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오늘 안에 부패하는 대지까지 다 깰 수 있을까요?”
은우는 어제 보았던 부패하는 대지의 괴수를 떠올리며 입맛을 쩝쩝 다셨다. 얼음수정의 땅을 탐방하느라 방송 시간은 벌써 6시간을 훌쩍 넘긴 상태다.
“부패하는 대지 격파까지 평균 몇 시간 정도 걸립니까?”
─전 15시간 걸림
─전 11시간?
─딴 스트리머는 10시간 걸렸던 것 같은디
시청자들이 간지러운 두근거림에 하나둘 자신의 기록이나 알고 있는 타인의 기록을 내놓았다.
평균 12시간. 현재 시각은 현실 타임으로 1시를 좀 넘긴 상태다. 은우의 운이 곰살맞게 휘었다.
“내일 토요일 아니고 금요일인데 밤새도 괜찮겠습니까?”
─무조곤 쌉가능
─아 가나요? 켠왕 갑니까?
─가즈아ㅏㅏㅏㅏㅏㅏㅏ
열띤 반응이 마음에 든다. 은우의 성대가 달칵거리는 웃음소리를 흘렸다.
“그럼 오늘 끝장을 봐야겠네.”
▣ 060. 날개부터 잘라야
“정말 만년수정을 구해 왔군…….”
“세상의 위기 앞에 제 긍지 따위는 소용없으니까요. 위대한 다프카 대전사께서도 이리 하셨을 겁니다.”
“그렇지……. 모두의 위기 앞에 긍지는 무쓸모지.”
파론은 쓰게 웃으며 캐릭터의 어깨를 두드렸다.
“네게 항상 신세만 지는군.”
“이번 일이 끝나면 제가 직접 그들에게 수정을 반환하고 싶습니다.”
“그런 불명예까지 자네가 짊어질 필요는 없어.”
“제가 직접 반환하고 싶습니다.”
“…마음대로 해라. 막을 자격조차 없군.”
파론은 캐릭터의 고집을 끝까지 만류하지 못했다. 대신 그는 무언가를 캐릭터의 목에 걸어 주었다. 그것은 청옥을 깎아 만든 용 모양의 펜던트였다. 캐릭터의 이름인 ‘켄’이 멋들어지게 새겨져 있다.
“그것은 대전사의 증표, 천룡이다. 또한 알다시피 천룡은…….”
“카라카의 증거지요. 제가 이걸 받아도 되는 겁니까?”
“로크즈류의 모두가 동의했다. 너는 이제부터 자랑스러운 카카라 대전사다.”
거기까지 말한 파론은 웃음을 터트렸다.
“위대한 전사, 다프카의 기록을 깼군. 역대 최연소 대전사라니.”
그는 캐릭터가 자못 자랑스러운 모양이었다.
“자, 이제 본격적인 이야기로 들어가지. 그 전에 장소부터 이동하고.”
부패하는 대지 이야기를 나누기 전, 자리가 바뀌었다. 로크즈류의 주요 인원들이 죄다 모인 회의장이다.
“이번 일은 굉장히 위험할 거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물러나고 싶은 자는 물러나도 좋다.”
거기까지 말한 후 파론을 비롯한 고위직들이 캐릭터를 바라보았다. 거기서 이벤트 신이 끊겼다.
“켄, 이건 네게도 통용되는 이야기다…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지만, 로크즈류에 너만큼 강한 전사는 없다. 정말 미안하지만… 너는… 원정대의 필수 인원이 될 거다.”
“정말 죄송합니다, 켄 님.”
“항상 그대에게만 짐을 쥐어 주게 되니… 우리의 부덕함을 용서하시게.”
“그렇지만 적어도 네가 원할 때 출발할 수 있도록 하겠다. 네가 준비되었다고 생각될 때 내게 말해다오.”
이벤트 신과는 별개로 사람들이 입력된 대사를 내뱉었다. 여기서 다시 말을 걸면 스토리가 진행될 거다. 파론의 머리 위에 떠오른 퀘스트 마크가 그 증거다.
─절대 못빠지쥬?
─주인공만 부려먹는다니까
─악덕종족임
─일하는게 주인공밖에 없냐ㅋㅋㅋㅋㅋ
시청자들과 달리 은우는 감회가 새로워졌다. 답은 정해져 있으니 따르기만 하라는 태도 따위, 질리도록 겪어 보았다. 그게 거슬릴지언정 불쾌한 기억이 아닌 건 그 자신이 먼저 나섰을 제안이어서일 테다.
“자, 그럼 모두 밤샐 준비는 하셨습니까?”
은우는 제법 스트리머 태가 나는 자세로 사람들의 불만을 다독였다. 수채화처럼 흐리멍텅한 색감의 옷이 그의 손끝에서 단단히 매였다.
“다시 한번 본인을 돌아보세요. 게임 구매 후 인증하셨는지, 화장실 다녀오셨는지, 야식 준비하셨는지 등등. 미리 챙기시는 게 좋을 겁니다.”
바로 메인 퀘스트에 진입하지 않는 건 장비 및 소모품을 마련하라는 의미다. 그렇지만 은우는 그 자신을 돌아보는 대신 타인에게 점검을 종용했다.
“쉴 쉬간 없이 달릴 거니까.”
배려는 당연히 아니었다. 그 자신의 즐거움이 끊기는 걸 바라지 않아서였지.
─야식 시켰다
─아 형 좀만 기다려줘요 지금 편의점에 치킨 사러감
─난 이미 족발시킴ㅋ
─안전벨트 달칵
─가자!!
잠깐의 기다림 끝에 은우의 몸이 파론 앞에 섰다. 상호작용에 의해서 파론이 말을 걸어왔다.
“준비되었나?”
“네.”
“네 용기에 찬사를 보내지.”
컷신이 다시 막을 올렸다. 파론은 큼큼 헛기침을 하곤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진행했다.
신이 주르륵 지나가는 동안 밝혀진 건 결국 은우가 파픽스를 죽이는, 아니 만년수정을 훔치는 동안 독기를 버틸 방법을 개발했다는 말이라.
“지금부터 물에 잠긴 황야를 건너 부패하는 대지로 건너가겠다. 무엇이 기다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우리는 그 모든 것을 이겨 낼 수 있을 것이다.”
파론이 탁자를 쿵 때렸다.
“카라카가 우리를 가호하시니, 그 증거로 푸른 하늘이 우리를 반기는 이상 카카라 전사는 결코 꺾이지 않는다! 자, 가자!”
* * *
“정말로 죽일 수 있는 거야?”
악에 받친 화검사가 물었다. 수백의 병사와 수십의 전우는 괴수들과 기상천외한 지형에 의해 거의 소모된 후다.
“너희가 길을 터 준다면 뭔들 못 하겠어? 알잖아. 나, 다수 대 일은 못 버텨도 일대일은 절대적이라는 거.”
그의 단언에 화검사가 입매를 비틀었다.
“좋아, 널 믿는다.”
그녀는 말을 길게 하지 않았다. 다만 든 레이피어에 마법을 걸었다.
그녀를 중심으로 마법진이 생겨났다. 반시계 방향으로, 또는 시계 방향으로 회전하는 마법진 속 문양들이 유독 화려하다.
“내가 길을 뚫겠다!”
주위로 불이 피어올랐다. 허공에 새겨지는 섬광과 빛줄기는 극한에 다다른 화염이 압축되어 탄생한 것이다.
화염 벚꽃이 흩날리고 자그만 별들이 지상에 뜨고 지길 반복했다. 그 순간에도 레이피어로 노래하는 마법사는 꽃을 피웠다.
백일홍처럼 화마가 한 겹, 한 겹 피어난다. 불꽃의 백색을 휘감은 금발은 꼭 태양을 보는 듯하다.
“흐하하하! 가자!”
화답하듯 성주가 발로 대지를 쿵, 밟았다. 성벽이 솟아오르며 수천 마리의 괴수가 있는 대지를 갈랐다. 그것만으로 그들이 감당해야 할 부담이 줄었다.
그렇지만 호탕하다 못해 명예욕으로 넘쳐나는 사내는 그것만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순식간에 구축된 흙의 기둥 하단 부위가 붕괴했다. 그것이 무너질 자리에는 거대 괴수가 있다. 흙더미가 거대 괴수를 다운시켰다.
“잡졸들은 내게 맡기게.”
시체교주가 나서자 늪지대 같던 대지에서 하얀 뼈들이 불쑥불쑥 튀어 올랐다. 가느다란 손가락들이 지상의 괴수들을 휘감는다.
살아 있는 것들이 그 끔찍함에 치를 떨며 저항했지만, 망자들의 집념은 대단했다. 검은 오라를 두른 백골들은 제 몸이 부서지는 것과 상관없이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생명을 구속했다.
그것은 꼭 지옥의 구덩이와 같다.
“백업은 내게 맡겨.”
뼈로 창조된 것들이 만들어 낸 그늘은 그림자술사의 좋은 재료였다. 그림자가 수축하고 변질되어 바깥으로 튀어나왔다. 면에서만 존재했던 것이 입체로서 존재하더니 괴수들을 붙잡은 것이다.
그림자술사의 속박은 재료가 된 그림자의 짙기와 너비로 달라지니. 그것은 시체교주가 부른 사자보다 더한 진득함을 자랑했다. 수천 마리의 괴수와 수만 마리의 망자가 그려 낸 그림자란 그런 수준이었다.
“가!”
그리고 그 끝에 신이 존재했다. 한낱 괴수로 태어나 동족들을 잡아먹고 천적을 삼키고, 모든 것을 먹어 치워 만들어진 신이.
이 땅에서 유일하게 존재하는 태생신이.
“기억해라, ──!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임을!”
화검사가 내지른 불길 사이로 그는 걸었다. 화검사가 휘저은 검로는 백색의 궤적을 남기니. 무수한 선의 집결은 마치 은하수를 연결한 것 같다. 쪼개지고 분리됐다가 모여든 빛의 스펙트럼이 낙원을 어렴풋이 띄웠다.
“절대 무너지지 않는 성벽을 두고 무슨 말을 하는 거냐!”
오만한 성주가 방패에 빛을 끌어모았다가 그대로 쏘아 냈다. 귀족가 저택만 한 괴수의 몸을 꿰뚫은 빛은 그 몸을 온전히 무너트렸다. 괴수의 몸 위로 성주의 힘이 자라나며 거대한 성채를, 움직이는 성채를 탄생시켰다.
바윗덩어리들이 하늘을 날며 유성비를 재현해 냈다.
“──, 너무 부담 갖진 말라고. 네가 여기서 죽어도 딱히 원망하진 않아.”
그림자들이 대거 일어나는 광경은 마치 어둠이, 밤이 몰려오는 것 같다. 화검사의 불꽃에 물러난 그림자는 더욱 짙어지고 깊어지며 그 몸집을 불린다.
그림자에 뒤덮인 그림자술사가 손을 까닥일 때마다 어둠이 괴수들을 뜯고 찢고 분해했다.
“재수 없는 소리 마시게. 그랬다간 우리도 위험하잖나.”
시체술사는 그 어둠속에 숨어 시신을 그러모았다. 뼈가 얽히고 살점이 뭉개지며 들러붙었다. 열기에 녹은 지방은 좋은 접착제였다.
죽은 괴수들로 이뤄진 시체의 골렘이 몸을 일으켰다.
“다들 고마워.”
그는 그들의 도움에 희게 웃으며 괴수신을 향해 나아갔다.
신을 지키고자 화마도 두려워 않는 생명들이 달려들었으나, 그림자에게 묶이고 시체에게 붙잡혔다. 종종 그마저도 뚫는 자들은 성주의 방패에 짓뭉개졌다.
“조금만 버텨 달라고.”
스르릉-
양손에 잡힌 기묘한 무기가 기를 머금고 무광만의 서늘함을 흘렸다.
“승리를 가져다줄 테니.”
드디어 인간과 신이 서로를 마주했다.
* * *
은우는 수십으로 시작해 스토리로 인해서 도태된 이들의 빈자리를 지켜보았다. 덕분에 쓸데없는 상념이나 떠올리고 말았다.
그보다 참 얄궂게도 인원이 알차게 빠져나간다. 애초에 솔플 게임이니 그 혼자 보스를 잡는 것이 맞긴 한데… NPC들이 차례차례 빠지는 걸 보고 있으면 웃음이 절로 나온다.
해독제를 들고 왔는데도 체질 탓에 독이 잘 받아서 빠지고, 멍청한 전개 때문에 피할 수 있는 공격을 그가 못 피해서 대신 받아 주다가 빠지고, 방심했다가 기습받아서 빠지고.
참 다양한 이유로 인원이 하나둘 줄더니 이젠 넷밖에 안 남았다. 참고로 파트너 괴수까지 포함해서 넷이다.
“그보다 마지막이라고 기본 무기를 골라 주셨네요.”
─쌍검이 기본무기는 아닐텐데ㅋ
─쌍검 다루기 힘들지 않음....? 난 거의 한손검처럼 쓰게 되던데ㅋㅋ
─보정있어도 좀 힘들긴 하지.....
─근데 기본무기도 맡긴 함ㅋ 노강 기본무기ㅋㅋ
─아ㅋㅋㅋㅋㅋㅋ
“뭐, 랜스나 태도에 비해서 실전성 떨어지는 형태는 아니잖습니까? 제가 좋아하는 디자인은 또 아니지만.”
애초에 그가 좋아하는 무기는 하나의 무기에 다양한 기능이 탑재된 쪽이니, 이런 게임에서 찾는 건 무리가 있긴 하다.
은우는 쌍검을 손으로 가지고 놀았다. 나이프나 볼펜을 가지고 노는 건 봤어도, 검을 이리저리 휘젓고 춤추게 만드는 그 모습에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 아무렴 저런 광경은 봐도 봐도 신기한 법이다.
“이곳인가…….”
그때, 살아남은 3인 1괴수 중 1인인 파론이 독기의 근원지로 진입했다. 썩은 뼈들과 널린 시체들 사이로 나름의 형태를 갖춘 둥지는 디자인만으로 19세 이용가를 받아도 할 말이 없을 것 같다.
“가자.”
연구원 겸 전투원인 이가 안경을 추스르며 뒤를 따랐다. 가장 마지막은 캐릭터와 름플브흐였다. 그가 가진 파트너 중 비행이 가능한 개체가 름플브흐밖에 없어 이 녀석으로 결정했다.
“흑독조는 없는 건가…….”
최종적으로─사실 이것도 임시 명칭이긴 하다─변종을 부르는 이름은 흑독조가 되었다. 생긴 건 용을 더 닮았으나, 차마 카카라의 숭배 대상을 갖다 붙일 순 없던 모양이다.
“잘됐습니다. 함정을 미리 설치해 두죠.”
연구원 겸 전투원은 파론을 지나쳐 둥지의 중심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가 장비를 꺼냈을 때, 둥지가 들썩였다.
“……!”
“함정이다!”
가장 먼저 캐릭터가 알아차리고, 파론이 함정 설치 하던 이를 끌어당겼다. 늦었다. 둥지 바닥에서 솟구쳐 오른 흑독조의 발톱이 두 사람을 덮쳤다.
“크악!”
“큭!”
파론과 연구원이 캐릭터가 있는 곳까지 튕겨져 나왔다. 캐릭터는 그런 그들의 안위를 살폈다. 눈대중으로 쓱 훑어봤을 뿐임에도 두 사람의 상태는 영 좋지 않았다.
할퀴어진 자리에선 독액이 뚝뚝 묻어났고 상처 자체도 깊었다. 이 상태론 싸울 수 없다.
키아아아아아아아!
그렇지만 불행은 상황을 봐 가면서 들이닥치지 않는다.
흑독조가 포효했다. 거대한 날개가 펄럭 퍼지고, 몸 주위로 독기가 화악 퍼져 나왔다. 목 양쪽의 돌기에서 흘러나오는 독기다.
연두색으로 번쩍이는 눈동자는 은우의 것보다 녹색빛이 더욱 짙고 탁하다.
“젠장, 왜 하필……!”
“…저를 두고 자리를 뜨십시오.”
“켄!”
“파론 님, 이대론 두 분 다 사망할 겁니다. 저를 믿고 가세요.”
캐릭터는 파론과 연구원 앞에 섰다.
“어서!”
한 번 더 재촉하자 사리무는 소리와 부산스러운 기척이 들려왔다.
“부탁한다!”
키아아아아아!
떠나는 두 사람과 흑독조의 포효를 마지막으로 이벤트 신이 끝났다.
『‘???’를 발견했습니다.』
“아, 드디어 여기까지 왔네요.”
은우는 시작하자마자 쏟아지는 독덩이를 피하며 입을 열었다.
“지금이 몇 시였죠? 새벽 5시? 6시?”
두 자루의 검이 역수로 쥐어진 채 흔들림 없이 은우를 따라갔다.
“동트기 전에 끝내고 싶었는데 그건 그른 것 같고…….”
중도에 갑자기 점프하며 몸을 회전하면 그 아래로 흑독조가 휘두른 발이 지나간다. 은우는 그 순간마저 흑독조의 발가락을 검날로 베었다.
“출근 시간이 보통 8시일 텐데, 그 전에는 마치는 걸로 해 보죠.”
─시청자의 출근도 챙겨주는 참된 스트리머....
─평균시간 단축시키는 것보소ㅋㅋㅋ
─사실 부대 클리어시간 늘어지는 게 보스전 때문이니까;;
─흑독조 개쉑
─줴엔장~~ 원트 믿고 있다고 형씨~~
바닥에 내려앉은 발이 지익 끌리는가 싶더니 방향을 역으로 틀었다.
“물론 부위 파괴도 잊지 말고.”
은우의 눈이 흑독조를 쓱 살폈다. 컷신으로 본 저번과 다르게 제대로 마주한 흑독조는 제법 파괴할 부위가 많았다. 꼬리, 날개, 뿔, 목의 독주머니, 앞뒤 다리 발톱, 이빨 등 최소로 부른 게 이 정도다.
“저건 진짜 용처럼 생겼네요.”
다리가 4개인 점이나 박쥐 날개부터 그렇지만, 흑독조라 부르는 게 미안할 정도로 용과 닮은 외형이다.
은우의 발언에 시청자들이 동의 표를 던졌다. 일부 사람은 스포를 하려다가 매니저에게 적발됐는지 칼같이 제재당했다.
키아!
역으로 달려오는 은우를 깨물기 위해 조금 짧은 주둥이가 덤벼들었다. 그의 몸이 슬라이딩하며 그 입 아래를 지나갔다. 검이 곧 가른 것은 목 아래에 달려 있는 독주머니였다.
재빨리 일어선 그는 흑독조의 뱃가죽 아래를 지났다. 흑독조가 그런 그를 깔아뭉개기 위해 앞발과 몸통을 들더니 밟아 죽이려는 것처럼 대지를 다시 짚었다.
은우는 그것을 솜씨 좋게 피하며 역으로 다리를 발판 삼아 뜀뛰기를 했다. 그의 검이 다시 한번 독주머니를 때렸다.
아까부터 마구 울음을 터트리며 짬짬이 흑독조의 비늘을 긁던 름플브흐 역시 독주머니 주변 살을 할퀴었다. 현명한 판단이었다.
“독주머니부터 자르고 시작하면 독 공격이 줄어들겠죠.”
다분히 고의적인 공격이었으나, 은우는 당당했다. 상태 이상 중 중독 저항은 템 세팅에 안 끼었으니 당연하다.
주변 독기로 인한 대미지에 죽을 순 없으니 해독제를 쓰고 있긴 하다. 그렇지만 상대는 이보다 더한 독을 쓰는 녀석이었다. 공격에 얻어맞았다간 중독 상태가 된다.
흑독조도 그런 은우의 생각을 읽었는지 몸을 흔들더니 앞발을 대지에 다시 내렸다. 그리곤 날개를 펼쳐 약간 날아올랐다. 상공에서 날아다니며 공격하던 름플브흐가 그 날갯짓에 얻어맞아 조금 뒤로 밀려났다.
키아아아아!
흑독조가 독덩어리들을 퉤, 퉤 뱉기 시작했다. 은우는 그것을 피해 둥지 안을 내달렸다. 둥지 자체는 작아도 둥지가 있는 공터가 워낙에 커 회피엔 문제가 없었다.
지이익-
뼈 사이로 미끄러진 그는 흑독조가 다시 내려앉는 걸 확인했다. 오래 날지 못하는 걸까, 단순히 제작사가 유저를 위한 패턴으로 내놓은 것일까.
은우는 검을 빼 들고 내달렸다. 흑독조가 그를 향해 돌진했지만, 알 바 아니다.
휘익!
지정 위치를 떠올리며 휘파람 신호를 보내자 름플브흐가 그 자리로 날아왔다. 은우의 발이 대지와 떨어진 것도 그 순간이었다.
휘익!
름플브흐가 두 번째 신호를 듣고 그곳으로 가기 위해 날갯짓을 했다. 그러나 녀석이 자리를 완전히 뜨기 전, 은우가 름플브흐의 몸뚱이를 밟았다. 탄 게 아니라 밟은 거였다.
은우는 름플브흐를 밟았다가 흑독조를 향해 크게 뛰었다. 름플브흐가 잠시 휘청였다가 지정 장소로 날아가고, 돌진하던 흑독조의 미간은 은우의 발과 닿았다.
“되네요, 역시.”
─켄, 넌 다 생각이 있엇구나?
─미쳤누;;
─저거 왜 추락 안 해요??
─름플브흐: ???
─졸지에 발판행ㅋㅋㅋㅋㅋ
름플브흐는 본래 유저를 태운 비행이 불가능하다. 플레이어가 름플브흐의 등에 올라탄 후 지정 위치로 가라며 휘파람을 부는 식의 꼼수도 안 됐다. 플레이어가 름플브흐의 등에 오른 순간 름플브흐는 추락했다.
“추락 판정은 름플브흐를 타고 있는 순간만 받지 않습니까. 이런 꼼수는 가능합니다.”
0.5초간 추락해 봤자 얼마나 추락하겠나. 름플브흐가 잠깐 휘청였다가 지정 장소로 날아간 게 그 증거다. 타고 다닐 순 없어도 발판으로 삼는 건 가능했다.
어찌 됐건 돌진하던 흑독조의 미간을 밟았던 은우는 그대로 그 목과 등허리를 차례로 밟은 후 왼쪽 날개의 뼈대를 붙잡았다.
흑독조가 마구 몸을 흔드는 통에 저항이 장난 아니었으나, 이것도 생각해 둔 바가 있었다.
은우는 흑독조의 몸 바깥으로 뛰어내렸다. 그 자리엔 지정 장소로 날아온 름플브흐가 있었다.
어깻죽지에서 점프해 름플브흐의 등을 밟고 날개에 오른다. 칼이 흑독조의 피막을 때렸다. 육질이 워낙 질겨서 찢어지진 않았으나, 칼자국은 남았다.
“세 번만 더 두들기면 찢어지겠네요.”
착지한 자리에서 바로 구르면 그 자리에 독 덩어리가 철퍽 하고 떨어진다.
은우는 쌍검을 손안에서 한 바퀴 회전시켰다.
“비행 타입을 잡을 때 본인에게 비행 능력이 없으면 가장 먼저 날개부터 잘라야 합니다. 기억해 두세요.”
사냥꾼이 본격적으로 새 사냥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