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희수> 맞다 님 요즘 병원 가고 있음?』
『나> 다시 다닐 예정』
음성으로 대답할 상황이 아니라 타자만 뚝 누르고 답장을 보냈다. 진료실 문이 달칵 열렸다.
“오랜만이에요.”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가 은우를 반겼다. 가운의 가슴팍 부분에는 정신 건강 의학과란 단어와 의사의 이름이 선명했다.
은우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 속에 맺힌 눈동자는 아무런 심상 없이 검었고, 동공은 못에 박힌 듯 의사를 응시했다. 상대가 적인지 관련 없는 존재인지 가늠해 보려는 맹수처럼.
“오랜만입니다.”
“스트리머 일을 시작하신 줄 몰랐어요. 관련 일로 연락이 왔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방송 잘 보고 있습니다. 이야, 게임 정말 잘하시더라고요? 저번에 못 오신다는 말씀 듣고 엄청 걱정했는데, 다행이에요.”
그러고 보니 마지막으로 이곳에 올 때 한동안 돈 문제로 못 다닐 것 같다고 그랬던가.
은우는 자리에 앉았다. 희수 다음으로 일대일 대화 시간이 많은 사람이었음에도 별다른 친밀감은 들지 않았다. 차라리 우유에탄산이나 빌리가 친구에 더 가까울 지경이니 말 다했다.
“몸은 좀 어떠세요?”
“멀쩡합니다.”
“다행이네요.”
그렇지만 치료를 명분 삼아 의도적으로 정신적 거리감을 좁히려는 것만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차라리 저쪽이 그에게 무언가의 실질을 얻고자 접근했다면 마음이 편할 텐데, 그것도 아니지 않은가.
물론 엄밀히 따졌을 때 저들은 돈을 받고 움직이는 거긴 하다. 근데 그게 타인에게서 나온 게 아니라 자신에서 시작된 점에서 더 거북했다.
세상에 제 돈 내고 자신에게 접근하길 명령하는 꼴이라니. 희극이 멀리 있지 않다.
“안색이 많이 좋아지셨어요. 스트리머 일이 적성에 맞으시나 봐요.”
은우는 목덜미를 쓸었다. 돈으로 시작된 관계는 절대 사적인 영역을 넘봐선 안 된다.
그렇지만 이곳은 상대의 직함만 믿고 돈과 시간, 사적인 정보까지 지불해야 했다. 과연 그렇게까지 해서 얻을 가치가 있을까? 그는 지금도 잘 살고 있는데?
합방을 다짐했을 때와는 또 다르다. 그것은 트라우마라는 과거의 한 순간을 이겨 내는 것이나, 이것은 삶의 방식을 바꾸는 것이다. 무게가 다르다.
“예, 뭐.”
“거봐요. 사람은 꼭 공부만이 길이 아니라니까요.”
희수는 의사가 도움이 될 거라고 했지만, 이것만은 그 녀석이 틀렸다. 그에겐 이 방법이 맞지 않다.
직업으로 인한 강제만 아니었다면 여길 다시 오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오랜만에 검사지나 작성해 볼까요?”
그러나 이미 온 상황이다. 은우는 검사지를 받아 들었다.
『나는 ―이다.』
펜이 사각사각, 화면에 검은 칠을 하기 시작했다.
▣ 057. 긍지가 쓰레기통 안에
“뭐냐.”
성주가 그를 힐끗 쳐다보았다.
“왜 그리 죽상이야?”
그는 그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거대한 돌덩이는 아낙네의 허벅지만 한 팔뚝을 가지고 아이 네 명을 올려도 거뜬히 버틸 어깨를 가진 사내와 더불어 자그만 소년 체구의 그를 단단히 지탱했다. 솔솔 부는 여름 바람은 시원하다. 한 달도 안 될 여름인 만큼 더욱 귀한 바람이다.
“헹, 네놈이 알아서 뭐 하게?”
“모르면 뭐 하는데?”
그의 너스레에 성주는 콧김을 팽 내뱉었다. 별로 말할 생각이 없어 보이나, 그건 그것대로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그는 그저 같이 있다는 온기만을 전해 주었다.
“──, 말이다.”
어렵사리 성주가 입을 열었다. 성주가 내뱉은 이름은 그도 아는 것이었다.
“안 되겠지?”
“뭐야, 좋아했어?”
“시끄러워!”
얼굴 붉히는 꼴이 너무 어울리지 않았다. 그렇지만 더 경악스러운 것은 좋아하는 게 하필 그 사람인가 하는 점이다.
물론 전장에서 굴러먹는 비렁뱅이들이 가질 수 없는 기품과 지혜로움이 그 사람에게 있긴 했다. 거기에 천하절색이기까지 하니 안 반하는 게 더 무리일 것이다. 본인부터가 남들 유혹하는 걸 재미로 삼기도 하고.
그러나 설마 성주까지 넘어갈 줄이야. 전장에서 싸우는 이는 유혹 안 하는 것이 그 사람 철칙이니 분명 먼저 플러팅을 한 건 아닐 거다. 진짜 성주가 먼저 반한 쪽일 거란 말이다.
“…걘 우락부락한 타입을 안 좋아할 텐데?”
“닥치라니까!”
요즘 답지 않게 여자를 끊었나 했더니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는 사랑의 위대함을 떠올리며 성주의 명복을 빌었다. 취향 확고한 그 사람을 꼬시려면 엄청난 노력이 필요할 테다. 불가능할 가능성이 더 높겠지.
“…넌 어떻게 생각하냐.”
“응? 나?”
“넌 ──이랑 친하잖냐.”
“친하긴 하지.”
그는 볼을 긁적였다. 그렇지만 친해서 더 문제였다. 속속들이 알고 있어서 성주가 정말 가망이 없다는 것도 알았다.
“내가 그, 생긴 게 가망이 그렇게 없냐.”
“어…….”
생긴 건 어떻게 할 수 없다. 그는 성주에게 최대한 절망을 주지 않기 위해 말을 신중히 골랐다.
“사실 그것보다는… 네가 쌈박질을 더 좋아하는 게 문제라고 생각해.”
그가 우스갯소리로 ‘넌 왜 날 유혹하지 않아?’라고 물었을 때, ‘넌 영웅이잖냐.’라고 대답했으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 사람은 사랑한다면 싸움터에서 죽을 일 없는 사람을 고를 거라고 했었다.
“쌈박질?”
“우린 전장에서 사는 사람이잖아. 언제든 죽을 수 있는 사람들. 그게 해결되지 않는 한 어려울걸.”
“그런가…….”
이렇게 되면 은퇴하려나? 성주만 한 동료도 구하기 힘든데. 그는 아쉬움에 입맛을 쩝쩝 다셨다. 그래도 인생 살겠다 떠나는 이를 잡을 순 없다. 그는 살 의미가 없어 전장에 몸을 던지는 사람이지만, 다른 이들은 아닐 테니까.
문득 성주가 부럽기도 했다.
살아갈 이유를 가지게 된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그것을 위해 자신의 일부를 구성하던 것을 버리는 건 어떤 각오인가. 그런 감정은 얼마나 무겁고 거대한가.
그가 삶을 느끼는 순간은 오직 죽음이 목전일 때뿐인데.
“은퇴할 거면 돈은 좀 모으고 은퇴해. 돈 없는 사람은 사랑도 못 한다더라.”
“──이?”
“어.”
“…좋아! 고맙다!”
“별말씀을.”
그는 일어섰다. 성주의 고민은 해결된 듯했지만, 그의 고민은 해결되지 않았다.
아마 죽을 때까지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이 결핍은 채울 수 있는 게 아니었으므로.
“금은보화를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고백하면 어떻게든 되겠지.”
“뭐, 힘내라고.”
“크하하하하!”
그래도 동료가 웃음을 되찾았다. 그거면 된 거 아닐까.
그거면…….
“제국이 네 목에 건 현상금이 수억이고 준비해 준 자리가 자리더군. 그 돈과 권력이면 ──쯤 얼마든지 가질 수 있겠지!”
그거면 됐던 것 같은데.
왜.
* * *
“약 받아 가세요.”
은우는 눈을 느리게 껌뻑였다. 상담하면서 무심코 떠올린 과거가 어쩌다 여기까지 왔다. 상담이 끝난 지 꽤 됐음에도 그랬다.
“감사합니다.”
그는 약을 받아 들고 병원을 나왔다.
“타인에 대한 불신이 심하셔서 치료가 쉽지가 않네. 스트레스 원인이 많을 게 분명한데 그중 하나밖에 말씀을 안 해 주셔.”
그에 대한 말인지 다른 이에 대한 말인지 모를 것이 어렴풋하게 지나갔다.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못 들었을 거다.
『희수> 다시 다닐 예정은 또 뭐야, 너 돈 벌고 아직까지 안 갓냐??』
『희수> 또라이 새꺄 너 안 가도 괜찮을 것 같다고 자가진단하고 안 갔지』
『희수> 아시바 새끼 고딩때도 존나 안 가려고 도망다니더니』
『희수> 고3되고나선 잘 가더만 돈없다고 잠깐 끊고 나니까 병원이 우습냐???』
전자 노트를 켜니 문자가 와 있다.
은우는 목덜미를 쓱 쓸었다. 걱정하는 마음은 알겠지만, 병원에 가 봤자 그가 전생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뭔 소용이 있단 말인가.
고등학교 당시야 희수가 이 세상의 정보를 알 수 있는 유일한 창구였으므로 꼭 병원에 가야 하는 줄 알았다. 가서 제대로 상담을 했는지는 별개지만, 어쨌든 꾸준히 다녔던 건 그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이제 보니 역시 그는 안 되겠다.
배신의 공포가 문제가 아니었다. 이런 식으로 시작되는 관계 자체가 그의 심기를 거슬렀다.
무엇보다도…….
『나> 그건 아닌데, 까먹었어.』
스트리머 활동을 하다 보니까 병원 가는 걸 완전 잊고 있었다.
솔직히 사람 대하기가 어려울 뿐이지 그에게 큰 문제가 있는 건 아니다. 현실에서의 싸움을 기피하는 거야 이유만 다를 뿐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고.
덕분에 병원의 필요성을 떠올리지 못했다. 안 그래도 가지고 있던 회의감이 더 깊어진 것도 그 때문이었다.
병원이 없어도 그는 잘 살 수 있고, 심지어 나아질 수도 있다. 희수가 아니었다면 상당히 오래 걸렸겠지만, 어쨌든.
『희수> ㅅㅂ』
『나> 그래도 이 정도면 괜찮지 않냐.』
『희수> 자가진단 ㄲㅈ 당장 가』
『나> 안 그래도 갔다왔어.』
『희수> 아아주 잘 했다 새끼야』
『희수> 앞으로도 잘좀 가라고』
희수의 찰진 비아냥을 들으며 그는 버스를 탔다. 손잡이를 잡고 가만히 서 있으면 사람들의 은근한 시선을 받을 수 있다. 키도 큰데 얼굴도 험상궂은 사람의 비애였다.
『나> 안 그래도 직업 때문에 주기적으로 가게 됐어.』
『희수> 아, 그 미친 또라이가 벌인 것 때문에 법 생긴다 했지?』
『희수> 물론 닌 그러지 않을 거 아는데 그래도 잘 좀 가라』
『나> ㅇ』
자리가 나서 앉았다. 병원과 집 사이의 거리가 꽤 돼서다. 돌아가는 데 시간이 좀 걸리는 것 정도야 경치가 예쁘고 버스가 조용해서 나쁜 일은 아니다.
“은우냐?”
그렇지만 버스에 앉아 있는 시간이 길다는 건 버스 안에서 타인을 마주칠 확률을 높이기도 한다. 그 버스 노선이 형의 직장과 겹친다면 더욱 그렇다.
은우는 기시감을 느꼈다. 예전에도 이렇게 마주치지 않았나.
“…퇴근 시간 아니지 않아?”
“어, 어… 아니야. 오늘은 그냥 외근 때문에…….”
건우의 시선이 은우의 손에 들린 봉지에 닿았다. 딱히 병원 이름이 적힌 것도, 약봉지가 비치는 것도 아니기에 거리낄 것은 없다. 그런데도 은우는 그것을 뒤로 물렸다.
“어디 갔다 오는 거야?”
“어.”
“어디?”
그는 시선을 피하며 눈을 굴렸다.
“친구 집.”
우유에탄산이나 빌리보다 먼 사이인 의사가 졸지에 친구로 승격되는 순간이었다.
“그래?”
“…형은.”
“뭘 두고 온 게 있어서 집에 잠깐 들렀다 바로 출발하게.”
직장인이 이렇게 허술해도 되는 건가? 짤막한 의문이 들었다가 아무렴 어떠냐는 태도로 흩어졌다. 형이 뭘 하든 그가 신경 쓸 필요는 없다.
겸연쩍은 침묵이 그들 사이를 감돌았다. 몇 번 건우가 말 걸려는 시도를 했지만, 그조차 어색함에 스러졌다. 그렇게 버스에서 내릴 시간이 다가왔다.
바깥쪽에 앉아 있던 건우가 먼저 내리고 은우가 그다음을 이었다. 도보에 톡 튀어나와 있던 돌부리에 건우가 넘어질 뻔했다.
“조심해.”
은우는 그의 옷소매를 잡아 넘어지는 걸 방지해 주었다.
“고, 고맙다야.”
동생 앞에서 넘어질 뻔한 게 쪽팔렸는지 형은 마른세수를 했다.
“이건 아직도 있네, 나 참.”
너스레의 색을 말할 수 있다면 그건 분명 창피함의 붉은색일 거다.
“예전엔…….”
“……?”
“예전엔 여기서 애기가 넘어질 뻔한 걸 네가 잡았는데, 이번엔 내가 신세 지네.”
“아.”
그러고 보니 그런 적이 있었다. 오늘처럼 버스 안에서 형과 마주쳐 나란히 집으로 돌아가던 적이.
그때는 이 돌부리에 4살 정도 되는 아이가 걸려 넘어질 뻔했던가? 아이를 잡느라 봉투가 바닥에 쓸려 약봉지가 바깥으로 튀어나왔던 것까지 기억난다.
또 아이가 그의 얼굴을 보고 울음을 터트린 것도. 아이를 대신 달래 준 형이 아니었다면 한참 쩔쩔맸을 거다.
“…집에 가자.”
“…어.”
나란히 과거를 떠올린 형제는 어색하게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돌아가는 걸음이 가벼운 듯 무겁고, 무거운 듯 가벼웠다.
* * *
은우는 접속하자마자 보이는 름플브흐의 모습에 흐린 눈을 했다.
그에게 제압당한 뒤로도 필사적으로 저항하다가 그가 둥지 밖으로 나오다 다친 새끼를 치료해 주는 걸 보고 마음을 풀었던가. 그렇지만 쟤는 볼 때마다 그놈의 버그 사태가 떠올라서 정이 안 간다.
그 뒤로 《물에 잠긴 황야》 지역을 정복하느라 다섯 마리의 보스를 처단하고 한 마리의 괴수를 길들였는데도 그렇다.
도저히 잊히지가 않았다. 그가 처음 맞닥뜨린 버그라서 그런지도 모른다.
끼에?
“귀엽긴 참 귀여운데…….”
─그 귀여운 놈을 두 번 죽여놓고,,,,
─ㅋㅋㅋㅋㅋ버그갓겜ㅋㅋ
─진짜 2페이즈 보겠답시고 절벽 뛰어내린 거 레전드ㅋㅋㅋㅋ
“그렇지만 버그로 깨는 게 무슨 가치가 있습니까.”
뛰어내리기 전, 줄 없는 번지점프 하기 싫으면 미리 일인칭 포기하라고 경고까지 해 줬다. 그거면 된 거 아닌가? 은우는 당당했다.
“자, 그러면 오늘 드디어 본격적으로 부패하는 대지에 진입합니다. 시청자분들 말씀에 따르면 그 전에 다른 지역에 가야 하는 것 같습니다만.”
─오늘 드디어 = 엑헌 4일차
─속도 미쳤누;;
─켄이라서 새삼스럽지도 않다.
─겨슷님 진도가 너무 빠릅니다
─얼음 수정의 땅 먼저 가야함ㅋ
“자, 스토리 컷신 보러 갑시다.”
그는 파론에게 갔다. 스토리를 진행하기 위한 이벤트 신이 바로 펼쳐졌다.
“부패독의 원인을 밝혀냈습니다.”
“뭐?! 정말인가?”
어제 플레이분에서는 조사원을 데리고 부패하는 대지 초입까지 들어갔다 나왔다. 참고로 부패하는 대지는 물에 잠긴 황야 너머의 지역이었다. 갉아먹는 사막과 부패하는 대지 사이에 물 잠긴 황야가 있어 사막과 직접적으로 맞닿지는 않았다.
“대체 원인이 뭐지? 어서 말해 보게.”
“원인은…….”
파론의 재촉에도 조사원은 쉬이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심각한 안색으로 입술을 잘근잘근 씹기만 했다.
“어서 말해 보래도!”
“원인은… 물에 잠긴 황야 너머 대지를 꽉 메운 시체입니다.”
“뭐?”
조사원은 차근차근 사정을 밝혔다.
“모종의 이유로 물에 잠긴 황야 너머의 땅에 사는 괴수들이 죽어 나갔고, 그 시체들이 제대로 썩지 못해 시독이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가득 찬 독기에 그나마 살아 있던 괴수들조차 죽어 나가고 그들의 시체는 다시 독기를 만들어 낸다. 악순환이었다.
“그 독기가 황야로 흘러들었고…….”
“황야를 타고 사막에까지 독기가 퍼진 게로군.”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독기의 근원을 찾아 얼려야 합니다.”
“불태우는 게 아니고?”
“불태워봤자 공기 중으로 독이 퍼질 뿐입니다. 이건 얼려야 합니다.”
파론이 턱을 매만졌다. 그사이 파론 옆에 서 있던 다른 이가 발언했다.
“독기의 근원은 시체일 텐데, 그걸 몽땅 얼리겠단 말입니까?”
“그건 아닙니다. 시체들은 태워야지요. 제가 얼려야 한다 말하는 건 다른 겁니다. 켄 님.”
조사원의 부름에 캐릭터가 나섰다.
“…독기에 적응한 개체가 있습니다.”
“그런……!”
“…설마 변종인가?”
캐릭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컷신에서 어제 그들이 목격했던 변종 개체를 슬쩍 비춰 주었다.
새까맣다 못해 녹색을 띠는 비늘과 뱀처럼 길고 가느다란 꼬리, 박쥐의 것처럼 뼈대와 피막으로 이뤄진 날개, 도마뱀처럼 오돌토돌 갈라진 피부의 주둥이, 고양잇과 동물의 날카로운 세로 동공.
마치 용을 닮았던 것.
사실 어제 발견하자마자 사냥 준비를 하려 했다. 스토리 때문에 막혀 버렸지만 말이다.
현실처럼 복잡하지 않아서 이것저것 잴 것 없다 보니 게임 캐릭터처럼 성급해지게 된다. 비현실적이니 뭐니 남 탓할 게 아니었다.
“그것이 주변의 독기를 흡수하고 더한 독기를 만들어 내고 있었습니다. 그것만 죽여 얼린다면 전보다 독기가 약해질 겁니다.”
“문제는… 그곳의 독기가 너무 심해 접근이 힘들단 것과 그것을 죽여도 얼릴 방법이 없단 것이겠지요.”
대안이라고 제시한 주제에 조사원은 그것을 실행할 방법을 몰랐다. 잠깐의 고요가 그들 사이를 휘감았다가 파론의 목소리에 깨어졌다.
“얼릴 방법은 있다.”
“네?!”
“그렇지만… 무척이나 고돼. 어쩌면 많은 피해를 입을지도 모르지. 아니, 입을 거다.”
“이대로라면 미개척지가 전부 망가집니다. 그러면 로크즈류도 멸망하겠죠. 이러나저러나라면 시도라도 해 보는 게 옳지 않겠습니까?”
“…맞는 말이야.”
파론은 고개를 주억인 후 은우의 캐릭터와 시선을 마주했다. 왜 하필 많고 많은 카카라 전사 중 그인지는 모르겠으나, 지금까지 앞장서서 해결해 온 것 때문이 아닐까 싶다.
“칼날소리의 대지에서 좀 더 위로 올라가면 ‘얼음수정의 땅’이 있다. 파픽스가 사는 땅이지.”
“파픽스!”
“확실히 파픽스라면…….”
“얼어붙은 요정, 파픽스들이 간직하고 있는 만년수정이라면 남쪽의 더위를 물리치고 독기의 덩어리를 얼릴 수 있을 거다.”
가만히 듣고 있던 은우와 시청자들이 동시에 생각했다. 이거, 약탈하자는 건가?
“파픽스들은 절대 만년수정을 내주지 않겠지. 그것은 그네들의 숭배 대상이니. 그렇지만 그것은 소모품이 아니다. 가져와서 독기만 얼린 다음 돌려주면 어떻게든 될지도. 그러니 켄, 부탁한다. 얼음수정의 땅을 가로질러 파픽스의 부락을 찾고, 만년수정을 훔쳐 와라.”
『◈│만년수정을 찾아서
□ 파픽스 부락 찾기
□ 만년수정 훔치기』
“…미안하다. 긍지 높은 카카라 전사인 네게 부도덕한 명령을 내려서.”
이벤트 신이 끝났다. 드디어 은우의 입에 자유가 주어졌다.
“대화를 조금도 고려하지 않네요.”
─팩폭ㅋㅋㅋㅋㅋ
─와중에 본인도 부도덕하단 건 알어ㅋㅋㅋㅋ
─뭐....물어봤다가 경계 심해질 걸 대비한 거 아님?
─긍지높은 전사X 물건훔치는 도둑O
─파픽스들 불쌍;;
“맞습니다. 이쪽이 만년수정을 노리고 있다는 걸 알려 주면 저쪽의 경계 태세가 높아질 테니까요. 무엇보다 만년수정이 거의 종족의 신물쯤 되나 본데… 그럼 내줄 리 없죠.”
은우는 목덜미를 쓱 쓸곤 일단 조사원 앞에 섰다. 조사원의 머리 위에도 메인 퀘스트 표시가 있던 탓이다.
“이 대지를 위해 큰 각오를 해 주신 것에 대해 로크즈류의 일원으로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조사원은 가벼운 인사치레로 운을 띄우더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얼음수정의 땅은 버티기 힘든 혹한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갉아먹는 사막과는 비교되지 않는 추위가 있지요. 그곳을 가로지르려면 장비가 필요할 겁니다.”
『◈│추위를 버티는 방법
□ 추위 무효화 장비 제작하기』
“재료를 알려 드리지요. 그 재료들을 구해 오시면 바로 제작해 드리겠습니다.”
“…게임이니까 어쩔 수 없다곤 생각하지만, 참 복지가 안 되어 있네요.”
─ㅇㅈㅇㅈ
─위험한 임무를 내려줄 거면 장비라도 직접 만들어 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ㅋㅋ
─진짜 쓰레기들임ㅋㅋㅋ
─긍지가 쓰레기통 안에 있음
은우는 전생에 몸담았던 왕국을 떠올렸다. 거기의 왕자가 딱 이 짝이었다. 왕은 유약할 뿐 복지라도 어떻게 해 주려 했는데, 왕자는 그를 사지로 내몰면서 지원 한 번 해 준 적 없다.
“켄 님이 만년수정을 구해 오시는 동안 저는 개발부원과 함께 독기를 버틸 방법을 강구하겠습니다. 그럼 부디 성공하시길.”
그렇지만 이미 받은 임무다. 은우는 출격할 준비를 했다.
“자, 그럼.”
투구 속 눈매가 살짝 휘었다.
“이번엔 어떤 무기를 잡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