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이번에도 가림막 뒤에서 캡슐에 접속했다. 로딩 화면이 잠깐 시야를 꽉 채웠다.
게임의 배경이 된다는 미국 전역이 번갈아 가며 비쳐졌다. 오픈 월드라고 들었는데 그래픽이 제법이다.
준비 영상이라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픽의 정점이라 불리던 Extrasolar Hunter만큼은 되는 것 같다. 그 게임은 하나부터 열까지 새로 만든 판타지 배경이고 이건 미국을 그대로 구현한 거지만 말이다.
“레이싱 게임은 처음인데…….”
미리 들은 바론 ‘크루 러시’는 시뮬레이션 형식이 아니라 아케이드 형식의 레이싱 게임이라 했다. 물리 엔진 등은 리얼함을 살렸지만, 난이도는 쉬운 편이라던가.
과거 아기자기한 디자인의 아케이드형 레이싱 게임으로 대박을 친 적이 있어 그런지 차기작도 아케이드형으로 결정했다 한다.
다만 디자인은 극사실을 추구했다. 아기자기한 디자인의 레이싱 게임이야─PC 전용이지만─이미 팔아먹은 전적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닐까 싶다. 크루 러시는 VR 전용이기도 하고.
『크루를 선택해 주세요.』
제법 긴 로딩 화면의 끝에서 캐릭터 선택 창이 나왔다. 물론 선택 창이라고 해 봤자 입고 있는 옷이 바뀌는 게 다였다.
캐릭터가 비스듬히 기대고 있는 차량은 뭔진 모르겠지만, 일단 매끄러웠다. 차에 관심 없는 사람의 감상평은 딱 거기까지였다.
“헬멧 예쁘네요.”
기운 빠진 상태지만 이건 일이다. 그는 부탁받은 대로 의식적으로 말을 하려 노력했다.
채팅 창이 없는 상태로 혼잣말을 하려니 기분이 묘했지만, 광고 금액을 떠올리면 그것도 할 만하다.
다만 대체 어떤 식으로 편집할는지.
다이아박스에서 영상을 미리 보고 스트리머에게 문제될 부분이 있는지 확인한다 하니 불안하진 않다. 그래도 궁금한 건 궁금하다.
“이게 더 낫나? 뭐가 더 나을까요?”
그는 혼잣말이 어려워서 방송한다 자기 최면 걸어 가며 존대로 중얼거렸다. 보통은 귀가 뜨거웠을 텐데, 전 광고에서 너무 권태로워졌나 보다. 그냥 그랬다.
은우는 결국 옷이나 열심히 골랐다.
검정을 고를까 하다가 맨날 검정만 입는다는 소리가 기억나서 궤도를 틀었다. 최종적으로 결정된 건 하얀색에 민트색이 들어간 복장이다. 헬멧도 깔맞춤이었다.
“시작하겠습니다.”
시작 버튼을 누르자 시야 전환을 알리는 창이 잠깐 뜨고, 모든 게 까맣게 물들었다가 새로운 세계를 형성했다. 그는 어느새 차 안에 앉아 있는 상태였다.
그래픽은 영상에서 봤던 것보다 조금 떨어졌다. 차 안은 잘 만들었는데, 바깥 배경이 묘하게 이질감이 든다. 액셀 밟고 보면 훅훅 지나가느라 크게 티가 안 날 테니 덜 신경 썼나 보다. 어쩌면 아직 완성형이 아니라서 그런지도 모른다.
“차 엄청 잘 만들었네요.”
은우는 오히려 잘 만들어진 차에 관심이 갔다. 자가 차를 몰아 보기는커녕 운전면허도 안 따 본 인간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애초에 땄어도 요즘 차들은 자동 운전이 탑재되어 있어 큰 도움은 안 됐겠지만 말이다.
“그러고 보니 운전면허가 없는데… 괜찮겠죠, 뭐.”
그것보단 뜬금없이 줄어드는 카운트가 더 중요하다. 은우는 알림 창을 응시했다. 다행히 조작법도 알려 주었다.
『Tip. 가속 페달을 밟으면 가속합니다.』
“…액셀이 왼쪽인가 오른쪽인가…….”
무면허 운전자는 벌써부터 난관에 봉착했다.
은우는 발아래에 있는 페달 두 개를 밟아 보았다. 왼쪽을 밟았을 땐 별 느낌이 없는데 오른쪽을 밟았을 땐 차 바퀴가 팽팽 돌기 시작했다.
“오른쪽이네.”
미터기─속도일 게 분명한─도 올라갔으니 아마 맞을 거다.
“벌써부터 불안하다.”
속내는 별로 안 불안했다.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무기력함이 그의 혈관을 잠시 장악한 것 같다.
은우는 점차 줄어드는 카운트를 보며 가속 페달을 이리저리 밟아 보았다. 어떤 세기로 밟느냐에 따라 속도 상승 시간이 달라졌다.
그리고 카운트가 온전히 줄었다. 차가 탁 풀려나는 기분이 들며 실제로 튀어 나갔다. 특별히 몸이 들썩거리거나 하진 않았다.
“흠.”
은우는 차가 쭈욱 나가는 걸 보며 페달을 일단 밟았다. 같이 출발한 차들이 그의 뒤로 밀려났다. 그가 치고 나간 거다.
딱히 그가 직접 달리는 것도 아닌데 바람이 느껴지는 기분이다. 스쳐 지나가는 도시의 정경이나 들리는 엔진음이 생각보단 괜찮았다.
『Tip. 브레이크 페달을 밟으면 감속합니다.』
그러다 살짝 굽은 커브 길이 나왔다. 핸들을 꺾었으나 속력이 줄지 않은 차는 부드럽게 꺾이지 않았다. 차가 건물 벽에 옆면을 박았다.
“브레이크를 밟아야 하나……?”
일단 부딪친 거 은우는 액셀을 밟았다. 차가 그 앞에 있던 쓰레기통을 치며 나아갔다. 딱히 차체에 손상이 간 느낌도, 그에게 충격이 오지도 않았지만, 속력 자체는 확 줄었다.
요컨대 차를 갖다 박아도 망가지거나 다칠 일은 없지만, 속력이 줄어서 레이스에 질 수 있으니 박지 마라, 이건 거 같다.
“…이런 느낌이군요.”
그 증거로 추월당했다. 양옆으로 쌩하니 지나가는 차들은 파란색과 노란색이다.
은우는 핸들 잡은 손을 톡톡 두드렸다. 처음이니까 초조해야 할 이유는 없다. 배우고 나서 이기면 된다.
그는 길을 따라 나아가며 슬쩍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화면에 딱 박혀 있는 내비게이션이 경로를 알려 주었다.
마침 완전한 커브 길이 있다. 은우는 아까 얻은 깨달음을 따라 브레이크를 밟고 핸들을 틀었다. 이번에도 부드러운 조작엔 실패했다.
“브레이크를 더 밟아야 하나.”
도로를 벗어나 인도 부분까지 튕겨 나왔다. 은우는 핸들을 꽉 쥐며 입술을 핥았다. 몇 번만 더 해 보면 감이 잡힐 것 같다.
그의 발이 가속 페달을 다시 세게 밟았다. 차 속력이 확 올라갔다.
무면허 운전자는 금세 다음 커브 길을 맞이했다.
끼이이익 소리와 함께 브레이크를 밟은 차가 미끄러졌다. 이번엔 벽에 부딪치지 않았다. 인도는 살짝 침범했지만, 아까처럼 차체 전부가 넘어가지도 않았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경쟁자들의 차량이 보였다.
“핸들을 조금 더 빨리 꺾어도 되겠네.”
경쟁자들과 더불어 나무 구조물도 보였다. 일부로 건조한 게 분명한 그것은 의도가 명백했다.
경쟁자들의 차량이 그 구조물을 타고 올라가더니 그대로 점프해서 날아갔다.
『Tip. 가속 페달을 세게 밟으면 급가속할 수 있습니다.』
이 타이밍에 급가속을 알려 주는 건 급가속을 하라는 얘기밖에 더 될까. 은우는 액셀을 콱 밟았다. 미터기가 주우욱 올라가며 속도감이 확 다가왔다.
완만하게 시작해 급격히 기운 경사가 그의 차를 날렸다. 부웅 뜬 시간은 오래 가지 않았으나, 고철 덩어리를 타고 지상에서 풀려날 수 있다는 감각은 제법 독특한 것이었다.
잠깐 권태에 젖었던 몸이 색다른 자극에 다시금 활기를 되찾았다. 헬멧 속 은우의 입술이 삐뚜름해졌다.
“마음에 드네요, 이 게임.”
겜잘스(게임 잘하는 스트리머)이나 레이싱 게임에서 만큼은 초보다운 어리바리함을 찍어 홍보로 써먹으려던 킨슨사의 노림수가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 065. 액션만 없을 뿐 전쟁
‘게임을 잘한다.’라는 말은 흔히 쓰인다.
그렇지만 게임을 정말 잘한다란 말에는 수식어가 붙곤 한다. 리듬 게임을 잘한다, 턴제 게임을 잘한다, 액션 게임을 잘한다, 레이싱 게임을 잘한다 등등.
그만큼 장르마다 시스템이 차별적이었고, 다른 시스템마다 요구하는 피지컬이 달랐다.
그러나 때때로 어떤 재능은 그 다른 시스템마저도 짓뭉개곤 한다.
“너무… 잘하는데요?”
영상에 써먹을 장면을 체크하기 위해 실시간으로 구경하던 직원이 입맛을 다셨다.
“이건 뭐, 다른 장면들도 여기서 따와도 될 듯?”
“그러니까. 저쪽도 난리 났다던데.”
“그쪽은 원래 잘하기로 유명했잖아요. 근데 이건 레이싱인데도 잘하네……. 버릴 장면이 하나도 없어.”
특히 초반에 가속 페달과 브레이크 페달을 구분 못 하던 점이나 이리저리 갖다 박는 장면은 초보 티가 확확 나서 좋다. 그립과 드리프트를 모르는 것도 그렇고.
그런 주제에 한 번 할 때마다 코너링이나 액셀, 브레이크 조절 실력이 쑥쑥 늘었다. 극시뮬레이션형과 달리 쉽게 드리프트를 해낼 수 있도록 해 놨는데, 본능적으로 그 방법을 찾아내는 거다. 그립은 아주 기본이었다.
여기까지만 보면 실력자이면서 초보인 척한 거 아닌가 싶을 수 있다. 하지만 튜닝 시스템을 못 다루는 걸 보면 또 명백한 초보였다. 차알못 그 자체인 것이다.
관객 입장에선 신기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짧게 공개하기로 했는데, 이거 좀 길게 해도 되겠는데요? 계약 조건을 바꿔야 하나, 이거.”
직원은 제 선배에게 물었다. 그가 보기엔 날리기 상당히 아까운 장면인 까닭이다.
확실히 켄은 자동차에 대해 잘 모른다던 말마따나 차에 대한 설명을 못했다. 차를 바꿔 탈 때마다 정확히 뭐가 다른지 말을 못 하는 것이다.
그러나 표현만 못할 뿐 본능적으로 차이를 잡아내며 어렴풋이 평하는 게 차를 아는 사람에게도, 모르는 사람에게도 먹힐 것 같았다.
뭣보다 현존하는 모든 차량을 구현해 낸다는 마음가짐으로 많은 차를 구현해 놨더니, 켄은 그걸 다 시승할 기세였다! 비록 아직 미구현된 차종도 많지만, 수십 대 시승한 것만으로도 홍보 영상으로 내보내기 딱 좋다. 하물며 그걸 다 잘 탄다면 더더욱 좋다.
“와, 와…….”
“바이크로 저걸 해낸다, 와.”
그 순간에도 켄의 플레이는 계속되었다. 레이싱 대회 중 사막 랠리에 참가한 참이다.
굴곡이 심한 사막 언덕을 내달리는데 언덕의 끝점에 도달하기 전 부스트를 발동시켜 크게 점프하는 솜씨가 어지간한 레이서 저리 가라였다.
“아, 바위 사막 진입한다.”
사막에서 바위가 슬슬 나오기 시작했다. 곧 랠리가 이어지는 도로에 진입할 것이다.
끼이이익!
소리를 꺼 놨음에도 그런 환청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켄의 바이크가 도로 쪽에 다다랐을 때의 일이었다.
도로의 측면에서 진입하는 것이니 커브를 돌아서 도로에 합류해야 하는데, 켄은 그 커브를 완만하게 돌지 않았다.
그는 도로에 거의 도착하고 나서야 바이크를 꺾었다. 쫘아악 미끄러진 바이크는 옆면이 바닥과 긁히기 직전이다.
그리고 도로에 완전히 진입했을 때, 부스터가 발동하며 도로를 따라 바이크가 쏜살같이 질주하기 시작했다. 예술적인 그 광경에 예술 점수가 치솟았다. 레이싱 경기에 한정해 시스템적으로 발동되는 점수제다.
순위가 낮아도 점수가 높으면 상금을 많이 받는 게임 특성상 저건 무리한 행위가 절대 아니다.
심지어 켄은 지금 1위였다.
“진짜 잘한다.”
그 행위는 예술 점수뿐 아니라 실제 관객의 감탄 자체도 이끌어 내었다. 하물며 켄은 오늘 레이싱 게임을 처음 시작했다는 초보가 아니던가.
아케이드라 게임이 쉬운 편임을 감안해도 적응이 빠르다. 이건 그냥 재능이었다.
“앗, 치고 들어온다!”
가드레일을 부숴 버리며 도로에 난입한 2위가 켄을 따라잡았다. 민트색 오토바이를 탄 켄의 고개가 힐끗 움직이더니 앞바퀴를 들었다.
그래, 바이크의 앞바퀴가 들렸다.
“어?”
지켜보던 관객이 놀란 순간, 켄의 바이크가 2위를 때렸다. 2위는 사륜구동 차였는데, 바이크의 앞바퀴로 앞쪽 보닛을 때린 거다.
“이야, 자존심 좀 있다더니 장난 아니야. 그냥 들이받네.”
“완전 싸움의 민족인데요.”
저런다고 해서 별다른 타격이 있진 않다. 차가 망가지는 것도 아니고 인공지능이 반응을 보이지 않을 테니까. 저런 위협 운전에 반응하도록 설계되어 있지 않기에 켄이 얻을 이득은 전무한 거다.
그러나 실제 관객에겐 다르다. 인상만큼은 콱 박혔다.
당장 참고하려 나온 개발부에서 쑥덕거리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아무래도 위협 운전에 대한 반응이 추가될 것 같다.
“진짜 완전 그림이 달라지겠는데요.”
“그러게…….”
게임 잘하는 스트리머의 초보 모습을 부각시켜 사람들의 시선을 이끌려 했더니, 그냥 천재밖에 남지 않았다.
직원의 선배는 결국 어깨를 으쓱이며 입을 열었다.
“다이아박스 사원 좀 불러와 봐. 계약 좀 바꾸게.”
* * *
끼이이이익!
은우는 핸들을 확 꺾으며 특유의 타이어 마찰음을 들었다. 차종마다 엔진음이 다 다르고 덜컹거리는 것도 달라 이것저것 타 보며 비교하는 맛이 좋다.
매끄러운 디자인의 차가 도로 위를 미끄러졌다.
“특별한 건 없는데… 나쁘지 않네요.”
레이싱이야 경쟁하는 맛이 있지만, 그 외엔 별다른 콘텐츠가 없다. 홍보를 위해 유료 차종마저 풀어 둔 상태라 돈을 끌어모을 필요가 없어서인지도 모른다.
다만 콘텐츠가 없어도 오픈 월드란 점이 나머지를 채워 주었다. 특히 산이나 절벽가에 지어진 도로를 지날 때의 느낌이 좋았다.
일부 사람들이 차를 모으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차마다 각자의 매력이 있었다. 어떤 차는 직진할 때의 느낌이 좋고, 어떤 차는 코너를 돌 때 부드럽게 휘어지고.
은우는 휘몰아치는 바람에서 짜릿함보단 평화로움을 느꼈다. 전투가 없어서만은 아니었다. 그랬다면 현실에서도 평화로움을 느꼈지 않겠나.
다만 이 게임은 조금 달랐다. 일단 속력이 너무 높아 자칫하면 차와 차가 부딪치고 벽에 박을 수 있다는 점에서 위협이 실존한다.
그렇지만 사고가 일어나도 그의 안전에는 문제가 없다. 특별한 사건만 없으면 그 끊을 수 없는 긴장 속에서도 느긋하게 있을 수 있는 거다.
뭐, 이것도 균열 사냥꾼 홍보 영상에서 너무 실망한 나머지 반사적으로 이쪽 평가가 치솟은 걸지도 모른다.
“출시되면 사 볼까.”
그래도 이거 하나는 확실했다. 방송용이 아니라 그냥 할 것 없을 때나 답답할 때 접속해서 드라이브하면 좋을 듯하다.
전투나 싸움이 없는 게임치고 후한 평가였다.
그렇지만 균열 사냥꾼 때문에 올려 쳐지는 것만은 절대 아니었다. 그건 한 절반 정도 되고, 나머지 절반은 진심이다.
솔직히 보통 액션 장르가 아닌 게임에선 열받거나 울분만 쌓였는데─왜냐면 그런 게임은 대체로 박 팀장 권유로 시작했으니까─이건 그렇지 않잖나.
지렁이 전쟁도 박 팀장 추천이긴 하지만, 그건 액션만 없을 뿐 전쟁이긴 하니까 예외로 치자.
[켄 님, 4시간째입니다만… 괜찮으십니까?]
“아.”
벌써 그렇게 됐나. 은우는 브레이크를 천천히 밟고 길가에 차를 대었다.
“로그아웃해도 됩니까?”
[영상거리는 충분히 모였으니 원하신다면 그러셔도 됩니다.]
은우는 거기서 조금 갈등했다. 조금 더 할까, 그만할까. 조금 더 해도 괜찮을 것 같은데, 그러자니 외부에서 지켜볼 인력들이 걸린다. 그가 늦게 나갈수록 저들은 퇴근이 늦어진다.
뭐… 출시되면 사서 하면 되니까. 영상거리도 모였다 하고. 은우는 캡슐을 나오기로 결정했다.
묘하게 다사다난했던 촬영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