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은우는 눈꺼풀을 느리게 껌뻑이며 공지를 작성했다. 대회에 나갔다 왔으니 만큼 방송을 하루 쉴 요량이다.
솔직히 휴방할 정도로 피곤하냐면 그건 아니나, 모처럼 얻은 휴식의 기회 아닌가. 중요한 건 그의 피로함이 아니라 사람들이 납득해 줄 수 있느냐다.
그는 글을 적다가 문장이 막힐 때면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책상의 유리판은 여전히 금이 가 있다. 빨간 망토의 액션 이후로 갈지 않았다.
은우는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공지 작성을 끝마쳤다. ‘등록’ 버튼을 누르면 공지는 알아서 잘 올라간다.
거기까지 해낸 후, 그는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다 말고 완전히 감겼다.
빈속이지만 별로 저녁 생각이 나지 않았다. 억지로 붙인 눈꺼풀이 잠을 몰고 왔다. 깊게 자지 못하는 대신 악착같이 잠에 빠져들 수 있는 특성은 전사의 미덕이었다.
그러다가 잠결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밥은 좀 먹고 자지.”
은우는 그 목소리를 외면했다.
▣ 049. 고기는 때려야 육질이 좋아진다
푹 쉬고 난 다음 날, 그는 시간에 맞춰 방송을 켰다.
“구하, 유하. 어제 하루 못 봤을 뿐인데 오랜만에 보는 기분이 드네요.”
─켄ㅎㅇ
─안녕하세요
─켄하
─대회 잘봤습니다!!
─어제 왜 안 함?
은우는 대회 때문에 하루 휴방했을 뿐인데, 그 한 번으로 거센 반응을 보이는 시청자들에게 살짝 웃어 주었다.
“너무 그러지 마세요. 저도 그렇게 될 줄 몰랐습니다.”
낮고 잘은 웃음소리에 사람들이 분을 삭이기 시작했다. 천 년의 화마저 식는 목소리여서 어쩔 수 없었다.
─목소리 때문에 봐줌ㅡㅡ
─국제 대회 열린다는 소문 있던데, 거기 나가실 건가요??
─이제 빌리 팀 소속임?
“아뇨, 국제 대회 안 갑니다. 빌리 님 팀이 된 것도 아니고요. 앞으로 네뷸라 워는 안 할 겁니다. 제 취향은 아니거든요.”
이렇게 지지부진 잡담을 나눴다간 대회 이야기가 지분의 전부를 차지할 것이다. 소위 ‘네뷸라무새’라고 불리는, Nebula War 하기만을 바라는 시청자층이 몰려올지 모른다. 그것은 좋지 않다.
은우는 화제 돌리기를 택했다. 마침 그에겐 훌륭한 무기가 있었다.
“자,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죠. 오늘 할 게임은 ‘Extrasolar Hunter’입니다.”
과연, 게임 제목을 이야기하자마자 채팅 창을 이루던 말들이 180도 바뀌었다. 할 게임이 결정된 만큼 좋든 싫든 관련 이야기만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온라인 게임도 아닌데 다운로드는 퍽 오래 걸렸다.
은우는 게임을 켰다. 대기실이 무너지며 새로운 세상을 가져오기 시작했다. 모닥불이 불씨를 흩날리는 동굴이었다.
나가는 길목은 있지만, 나갈 수 없다. 동굴 한쪽 벽면에는 게임의 섬네일 로고와 기타 글씨가 적혀 있다. 새 게임, 설정 등등이다.
“신기하네요.”
은우는 그중 설정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벽화가 지워지며 새로운 글씨들을 떠올렸다. 그중 그가 변경해야 할 건 당연하게도 ‘자동 전투’를 끄는 거다.
그 외 체력 표시, 타격 표시, 미니 맵 등도 껐다. 사람들이 벌써부터 난이도 조절한다며 우스갯소리를 지껄였다.
“아, 난이도가 따로 있습니까?”
─쉬움, 보통, 어려움, 전문가 모드 이렇게 4개 있어요ㅋㅋㅋ
─4개 있음
─난이도 있어요~~
당연하지만 전문가 모드가 제일 어려울 거다. 은우는 고개를 주억이며 일단 기타 편의를 위한 인터페이스를 전부 꺼 놨다.
사람들이 또 한 번 웃음을 터트렸다. 은우라면 무조건 전문가 모드를 할 텐데 그러면서도 편의성을 삭제하는 게 웃긴 것이다.
그렇지만 은우로서도 이건 필요한 일이었다. 강제로 제공한다면 모를까, 선택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라면 없는 게 좀 더 방송에 적합하다.
또한 은우는 이 게임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만 전해 들었을 때, 제일 현실적인 형태로 하겠노라 마음먹었다.
아무렴 이 게임은 칼이나 망치 같은 무기들로만 수십 가지 종의 괴수를 잡는 게 특성이었다. 단순히 피와 살점이 흘러넘치던 엔젤 돈 크라이보다 훨씬 재밌을 거다. 기회를 놓치긴 아깝다.
그렇게 설정을 전부 마친 그는 본격적으로 게임을 시작했다. 몸의 감각이 상실되고, 그 스스로가 카메라가 된 것처럼 주변을 살피며 부유하기 시작했다.
나갈 수 없던 동굴 밖으로 시점이 이동한다. 푸른 색감의 숲이 펼쳐졌다.
Extrasolar(외계의, 태양계 밖의)란 단어에 걸맞게 그 숲은 그들이 일반적으로 아는 숲과 달랐다.
바닥엔 야광 이끼가 곳곳에 피어 있고, 울창한 숲은 하늘의 빛을 가렸다. 거대 해파리 같은 식물이 기이한 빛을 뿜으며 있는가 하면, 원시시대처럼 사람보다 큰 고사리 같은 것이 있기도 했다.
그리고 그 끝에, 은우는 하나의 집단을 발견했다. 짐을 한가득 싣고 이동하는 무리였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이 이상 나아간다면 그대들은 돌아갈 수 없다. 두렵다면 어서 돌아가라. 그렇지만 각오가 되었다면 가자, ‘로크즈류’를 향해서.〛
그들을 따라 움직이나 싶던 시야가 위로 치솟았다. 나뭇가지와 나뭇잎, 넝쿨 줄기 등을 피해 위로, 위로. 하늘을 향해서.
그리고 나무의 그늘에서 벗어났을 때, 시청자들이 탄성으로 채팅 창을 물들였다.
진정한 판타지 세상이 그곳에 있었다. 공중에 떠 있는 대지, 흘러내리는 물줄기, 감히 살아 있을 적을 예상할 수 없는 거대한 괴수의 갈비뼈. 이 게임이 오픈 월드임을 생각하면 뭐라 평하기 어려울 그래픽이었다.
‘Extrasolar Hunter’. 고유의 로고가 떠오르고 시야가 다시 깜깜해졌다.
다시 깨어난 곳은 숲속이었다. 바로 옆에서 시냇물이 흐르는지 물소리가 들려왔다.
“일어나! 이 르나퀴 같은 녀석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누군가를 타박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듣자마자 고개가 절레절레 저어졌다. 은우가 한 게 아니라 게임상 저절로 움직인 것이다.
시야도 강제로 고정된지라 제 얼굴은커녕 몸이 어떤지도 알 수 없다.
“기상 시간이다!”
알 수 없는 목소리가 타인을 재촉했다. 그리고 은우의 캐릭터는 고개를 한 번 더 젓곤 시냇물 앞에 쪼그려 앉았다. 드디어 그의 얼굴이 비쳤다.
『외모 변경
-피부
-눈
.
. 』
놀랍게도 시냇물 안에 비친 그의 모습은 인간이 아니었다. 그가 설정해 둔 외모값과 비슷하되 피부는 회청색에 눈의 흰자위는 검게 물들었다.
귀의 형태는 검은 수정이 자라난 것처럼 변했는데, 그게 꼭 뿔 같아 보이기도 했다. 이것은 뺨까지 침입해 비늘 같은 것을 만들어 냈다.
옷 사이로 은근히 드러난 살에도 부분부분 피부가 경화되어 있는 걸 보면 종족 자체가 이런 것 같다.
눈가와 뺨, 어깨나 손등에는 흰색으로 무늬를 그려 놨다. 화려하고 요란하다는 느낌보다는 엄숙함이 더 강하다.
옷차림은 원시인보단 발달되어 있고, 현대인이라고 하면 절대 아닌 이미지였다.
노출이 제법 있고 가죽으로 이뤄져 있으며, 뼈나 돌을 엮어 만든 장신구들이 있다. 그렇지만 가죽의 마감 상태나 디자인 자체를 보면 마냥 원시 같지도 않았다.
“헬멧은 또 없고… 외모는 신기하네요.”
인간형이되 인간 같지 않은 느낌으로 디자인하기까지 얼마나 힘들었을까. 은우는 시청자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변경 가능한 설정들을 살폈다.
크게 피부색과 눈동자 색, 머리 색, 얼굴에 그려진 무늬, 비늘의 분포도, 옷 등을 바꿀 수 있었다.
“저는 이대로 가겠습니다.”
기본형으로도 충분하다 싶었으므로 은우는 특별히 바꾸지 않고 게임을 시작했다. 투구나 헬멧이 없다는 것은 속이 쓰렸으나, 게임을 진행하면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을 슬쩍 더했다.
『이름을 입력해 주십시오.』
그가 할 이름은 하나밖에 없다. ‘켄’이라는 글자가 타닥 쳐졌다. 승인이 되자 몸이 알아서 움직였다. 물을 손으로 떠 세수를 한 것이다.
“일어나라!”
또 한 번 터진 사자후에 캐릭터가 얕은 한숨을 내뱉었다. 그러곤 소리가 들린 쪽으로 돌아갔다. 움막이나 텐트는 없으나 모닥불, 바닥에 깔린 잎사귀 등으로 그곳이 캠프임을 알 수 있다.
소리치던 이는 캠프 한가운데에 서 있는 거대한 남성이었다. 은우보다도 10cm는 더 커 보인다. 덕분에 주변에 있는 이들이 더욱 작아 보였다.
“긍지 높은 카카라는 나태하게 굴지 않는다!”
“죄송합니다!”
은우의 캐릭터는 그 외침 속에 자연스럽게 합류했다. 그 누구도 뭐라 하지 않는 걸 보니 일찍 일어나기만 하면 쓴소리는 안 듣나 보다.
“어서 움직여라! 로크즈류가 곧이다! 위대한 1기 개척단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단 말이다!”
거구의 남성은 끝까지 호통으로 마무리했다. 주변인들이 주섬주섬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유일하게 짐을 꾸리지 않는 건 은우의 캐릭터뿐이었다.
“푸른 하늘이 그대를 반기노니, 켄. 역시 다프카의 후예라 불리는 이답다. 다른 놈들이 네놈을 조금이라도 본받는다면 좋을 것을. 2기 개척단에 네가 포함된 게 다행이다.”
“푸른 하늘이 그대를 반기노니.”
캐릭터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다 잠깐, 고개를 휙 돌렸다.
“너도 느꼈나? 큰 놈은 아닌 것 같고… 다른 녀석들을 보내기엔 다들 짐 싸느라 바쁘군. 그렇다고 내가 자리를 비울 순 없으니… 네게 맡기겠다. 부탁하마.”
─아 파론쉑 일 떠넘기네;;
─???: 긍지 높은 카카라는 나태하게 굴지 않는다!
─튜토리얼인가?
─쟤 이름 파론임?
거구의 남성 이름이 파론인지, 사람들이 ‘파론이 일 떠넘긴다’며 떠들었다. 물론 해당 장면은 컷신이었으므로 해당 일에 대해 은우의 의사는 포함되지 않았다. 캐릭터는 멋대로 저 부탁을 받아들였다.
그제야 강제성이 풀렸다.
『◈│캠프 주위를 둘러보며 위협대상 제거하기
□ 가방에서 무기 챙기기
□ 캠프 주위의 흔적 찾기
□ 흔적의 주인을 제거하기』
퀘스트가 상단에 떠올랐다. 아까 설정해 둔 것 때문에 미니 맵이나 퀘스트 대상 표기 등은 떠오르지 않는다.
“억지로 일거리를 떠맡은 건 별로지만… 이것도 다 튜토리얼이겠죠. 일단 무기부터 챙겨 봅시다.”
은우는 몸을 천천히 움직였다. 성능이 꽤 괜찮은 걸 보니 이것도 기본 성능으로 쭉 가는 게임이 아닌가 싶다.
“제 가방이… 이거겠죠?”
그는 그의 발치에 있는 가방을 건드렸다. 그러자 알림 창이 떠올랐다. 직사각형 창에 원고지처럼 죽죽 줄을 그어 나눠 둔 그것은 아무리 보아도 인벤토리 창이다.
들어 있는 아이템은 약초 2개와 붕대 3개, 말린 고기 두 덩이였다.
“회복 템 같은데… 이거밖에 없나요?”
그리 물으며 시범 삼아 각각 하나씩을 챙겼다. 새로운 인벤토리 창이 떠오르며 소비 아이템을 이동시켰다.
가방과 별개로 또 존재하는 건가 의문이 들 즈음, 또 다른 창이 떠올랐다. 인벤토리 창을 끈 이후였다.
『장비 변경』
그 아래엔 장비 목록이 엄청나게 많았다. 맨 마지막에 별 표시와 함께 ‘기본 무기의 경우 몇 번이고 변경이 가능합니다.’라는 대사가 붙은 걸 보아, 다양하게 써 보고 맞는 걸 고르라는 것 같다.
“무엇을 할까요?”
보통은 가장 다루기 편한 한 손 검과 방패 세트를 고르나, 지금 플레이하는 사람은 은우다. 어떤 무기를 집든 미친 퍼포먼스를 보이는 은우.
사람들은 옳다구나 하며 원하는 장비를 지목했다. 미래를 볼 줄 아는 이들은 후원이나 구독으로 벌써 가리킨 상태다.
「‘아카아시쨩’ 님이 ‘10,000원’ 투척!
행님, 해머ㄱㄱ」
─태도오오오!!!
「‘강남건물주’ 님이 ‘30,000원’ 투척!
랜스 어떠신가요?」
「‘BandTY’님이 ‘12,405원’ 투척!
건틀렛이 보고싶습니다」
은우는 언제나처럼 맨 처음 터진 후원으로 골랐다. 거대한 망치였다. 물론 거대하다고 해서 만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크진 않다. 슬래지 해머 정도 크기를 자랑하되 봉 부분이 더 길었다. 유사시 창처럼 써도 무리는 없으리라.
무기 챙기기 퀘스트 옆 박스가 체크 표시 되었다.
“이제 흔적을 찾아보죠.”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은우는 숲으로 나아갔다. 캠프에서 조금 떨어지자마자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공기가 더 서늘해지고 푸르러진 느낌이다.
『‘사냥꾼의 눈썰미’를 활성화하면 사용 가능한 자원 및 생물이 남긴 흔적 등이 밝게 표시됩니다. 대신 스태미나를 소모합니다.』
그는 알림 창을 확인하고 사냥꾼의 눈썰미를 활성화했다. 세상의 채도가 낮아지며 특정 것들이 밝게 형광빛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대부분 식물이나 땅바닥의 발자국 따위였다.
동시에 시야 한편에 스태미나 바가 생겨났다. 체력 바는 꺼 놔서 보이지 않으나, 스태미나 바는 또 별개인가 보다.
심지어 사냥꾼의 눈썰미로 소모되는 양은 정말 적었다. 저것이 바닥을 치려면 적어도 10분은 써야 할 것 같다.
“인간의 발자국도 표기하는군요.”
은우는 스태미나 바를 뒤로한 채 몸을 낮춰 밝게 빛나는 발자국을 매만졌다. 여러 개를 확인하니 알림 창이 또다시 떠올랐다.
『???의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20%)』
그것은 그가 발자국을 확인하면 할수록 퍼센티지가 올라갔다. 기어코 100%가 되었을 땐 ‘???’이라고 표기되었던 것의 정체가 밝혀졌다. 카카라의 흔적이라고 바뀐 것이다.
동시에 노란색이던 흔적들 중 발자국만 파란색으로 변경되었다. 덕분에 발자국 구분은 쉬웠다.
『숙련된 사냥꾼은 조금의 흔적만으로도 흔적의 주인을 밝혀냅니다. 여러 흔적을 찾아내어 숙련도를 쌓으세요. 100% 숙련한 흔적의 경우 구별이 가능해집니다.』
카카라라면 아까 파론인지 하는 남자가 말했던 것 같은데. 은우는 발자국 여러 개와 아까 발언을 골라 생각해 보았다.
“카카라가 종족 이름입니까?”
─네
─파란색 흔적은 끌 수 있어요
─카카라, 스홀들라, 프픽스 뭐 되게 많음
─100% 다 채운 애들은 안보이게 만들 수 있어 형
시청자들은 친절하게도 게임이 알려 주지 않는 것까지 일러 주었다. 사냥꾼의 눈썰미 일부 OFF 기능이다.
필요 없다 판단한 자원이나 흔적은 보이지 않게 배제하는 것으로, 매번 모든 흔적이 보일 경우 시야가 어지러워질 것을 고려해 넣은 기능 같다.
반대로 특정 흔적이나 자원만 빨간색으로 보이게 하는 것도 있었다. 이 경우는 찾기가 더 쉬워질 것 같다.
은우는 고개를 주억이며 주변을 더 훑었다. 자원은 그렇다치고 흔적이 아직 두어 종류가 있다.
그중 그가 주목하는 것은 카카라의 것과 확연히 다른 거대한 발자국이었다. 고양이과 맹수처럼 발가락이 네 개에 발톱이 존재한다.
그의 눈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이거 제법 괜찮네요. 나름 사냥하는 기분이 드는 게.”
사냥꾼의 눈썰미 때문에 비현실감이 들다가도 그럭저럭 나쁘지 않다. 어차피 끄면 시야가 본래대로 돌아와서 그런지도 모른다.
은우는 오랜만에 헌터가 되어 흔적을 살피고 조용히 움직였다. 전생이나 현생과는 전혀 다른 식생이 약간의 고난을 안겨 주었지만, 그 점이 더욱 즐거웠다.
엔젤 돈 크라이가 전장 자체의 느낌을 줬다면 이 게임은 그가 괴수 사냥을 할 때를 재현하는 것 같다.
“여기 정말 잘 표현했네요.”
─크....오졌다
─아, 안 살려고 했는데 켄 하는 거 보니까 엑헌 마렵네;;
─엑헌 개잼임
─버그가 좀 많은 편이긴 한데 갓겜 ㅇㅈ
─아 당장 사러갑니다
검은기사 때도 제작사의 변태 같은 표현력에 놀랐는데, 이쪽도 만만치 않다. 이건 심지어 실시간으로 적이 움직이는 것에 맞춰 구현되고 있는 상황이다. 심지어 오픈 월드였고.
괜히 게임 다운로드가 오래 걸린 게 아니다.
은우는 사냥꾼의 눈썰미를 끈 채 움직였다. 꼭 켜지 않아도 흔적은 보이기에 결정한 사항이다. 사람들이 대체 어떻게 보고 움직이느냐 묻는다면 그건 그가 어떻게 해 줄 수 없지만 말이다.
─오....찐 헌터같음...
─내가 하면 찐따같은데 왜 켄은 헌터같냐
사람들이 자조 어린 농을 내뱉는 사이, 은우는 완전히 사냥꾼처럼 발자국을 쫓고 분석했다. 주변을 빙빙 돌다가 어느 순간 어지러워진다. 그리고 끊겼다.
은우의 귀는 주변 소리를 조금도 놓치지 않는다.
『뷔크자의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주위에 있네요.”
이미 해당 흔적의 주인이 누군지는 알아냈다. 뷔크자. 시청자의 설명에 따르면 표범과 흡사한 짐승이다.
은우의 손이 등 뒤에 매달린 해머의 손잡이를 잡았다. 그리고 몸이 점차 낮아졌다. 소리 없이 손에 잡힌 해머가 휘둘러질 채비를 갖췄다.
파슥!
나뭇잎 떨리는 소리가 들리고, 무언가가 떨어져 내렸다. 은우의 망치가 검은 궤적을 그린 것도 그 때였다.
퍼억!
맹렬한 소리와 함께 검은 형체가 날아갔다. 뷔크자였다. 털없이 매끄러운 검은 가죽에 목덜미에는 아가미 같은 것이 세 갈래 있다. 그 안쪽 살이나 입안은 새파란색이었다.
푸르르-
아가미 사이로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은우는 망치에 얻어맞고도 멀쩡히 걷는 뷔크자를 보며 무기를 탁탁 쥐었다.
“멀쩡하네요.”
─기본무기는 대미지가 약해서 그럼
─ㅗㅜㅑ,,,, 시원하다
─놀랐는데 켄이 넘 침착해서 덩달아 침착해짐
─훌륭한 기습대처였다.
이것도 대미지 싸움인가. 그렇지만 그는 대미지 표기를 꺼 놔서 모른다.
몰라도 죽일 수 있다.
은우는 그의 주위를 어슬렁어슬렁 도는 뷔크자를 보며 해머를 고쳐 잡았다. 뷔크자가 그에게 다시 덤벼들었다.
세상이 다르고 형태가 달라도 비슷한 구조일 경우엔 움직이는 양상마저 같은 걸까? 저런 건 너무 많이 잡아서 눈 감고도 잡을 수 있겠다.
은우는 한 걸음 이동하는 것으로 그것을 매끄럽게 피한 뒤 망치로 그것의 대가리를 쳤다. 대미지가 얼마나 나오는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크리티컬Critical이 떴다는 건 알겠다. 뷔크자가 휘청거렸다.
“고기는 때려야 육질이 좋아진다던데.”
─동물학대on
─인간이 미안해ㅠ
─구울왕은 자비같은 거 읍다 이거야~
─머리 맞췄는데 일격사 아니네;;
은우는 싱긋 웃으며 해머를 휘둘렀다.
곧 뷔크자가 바닥에 몸을 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