 내려친다.
교차하다가 꼬여 버린 기계 팔 두 개가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숨 참아.”
미적지근한 숨결이 낮은 목소리를 흘리자 사람들이 흡! 하고 숨을 참았다.
지팡이를 든 은우의 팔이 투창 자세를 잡았다. 은우의 호흡도 색을 거두었다. 가면 속 에메랄드색 눈동자가 모르포 나비의 날개 색과 같은 푸른빛을 머금었다.
딱히 ‘완벽한 회피’가 펼쳐진 것도 아닌데 보는 이들의 시간이 뒤틀렸다. 지팡이를 잡고 있는 손이 하나둘 펼쳐지는 것이 그들의 눈 속에, 감각에 똑똑히 들어온다.
그리고 검정색 지팡이가 앞으로 짓쳐 나가기 시작했다. 아주 느리게 회전한다는 사실은 지팡이의 손잡이 부분으로 미루어 알 수 있다.
거미줄과 지팡이가 서로를 지나치고. 4개의 기계 다리 중 쏘아지는 하나와 지팡이가 다시 어긋난다. 바람을 휘감은 지팡이는 맞지 않는 균형으로 인해 묘하게 비틀리고 있건만, 정확한 계산은 그마저도 고려해 경로를 짰다.
그렇게 허공을 가른 지팡이가 다다른 곳은 거미 남작의 머리였다.
따악!
지팡이의 끝이 남작의 미간을 정확히 때리고 위로 튕겨 났다. 뱅글뱅글 돌며 포물선을 그리는 그것은 철저한 각도 계산 덕에 은우 쪽으로 날아왔다.
지팡이와 어긋났던 기계 다리는 은우를 노렸다. 은우가 뒤구르기를 하며 손을 뒤쪽으로 뻗었다.
새하얀 장갑 위로 새까만 지팡이가 홀린 듯 빨려 들어왔다. 탁, 하는 소리가 천둥소리처럼 사람들의 귀에 선명하게 기어 들어왔다.
“이제 숨 쉬어.”
뒤틀렸던 시간축이 도로 돌아왔다.
“빌어먹을! 이대로 물러날 것 같으냐!”
놀랍게도 컷신이 자연스럽게 연결되었다. 거미 남작이 격노해서 옥상에 설치된 구조물 하나에 올라가더니 그대로 거미줄을 바닥에 도배하기 시작한 것이다.
모르포맨은 어쩔 수 없이 위로 날아올라야 했다. 그렇게 2차전이 시작되었다.
그렇지만 배경이 공중이라고 해서 은우가 밀려야 할 이유는 없었다. 오히려 거미 남작이 거미줄 위를 거니느라 네 개의 다리를 다 써야 했기에 은우가 노릴 곳은 더 많아졌다.
한쪽 다리만 무너트리면 자기가 설치한 거미줄에 자기가 접착되어 허우적거린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빠져나오나, 은우 입장에선 그마저도 넘쳐나는 시간이었다.
2페이즈는 너무 쉽게 넘어갔다.
그리고 대망의 3페이즈. 도망가는 남작을 쫓으며 잡는 것.
거기서 은우는 한탄했다. 차라리 1페이즈로 쭉 갔다면 좋았을 것을, 갑자기 추적물이라니? 정말 끝까지 마음에 안 드는 게임이다.
그러나 은우의 심정이 어찌 되었든 엔딩은 계속되었다.
거미 남작은 기어코 자신의 거미줄에 칭칭 감겨 감옥으로 이송되었다. 모르포맨은 남작에게서 나비의 정보를 얻었지만 실마리에 불과했다.
징글징글한 모르포맨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