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이율드크르 사냥을 완료하자 컷신이 시작됐다. ‘갈무리는?’, ‘방패는?’이라고 말할 틈도 없었다.
다행히 그의 의문을 고스란히 표현해 주는 시청자들이 있었다. 그것에 답을 주는 이들도.
─보상으로 소재 줘요 ㄱㅊ
─갈무리 한 것보다 더 많이 줌
─방패는??
─방패랑 랜스가 세트 취급이라서 아마 돌아올 걸요? 저 예전에 실수로 쌍검 한쪽 떨군 채 컷신 돌입했는데 돌아왔음
─착한 설명충 ㅇㅈ합니다
역시 머리를 맞대면 못 이겨 낼 불안이 없었다.
“혼자… 잡은 건가?”
그사이 파론이 직접 이끌고 온 카카라 전사들은 그를 경외 어린 눈으로 보았다. 파론은 아예 호탕한 웃음을 터트리며 ‘역시 켄, 자네야!’라는 소리를 지껄였다.
“자네라면 다프카의 후예를 넘어서 다프카보다 더 위대한 대전사가 될지도 모르겠어. 자, 어서 돌아가지.”
조난자 구조 스토리가 끝났다.
▣ 053. 승자는 정해져 있다
“일어났냐?”
그림자를 가지고 놀던 이가 눈 뜬 그를 반겼다.
“──.”
제 입에서 어렴풋한 발음이 흘러나왔다.
“깼으면 어서 일어나.”
금빛 머리카락을 짧게 깎은 화검사가 그를 재촉했다.
“참 아이러니한 일이지. 잠도 꼬박꼬박 자야 하고, 영양 섭취를 하지 못하면 죽는 그대가 우리 중에서 가장 강하단 사실은.”
로브를 깊게 눌러써 하관만 보이는 것이 다인 여성은 오랜만에 말을 내뱉었다.
“기도하는 거 아니었어?”
아이들만이 가질 수 있는 낭랑한 고음이 투덜거렸다. 그림자술사 성격상 시체교주에게 놀아 달라고 칭얼거렸다가 침묵에 못 이겨 떨어져 나온 상태였을 것이다.
“…그냥 일반인이라고 말해.”
“그대는 기인이잖나.”
“기라고 해 봤자 코딱지만 한 게 다구만.”
잠을 오래 자지 못한 까닭에 목소리가 조금 갈라졌다. 흔한 일이었다. 그는 웅크려 자던 몸을 일으켜 세웠다. 우득, 우득 소리가 났다.
“왜 그래?”
“아니야.”
좀 더 편한 곳에서 잤던 것 같은데, 기분 탓인가.
그는 뺨을 긁적이다가 고개를 저었다. 이런 사소한 기시감에 빼앗길 시간은 없다.
“자.”
화검사가 레이피어 끝에 무언가를 걸고 내밀었다. 그것은 스프가 담긴 수통이었다. 심지어 따뜻했다.
‘어디서 구한 거야?’라고 물으니 ‘먹기나 해.’라는 퉁명스러운 답이 돌아왔다.
“어디서 구했겠나. 영양 보충이 필요한 그대가 굶주림을 이유로 제 실력을 못 내면 안 되니 새벽부터 부산스럽게 만들었네.”
“네가? 직접?”
“하! 나한텐 주지도 않았다고, 빌어먹을 계집이!”
동굴 입구에 서 있던 성주가 투덜거렸다. 화검사가 옅은 조소를 머금었다.
“마법사 칭호가 아까운 발언이야. 한 끼 안 먹어서 실력이 떨어지는 일반인으로 돌아가면 만들어 주지.”
“하!”
돌려 말하자면 결국 한 끼 못 먹었단 이유로 징징거리지 말고 제대로 하란 소리다.
“참고로 성주도 사냥에 동참했다네.”
“난 구경했어. 초능은 한계치가 존재하니까!”
“저 사이비 놈이!”
“구백구십만의 이계신이 존재하는 땅에 사이비가 어디 있고 본교가 어디 있겠나.”
말로 시체교주를 이길 자는 없다. 그는 그들의 만담을 들으며 성주가 사냥하고 화검사가 끓인 스튜를 꿀꺽 삼켰다. 그림자술사가 옆에서 연신 ‘맛있어? 어때?’라고 조잘거렸다.
“이렇게 얻어먹기까지 했으니 절대 실패는 못 하겠네.”
그는 빈 수통을 동굴에 던진 후 온몸에 채워진 무기를 점검하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동굴 가장 바깥, 방패를 내세우고 있던 성주가 콧김을 후욱 뿜었다.
“늦어!”
“오오냐. 미안하다.”
방패가 거둬지고 빛이 동굴 안으로 흘러들었다. 괴수들에 둘러싸여 고립된 도시가 보였다. 지평선은 노을로 인해 불타는 것처럼 붉었다.
“자, 가자.”
밀빛 머리카락이 보구에 뒤덮였다.
“저 빌어 처먹을 괴수들을 죽이러.”
* * *
은우는 눈을 번쩍 떴다.
“일찍 와 계셨네요!”
기철이 막 그가 있는 테이블로 다가오고 있다.
“음료만 바로 주문하고 오겠습니다.”
“네.”
가방을 내려놓은 기철이 음료를 주문하러 다시 나갔다. 그사이 은우는 방금 꾼 꿈을 정리했다.
드물게 카페 내 사람들이 아무도 없어서인가. 자신이 외부에서 선잠에 들 줄이야. 심지어 그 선잠으로 꿈을 꾸었다는 것도 신기하다.
그는 목덜미를 쓱 쓸었다. 게임 때문인가? 꿔도 하필이면 그때 꿈을 꿨는지 모르겠다.
은우는 손톱으로 테이블을 살살 긁다가 그냥 신경을 끄기로 했다. 꿈같은 무의식적 현상에 일일이 관심 둬 봤자 얻는 이익은 없다.
그는 대신 달달한 흑당 달고나 커피를 한 모금 삼켰다. 30년 전 무슨 사태로 탄생한 조합이라는데, 위에 뿌려진 생달고나가 빠드득 씹혀서 제법 식감이 좋았다. 달기도 달았고.
『레드바 님> 형님 그 소식 들으셧어요??』
문자 알림음이 귀를 때렸다.
『레드바 님> 반반마니 고소당했답니다』
『레드바 님> 지금 완전 난리난리 저세상난리』
『레드바 님> 혹시 모르실까봐 말씀드려요^^7』
반반마니가? 고소? 은우는 답장을 보낼까 하다가 다가오는 기척에 전자 노트를 집어넣었다. 나중에 확인해도 늦지 않다.
“이야, 역시 사람이 직접 운영하는 카페가 좋아요. 덤도 주고.”
박기철은 너스레를 떨며 자리에 앉았다. 에스프레소와 과자가 그 손에 들려 있다. 설탕이 잔뜩 뿌려진 과자는 보기만 해도 달아 보였다.
“은우 씨도 드세요. 주인분께서 일부러 두 개 주셨거든요.”
은우는 떨떠름하게 과자를 받으며 생각했다. 그가 나갈 때 감사 인사를 하고 나가는 게 저 주인장에게 좋은 일일까, 그냥 나가는 게 더 좋은 일일까.
“은우 씨는 단 음식을 정말 좋아하시는군요……?”
“네.”
다른 맛을 싫어하는 건 아니었다. 맛있으면 다 잘 먹었다. 다만 단 음식을 유독 고집하는 건 전생에서 그만큼 희귀했던 탓이다.
무엇보다 힘겨웠던 고교 시절, 희수는 그에게 툭 하면 초콜릿과 사탕을 쑤셔 박아 줬다. 그래서 그런가. 그 이후로 파블로프의 개처럼 기분 전환 하고 싶으면 단 걸 찾았다.
“운동하시는 분들은 근 손실인가 온다고 단 거 잘 안 드신다는데.”
기철의 말에 은우는 눈을 껌뻑였다.
“그게 뭡니까.”
단 것과 함께 운동하는 걸 스트레스 해소로 삼는 누군가는 근 손실이란 단어를 이해하지 못했다. 기철은 아니라며 손을 휘저었다.
“오늘 은우 씨를 부른 건 광고 때문입니다!”
상큼한 제의였다. 지금껏 광고 제의가 들어와도 문자로만 전달했던 걸 생각하면 유독 상큼하다. 꿍꿍이가 의심될 정도로.
“그렇게 노려보시면 상처 받습니다…….”
“상처가 아니라 겁먹으시는 것 같습니다만……. 그리고 안 노려봤습니다.”
원래 눈이 째진 걸 어쩌란 말인가. 은우는 무의식적으로 제 눈가를 쓸었다. 껄끄러운 제 전생이나 거북한 제 형이 부러워지는 건 항상 이런 때다. 그들의 처진 눈매를 가지고 있었다면 지금보다 아주 조금은 더 나았을 것이다.
“정말 좋은 광고라서 그렇습니다. 은우 씨가 부담스럽지 않게 찍을 만한 내용이고, 향후 행방에 조금의 문제도 되지 않을 광고죠.”
그러니까 지금까지 문자로 보내 온 광고는 별로니 받아들여도 되고 안 받아들여도 되지만, 이번 건 정말 괜찮으니 받아들여 줬으면 좋겠다. 이 소리렷다.
“보여 주세요.”
“자, 여기 정리해 왔습니다.”
아날로그 인간은 어김없이 서류철을 들이밀었다. 은우는 그것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내용을 읽었다. 법적 문제는 여전히 어렵지만, 대강 내용 파악은 된다.
“금액이… 크네요.”
“지금까지 튕기신 것 덕분에 몸값이 더 올라갔거든요. 그리고 브랜드값도 있고요. 무려 킨슨이잖습니까? 은우 씨 때문에 균열 사냥꾼이 외국에서 빵 뜬 걸 생각하면 이 금액은 당연합니다.”
참고로 광고 내용은 킨슨에서 새로 낼 레이싱 게임과 이미 낸 게임인 균열 사냥꾼의 홍보 영상, 이 두 가지였다.
“나중에 가면 전속 모델 제의도 올지 모르겠습니다만… 그건 지금 생각할 일이 아니죠. 일단 계약 내용부터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기철은 은우가 놓친 점들을 조목조목 집어 설명해 주었다. 물론 그는 광고를 권유하는 입장이므로 좋은 점만 말해 주었다.
때문에 은우는 그것이 그럴싸한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진의 여부가 어쨌든 긍정적인 점만 부각돼서 기분이 묘해진다 이거다.
“…별로십니까?”
“아뇨, 그 정도까진.”
연예인이나 인기 인플루언서만 찍는 광고를 그가 찍는다 생각하니 감회가 새로울 뿐이다. 동시에 은우는 희수를 떠올렸다. 찍은 광고가 세상에 나오자마자 놀릴 거다. 분명 놀린다.
은우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쯤 되면 친구 놈인지 웬수 놈인지.
“…제가 광고를 찍을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너무 어렵게 생각하실 필요 없으십니다. 고작해야 게임 플레이 영상인걸요.”
그건 그렇다. 지금까지 거절해 온 광고는 죄다 제품 광고거나 했는데─숙제 방송은 별개다─이건 게임 홍보 영상 아닌가. 하나는 비록 해 본 적 없는 레이싱 게임이지만, 이것도 해 보면 감이 잡힐 것이다.
“근데 균열 사냥꾼은 그렇다 쳐도 레이싱 게임은 왜……?”
“은우 씨가 오토바이 헬멧을 쓰고 계시잖습니까?”
생각보다 간단하고 어이없는 이유였다. 은우는 납득했다.
“괜찮네요.”
“그럼 진행하겠습니다?”
“네.”
기철이라면 알아서 괜찮은 일정을 잡아 제시해 줄 거다. 은우는 나머지를 다 떠맡겼다. 이런 거 대신 해 주라고 저들에게 돈 주는 것이므로 양심의 가책 따윈 없다.
“그러고 보니 은우 씨, 이번 광고까지 찍으시면 엄청 돈 모으셨겠습니다.”
“아, 네.”
“억대인데 쓰진 않으십니까? 차라거나 시계라거나… 집도 그렇고?”
차는 별로 관심 없다. 디자인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 그에게 차는 비싼 고철 덩어리에 불과했다. 대중교통도 발달했는데 구태여 살 가치를 못 느끼겠다.
시계 같은 명품도 마찬가지였다. 전생에서도 은우는 자신의 목숨을 구해 줄 장비에 투자했지, 화려하게 빛나기 위해서 옷을 산 적은 없었다.
“집 살 생각입니다.”
“월세가 아니라 아예 구매를 생각하시나 보군요?”
“네.”
“흐음, 그쪽도 알아봐 드릴까요? 학교에선 그런 거 가르치지도 않을 테고, 은우 씨 성격상 혼자 알아보고 계실 텐데 어려우실 겁니다.”
기철의 제안에 은우의 고개가 들렸다. 집까지 대신 구해 주는 건 그들 업무가 아닐 텐데.
“업무는 아니지만, 은우 씨는 저희 채널의 중요한 스트리머가 아닙니까. 이 정도 편의는 봐드립니다. 무엇보다… 아시잖습니까? 신상 정보 한 번 털리면 얼마나 위험한지. 안전한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박기철은 빙글빙글 웃었다.
“은우 씨의 경우는 침입자분을 더 걱정해야겠습니다만, 은우 씨도 그건 바라지 않을 것 아닙니까?”
맞는 말이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딱히 손해는 아니었으므로─그럼에도 부탁하지 않은 건 그런 사적인 일까지 맡기고 싶지 않아서였다─은우는 박기철에게 일을 넘겼다.
“그럼 원하는 조건에 대해 따로 문자 부탁드립니다. 맞춰서 찾아볼 테니.”
맡기고 나니 왜 지금껏 혼자 고민해 왔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편해졌다. 은우는 알았노라 고개를 주억였다.
“아, 그렇지. 그 소식 들으셨습니까?”
“글쎄요.”
저렇게 말하면 뭘 말하는지 모르겠다.
한창 인기몰이 중인 드라마가 표절작이라는 것? 게임에 미쳐 살다가 현실에서도 혼동을 일으켜 살인을 벌인 미친놈이 나왔다는 것? 아임휴먼 제작사에서 신작 데모를 출시한 것?
은우는 그냥 순순히 토설하란 의미로 박 팀장에게 시선을 주었다. 찔끔한 기철이 바로 답을 내놓았다.
“VR을 자주하면 현실에서도 혼동을 일으킨다 뭐다, 말이 많잖습니까. 저희 측에서도 그것을 우려해 스트리머분들이 원하시면 정신과 의사분을 소개해 드리기도 하고요.”
그가 아는 소식이었다.
“그런데 이번 사건 때문에 아무래도 법이 새로 제정될 것 같아서요.”
“그렇습니까.”
“벌써 은밀하게 지침도 내려왔습니다.”
게임 방송 스트리머는 VR을 자주 플레이하는 입장이다. 관련 법이 제정되면 1순위로 지목되는 게 당연하다.
“곧 모든 다이아박스 스트리머분들은 주기적으로 정신과 진료를 받으시게 될 겁니다. 물론 정신과는 진료 기록 절대 안 남으니까요. 비밀 엄수도 저세상 수준이고. 뭐, 이미 아시겠지만?”
“압니다.”
“다행이네요. 관련 이야기는 계약서로 깔끔히 정리되어 곧 전달될 겁니다. 그러니 그때까진 대충 병원 다니겠구나, 정도만 알아 두시면 됩니다.”
은우는 목덜미를 쓸었다. 스트리머 일을 시작한 이래 까먹고 안 다닌 병원을 다시 다니게 생겼다. 솔직히 돈 핑계 대고 끊을 수 있게 됐을 때 상당히 편했는데.
“그것 외 소식은… 그렇네요. 이게 있었죠.”
더 있나? 은우는 음료 잔을 들었다.
“반반마니가 고소당했답니다.”
기철의 안경 아래 눈매가 길게 휘어졌다. 독사도 저리 스산한 비늘 소리를 내진 못할 것이다.
그는 답을 내렸다.
“고소하신 거겠죠.”
“하하. 도움을 드린 건 맞지만, 제가 주체는 아니니까요.”
이 능청맞음을 보아라. 은우는 음료를 쭈욱 들이켰다. 박기철, 이 양반은 적대적인 이계신 앞에 내놔도 그 잘난 입으로 설득해서 계약을 해낼 거다. 신성 친화도가 낮든 높든 권능도 받아올지 모른다.
“뭐, 어쨌든 그쪽은 더 이상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네.”
그렇지만 아군이니까. 그가 이득을 줄 때까진 그의 아군일 테니까.
은우는 목덜미를 쓱 쓸었다. 카페 유리창 사이로 흘러드는 뙤약볕이 마치 금빛 핏물 같았다.
* * *
‘Extrasolar Hunter'의 스토리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분기점이 있는 건 아니고, 두 가지 사건이 동시에 진행되기 때문이다.
먼저 로크즈류의 번영. 타 종족의 침입을 막고 역으로 반격도 해 가며 로크즈류를 키우는 게 첫 번째 주요 사건이다. 전투는 물론이거니와 마을 발전을 위해 재료를 엄청 모아야 해서 극강의 노가다라 불렸다.
또한 이 과정에 괴수들이 계속 로크즈류로 쳐들어오기 때문에 괴수들도 막아 내야 했다. 괴수들이 쳐들어오는 이유를 밝히기 위해, 대처법도 알기 위해 미개척지도 개척해야 했고.
그러다 보면 새로운 사건이 발견되는데, 그것이 바로 ‘부패’였다. 미개척지 깊은 곳에서부터 부패독이 퍼지기 시작하며 괴수들의 생태계를 무너트린 것이다.
이대론 괴수들이 끊임없이 쳐들어올 터. 근본적인 원인을 제거하기 위해 주인공을 비롯한 전사들은 미개척지의 중심으로 향한다.
이게 두 번째 주요 사건이다. 첫 번째 사건보다 스토리의 중점인 이야기이기도 했다.
“부패독이 이렇게까지 퍼져 있을 줄이야…….”
은우는 현재 첫 번째 지역 《개척 수림》과 두 번째 지역 《칼날소리의 대지》, 세 번째 지역 《갉아먹는 사막》까지 온 상태였다.
참고로 1기 개척단이 탐색한 지역은 사막 중반부까지로, 이제부턴 완전한 미지다.
“부패독으로 인해 변질된 종까지 등장했어. 예삿일이 아니야. 이대로 내버려 뒀다간 미개척지 전체가 오염될 거다.”
“맞아요. 심지어 어쩌면… 본토까지 위협당할지도 모르죠.”
명목상으론 같이 파견된 전사들이 이래저래 떠들었다. 은우에겐 조금 먼 나라 일이었다.
전생에서도 그는 이런 근본적인 원리에 대해 뜻을 두지 않았다. 일반종과 변종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 공략 방법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는 알아도 그것들이 왜 달라졌는지는 관심 없는 거다.
“켄, 일단 돌아가자.”
이벤트 신 속 캐릭터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자유가 돌아왔다. 은우는 시청자들의 의견에 따라 또 한 번 바꾼 무기를 들었다.
에임든브의 부락을 정복하면 개방되는 무기로, 가장 간지가 난다는 기계낫이었다. 칼날을 어떤 방향으로 설치하냐에 따라 낫이 될 수도, 곡선 날이 달린 창이 될 수도 있다.
은우는 무기를 든 채 앞장서서 걸었다. 사막 자체가 주는 대미지를 버티기 위해 바꾼 장비가 걸음걸음마다 사르륵 소리를 내었다. 얼음을 얼려 만든 듯 투명한 가죽 탓이다.
칼날소리의 대지에서 잡을 수 있는 얼음 비룡들의 비늘과 피막으로 만든 옷은 그 자체로 냉기를 가져다주니. 사막의 낮을 버티기엔 이것만큼 좋은 게 없다. 밤에는 추워서 불 속성 장비를 껴입어야 하지만.
쿵!
그러다 거대한 폭음이 들려왔다.
“무슨 일이죠? 어서 확인해 보러 가요!”
은근한 지시가 내려졌다.
─왜 구지 가는 거임??
─걍 도망이나 가지
─맞춤법 불편ㅡㅡ
“저들이 멍청한 게 아닙니다. 이런 건 미리미리 확인해 두지 않으면 나중에 화가 될 수 있거든요.”
그는 시청자들의 불만을 다독이며 진동의 근원지로 향했다. 곧 모래 언덕 위에서 그 사태의 본질을 목격할 수 있었다.
사막에 거주하는 대괴수 중 하나인 유슬라카프가 같은 대괴수 종인 흐딕스 떼를 공격하고 있었다. 다만 본래 유슬라카프는 적갈색인데 반해 저기 있는 유슬라카프는 검정색이었다. 변종이란 의미였다.
“흐딕스랑 유슬라카프 변종이 싸우는 거였나…….”
“그보다 흐딕스들이 좀 작은 것 같은데…….”
“새끼겠지. 저길 봐라.”
“…어미가 죽었군요.”
은우는 NPC들이 떠드는 소리를 들으며 시청자들에게 말을 걸었다.
“저 둘을 잡으라고 할까요?”
그건 앞으로 나올 퀘스트에 대해 추론해 보는 것이다.
그때, 컷신이 짧게 시작되었다. 캬르르륵. 조금 거대한 코요태를 연상시키는 흐딕스는 그 까만 눈을 일렁이며 그들을, 은우의 캐릭터를 바라보았다.
깨갱!
가장 앞에서 싸우던 그나마 큰 흐딕스가 몸을 뉘였다. 제일 자그만 흐딕스가 유슬라카프의 다리 하나를 깨물었다. 전갈을 닮은 유슬라카프는 꼬리로 그 작은 흐딕스를 찔렀다.
이제 남은 건 중간 크기의 흐딕스밖에 없다.
은우의 캐릭터가 무기를 굳세게 움켜쥔 것도 그때였다.
“유슬라카프를 죽이겠습니다.”
“뭐?!”
“위험해요!”
“변종이 일반종을 죽여 생태계를 위협하는 걸 보고 있을 수만도 없잖습니까.”
캐릭터는 무기를 쥐고 모래 언덕을 미끄러져 내려갔다. 팔뚝에서 뻗어 나간 화살이 유슬라카프의 머리를 때렸다. 마지막 흐딕스를 죽이려던 꼬리가 회수되고, 유슬라카프가 고개를 돌렸다. 상처를 입은 흐딕스가 캐릭터를 처연하게 바라보았다.
『‘유슬라카프 변종’을 발견했습니다.』
전투가 시작되었다.
물론 승자는 정해져 있었다.
검은 전갈이 사막 위에 스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