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한 쌍의 날개가 뜯어지듯 잘려 나간다.
덜렁거리던 꼬리가 기어코 분리되었다.
기하학적으로 꼬여 있던 뿔이 부러졌다.
독주머니는 도려져 바닥을 굴렀다.
남은 건 너덜너덜한 몸뚱이뿐이었다.
은우는 검을 휘둘러 털었다. 그의 시선은 흑도조의 목에 맺혀 있다.
부위 파괴를 완료한 후 그는 집요하게 목만을 노렸으니. 그곳엔 피부 거죽을 손톱으로 그었을 때처럼 옅은 실선이 떠있다. 놀라울 정도로 일선만을 공격했다는 증거다.
부위당 피격 판정 범위가 널널하므로 저렇게까지 결벽적이게 공격할 필요는 없으나, 은우는 일부러 일선만을 노렸다. 그게 사람들에겐 인상적일 것임을 알아서다.
“더럽게 독을 뱉어 내는 것만 제외하면 여타 괴수들이랑 다르지 않네요.”
특별한 패턴이 없는 건 아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행동을 보면 짐승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독만 조심하면 어려울 게 없는 보스인 것이다.
그 점이 상당히 아쉽다. 조금 더 어려웠으면 재밌었을 텐데.
─눼......?
─님 기준으로 말하지 말라고ㅡㅡ
─그 독 뱉는게 문제인뎁쇼....
─아....나도 저렇게 말할 수 있는 실력이 있었음ㅠ
─다음생에서도 안 될 듯
─개새끼야
익숙하게 사람들이 어이없어 하고, 은우는 의견을 철회하지 않았다. 이변은 그 이후에 벌어졌다.
갑작스럽게 컷신이 끼어들며 육신의 자유를 빼앗아 갔다. 눈을 게슴츠레 좁히고 싶은 걸 다음 순간 벌어진 장면이 그마저도 막아 냈다.
키, 아,아아아아, 아아아!
컷신 속에서도 엉망인 흑독조가 몸을 흔들자 비늘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잘려 있던 뿔이 더욱 금 가고, 이내 산산조각 나서 비산했다.
“이 무슨…….”
캐릭터가 깜짝 놀랐다. 변화는 그사이에도 이어지고 있었다.
“아, 아아아……!”
비늘 아래 살갗이 찢어지고 돌기들도 투둑투둑 떨어졌다. 찢어진 살갗 아래선 피와 근육 섬유가 튀어나왔는데, 그 사이로 살금 보이는 것은 회청색의 무언가였다. 마치 허물이라도 벗는 것 같았다.
“아아아!”
1분도 안 되는 시간 안에 흑독조는 새로운 형태를 드러냈으니.
“죽, 인, 다─!”
카카라와 상당히 흡사하나, 그보단 괴수에 가까운 것.
좀 더 쉽게 표현한다면 환상 속 생물 중 리자드맨과 상당히 닮았다. 카카라가 비늘이 달린 인간에 가깝다면, 저건 용이 2족 보행 생물이 된 거니 당연하다.
괴수신이랑 닮았네. 은우는 그것을 힐끗 보곤 감상평을 내렸다. 외형을 닮았노라 말하는 게 아니다. 그냥 변해 가는 것이 닮았다.
은우는 무의식적으로 오른팔을 매만졌다. 그렇다고 그 수준을 기대해선 안 된다. 저것은 신은커녕 진짜 괴수도 아닌, 데이터 쪼가리일 뿐이므로.
“죽, 인다아─!”
일순 무언가가 그것의 가슴팍에서 반짝 빛났다. 자세히 살펴보면 가죽 사이에 보석 같은 것이 박혀 있음을 알 수 있다.
“저건……!”
청옥을 깎아 만든 용의 펜던트. 캐릭터의 눈이 더할 나위 없이 커졌다.
『‘다프카’를 발견했습니다.』
그 괴수의 가죽에 박혀 있는 펜던트에는 다프카란 이름이 선명히 적혀 있었다.
▣ 061. 죽이고 얘기합시다
“파픽스가 불쌍하네요.”
은우는 뻗어진 다프카의 팔을 피하며 검을 박아 넣고 그었다. 살점이 질겨서 칼이 제대로 박히지 않았다. 쌍검의 관리도가 슬슬 낮아진 까닭인지도 모른다.
“카카라야 본인들이 싼 똥을 싸우는 셈이 된 거지만, 파픽스는 무슨 죄인지.”
─ㅇㅈㅋㅋㅋㅋㅋ
─파픽스 개불쌍ㅠㅠ
─카카라가 싼 똥에 애꿎은 파픽스만,,,,,
제대로 상처조차 주지 못한 채 튕겨져 나온 그는 몸을 바로 돌린 후 가드를 올렸다. 꼬리가 그를 후려치며 멀리 날렸다.
생각보다 움직임이 빠르다. 은우는 판단을 내렸다. 일반 보스와 패턴 차이가 크진 않겠으나, 대신 신체 능력이 좋았다.
이 정도 속도면 많은 이가 공격을 피하지 못하고 얻어맞을 거다. 얼마나 덜 맞느냐에 따라 공략 시간이 달라질 테고.
지지직-
발이 대지에 끌렸다. 한없이 밀려나던 몸이 드디어 멈춰섰다. 다만 그 손은 어느새 숫돌을 꺼낸 상태다.
“별개로 2페이즈는 마음에 듭니다.”
─2페이즈,,,,,,?
─이 와중에 숫돌 가는 것 봐ㅋㅋㅋㅋ
─저게 페이즈인가....ㅋㅋㅋㅋ
사각사각, 무기가 갈렸다. 자동 숫돌질이 아닌, 직접 하는 것임에도 관리도가 꾸역꾸역 차올랐다. 오히려 두 배는 더 빠른 듯 보였다.
“2막이라고 할까요, 그럼?”
무엇이라 부르든 강해졌으니 됐다. 은우는 숫돌을 집어넣고 뜀박질을 했다. 대각선으로 핑그르르 몸을 띄우면 엄청난 속도로 다가온 다프카의 다리가 아슬아슬하게 지나간다.
“죽인다아!”
“죽인다란 말밖에 배운 게 없나?”
팽이처럼 뱅글 돌던 몸에서 칼이 삐죽 튀어나왔다. 그것은 다프카의 허벅지를 때렸다. 다프카의 주둥이가 쩍 벌어지며 그를 쫓았다. 꼬리 역시 초속으로 그를 향해 짓쳐 들었다.
양쪽에서 들어오는 공격. 은우는 그것에 대해 한 쌍의 검을 각 방향으로 하나씩 뻗어 내 막았다. 칼이 그 몸에 박히지 않는 것을 십분 활용해 두 칼을 지지대 삼아 몸을 바깥으로 빼낸 것이다.
두 발이 대지와 닿고 다시 떨어졌다. 그 몸이 그를 깨물기 위해 내려온 다프카의 머리를 향해 돌진했다. 손안에서 뱅그르르 돌아간 검이 다프카의 콧잔등과 다시 자라난 뿔을 때렸다.
“움직임이 빨라서 좋네요.”
─뭐가 좋아요ㅋㅋㅋㅋㅋ
─이분은 적이 강할수록 희열을 느끼시는 듯;;
─그걸 지금 알았나.
─타고난 유혈러
─마! 구울왕은 약한 놈 안 묵는다!
─근데 구울은 약한 놈만 먹음
뿔을 때리며 지나간 탓에 다프카의 뒤로 오게 되었다. 은우는 바닥을 구른 후 몸을 일으킬 때 몸을 확 돌렸다.
그러다 잠깐 떠오른 말이 생기면 망설이지 않고 내뱉었다.
“꼬리가 달린 2족 보행형 괴수를 상대할 땐 팔뿐만 아니라 꼬리도 주시해 주셔야 합니다.”
은우의 발이 채찍처럼 구부러지며 다가오는 꼬리를 밟고 점프했다.
“네, 노오옴!”
“잘 보고 디딤대로 쓰면 쓸 만해요.”
─ㅖ,,,,,?
─디딤대로....쓸만 하다.....메모
─아니 이게 조언이냐ㅋㅋㅋㅋ
─ㄴㄴ기준이 다름
─내가 하면 꼬리를 디딤대로 쓰기 전에 내가 디딤대 될듯
다프카가 거대한 팔을 휘둘렀다. 초등생이 몸을 웅크렸을 때처럼 두터운 그 팔은 꼭 야구 배트나 몸둥이를 떠올리게 만든다. 어깨 쪽은 가는데 손은 상체만큼 두껍다.
그렇지만 그래서 무슨 소용인가? 은우는 저가 방향 바꿀 수 없는 공중에 있다는 건 신경도 쓰지 않았다.
검이 허공으로 던져졌다.
“죽인, 다아!”
팔이 그에게 거의 접근하고, 은우는 빈손으로 그것을 쓰다듬듯 짚었다. 충돌에 의한 충격은 없다. 그것이 그에게 다가오는 속도에 맞춰 팔을 굽히면 손은 닿아 있되 충격은 받지 않는다.
또한 팔이 기이한 방향으로 굽어지기─꺾이기─전에 몸을 위로 끌어 올려 다프카의 팔을 뛰어넘는다면, 그는 충격 없이 뜀틀 뛰기를 할 수 있다.
한 손으로 다프카의 팔을 넘으며 나머지 손으로 던졌던 검 두 자루를 받아 낸다. 은우의 발이 대지에 내려앉았을 땐 두 손에 검이 한 자루씩 다시 분배되어 있다.
은우의 검날이 다시금 다프카의 허벅지를 갈랐다. 아까 때렸던 그 부분이다. 선이 조금 더 짙어졌다.
─다른 분들은 겜 하는 느낌인데 이분은 찐전투를 하심;;
─진짜 웃음만 나온다.....
─몬가.....몬가 일어나는데 모르겠다ㅋㅋㅋ너무 빨라
─일인칭인데도 못 따라가겠음
─이게 겜이냐ㅋㅋㅋㅋ
시청자의 채팅이 눈을 스쳐 지나갔다. 은우는 호흡이 엉키지 않도록 대답을 잠시 미루며 다프카의 측면으로 돌아간 후, 엉덩이와 꼬리가 연결된 그 부위를 발판 삼았다.
“제가 게임을 진짜 같이 하는 걸 좋아합니다.”
꼬리를 한 번 발판 삼고, 무거운 팔을 그에게 내려치느라 구부정해진 허리를 한 번 더 밟으면 4m 거구의 상체에 도달할 수 있다.
어느새 역수로 뒤바뀐 검이 다프카의 목덜미에 드리워지더니 사악 그었다.
“캬아악!”
아무리 피부가 두껍고 근육이 튼튼해도 급소가 노려지면 본능적으로 움츠러드는 게 있다. 이 게임은 그렇게까지 세밀한 감정 표현을 살리진 않았으나, 급소가 노려질 것 같으면 최대한 방어하는 반응은 탑재해 놨다.
제 머리를 칠 가능성이 있는 팔 대신 꼬리가 은우을 향해 쏘아졌다.
“그래야 재밌잖아요.”
그는 진짜 싸울 수 없어 게임으로 대체한다는 말을 유려하게 돌려 표현하곤 검 한 자루를 위로 던졌다. 검과 검 사이의 결합 기능이 없는 게 새삼 아쉽다.
어쨌거나 검을 던짐으로써 빈손은 다프카의 태산 같은 어깨를 짚고 몸을 위로 띄웠다. 꼬리가 방금 있던 자리를 휘저었다.
어깨를 짚은 손의 손목이 비틀어지자 몸이 틀어졌다. 덩달아 틀어진 다리가 꼬리를 디뎠다.
꼬리를 디딤판 삼아 다리를 빠른 속도로 텀블링 하듯 넘기면 다프카의 목 양쪽으로 다리가 걸쳐진다. 은우는 그 상태에서 목을 휘감았다.
자유로워진 손이 추락하는 검을 붙잡고 꼬리를 베었다. 꼬리가 깜짝 놀라 그와 멀어졌다.
그 틈을 노려 검 한 자루를 다시 위로 던진 은우는 다프카의 어깨를 짚고 다리를 풀었다. 교묘한 움직임으로 다리를 해방한 그는 다프카의 등을 미끄럼틀 삼아 흘러내렸다. 발이 엉덩이와 연결된 꼬리 부분을 밟고 완전한 탈출을 막았다.
탁.
검이 빈손에 흡착되듯 돌아왔다. 멀찍이 물러났던 꼬리도 다시 은우를 노렸다.
검과 꼬리가 본격적으로 춤을 추기 시작했다.
“네노오오옴! 죽인다!”
다프카의 등에 몸을 기대고 균형감각만 이용해 꼬리에서 버티는 거라 그런가. 스태미나는 좀처럼 줄지 않았다. 덕분에 은우는 그를 떨어트리려고 난리 치는 다프카에게서 오랫동안 버텨 냈다. 정확히 꼬리가 파괴될 때까지 말이다.
“꼬리 컷.”
은우는 꼬리가 잘려 나가자마자 미련 없이 다프카에게서 떨어져 나왔다. 다프카가 비명에 가까운 포효를 내질렀다.
“용서, 하지 않아!”
다프카의 입안에서 무언가가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독이다
─독독독독
─독 날라와유!!
─여기서 또 어이없게 죽는 거 아님?
─ㅋㅋㅋ그럼 레전드ㅋㅋㅋㅋㅋ
“독 말입니까?”
설마 피할 수 없는 독이 오나? 은우가 당황하려던 찰나 다프카가 고개를 아래로 내리더니 바닥을 향해서 독을 뿜어냈다. 분홍빛 연기가 촤아아악 내리깔렸다.
마치 아침 연무를 보는 것 같다. 시야에 방해가 되진 않으나 들이켜지 않고선 배길 수 없다.
『환상 독에 중독됩니다!』
은우의 시야가 살짝 흔들렸다. 이윽고 보이는 것은 여러 마리로 불어난 다프카다.
“감히, 나를─!”
“환상?”
─미쳤누;;
─막보스 난이도 실화냐
─막보스 그래서 원거리 무기로 잡아야함
─원거리 무기 쓰면 좆밥임
─진짜 좆밥임?
─내가 좆밥임ㅋ
그는 여러 마리의 다프카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환상으로 놀려 먹으려나 본데…….”
분신조차 그를 속여 넘기지 못하는 마당에 환상 따위는 쓸모없다. 은우는 환상과 진짜의 차이점을 바로 알아챈 후 움직였다.
다프카와 다프카의 환상들이 그를 향해 덤벼들었다.
“이렇게 훤히 보이는데 넘어가 주기도 뭐하네요.”
─뭐요?
─?
─?? 뭐가 보여?
“가짜는 소리가 없고 냄새도 없잖습니까.”
─여기서 냄새를 맡는다고??
─소리는 글타 치고 냄새요...??
─이 악취에서 냄새가 구분이 가....?
─퍄퍄;;; 역시 묻따켄
은우는 그를 향해 뛰어드는 환상을 무시하고 통과했다. 차라리 분신이라면 그를 공격할 수 있겠지만, 환각 따위가 실체를 가졌을 리 없다.
가짜라는 게 들통난 환상 하나가 사라지고, 진짜 다프카가 은우와 맞닥뜨렸다. 다프카가 우물거리던 독을 토해 냈다. 은우는 검날로 그것을 가볍게 미끄러트리듯 받아 내어 쳐 냈다.
그의 발이 다프카의 허벅지를 밟고 뛰어올라 다프카의 목덜미를 그었다. 다프카가 날카로운 이로 물어뜯으려 했으나, 다른 하나의 검이 그 잇새에 물렸다. 검은 부러지지 않았다.
자유로운 검이 다프카의 뿔을 때렸다.
“재밌긴 한데 슬슬 질리네요.”
은우는 다프카의 고갯짓에 따라 달랑달랑 휘둘리다 그대로 던져졌다.
“두 뿔만 꺾고 본격적으로 머리만 노리겠습니다.”
─절대 부위파괴를 잊지 않는 당신은 도덕책.....
「‘заявление об отставке’ 님이 ‘175,500원’ 투척!
박박 긁어왔다.」
─우리는 못 잡아서 죽을 맛인데 켄은 질리는구나...
─사직서님ㅋㅋㅋㅋㅋㅋㅋ
시청자와 만담을 나누고 있자니 다프카가 포효했다. 포효 저항이 있어서 괜찮았다.
“용서, 못 해! 나를, 나를 감히! 이곳에 처박은 것들!”
“……?”
“얼음의 냄새가 난다! 네놈에게서 가증스러운 것들의 냄새가 나!”
다프카는 대사를 치며 그를 공격하려 들었다. 은우는 반사적으로 그 팔을 밟고 뛰어오르며 숨을 멈춘 채로 질문했다.
“가증스러운 것들이 파픽스다, 아니다.”
─무조건 파픽스다.
─아 이건 찐이지
─파픽스 피해잔 줄 알았는데 사실 그게 아니었누
─ㄴㅇㄱ
결말을 아는 이들이 웃는 사이 갑론을박이 오갔다. 이 와중에도 그의 검은 다프카의 뿔을 도려내기 위해 일점을 계속해서 때리는 중이다.
“그러고 보니 티아마스의 마지막 컷신에서 그런 말을 했던가요?”
은우의 몸이 허공을 빙글 돌았다가 바닥에 착지했다.
“예언은 피해 냈을 터였는데.”
한숨을 닮은 소리는 약간의 헛웃음을 머금었다.
“아무래도 파픽스가 불쌍한 게 아니었나 봅니다.”
동정의 쓸모없음을 눈치챈 사람의 헛웃음이다.
“감히 나를!”
“제가 만년수정을 훔치는 데 성공한 걸 보고 그 말을 했으니… 아마 예언의 내용은 만년수정을 빼앗길 거란 거였겠죠.”
“얼음요정 따위가아!”
“저와 다프카의 공통점은 대전사, 즉 종족 내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라는 점이니까…….”
은우는 빈말로나마 파픽스를 불쌍히 여겼던 것을 철회했다.
“파픽스가 다프카를 죽인 거네요.”
─(대충 눈치 빠른 것들은 싫다는 채팅)
─이거 그거죠? 그, 예언을 피하기 위해 한 일이 예언을 이루는 거
─와ㅋㅋ파픽스가 트롤이었네ㅋㅋㅋㅋ
─켄 이 와중에 추론도 은근 잘하는 듯ㅋㅋㅋ
─오이디푸스도 아니고ㅋㅋㅋ
그는 혀를 찼다. 어쩌다 독의 숙주까지 됐는진 몰라도 원인은 결국 파픽스였다. 아니, 파픽스가 받은 예언이다.
그것만 아니었어도 파픽스는 다프카를 죽이지 않았을 테고, 다프카는 이 꼴이 되지 않았으리라.
은우는 다프카를 가엽게 여기며 그 뿔을 잘랐다. 때마침 뿔이 부러지며 바닥에 툭 떨어졌다.
“불쌍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살려 둘 순 없으니.”
검이 다프카의 목에 닿았다.
“죽이고 얘기합시다.”
* * *
쿵!
다프카가 무릎을 꿇었다. 그 앞에 선 캐릭터는 그런 다프카를 향해 침중한 시선을 보낼 뿐이다.
“아아…….”
전투 후반부터 드문드문 멀쩡한 대사를 치던 다프카는 이제 온전한 자아를 되찾고 카카라 대전사로 돌아온 상태다. 비록 죽음을 목전에 둔 상태라곤 해도 말이다.
“훌륭한 대전사여… 그대에게 감사를. 덕분에 더럽힌 긍지나마 전사로서 안고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부서지고 찢어진 얼굴 가죽이 들썩이며 고운 목소리를 내었다. 비로소 되찾은 사람의 목소리다.
“대답해 주세요, 대전사여. 내가… 우리 카카라가 쌓아 온 것들은 여전히 푸른 하늘 아래 있나요?”
“아주 푸르른 하늘 아래에 있습니다.”
“좋아요, 좋아요…….”
다프카의 찢어진 입술이 희미하게 올라갔다. 얼핏 보이는 그녀의 눈동자는 더없이 맑은 녹색이었다. 펄떡이는 생명의 색이다.
“당신 같은 강인한 전사가 있는 한, 카라카께선 카카라의 긍지를 긍휼하실 것이니… 안심하고 저 하늘에 갈 수 있겠어요.”
다프카의 눈이 서서히 감기고, 품고 있던 독기가 스멀스멀 새어 나오려 했다.
캐릭터는 입술을 깨물며 만년수정을 꺼냈다.
만년수정이 빛을 발하며 그 일대를 전부 얼리기 시작했다. 녹색 독기가 투명함에 갇혀 정지하고, 보석을 닮은 것들이 자라났다.
“아아…….”
캐릭터는 완성된 얼음의 감옥을 보며 탄성을 감출 수 없었다.
완성된 것은 무려 용이었다. 녹색 독기가 얼음에 갇혀 난반사됨으로써 옥색으로 보이는 용.
천룡, 카라카.
“푸른 하늘이 그대를 반기노기……. 편히 잠드시옵소서, 위대한 동지여.”
미개척지를 위협하던 위험이 드디어 제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