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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자도 방송할 수 있습니다-47화 (47/233)

47화

은우는 어떤 순간에도 공격하는 입장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그가 타인을 치료할 능력이 없고 특성상 방어에 적합하지 않다는 건 둘째 치고서라도, 공격이 가장 편하기 때문이다.

이번 생에서도 마찬가지다. 타인을 배제한 채 승리를 가져오거나, 협력을 한다 해도 결국 그가 공격의 중점이 되어 판도를 바꾸었다.

제대로 된 협력을 했다기보다는 그의 실력으로 대충 밀고 들어갔단 소리다.

그렇지만 힐러 역할은 다르다.

그는 경계하기 위해 아군의 기척을 찾는 게 아니라 그들을 살리기 위해 살펴야 했다. 적을 죽이기 위해 적을 발견하는 게 아니라 그가 버텨 내기 위해 위치를 파악해야 했다. 아군을 믿고 그들에게 의지해야 했다.

이용당하기 싫어서 결정한 직군이었으나, 이건 그에게도 좋은 기회였다. 힐러만큼 협력에 익숙해질 수 있는 직업은 없었으므로.

▣ 047. 시간 끄는 것

은우가 고른 것은 전형적인 힐러 포지션의 지원형 성좌, 뱀주인이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의술의 신이라 불리는 아스클레피오스를 모티브로 만들어졌다.

그리스 출신답게 뱀주인 성좌는 하반신에만 천을 두른 충격적인, 아니 파격적인 패션을 자랑했다. 그로 인해 많은 이들이 시각 테러라며 변경을 요청했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켄 님은 그리스 출신 성좌 하시면 안 될 듯.”

“이거 진짜 19금 먹는 거 아니에요?”

“와… 와… 켄 님, 절대 제 근처 접근 금지.”

“크, 역시 젊음이 좋긴 좋아요?”

“탄산 님, 너무 흐뭇하게 보시는 거 아녜요?”

성좌를 택하는 대기 시간, 은우는 낯 뜨거워지는 소리를 들으며 마른세수를 했다. 사람들이 저리 반응하니 괜히 창피하다. 헬멧의 존재가 절실할 정도다.

그는 어깨에 장식용으로 얹어진 천 하나를 주섬주섬 넓게 폈다. 다른 손에는 뱀 한 마리 감겨 있는 지팡이가 들려 있다.

“쓸데없는 것에 집중하지 마십쇼.”

그는 그 지팡이로 세 사람의 정수리를 콩콩 때렸다. 탄산은 (많이) 연장자니까 봐주었다. 탄산이 허허 웃었다.

“자, 그럼 모두 잘해 봅시다.”

“꼭 이겨요, 우리.”

“파이팅.”

“아니, 산호. 왜 이렇게 힘없는 파이팅이냐.”

“뭐.”

그들은 시시덕거리며 줄어드는 초를 확인했다. 특별 경기로 결정된 승부는 점령 모드이니, 이제 그들은 지금껏 해 왔던 노력을 터트리기만 하면 됐다.

3, 2, 1. 게임이 시작되었다.

“나갑니다!”

은우는 맨발로 살랑살랑 걸으며 기본 스킬인 ‘메두사의 피’를 이용해 팀원에게 새로운 버프를 걸어 주었다. 한 사람을 골라 공격력을 차근차근 올려 주는 기술이다.

물론 본래 패시브 효과는 초당 자가 회복이며, 아군에게 버프를 걸어 줄 땐 자가 회복이 발동되지 않는다. 또한 제대로 된 효과를 보려면 오래 쬐어야 했고, 기술을 다른 사람에게 돌린 순간부터 효과가 떨어진다.

그러나 이 모든 점에도 불구하고 초반 이동할 때는 쓰기 좋은 스킬이었다. 뱀주인 성좌의 치명적인 단점 때문에 초반 이외엔 거의 쓰이지 않지만 말이다.

그는 혹시라도 그가 전면에 서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며 움직였다. 공격군이 아니란 게 어색할 뿐, 뒤에 선 적은 많았기에 어색하진 않았다.

물론 그 시절에는 잡졸들을 떠넘기느라 뒤에 선 거였다. 가장 강력한 적을 상대해야 하는 입장에서 잡졸을 상대하느라 얼마 없는 기를 소모할 순 없었기 때문이다.

“적군 발견!”

맵 내 몬스터들을 처치해 가며 전진하던 그들은 드디어 빌리 팀과 마주쳤다.

레리가 이를 악물더니 그대로 검을 치켜들었다. 탈라리아의 날개가 발동되며 그녀의 달음박질이 더욱 빨라졌다.

상대방 쪽에서도 누군가가 튀어나왔다. 은우 입장에선 녹화 영상으로만 접한 게 다였던 빌리였다. 실제로 마주하는 건─사실 이것도 현실은 아니었다─처음이다.

은우는 레리에게 몇 초간 보호막을 씌워 주는 신의 가호를 발라 주었다.

“좌측 화살!”

“까마귀 있다!”

궁수 성좌의 슬리퍼가 속사로 화살을 쏘아 내고, 쌍둥이 성좌의 산호가 분신을 만들어 내며 공격했다. 탄산은 시계 성좌답게 상대방을 둔화시키는 스킬을 날렸다.

그러나 적측도 만만치 않았다. 슬리퍼의 궁수 성좌와 비슷한 화살 성좌와 용으로 변신할 수 있는 용 성좌가 날뛰었다.

특히 후자의 경우 용으로 변하면 조작이 힘겨운 대신 엄청난 화력을 자랑하는 성좌였다. 육신과 감각의 불일치 때문에 조작이 어려운 거라는 걸 생각하면, 그 위화감을 이겨 냈을 때 엄청난 강함을 자랑할 수 있단 소리다.

은우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치료의 손길. 반투명한 손이 허공에 생겨나며 레리와 그 주변에 있던 이들을 쓰다듬었다. 은우의 반경 3m 내에 있던 이들도 치료를 받았다.

본래는 은우를 중심으로만 발동되는 스킬이지만, 신의 가호를 받은 대상을 중심으로도 스킬이 사용되기에 가능한 일이다. 범위 안에만 있다면 몇 명이든 같은 자원 소비값으로 치료할 수 있다는 것 역시 톡톡히 한몫했다.

팍!

그런 은우를 노리며 화살이 날아들었다. 끌릴 정도로 긴 옷자락이 불편하기라도 하련만, 그는 꼭 춤을 추듯 그 모든 공격을 피했다.

지원형 성좌 중 생존력이 최악에 속하는 뱀주인 성좌라곤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뱀주인 성좌는 옷 때문에 기본 움직임도 불편하고 방어기도, 회피기도, 이동기도 없기 때문이다.

“힐러 직접 끊으세요!”

과연 은우가 나타나기 전까지만 해도 스트리머 중 피지컬 최고로 뽑힌 사람은 뭐가 달랐다. 빌리는 레리를 상대하면서도 간간이 산호를 견제하며 외쳤다.

그 외침에 나선 건 까마귀 성좌였다. 공격형과 돌격형 사이에 걸쳐 있는 용 성좌나 이동기가 단거리인 화살 성좌보단 낫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지원형 성좌(힐러)인 거문고가 나설 수도 없었다.

“반반마니……!”

산호가 이를 갈듯 외쳤다. 다행스럽게도 뒤에 욕설이 붙진 않았다. 지금 대화가 방송에 송출된다는 걸 의식한 모양이다.

“까마귀 막아!”

슬리퍼랑 산호, 탄산이 최대한 은우를 보호하려 들었다. 그러나 압도적인 화력의 용 성좌와 혼자서 1.5인분을 하는 빌리는 어떻게든 틈을 만들어 냈다.

은우의 눈이 조급해하는 사람들에게 차례로 닿았다.

“능력 부족은 죽음과 직결됩니다.”

그의 보이스 챗이 팀원들의 귀를 꿰뚫었다.

“그렇지만 제가 분명 말했을 텐데요.”

그의 몸이 전장 안쪽으로 훅 치고 들어오고, 쿨타임이 돌아온 치료의 손길이 터져 나왔다. 치료가 시급했던 레리나 피가 조금씩 부족해지려던 산호의 체력 바가 꽉 찼다.

그의 패시브 스킬, ‘메두사의 피’는 여전히 자가 회복이 아니라 아군의 공격력 버프 쪽으로 돌려진 상태다. 대상은 슬리퍼다.

“어떤 순간에도 살려 낼 거라고.”

까마귀 성좌가 그림자의 샛길 스킬을 사용했다. 스킬용 단검이 날아왔으나, 은우는 지팡이로 그것을 쳐 내며 자연스럽게 뒤로 물러났다. 단검을 쳐 내는 것도 각도를 계산해 가면서 했기에, 그림자 샛길은 졸지에 아무도 없는 공터에 생겨났다.

“여러분은 못 죽습니다. 그것엔 저도 포함되고요.”

“하, 지, 신감 넘치네!”

가까이 붙음으로써 까마귀의 도발이 들린다. 은우의 입술이 삐뚜름해졌다. 그의 손은 지팡이를 휘감은 뱀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신의 가호. 쿨타임이 돌아오자마자 그는 레리에게 가호를 덧발랐다.

까마귀가 어떻게든 그에게 접근하며 우는 까마귀를 쓰려 했다.

은우의 지팡이가 까마귀의 뺨을 때린, 아니 내려친 것도 그때였다.

‘부상’은 비단 사지가 망가지는 것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머리를 얻어맞으면 짧은 스턴이 걸리거나 스킬 취소가 된다.

은우는 까마귀가 머리를 얻어맞은 충격에 멈칫거렸을 때, 부드럽게 뒷걸음질 쳤다. 팀원들의 위치를 파악하던 눈동자가 때에 맞춰 다시금 치료의 손길을 터트렸다. 전선 쪽에서 매가 날아와 그림자를 날려 버린 것도 동시였다.

레리와 레리 옆에 있던 산호가 그리고 은우를 기점으로 산호와 탄산이 회복되었다.

지팡이가 바닥을 가볍게 찍었다. 샛길을 잃어버린 까마귀의 표정이 황망하다.

“각자 할 일을 하세요. 그리고 승리를 가져오세요.”

까마귀를 집요하게 응시하는 눈동자는 그 음험함마저 가려질 정도로 산뜻한 에메랄드 색이다.

* * *

“각자 할 일을 하세요. 그리고 승리를 가져오세요.”

슬리퍼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짜릿함을 감출 수 없었다.

그래도 신세 지고 있는 사람이니까, 개인 방송이 아닌 다 같이 모인 자리니까, 대회니까. 그런 이유로 최대한 참고 있던 입이 근질거렸다. 마음 같아선 저 세 가지 때문에 자체적으로 걸어 놨던 필터링을 떼고 싶을 정도다.

짜증 나서가 아니라 너무 시원해서. 시청자들이 있었다면 ‘님, 왜 이리 얌전해요?’ 소리를 들었으리라.

“아. 우리 힐러님, 진짜 개오진다.”

그는 활시위를 빠르게 잡아당겼다.

“보정 안 먹인 화살. 보정 먹인 화살.”

뼈를 때리던 목소리가 스쳐 지나가는데도 어쩐지 경쾌한 웃음만 나왔다.

“저런 힐러님 두고 지는 게 빙, 머저리다. 인정?”

“어, 인정.”

산호가 그의 중얼거림을 맞받아치자 즐거움은 더욱 배가 된다. 그는 화살을 폭풍처럼 쏘아 냈다. 켄에게 너무 굴려져서 그런가. 이젠 눈 감고도 활시위를 당길 수 있고, 움직이면서도 표적을 노릴 수 있다.

용 성좌가 꼬리를 휘두르며 화살을 튕겨 내고 단단한 비늘로 버텨 냈다. 그러나 슬리퍼는 괘념치 않고 화살을 쏘아 냈다.

상대의 덩치가 큰 데다가 거문고 성좌랑 붙어 있어서 두 발 중 한 발은 누군가가 맞았다. 그렇다고 거문고 성좌가 물러난다면 돌격형 성좌인 빌리가 힐을 못 받을 것이다.

“궁수 끊어!”

화살 성좌가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고 용 성좌가 불을 뿜었다. 쏟아지는 화염은 범위 때문에 회피하기도 어렵다.

슬리퍼가 눈살을 찌푸리려 할 때쯤, 힐이 기가 막힌 타이밍에 들어왔다. 그는 조금 더 켄을 믿고 과감하게 움직였다.

“힐 주기 어렵게 움직이시긴.”

뒤쪽에서 핀잔이 들어왔으나, 말리진 않았다. 산호가 날카롭게 용과 화살의 빈틈을 찔렀다.

슬리퍼는 화살 비를 쏘아 내며 틈틈이 켄을 살폈다. 아무리 켄이 대단해도 떼어 내기 힘든 까마귀 성좌랑 단둘이 내버려 두기에는 양심이 찔렸다.

“슬리퍼 님, 지금 시점에서 반 바퀴 도신 후 매사냥. 그리고 급할 때 말씀드릴 테니 본인 역할에 집중하세요.”

“넵.”

다만 살펴볼 필요조차도 없었나 보다. 슬리퍼는 얌전히 지시를 따라 매사냥을 뒤로 쏘아 보냈다. 까마귀 성좌의 그림자 잠수가 또 한 번 막혔다.

“산호 님, 가호하겠습니다. 레리 님, 한 발자국 옆으로. 탄산 님.”

“시간 지연 들어갑니다.”

어찌나 착착 맞아 들어가는지. 힐러가 적군 딜러 한 명을 묶고 있는 기이한 광경이지만, 덕분에 그들은 착실히 적의 HP를 깎았다.

“점령 시작됐습니다!”

그 외침에 전장이 차근차근 거점 쪽으로 움직였다.

거점 게이지를 채우려면 누군가가 자리에 가만히 서서 게이지를 올려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기기 위해선 적에게 쉴 틈 없이 공격을 쏟아부어 움직임을 이끌어 내고, 뒤쪽 열의 사람은 공격에 안 맞도록 조심해 가며 게이지를 채워야 했다.

1초에 게이지 1%였으므로 쉬운 것 같으면서도 은근 어려운 조건이었다.

이대로라면 정말 이기는 거 아니야? 슬리퍼는 반 이상 깎여 나간 용 성좌와 자가 회복 하느라 급급한 거문고 성좌를 확인했다.

이거, 잘만 하면 용과 거문고를 둘 다 컷할 수 있을 것 같다. 못해도 거문고는 확실히 컷이다.

“힐러, 확실하게 끊겠습니다!”

높은 확률로 그도 죽겠지만, 힐러를 끊을 수 있다면 승패는 확실하게 기울어진다. 슬리퍼는 이를 악물고 돌진했다. 용이 날개를 활짝 펼치며 궁극기를 날리려 했다.

“산호 님, 화살 확실히 막으시고. 탄산 님, 용에게 둔화를. 슬리퍼 님은 용 궁극기 맞을 각오하고 맞딜하세요.”

켄의 조곤조곤한 목소리를 들으며 슬리퍼는 자신이 생각한 것이 켄의 생각과 일치했다는 걸 깨달았다. 격렬한 저항에 이를 악물고 이곳저곳을 지원하던 탄산이 뒤늦게 의도를 파악하고 OK 사인을 보냈다.

“필멸자들이여, 죽음을 겸허히 받아들여라!”

“오래 살아 좋을 게 뭐 있겠나!”

슬리퍼와 용 성좌가 동시에 궁극기를 발동했다. 용 성좌의 경우 날개를 펼쳐 날아오름과 동시에 10m 정도 돌진하며 불을 뿜는 형상이니.

슬리퍼는 그런 용에게 궁극기를 쏘는 척하다가 그대로 획 돌려 힐러를 겨눴다. 용이 날아오름으로써 거문고 성좌는 대놓고 바깥에 드러난 상태다.

빠른 속도를 유지하되 급소까진 불가능해도 일단 맞출 수는 있는 명중률. 켄이 칭찬했던 슬리퍼의 장점이 도드라지며 화살이 거문고에게 명중했다.

궁극기의 괴랄한 대미지는 반피나 깎인 지원형 성좌를 처치하기에 충분하다.

용이 슬리퍼의 몸을 불태운 것도 그때였다. 슬리퍼의 시야가 깜깜해졌다. GAME OVER. 슬리퍼는 자신 앞에 뜬 글자에도 히죽히죽 웃었다.

* * *

슬리퍼를 미끼 삼았던 탄산이 용 성좌에게 시간 조작을 발동시켰다. 용 성좌를 가둔 커다란 구체는 용 성좌의 움직임을 느리게 만들었다. 저거면 돌진 경로에서 쉬이 몸을 뺄 수 있다.

“슬리퍼 님이 거문고 컷하셨네요. 산호 님, 가호와 힐 들어갑니다. 탄산 님, 저 좀 도와주십쇼.”

“우리 귀한 뱀주인을 누가 괴롭히고 있나요?”

“어머니를 모함해 죽인 벌로 까매진 새?”

까마귀 성좌와 맞상대하고 있다고는 믿을 수 없는 태연함으로 켄은 보이스 챗을 날렸다. 레리는 빌리와 검을 맞대며 그 목소리를 가만히 들었다. 마냥 설렐 수만 없는 것은 그렇게나 연습했는데도 상대방에게 밀리고 있다는 현실 때문이리라.

“반반 님! 대체 뭐 하시는 겁니까!”

빌리는 그녀를 상대하면서도 상황 전체를 조율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다른 쪽에 시선을 돌릴 여유가 있단 소리다.

“당장 힐러 죽이세요! 부활 스킬 쓰는 순간 끝장입니다!”

그게 그녀를 비참하게 만들었다. 아무리 상대가 켄 이전 한국 최고 피지컬 스트리머라지만, 그녀도 어디 가서 피지컬로 밀린 적은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차이 날 건 뭐란 말인가.

켄이 자가 회복을 포기하고 그녀에게 공격력 버프를 둘러 주지 않았다면, 직접 전장 한가운데 뛰어드는 위험을 감수하고 모두에게 힐을 주지 않았다면 그녀는 이미 죽었을 거다.

“아, 좀 열받네.”

레리는 이를 악물었다. 켄이 그렇게 상대해 줬는데도 이렇게밖에 못하는 자신에게 화가 나고, 재수 없는 상대방에게 짜증이 났다.

그녀는 정말 여기서 끝인 걸까? 왜 연습 때는 잘만 했던 것 같은 움직임이 실전 되니까 녹슨 것처럼 느껴질까? 기본적인 재능 차이는 어쩔 수 없다는 거야?

“슬리퍼 님, 부활 들어갑니다. 세 분 힘 합쳐서 용이랑 화살 잡아 주세요. 그리고─”

켄의 목소리가 또 한 번 머리를 치고 갔다. 그리고 다음에 들려올 말이 어렴풋했다가 그 뜻이 이해되는 순간, 정신에 냉수가 쏟아진 기분이 됐다.

“레리 님, 혼자 못 잡을 것 같습니까?”

레리는 손에서 미끄러지려는 검을 굳게 쥐었다. 켄은 그녀에게 그가 발견한 빌리의 약점 및 습관을 알려 주었다. 비록 연습 때와 달리 팀전이 되며 몇 개의 정보는 쓸모가 없어졌지만, 전부가 그런 건 아니다. 그래,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있었다!

그녀는 검을 움켜쥔 채 방패를 들었다.

「전 레리 님 하시는 거 보고 가능할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판이 시작되기 전, 켄이 했던 말이 연이어 재생되는 기분이었다.

“원래 신은 느긋하게 힘을 내려 주시는 법입니다.”

가능하다는 말을 돌려 말한 것이다.

“힐러 끊긴 용가리 하나는 금방 잡죠.”

산호와,

“레리 님, 믿어요.”

탄산의 목소리가 연달아 이어졌다. 슬리퍼가 있었다면 그녀의 동생이 떠오르는 개드립을 날렸을 거다.

레리는 그녀에게 ‘성하’란 별명이 붙었던 날을 떠올리고 다시 앞을 보았다.

상대의 모티브가 승리의 신이란 건 아무래도 좋았다. 살다 보면 신앙자가 신에게 반기를 들 수도 있는 것 아니겠나.

뭣보다 그녀가 믿는 신은 방송의 신이지 승리의 신이 아니었다. 즉, 이 앞에 있는 놈은 이단이었다!

“방송의 신이시여! 제게 승리를!”

레리의 외침에 빌리가 움찔거렸다. 궁극기 대사랑 비슷해서 궁극기 쓰는 거라고 찰나간 오해했나 보다. 알 바 아니었다. 휘광이 그녀의 검에 어렸다.

“반반 님!”

힐러를 끊으라고 빌리가 악을 지름과 동시에 레리랑 빌리가 다시 격돌했다. 빛이 번쩍하며 부활 스킬이 발동됐다.

“오이오이, 형씨! 믿고 있었다구!”

화살 비가 내렸다.

* * *

은우는 어쩌다 보니 지휘까지 하게 된 자신의 처지를 떠올리면서도, 앞에 서 있는 까마귀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초조함이 아주 노골적으로 보인다.

그는 지팡이를 단단히 잡은 채 부활한 슬리퍼에게 지시를 내렸다. 매사냥이 날카롭게 날아오며 그를 스치고 지나갔다.

구태여 까마귀 성좌가 날릴 그림자의 샛길에 맞춰 날리지 않고 은우 자체를 맞추고 지나갔기에 그는 꼭 광휘를 두른 것 같다. 은우는 이제 아군의 공격에 움찔거리지 않았다.

매 덕분에 까마귀는 그림자 샛길을 은우에게 만들어 낼 수 없었다. 빠른 이동이 봉인되면 자동적으로 접근해야만 사용할 수 있는 나머지 스킬이 봉인된다.

단검은 날려 봤자 지팡이에 다 막혔고, 궁극기는 이미 썼다. 단지 은우가 탄산과 합을 맞춰 시계 성좌의 궁극기, 시간 역행으로 파훼했을 뿐이다.

힐러의 힐은 애초에 끊겨서 HP도 간당간당한 상태였다.

마치 G페스티벌 당시의 사건이 재현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까마귀, 반반마니의 얼굴이 흉신 악살처럼 일그러졌다. 은우 알 바는 아니었다.

“원래는 공격계 분을 기다리려 했는데…….”

은우는 용과 화살이 거의 다 잡혀 가는 걸 확인하며 무능한─대상이 그인 만큼 참작할 순 있겠지만─검은 새를 바라보았다. 적확한 초점이 직접 마주해야만 알아챌 수 있는 미묘한 웃음을 머금었다.

“시간 끄는 것도 좀 그렇네요.”

착실하게 힐을 넣어 주며 그는 지팡이를 제대로 꼬나쥐었다. 도망만 다니던 그가 까마귀에게 접근을 시작했다.

반반마니는 옳다구나 우는 까마귀 스킬을 발동했다. 죽음의 낙인을 찍고 2초간 피해를 주는 그것은 스킬 발동 후 2초 이상 근접해 있으면 저주를 내릴 수 있다.

은우의 몸이 뒤로 틀어진 것도 그때였다.

“제게 뭘 묻히시려는 것 같은데…….”

이미 낙인이 찍혀 있으므로 HP는 쭉쭉 빠졌다. 그러나 접근하려던 몸은 다시 도망을 시작한 상태였다. 까마귀는 이번이 마지막 기회란 걸 깨닫고 악착같이 붙었다.

“안 통합니다, 그거.”

그 순간, 은우는 걸음을 멈추고 지팡이를 빙글 돌렸다. 죽음의 낙인을 발동하려던 반반마니의 턱주가리가 지팡이에 얻어맞고 위로 살짝 들렸다.

딜레이 0.5초. 은우의 손이 지팡이를 야구 배트 휘두르듯 다시 머리를 쳤다. 또다시 딜레이 0.5초.

“그러게 왜 시도하셨어요. 통하지도 않는데.”

은우는 현 상황에 빗대어 반반마니가 그에게 수작 부리려던 걸 꼬집었다. 다시 말하지만, 그는 여전히 반반마니에게 별 유감 없다. 그저 그를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 모두에게 보여 줄 뿐.

퍽! 퍽! 퍽!

그는 끊임없는 공격으로 반반마니를 몰아붙였다.

2초 피해는 진즉 끝났다. 죽음의 낙인은 스킬이 완전히 취소되거나 발동되기 전까지 사라지지 않으나, 어느 쪽도 충족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뱀주인 성좌의 형편없는 대미지는 까마귀 성좌를 죽이지도 못했다.

완벽한 농락이었다.

“용 성좌 컷!”

“화살… 컷!”

그리고 원하던 외침이 들려온 순간, 은우는 눈매를 곱게 접었다. 실컷 얻어터지고 있던 반반마니에겐 사신이나 다름없는 눈웃음이었다.

눈매는 곱게 접힌 주제에 눈동자는 소금 결정을 굳힌 듯 무결해서 더욱 그런 느낌인지도 모른다.

“산호 님.”

은우가 겨우 지팡이 난타를 멈췄나 싶을 때, 까마귀를 향해 누군가가 돌진했다. 쌍둥이 성좌, 산호다.

“무슨?!”

반반마니가 다급히 자신의 아래를 살펴보았다. 사냥의 표식이 선명했다. 그리고 그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쌍둥이 사냥꾼은 이미 지척에 다다른 상태였다.

“그대에게 피어난 죽음이 보이나?”

궁극기 전용 대사가 벚꽃 잎처럼 엷은 향기를 흘리고, 그대로 썩어 들어갔다.

서걱!

제대로 터지면 버텨 내는 이가 없는 단일 고화력 궁극기가 그림자 까마귀를 짓뭉갰다.

“저……!”

방송이라서 욕설을 삼킨 빌리의 목소리가 아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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