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언박싱Unboxing. 상자를 연다는 뜻의 이 단어는 구매한 상품의 포장을 개봉하는 과정 자체를 일컫기도 한다.
또한 스트리머에겐 제법 재미난 소재거리이기도 했다.
은우는 좁아 터진 방안을 전부 치운 후 헬멧을 썼다. 방 중심에는 커다란 상자 하나와 카메라가 곱게 얹어져 있다. 이걸로 캠을 켤 준비는 다 됐다.
그는 숨을 크게 내쉰 후 방송을 시작했다. 공지를 따라 방송이 일찍 켜질 걸 알고 있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구하, 비하. 여러분, 안녕하세요.”
그는 가볍게 인사를 한 후 상자를 톡톡 두드렸다.
택배 상자 자체에 로고가 떡하니 박혀 있는지라 사람들은 누구에게 받은 거냐고 묻지 않았다. 오히려 이제 받았냐는 채팅들이 꽤 많다.
“예, 다들 눈치채신 것 같지만… 시드 소프트에서 선물을 보내 왔습니다.”
아임휴먼 때부터 줄곧 있었던 일이기에 은우는 자연스럽게 상자를 개봉했다. 손가락이 택배에 그어져 있는 금을 따라 긋자 파란 불빛이 살짝 일며 상단 면이 쩍 벌어졌다.
안을 들여다보면 바깥 상자와 1cm가량 떨어지게 둥둥 떠 있는 박스들을 볼 수 있다. 마법 같지만 이 또한 과학이었다. 원리를 모를 뿐.
“꽤 많이 들어있네요. 큰 것부터 풀겠습니다.”
은우는 박스 안의 박스 중 제일 큰 것을 꺼내 개봉했다. 나온 건 12인치짜리 루치페르 피규어였다.
‘엔젤 돈 크라이: Hell of Doom’의 마지막 부분. 죄악의 병사의 머리를 밟고 있는 모습이 그럴싸했다. 물론 루치페르의 얼굴은 루치페르란 캐릭터의 디자인 원안이다.
시청자들의 말에 따르면 전 세계에서 2천 명에게만 주어지는 한정판이라는 모양이다.
은우의 눈동자가 헬멧 안에서 데굴데굴 굴렀다. 피규어 자체야 게임 회사들이 선물을 보낼 때마다 빠짐없이 들어 있는 종류라 새삼스럽진 않다. 한정판이란 것도 그가 해낸 업적을 생각하면 그냥 당연한 대가를 받는 느낌이다.
단지 그를 곤란하게 만드는 것은 이것을 놓을 자리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빨리 이사 가야 진열이라도 해 두지…….”
─빨리 이사가요
─우리가 갖다바친 돈 다 어디감
─방 되게 좁아ㅋㅋㅋ
─피규어 진짜 개멋있다
“이사 가려면 좀 남았습니다.”
방송을 시작하고 돈을 많이 번 건 사실이지만, 아직 집을 살 정도까진 아니다. 전세나 월세로 가는 거야 충분해도, 은우는 가능하면 그의 명의로 된 곳─그것도 단독주택을 가지고 싶었다. 그래야 그가 입맛대로 주택을 시공할 수 있을 것이므로.
다만 기술의 발전으로 지방이나 외곽 지역마저 교통이 원활해지면서 전체적으로 땅값이 오른 게 문제라면 문제다. 그가 원하는 집을 가지기 위해선 좀 더 벌어야 했다.
“일단 피규어는 다시 넣어 둘게요.”
시청자들에게 루치페르 피규어를 충분히 보여 준 그는 다시 박스에 넣고 봉인했다. 귀한 한정판 피규어는 다른 피규어 박스가 쌓여 있는 옷장 안에 고이고이 모셔졌다.
“부모님이 뭐라 안 하시냐고요? 아, 괜찮습니다.”
그들이 저걸 알아챌 정도의 관심이 있다면 애초에 그가 공부하고 있지 않다는 것부터 알아챘을 거다. 그렇지만 그들은 한 번도 그에게 공부 안 하고 뭐 하냐는 말을 한 적이 없다. 관심이 없으니까.
무엇보다 그들은 그의 방에 들어오지 않는다. 기껏 들어오는 사람이라 해 봤자 형 정도일까.
그마저도 그가 사생활 보호를 중시한다는 걸 알아 자주 들어오진 않았다. 가끔씩 방문을 빼꼼 열고 뭔가를─식사 여부라든가─물어볼 때가 있긴 하지만.
“그럼 두 번째 박스를 개봉하겠습니다.”
은우는 두 번째 상자를 꺼냈다. 피규어 박스랑 큰 차이 없는 크기였는데, 내용물은 차이가 있었다.
“…헬멧?”
헬멧, 헬멧 노래를 불렀더니 정말로 헬멧 선물을 받았다.
그는 처음에 조금 당황했다가 일단 좀 더 살펴보았다. 루치페르랑 잘 어울리는 디자인의 헬멧은 설명서가 작게 동봉되어 있다.
설명은 다음과 같았다.
안에 들어 있는 소켓을 캡슐에 꽂아 다운로드하면 엔젤 돈 크라이 내에서도 같은 형태의 헬멧이 구현된다는 것. 실제 헬멧의 경우 은우의 캐릭터에 맞춰 구현했기 때문에 현실에서도 쓸 수 있을 거라는 것. 이 두 가지였다.
은우는 헬멧과 소켓을 떨떠름하게 매만졌다. 확실히 헬멧이 그의 머리 크기와 맞을 것 같긴 하다. 게임 내에 탑재된 신체 데이터는 눈매나 머리색, 피부색만 다를 뿐 나머지는 같으니까.
“실제 착용도 가능할 것 같으니 한번 해 보겠습니다.”
그는 카메라 위치를 확인한 후 얼굴이 보이지 않는 거리까지 물러났다.
시청자들이 얼굴 공개 좀 해 달라며 애간장을 태웠지만, 은우는 단호했다. 절대 얼굴 공개는 없다.
헬멧을 갈아 끼운 그는 꼼꼼히 얼굴을 확인했다. 오토바이 헬멧과 비슷하되 히잡처럼 천이 둘러싸고 있어 성직자의 느낌을 살렸다. 그의 얼굴은 조금도 드러나지 않았다.
유일한 흠이라면 그가 지금 니트를 입고 있다는 것 정도? 솔직히 미스매치다.
“착용하면 이렇게 생겼네요.”
그럼에도 그는 흔쾌히 카메라 앞에 나섰다. 스트리머의 숙명이었다. 사람들이 옷과 헬멧의 부조화에 깔깔대며 웃으면서도 헬멧의 근사함에 감탄했다.
분명 어제, 죄악의 병사를 죽인 루치페르가 지옥왕의 자리에 앉는 것까지 해서 엔젤 돈 크라이 엔딩을 보았건만, 언박싱 방송까지 하고 나서야 진짜 끝이 난 기분이 들었다.
▣ 046. 어떤 순간에도
시간은 생각보다 더 빨리 흐른다.
은우는 스트리머 대전이 오늘부터 시작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감회를 느꼈다. 그가 참가하는 것도 아닌데 대회가 시작됐다 하니 기분이 묘했다.
빌어먹을 교육생들을 전장으로 내밀고 뒤에서 지켜보는 기분이다. 이제 저들은 패배 또는 승리 둘 중 하나만을 가져오리라.
그나마 죽음이 껴 있지 않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은우는 목덜미를 슬슬 쓸며 콜라를 집어 들었다. 그래도 그가 훈련 봐준 이들인 만큼 우유에탄산 팀이 나오는 파트는 지켜볼 요량이었다.
그는 우유에탄산 팀전이 있기 전, 그 전에 비춰 주던 빌리 팀을 보며 눈을 껌뻑였다. 반반마니는 알 바 아니고, 역시 팀 주장인 빌리가 장난 아니게 실력 좋다.
그래도 하던 대로 하면 이길 수 있다. 은우는 콜라를 홀짝이며 방영되는 대회를 주의 깊게 지켜보았다. 대회가 무르익어 간다.
그리고 무르익은 대회가 결승전이라는 마지막 과실을 남겼을 때, 우유에탄산 팀이 결승전까지 올라왔을 때, 은우는 다급한 연락을 받았다.
『우유에탄산 님> 대타 좀 뛰어 줄 수 있어요?』
* * *
사정 설명은 정말 빨랐다.
개불의 자식이 교통사고─다행히 큰 부상은 아니란다─를 당했고, 처음 그 소식을 들은 개불이 안절부절못하다가 팀원들의 허락을 받고 병원으로 떠났다. 결승전 시작 2시간 전 일이었다.
크게 다친 게 아닌 만큼 바로 돌아오는 게 어렵진 않다. 오가는 데 한 시간 정도면 충분했으므로.
그에 대한 장애물은 개불의 가정 형편이었다. 그는 아내와 사별한 상태고 다친 아이는 혼자 있기에는 아직 어렸다.
팀원들은 그가 대회 때문에 어린 자식을 두고 오기보다는 그냥 자식과 함께하기를 밀어주었다. 그렇게 되면 그들이 패배할 것임에도.
팀원이 빠진 이상 패배는 확실시됐기에 우유에탄산 팀은 결국 기권했다. 개불은 그것에 정말 미안해하면서도 고마워했고.
여기까지만 보면 정말 훈훈한 미담이었다. 다만 현실은 미담만으로 해결되는 게 아니었다.
“그래서 저를 부르신 겁니까?”
외부 인력을 데려오는 건 전례가 없는 일이거니와 나중에 문제가 될 수 있으므로 결승전 자체를 치를 순 없다. 다만 경기를 아예 무르자니 돈 내고 입장한 관객들이 걸림돌이었다.
미담만으로 만족하지 않을 자들은 많았고, 대회 관계자들은 이 일을 어떻게든 해결해야 했다.
그래서 나온 게 특별 경기였다. 비록 승패는 결정됐을지라도 부족한 인원을 채워 본래 결승전을 치렀어야 할 두 팀이 대결하는 것.
참고로 은우는 대타 제의를 받자마자 박 팀장에게 만약 받아들일 의향이 있다면, 그래도 되는지 상의를 구했다. 그쪽에선 같은 소속사이거니와 문제없는 사람들이니 괜찮다고 OK 했고.
“네.”
우유에탄산이 주위 팀원들을 힐끗 살피곤 손목에 걸린 전자 노트를 살짝 두드렸다. 시계 정도로 접혀 있는 그것을 가리키는 손짓은 의미가 명백했다.
『우유에탄산 님> 켄 님 정도면 시선을 빼앗을 수 있잖아요?』
은우는 그 말을 읽고 잠깐 침묵했다. 그의 생각이 닿는 것은 1등에 묘한 집착을 보이던 우유에탄산이다.
그는 팔짱을 낀 채 손가락으로 교차한 팔꿈치를 톡톡 두드렸다.
그로 시선을 끌려 한다라. 그렇다는 건 그녀가 이 정치판에서 이기는 조건이 대회 1등은 아니란 이야기가 된다.
시선, 가능하면 1등. 두 개의 단서를 조합하면 도출되는 답은 있다. 상대보다 화제성을 더 끌어모으는 것이 우유에탄산이 바라는 거다. 혹은 그녀에게 부탁을 한 사람이 바라는 것이거나.
헬멧 안 눈동자가 우유에탄산을 느리게 살폈다. 흔들림 없이 고정된 동공은 플라스틱판을 사이에 두더라도 선명한 눈길을 자아냈다. 탄산의 눈매가 깊게 파였다.
자못 당당한 얼굴로 보아, 그녀가 바라는 대로 상황이 흘러갈 거라는 확신이 있는 것 같다. 정작 은우는 결정을 내리지 않았는데도.
“…개불 님이 빠지신 상황이라 하셨죠.”
“네.”
그가 갑작스러운 부름에도 여기까지 와 준 건 별 이유 없다. 지난 연습을 통해 정이라고 하기에는 얄팍한 유대가 생겼기 때문이고, 이렇게 허무한 이유로 떨어지기엔 저들이 정말 노력했단 걸 알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이용당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역할군 때문에 그런 거라면 저랑 바꾸시면 돼요. 저도 힐러를 못 하는 건 아니라서…….”
“아뇨.”
그는 레리의 말을 끊었다. 그리고 그녀와 슬리퍼, 산호를 차례로 훑어보았다.
승리라는 일념하에 그의 지도를 따라와 준 학생들이다. 그가 꽤 괜찮다고 생각할 만큼 성실하고 끈기 있는 사람들이기도 하고. 그만큼 빌리 팀을 향한 열의(적의?)가 뛰어나기도 했다.
여전히 이용당하긴 싫다. 그렇지만 저런 사람들이기에 변덕으로 어울려 줄 의향은 있다. 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개불 님 대역으로 왔으니 만큼 역할도 대행하겠습니다.”
돕긴 돕되 우유에탄산이 바라는 그림을 뒤엎은 채 도우면 되는 거 아닐까? 여기서 그를 이용하려는 건 저 사람뿐이니까.
“예? 힐러요?”
“힐러 하신다고요, 켄 님?”
“공격수가 아니라……?”
“네.”
탄산뿐 아니라 모두가 당황했다. 탄산의 획책을 알아서라기보다는 순수한 당혹감에 가깝다. 이미 그의 무력을 잘 알아서 저런 반응이 나오는 것일 테다.
“못하진 않을 겁니다.”
“아니, 뭐… 켄 님 정도면…….”
“그래도 돌격이나 딜러가 더 편하지 않으시겠어요?”
“힐러라는 게 가벼운 포지션은 아니라서…….”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그를 설득하려 했다. 그가 돌격형이나 공격형 성좌를 맡는다면 승리는 따 놓은 당상인 건 맞음으로 그 심정이야 이해한다.
다만 은우는 탄산에게 일부러 시선을─고개 방향을─고정한 채 천천히 말을 이었다.
“대회를 위해 여러분들이 노력하신 걸 제가 직접 봐 왔는데, 그 자리를 빼앗을 생각은 없습니다.”
도와줄 생각은 있으나 체스 말이 될 생각은 없다. 은우는 단어를 고르고 골라 세 사람을 흔들었다.
“어차피 승패는 결정되었을 텐데요. 그렇다면 적어도 연습의 성과라도 드러내야 만족하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은우는 슬리퍼를 바라보았다.
“슬리퍼 님, 이제 속사를 정말 잘 다루시는데 제게 가려지긴 좀 아쉽지 않습니까?”
산호를 바라보았다.
“쌍둥이 성좌 사용에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고 계신다던데.”
레리를 보았다.
“혼자 빌리 님을 잡고 싶다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전 레리 님 하시는 거 보고 가능할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그 누구도 섣불리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세 사람의 눈에는 뭉클한 감격이 서린 상태다. 탄산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네요. 생각해 보니 켄 님의 말이 맞네요. 저희가 이 판에서 이겨도 실제 우승하는 건 아닌데, 굳이 역할을 뒤엎을 필요는 없죠.”
노장은 위험하다. 은우는 그가 오래전 깨달았던 진리를 새삼 머리에 되새겼다.
“켄 님, 믿을게요.”
“예.”
구렁이 담 넘듯 자연스럽게 넘어가는 저 모습을 보면 딱 답이 나오지 않는가.
은우는 헬멧 속 입술을 삐뚜름하게 늘리며 관계자에게 말을 전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만큼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접속은 무대에서 이뤄집니다. 아, 물론 켄 님 의사에 맞춰 켄 님 캡슐에는 가림막을 설치해 둘 예정입니다.”
“네.”
“그 외 불편한 점이 있으시면 언제든 말씀해 주세요.”
“동기화율에 대해 조절하고 싶은데, 가능합니까.”
“즉시 해 드리겠습니다.”
그는 시시콜콜한 문제를 전부 해결한 후, 대회 시작 10분 전에 화장실로 향했다. 딱히 생리 현상이 급해서는 아니다.
“켄 님.”
은우는 화장실이 있는 길목에서 우유에탄산을 마주했다.
“하여튼 켄 님은 못 이기겠네요. 거기서 그렇게 말하시면…….”
그의 손이 헬멧을 잡고, 벗었다. 주위의 기척을 전부 셈하고 있던지라 탈착에는 망설임이 없다. 싸늘한 인상의 그리고 그보다 더한 분위기의 눈동자가 드러났다.
색이, 형태가 달라져도 그것이 드러내는 영혼은 동일하다.
“탄산 님.”
그는 한 걸음 더 앞으로 내디뎠다. 희수보단 크지만, 여전히 머리 하난 작은 이의 몸이 그의 그늘에 잡아먹혔다.
동시에 타인을 배려해 가둬 두고 있는 기세가 흉악하게 고개를 쳐들었다. 사냥꾼이자 학살자이며, 신살자의 피비린내가 복도를 야금야금 좀먹기 시작한다.
“전 탄산 님을 싫어하지 않습니다.”
항상 은우를 태연자약하게 대하던 우유에탄산이 처음으로 안색을 굳혔다. 사람들이 그를 겁내는 걸 싫어하는 은우로선 조금 아쉬운 일이나, 이건 필요한 일이었다.
그는 정상적인 대인 관계를 이루고 싶은 거지 이용당하는 관계를 만들고 싶은 게 아니었다.
“팀원분들도 좋아하는 편입니다. 아니었다면 여기까지 오지 않았겠죠. 대회까지 참가하면 더 이상 적응을 핑계로 합방 요청을 거절할 수 없게 되니까요. 아, 제가 합방을 어려워한다는 건 이미 아시리라 믿습니다.”
그간 웬만한 스트리머들이 대회 준비 하느라 제의를 안 해 왔을 뿐, 곧 하나둘 들어오기 시작할 거다. 대회 참가는 그것을 더욱 가속화할 테지.
아무렴 인연이 한 번 닿았을 뿐인데─실제는 아니지만─달려와 준 것처럼 보일 것 아닌가. 인연이 닿기만 하면 이런 특혜를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분명 나온다. 어쩌면 다음 대회를 노리고 친분을 쌓으려 드는 이들도 있을 거다.
전부 은우가 이번 대타를 뛰겠다 할 때 감수한 것들이다.
“전 탄산 님이 나쁜 분이 아니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별개로 그 결정에 탄산에 대한 호감이 존재하느냐? 그건 조금 모호했다.
방금 한 말처럼 탄산은 그에게 악의를 가지고 접근한 적이 없다. 단지 그를 써먹으려 했을 뿐.
물론 탄산의 패로 쓰인다 해서 손해가 있진 않았을 것이다. 경험과 직감으로 판단하건대 그녀는 천성이 사악한 사람이 아니다. 아마 이용당해도 얻는 이익은 있고, 그 이상으로 본인이 챙겨 줬을 거다.
그래서 탄산을 이유로 이번 제안을 거절하지 않은 거고.
“그러니 이번 일은 넘어가겠습니다.”
그러나 은우는 상대가 좋은 사람이건 나쁜 사람이건 멋대로 이용당한다는 전제 자체를 싫어했다. 박기철 팀장처럼 상호 협정 간에 이익을 챙기는 관계가 아닌, 일방적으로 휘둘리는 건 질색이다.
장단을 맞춰 주고 싶을 정도로 친밀함을 쌓았다면, 그래. 그건 조금 봐줄지도 모르지. 탄산은 그 수준이 아니었지만.
“저를 써먹고 싶으시다면 제가 납득할 수 있는 것을 가져와 주시길.”
저편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은우는 다시 헬멧을 썼다.
“저는 혼자서도 잘 크거든요.”
그제야 목을 옥죄고 숨구멍에 물을 쏟아붓는 듯하던 공기가 탁 트였다. 그러니까, 탄산 입장에서 말이다.
은우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켄 님! 저희 입장할 시간 거의 다됐, 엥?”
화장실에 들어오려면 복도에서 한 번 꺾고 그 좁은 통로에서 원하는 성별의 화장실로 골라 들어가야 한다.
때문에 코너를 꺾어 들어오던 슬리퍼는 두 사람이 서 있는 장면을 목격하자마자 촐랑거림을 멈췄다. 은우가 한 발짝 물러남으로써 적정 거리를 유지하고 있건만, 슬리퍼는 묘하게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 싸우신 건 아니죠?”
“그럴 리가요.”
그건 아직 남아 공기를 서늘하게 식히는 그의 기세 때문일까, 아니면 딱딱하게 굳어 있는 탄산의 표정 때문일까.
은우는 자연스럽게 슬리퍼 쪽에 합류했다. 뒤늦게 탄산이 목소리를 내었다.
“싸웠을 리가 있겠어요? 켄 님한테 힐러 자리가 부담스러우면 나랑 바꾸자고 하고 있었지.”
언제 표정을 굳혔냐는 듯 우유에탄산은 자연스럽게 상황을 넘겼다.
“그보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자, 어서 갑시다! 지각하면 안 되지.”
“예에…….”
탄산까지 그렇게 나오니 슬리퍼는 긴가민가한 표정이 되었다. 은우의 손이 목덜미를 슬슬 쓸었다.
“슬리퍼 님도 제가 힐러 하는 것이 못 미더우십니까?”
“엥? 그건 아닙니다.”
적절한 화제 전환이었다. 슬리퍼가 손을 휘저으며 드립을 적절히 섞은 대답을 내놓았다. 군더더기를 빼고 요점만 정리하면 결국 ‘믿고 있다’다.
“그거면 됐습니다.”
은우는 무대와 이어지는 통로에 섰다. 미리 기다리고 있던 산호와 레리가 그들을 반겼다.
“후, 떨리네요.”
“근데 뭐, 여기서 이기든 지든 결과적으론 패배잖아? 편하게 해.”
“에잇! 아무리 그대로 그렇죠! 전 빌리 님을 이길 거라고요. 신의 심판!”
“난 반반마니만은 꼭 죽이고 죽는다.”
“다들 기세가 좋네요. 그럼 이겨야지. 사람들이 발표 같은 건 신경 못 쓰게.”
“오, 그거 좋네요. 여윽시 탄산 님.”
그들은 긴장을 풀기 위해 농담을 나눴다. 곧 초침이 정각에 다다랐다. 나아갈 시간이다.
“승리를…….”
그 속에서 은우는 입을 열려다가 살짝 멈칫거렸다. 가져다드리겠습니다? 그는 이번 판에서 선봉에 서지 않는데?
“승리를?”
“승리, 뭐요?”
네 사람이 그를 돌아보았다. 은우는 그제야 그가 해야 할 말을 떠올릴 수 있었다.
“승리를 가져와 주시죠. 대신 저는 여러분을 어떤 순간에도 살려 내겠습니다.”
그는 처음으로 타인에게 승패의 주도권을 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