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본거지는 정말 거대했다. 층이 총 다섯 개였고, 한 층마다 최소 2, 30명의 인원이 있었던 것이다.
이쯤 되면 하나하나 죽이는 것도 일이라, 두 번째 층부턴 적들을 죽일 때 일격사의 범위가 어떻게 되는지 시험해 보기 시작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같은 그림만 나와서 지루할 것 같았다.
다만 놀랍게도 사람들은 별로 싫어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Extrasolar Hunter’에 대한 영상 중 파픽스의 본거지를 이렇게 탐방하는 영상은 가뭄에 콩 나듯 적은 탓이다.
어쩔 수 없는 게, 이 퀘를 받을 때쯤이면 최상의 장비에 스킬도 다양하게 찍은 이후다. 거기에 퀘스트의 본질이 몰살이 아니라 훔쳐오는 것이므로, 꼭 NPC들을 다 잡을 필요가 없었다. 방어 셋으로 다 맞춘 후 돌격해서 집어 오기만 해도 되는 것이다.
레벨이 높으니 HP도 많고 방어 셋으로 맞추면 피도 잘 안 깎인다. 공격을 맞아 가며 집어 와도 피가 넉넉하다. 어지간한 변태가 아니고서야 은우처럼 어렵고 고된 길을 고를 이유가 없었다. 스트리머라면 더더욱 그렇다.
때문에 심심한 대목임에도 시청자의 이탈은 적었다. 오히려 예술적인 암살에 드물던 후원마저 다시 터지기 시작했다.
가끔 몸이 찌뿌둥해진 은우가 입맛을 다시는 것만 빼면 참 순조로운 진행이었다.
▣ 059. 아름다움의 하나일 수 있다는 것
“이쯤 되면 침입을 알아차려야 하는 거 아닌가?”
─능지 on
─글킨한데 그러면 난이도가,,,,
─근데 켄이면 그래도 쉽게 깰듯 이것도 전문가난도잖어ㅋ
─ㅇㅈㅋㅋㅋㅋㅋ
─진짜 암살인데도 시원시원하게 진행하시네
─아, 엑헌 마렵누
지하 4층까지 내려오니 그런 생각도 들었다. 좀 알아차릴 때가 되지 않았나 하는.
300만 원이 아쉬워서라도 발각될 생각은 없지만, 슬슬 전면 싸움도 고팠다. 은우는 아쉬움에 입술을 살짝 핥았다.
“그래도 이제 거의 끝나 가네요.”
그는 혼자 있는 적을 향해 돌진했다. 수양버들이 몸을 떠는 소리와 함께 곧은 검이 적의 등을 찔렀다.
은우는 그 상태에서 검을 위로 올려 찼다. 걷어차인 검이 위로 쭉 올라가며 적을 베었다. 진짜였다면 내장이 잘리고 갈비뼈가 갈려 나갔을 것이나, 인간형 캐릭터는 그렇게 현실적인 모습을 비추지 않았다.
또한 일격에 절명하지도 않았다. 3층부터 깨달은 거지만, 일격사로 취급받는 공격은 아무래도 머리가 다인 모양이었다.
은우는 당황하지 않고 하늘까지 튕겨 나온 검을 다시 아래로 그었다. 등이 길게 베이며 적이 몸을 휘청거렸다.
그는 마지막 일격으로 적을 걷어찼다. 적이 기어코 바닥에 몸을 뉘였다.
“무기라도 교체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건 좀 아쉽습니다.”
그는 검을 털었다. 문득 바닥에 뉘인 시체가 버벅거리며 이상 행위를 보였다. 그것을 목격한 순간 은우의 눈이 흔들렸다.
─? 왜 저럼?
─오브젝트가 겹친 듯?
─버그닼
─버그 망겜 엑헌ㅋㅋㅋ
사람들의 말마따나 시신은 바닥에 튀어나와 있는 돌과 겹쳐서 존재했다.
은우는 괜히 불안해져서 그것을 들고 다른 데로 옮겼다. 다행히 겹친 게 문제였는지 다른 데에 시신을 두자 발작하듯 떨리던 게 멈췄다.
“무서웠다…….”
은우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사람들이 켄의 천적은 버그라며 놀려 댔다. 부정할 수 없는 말이었다.
“좋은 게임인데 버그가 많네요.”
─사실 님이 운 좋은 거임;;
─딴 겜에서도 버그 많아요ㅋ
─켄 님이 기본에 충실하셔서 근가 버그를 덜 겪으시긴 했죠
─다른 스트리머들은 두세 배는 겪음
버그 이야기가 나오자 채팅 창이 성토의 장으로 변질됐다. 은우는 마저 전진하며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 주었다. 반복 장면으로 인한 무료함을 덜 수 있고, 시청자들도 스트리머와 대화하기를 좋아했으므로 나쁜 일은 아니었다.
다만 단점이 있다면 쏟아지는 버그 제보에 그게 내 일이 되면 어쩌지-라는 생각을 해 버리게 되는 것일까.
“1렙 노 데스 도전이 낫지, 버그 마주치는 건 정말 무섭습니다.”
─벌레 무서워하는 학살좌 루삥뽕삥빵
─ㅋㅋㅋ보통은 후자를 더 반길 텐데ㅋㅋ
─아ㅋㅋㅋ버그 진짜 싫어하시네ㅋㅋㅋㅋ
─버그 1승ㅋㅋㅋㅋㅋㅋㅋ
그렇지만 정말 무섭다. 버그는 그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은가. 그는 신을 죽일 순 있어도 버그를 고칠 순 없었다.
그러나 불행은 언제나 급작스럽게 닥치고, 인생은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한 법이었다.
“…저건 어떻게 처리합니까.”
“침입자다!”
“아니, 아니.”
“침입자다!”
은우는 벽과 오브젝트가 겹쳐서 무기만 빼꼼 내밀고 있는 병사를 보며 어이가 없어졌다. 저것 때문에 지금 경보가 내려져서 파픽스 병사들이 몰려오고 있다는 건 아무래도 좋아졌다.
“침입자다!”
“저걸 진짜, 와.”
─벽아일체ㅋㅋㅋ
─버그 갓겜 진짜ㅋㅋㅋㅋㅋ
─헐ㅠㅜㅜㅠ이렇게ㅠㅠ실패ㅠㅠ
─와,,,,,진짜 개빡치시겠다,,,,4층까지 왔는데,,,,
─버그가 이걸;;
300만 원이 날아간 것보다 저걸 죽일 수 없다는 게 더 통탄스럽다. 은우는 본능적으로 몰려온 병력의 목을 따며 헛웃음을 흘렸다. 이 와중에도 저놈은 ‘침입자다!’를 열창하고 있다.
“너무 황당해서 화도 안 나네요.”
은우의 몸이 병사1의 화살을 피하고 병사2의 몸을 칼집으로 삼았다. 칼이 마음에 안 든다고 했으므로 지체 없이 검을 다시 빼 주었다.
옆에서 들어오는 몽둥이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듯 그 두툼한 부분을 쓸며 아래로 손을 내렸다가 그대로 방향을 틀도록 밀어내면 된다.
그는 한 손으로 쥐느라 땅바닥과 닿은 칼끝을 발뒤꿈치로 찼다. 검이 튕겨 오르며 반대쪽에서 오던 검날을 쳐 냈다. 반동으로 그의 검도 바닥에 박혔지만, 몽둥이를 비껴 낸 손이 도로 돌아온 상태다.
은우는 검을 양손으로 쥐고 숨을 삼켰다. 호랑이처럼 굳세게, 용처럼 유연하게.
녹색 눈동자가 검로를 찾아 시간을 비틀었다. 찰나가 찰나로, 순간이 순간으로 여러 번 쪼개졌을 때 은우는 답을 찾았다.
칼질 한 번에 무기들이 죄다 튕겨 나가며 적들을 베었다.
“하.”
투구에 달린 감색 술이 꼬리처럼 낭창하게 휘었다. 아몬드 형태로 파인 눈구멍 속에서 녹빛 안광이 스산하게 흘러나왔다.
“미션 실패입니까.”
은우는 검을 쥐고 숨을 후 내뱉었다.
화는 안 났다. 안 났다. 안 났다고 하자. 그는 평온을 유지하기 위해 다시 호흡을 삼켰다. 서늘한 공기는 뜨거운 울분을 다독이기에 적합했다.
“…여기 와서 다시 도전하긴 뭐하니, 계속 진행하겠습니다.”
다행히 그의 인내심은 아직 길었다. 은우는 화가 잘려 나간 이성으로 냉정히 판단했다. 버그로 인해 산 적이 경보를 울렸고, 본거지에 남아 있던 적이 몰려온다. 뿔피리 소리도 지금 들렸으니 바깥에서 추가 병력도 올 거다.
이때 취해야 할 방법은 역시 한 가지뿐이니.
“다 죽이면 되겠죠.”
몰살이다.
「‘강남건물주’ 님이 ‘3,000,000원’ 투척!
버그 때문에 아쉽게 됐지만 지금으로도 만족합니다.」
다행히도 강남건물주 님은 그가 제어할 수 없는 것으로 인해 망한 판을 실패로 간주하지 않았다.
그 대단한 배포에 은우는 물론이고 시청자들이 박수를 쳤다. 자고로 부유한 이의 너그러운 적선은 분노를 끄는 소화제였다.
“강남건물주 님, 300만 원 감사합니다. 비록 미션은 완벽히 성공하지 못했지만…….”
벽을 박찬 은우의 발이 정예 병사의 몽둥이를 발판 삼아 뛰어올랐다. 뛸 당시 회전한 몸 덕분에 통로 천장에 발이 닿았다. 은우는 그대로 뛰었다.
“상응하는 모습이라도 보여 드리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그가 중력의 입맞춤을 받기 전에 짧은 통로가 끝났다. 은우의 몸이 웅크린 자세로 변하며 허공을 회전했다가 바닥에 착지했다. 검이 교묘하게 사방을 훑으며 전방을 갈랐다.
은우는 즉시 바닥을 구르며 뒤로 몸을 틀었다. 찌르기 자세를 취한 팔이 몸을 일으킬 때에 맞춰 검을 앞으로 내밀었다. 은우에게 달려들던 적의 머리가 꿰뚫렸다.
일격사. 그는 바로 왼쪽으로 뛰어 몸을 피했다. 검을 단단히 쥔 손은 몸을 움직이는 것만으로 검을 뽑아내게 해 주었다.
“침입자 놈을 죽여!”
“얼음의 분노를 보여라!”
통로에서 우르르 병사들이 나왔다. 은우는 바로 그 속에 뛰어들었다.
병사 하나의 머리통을 쥔 손이 그 병사를 바닥에 메다꽂으며 검을 절묘하게 틀었다. 손과 대지로 지탱되는 검은 상대의 단도를 막아 냈다.
은우는 그 상태에서 병사의 머리를 쥔 손을 축 삼아 몸을 띄웠다. 한 팔로 대지를 짚은 물구나무서기라도 봐도 되었다. 비록 대지와 손 사이에 남의 두개골이 껴 있고, 띄워진 다리가 정예 병사의 턱주가리를 걷어찼지만 말이다.
“좁은 통로는 이래서 좋아요.”
정예 병사 쪽으로 다리를 다시 내린 그는 태도가 무도회장의 파트너인 것처럼 검을 핑그르르 돌렸다. 그의 손끝에서 무희처럼 춤을 추는 검은 파트너의 목숨을 노리는 무기들을 막아 주었다. 든든한 춤 상대였다.
두 손으로 잡고 휘두르면 상대의 목을 가르며 숨을 끊어 버린다는 점도 그랬다.
은우는 목을 자르고 다시 땅에 박힌 검의 반동을 이용해 몸을 재차 띄웠다. 건너편으로 넘어간 몸이 그쪽 적의 머리를 발로 차며 바닥과 다시금 마주했다.
그리곤 은우는 검을 지팡이처럼 짚은 채 통로의 벽을 밟고 뛰었다.
원형의 통로는 벽이 곡선을 그리고 있어 지지대만 있으면 대지와 평행이 되게 벽을 걷는 것도 가능하다. 은우가 하는 것만 보면 그래 보였다.
그는 벽을 걸으며─그보단 뛰며─적의 대가리를 후려쳤다. 중력에 이끌린 몸이 지상에 다시 묶이면 양손은 태도의 손잡이를 잡고 은빛 궤적을 허공에 새겼다.
곧 적이 전부 쓸려 나갔다.
“이렇게 간단한 걸.”
은우는 검을 턴 후 기척을 살폈다. 은신하는 녀석 없고, 살아 있는 녀석 없다. ‘침입자다!’ 버그 빼고.
“이게 끝인가요?”
지하 5층에 있는 녀석들까지 몰려온 것 같긴 했는데, 정말로 이게 끝인가? 이 본거지는 정말로 비었나?
그가 고민할 때, 어김없이 시청자의 제보가 들어왔다. 터진 후원이 워낙 많았던지라 조금 늦게 보였다.
─ㄴㄴ 아직 보스 남음
─진짜 파픽스들 개불쌍하다;; 가만히 있었는데 학살자가 왔어....
─진짜 피해자는 파픽스들임
─보스 있어요
─누나아아아ㅏㅏ 나온다ㅏㅏㅏ
보스가 남아 있다라. 은우의 눈썹이 한차례 들썩였다가 뒷목을 매만졌다.
“그거 다행이네요.”
태도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사령관이랑 용사가 제법 재밌어서 파픽스에는 없나, 하고 아쉽던 참인데.”
─ㅋㅋㅋ아 도망쳐ㅋㅋㅋㅋ
─사령관과 용사ㅋㅋㄲㅋ
─진짜 개털리듯 털리는 거 존웃이었는데ㅋㅋㅋ
─티아마스 불쌍ㅉㅉ
아직 남아 있다는 게 어찌나 안도되는지. 은우는 걸음을 재촉해 5층으로 내려갔다. 5층에 있던 녀석들까지 다 몰려왔던 게 맞는지 모든 방이 텅텅 비어 있었다.
덕분에 길 찾는 게 쉬웠다. 만년수정이 나올 때까지 편하게 돌아다니면 됐던 것이다.
또한 그 끝에서 은우는 사람들이 말했던 존재와 마주할 수 있었으니. 컷신이 시작되었다.
탁!
은우의 머리 옆에 단도가 꽂혔다.
“잘도 이곳까지 왔구나.”
단도를 던진 것은 파픽스족의 여성이었다. 눈을 가린 붕대와 올려 묶은 흰 머리가 인상적이다. 다른 파픽스들과 달리 가벼운 옷차림도 눈에 띄었다.
『‘서리기사: 티아마스’를 발견했습니다.』
“처형을 시작한다.”
서리기사 티아마스가 무기를 들었다. 거대한 부채였다.
파앙!
부채가 거대한 바람을 일으켰다. 그 바람은 은우가 피한 자리를 휩쓸며 풍선 터지는 소리를 냈다. 자세히 살피면 분 바람 사이로 칼날처럼 날카로운 바람이 섞여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럴 거면 차라리 처음부터 머리를 맞췄으면 됐을 텐데.”
은우는 태도를 움켜쥐었다. 힐끗 본 벽에는 단도가 박혀 있다. 이런 거엔 또 디테일하다. 버그 망겜이지만.
“감히 파픽스의 심처에 숨어든 네놈에게 북풍의 바람을 선물해 주마!”
티아마스는 부채를 다시금 휘둘렀다. 쏟아지는 바람의 칼날에 그는 대지를 박찼다. 앞으로 전진하면서 옆으로 빠지면 칼날을 피해 적에게 접근할 수 있다.
티아마스가 부채를 접었다.
까앙!
태도와 접은 부챗살이 맞닿았다. 철로 만들어진 부챗살은 검날과 맞부딪쳐도 부러지거나 꺾이지 않는다. 은우의 태도가 손목 각도에 따라 틀어지며 부챗살을 흘려 냈다.
쿵!
무거운 부챗살이 대지와 충돌하고, 은우의 칼날은 허공에 섰다. 두 사람의 발이 교차한 것도 그때였다.
“음.”
은우의 몸이 뒤로 밀렸다. 그가 일부러 뒤로 뛴 것도 있고 힘 싸움에서 밀린 것도 있다.
거리가 벌어지자마자 칼바람이 날아왔다.
“얼어붙어라!”
그뿐만이 아니었다. 티아마스가 진각을 밟자 성에가 쫙 일어나며 그를 쫓았다. 직선으로 얼어붙는 것이기에 경로에서만 벗어나면 그만이나, 저것에 휘말리면 발목이 묶일 것은 자명하다.
은우는 그것을 가만히 보다가 태도를 버렸다. 지금껏 쓴다고 써 왔지만, 사실 이것처럼 길기만 한 검은 실용성이 없다.
쓸데없이 리치는 길어서 접근전은 힘들지, 창처럼 잡을 수 있는 부분이 많아 거리 조절을 그가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 긴 검신 때문에 무게중심도 안 맞고, 절삭력도 게임이란 특성상 인간형에겐 못 써먹는다.
무기도 실용성이 있어야 좋은 법이다.
시험해 본 결과 인간형 적을 상대로는 맨손도 먹혔으니, 티아마스 또한 맨손으로 잡을 수 있으리라. 은우는 등에 메고 있던 검집도 버렸다.
딱히 무게 시스템이 있는 것도 아닌데 몸이 가벼워진 기분이다.
─아니ㅋㅋㅋ이 분 또 버려ㅋㅋㅋ
─왜 버려요ㅋㅋㅋㅋ
─티아메스를 맨손으로 잡으려는 스트리머가 있다?!
─근데 그게 켄이다?!
─팝콘이나 챙겨라.
“오랜만에 박투를 해 볼까 하네요.”
바람이 틈을 두지 않고 날아왔다. 은우는 티아마스를 축으로 돌며 느리게 숨을 뱉은 후, 그다음을 잊었다. 사람은 호흡이란 행위를 잊는 것만으로도 더 많은 것을 해낼 수 있다. 그의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나선을 그리며 축을 향해 달린다. 티아마스가 칼바람을 날렸지만, 관측한 결과 칼바람의 실질적인 바람의 칼날은 인간의 상체 부분에 밀집되어 있다. 슬라이드 하면 맞지 않는다.
은우의 몸이 바닥 위를 미끄러지며 티아마스를 살짝 지나쳤다. 그러곤 손으로 바닥을 짚어 발을 휘둘렀다. 티아마스의 발이 걸리며 자세가 순간 무너졌다.
그는 그 자리에서 무릎 접었다 뛰기를 하듯 일어서며 티아마스의 휘둘러진 부채를 피했다. 온전한 점프고 힘도 덜 실어서 부채가 다 지나가기도 전에 몸이 추락했지만, 괜찮다.
은우의 발이 부챗살을 밟고 재차 뛰며 몸을 회전시켰다. 돌려 차기가 티아마스의 머리만을 집요하게 두 타 연속으로 때렸다.
“역시 보스라서 그런가 몸이 단단하네요.”
그의 몸이 바닥을 밟고 다시 티아마스에게 접근했다. 부채의 리치가 기니 반드시 붙어야 했다.
티아마스가 부채를 쫙 펼쳐 막으려 했지만, 그는 가장 바깥의 살을 손으로 짚고 그것을 훌쩍 넘었다.
티아마스가 다급히 손을 휘저었다. 은우는 오른 팔뚝으로 그의 머리를 치려는 팔을 올려친 후, 빈틈을 향해 왼손을 뻗었다. 그의 손등이 티아마스의 턱을 쳤다. 티아마스의 고개가 강제로 젖혀졌다.
은우는 연이어 주먹으로 그녀의 명치를 쳤다. 티아마스가 부채를 들고 뒤로 세 걸음 물러났다. 그는 놓치지 않았다.
재빨리 티아마스의 뒤로 돌아간 몸이 티아마스의 머리를 잡고, 발로는 다리를 교차하게 걸었다. 그러곤 옆으로 세게 밀었다. 그러면 상대를 내던지듯 넘어트릴 수 있다.
“보통은 목이 부러지는데, 일격사가 안 된다는 점은 참 좋은 것 같습니다.”
“감히 신성한 파픽스의 땅에서!”
“싸움은 못하는데 길게 이어지긴 하니까.”
만화처럼 상대를 던져 놓고 자세를 되잡을 시간을 주는 일 따윈 없다. 티아마스의 앞에 도달한 은우는 무거운 부채를 한 손으로 쥐느라 조금 늘어져 있는 팔을 붙잡고 손날로 목뼈를 타격했다.
“얼어붙어라!”
티아마스가 발악을 하듯 발을 구르자 전방이 얼어붙었다. 은우는 다급히 뒤로 뛰며 물러났다. 부츠에 맺힌 살얼음이 금세 깨져 나갔다.
티아마스의 눈을 가리던 붕대는 형편없이 찢어져 새빨간 눈동자를 드러내고 있었다.
지금껏 상대해 온 파픽스들의 눈은 은색이었는데, 오직 그녀만 붉은색 홍채를 가지고 있다. 귀에 걸려 장식처럼 흘러내린 붕대가 유독 밟힌다. 눈이 멀지 않았음에도 그녀는 눈을 가렸다.
─맨손으로 벌써 2페이즈...?
─보스는 급소 일격사가 없는 대신 급소 치면 10배 댐지임
─누나아아아ㅏㅏㅏ
─아니 티아마스가 이렇게 쉽게;;
─ㅈㄴ 이쁘다
은우는 멈췄던 숨을 다시 내쉬었다.
“혹시 제가 숨 안 쉬었다고 같이 숨 안 쉬다가 막힌 사람 없죠?”
농담이었지만, 의외로 뼈 맞은 이들이 있었다.
짧은 순간 이어진 박투이다 보니 무의식적으로 숨을 멈추고 있던 이들이 실제로 있었던 것이다.
“숨 쉬세요, 구울분들.”
“네놈의 몸뚱이를 얼려 만년수정에게 바치겠다!”
“안 쉬다가 기절하면 이 뒷부분을 못 보잖아.”
은우는 바람을 피하지 않았다. 쏟아지는 바람은 그의 몸을 휘감으며 옅은 흰 줄기의 길을 만들어 냈다. 흰빛을 머금은 칼바람들이 은우의 눈동자에 맺혔다.
한 걸음. 상체가 낮아지고 손가락이 스치는 바람을 가르며 빈 공간을 만들어 냈다.
두 걸음. 다시 휘둘러진 부채가 백색 기류를 추가로 내보낸 순간, 칼바람의 개수가 더욱 늘었다. 첫 번째 칼바람은 이제 은우의 바로 앞에 도달한 상태다.
세 걸음. 은우의 몸이 빙그르르 돌았다.
등을 얕게 스치는 칼바람이 하나. 코를 베지 못하고 지나가는 칼바람이 하나. 팔뚝과 인사하며 사라지는 하나. 아쉬운 듯 목덜미를 간지럽히는 것이 하나.
네 걸음. 바람에 흔들리는 거미줄처럼 낭창거리는 팔과 춤을 추거나, 숨을 멈춰 홀쭉 들어간 배와 눈을 마주치거나, 피안화처럼 얄팍한 꽃잎이 되어 부드럽게 쓰다듬고 가거나.
다섯 걸음. 칼바람들이 전부 스러졌다.
“그렇지?”
다섯 걸음. 은우와 티아마스의 눈동자가 서로를 담았다.
은우의 주먹이 티아마스의 안면을 강타했다. 반 걸음 더 나아가면 뒤로 밀려나는 티아마스를 쫓을 수 있다. 그의 다리가 티아마스의 옆구리를 차고, 팔은 휘청이는 여인의 팔을 잡아채 그대로 메쳤다.
짤랑.
은우의 귀에 걸린 귀고리가 울었다.
그렇지만 여기서 끝이 나면 박투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가까스로 엎어지는 대신 발로 몸을 지탱하고 무너진 무게중심은 손을 세 번째 지지대로 삼아 주욱 밀려난 티아마스가 고개를 들었다.
그렇지만 그녀가 볼 수 있는 건 하나뿐이었다. 붉은색 홍채 위로 검은 것이 거울처럼 비추어졌다. 은우의 부츠 단면이었다.
은우는 무자비하게 공격을 몰아쳤다.
부채를 펼칠 시간조차 주지 않고 발, 종아리, 팔뚝, 팔꿈치, 손등, 손바닥, 손날. 모든 신체 부위로 그녀를 타격했다.
심지어 허공에서 몸이 대지와 거의 수평이 된 채 회전하며 티아메스를 때리던 모습은 극에 다다른 폭력이 야만적인 아름다움의 하나일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잔혹하고 부도덕이면서도 경이롭다.
티아마스가 쓰러졌다.
.
.
.
“안, 돼… 안 된다고.”
패배자는 언제나 소리를 낼 수 없다. 캐릭터는 티아마스의 울부짖음을 뒤로하고 만년수정이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그것만은 안 돼……!”
투명한 수정은 바깥에 널린 수정과 다를 바 없었다.
이게 정말 이 대지를 구할 수 있을까?
“어째서……! 분명 예언은 피해 냈을 터인데……!”
그렇지만 이것밖에 없다. 카카라 전사는 만년수정을 쥐고 이곳을 빠져나가기 위해 다시 패배자를 지나쳤다.
울음소리가 방안을 가득 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