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나를 알면 싸움에서 조금의 낭비도 없이 최선을 다할 수 있게 된다. 실수란 변명도 댈 수 없고, 안타깝게라는 수식어구도 붙일 수 없게 되는 거다.
그렇다면 적을 알 때는?
적을 안다는 것에는 단순히 ‘안면을 익히다.’라는 의미부터 ‘적의 버릇과 과거, 현 상태 따위를 전부 파악하고 있다.’까지 다양하다.
또한 그만큼 여파 또한 다르다.
단순히 안면을 아는 걸로 그친다면 표적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 외의 가치는 없으니.
과거를 알면 정신적 약점을 알 수 있다. 버릇을 알면 빈틈을 찾을 수 있다. 현 상태를 알면 이 순간에만 노릴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 있다.
적을 안다는 것은 그런 의미였다. 나를 안다는 것이 모든 순간에 최선을 다할 수 있게 해 준다면, 적은 그 적에 한하여 한없이 유리한 고지를 잡게 해 준다.
그러니 은우가 우유에탄산 팀을 위해 빌리 팀을 조사해 준 것은 쓸데없는 일이 아니었다. 조사라고 해 봤자 그들의 영상 따위를 찾아본 게 고작이긴 했지만.
▣ 045. 타고 오를 능력만 되면
두 번째 교습 날, 은우는 세 사람을 달달 볶았다. 세 번째 날 소식을 듣고 합류한 개불과 탄산도 어김없이 굴렸다.
나이? 전장에 나이는 없다. 경험이 있을 뿐.
그리고 은우가 보기에 개불과 탄산은 새파란 애송이에 불과했다. 적어도 싸움에 한해서는 말이다.
무엇보다 본격적으로 할 마음을 먹었다 한들 은우의 이성은 언제나처럼 평온했다. 연장자에 대한 예의는 지켜 군소리가 나오지 않게 했단 소리다.
“그 실력을 가지고 잠이 오십니까?”
“원하신다면 그만두셔도 됩니다. 그 실력에 만족하신다면.”
“2등으로도 사람들은 뭐라 하지 않을 겁니다. 여러분은 다르시겠지만.”
“힘드십니까? 정말로?”
“여러분들을 위해 빌리 팀 영상을 찾아보고 왔습니다. 대충 따라 해 드리죠.”
“저는 지금 당신들이 상대할 이를 따라 움직이고 있습니다만, 포기하실 겁니까?”
“1등하고 싶다고 하시지 않으셨나요?”
“그만두고 싶다면 저야 편합니다. 일부러 시간 낼 필요가 없어지니까요.”
언성 높이지 않기랑 하대하지 않기, 욕설 쓰지 않기 같은 기본 예절만 지킨 게 함정이다마는.
슬리퍼가 남몰래 생각했던 은우의 ‘사람 한심하게 만드는 재주’는 모두에게 통했다.
심지어 팩트만 골라 언어로 표해 내니 시각적 폭력뿐 아니라 청력적 폭력도 이뤄졌다. 구구절절 맞는 말이란 것도, 사람의 염치를 건드린다는 점에서도 욕설보다 더한 악질이었다.
와중에 실력 느는 건 체감이 됐는지라 우유에탄산 팀은 울며 겨자 먹기로 은우의 특훈을 받았다.
“이렇게까지 했는데 못 이기면 내가 개다!”
슬리퍼의 외침은 덤이었다.
“켄 님, 정말 반반마니 싫어하시나 보네요……. 이런 식으로 복수하시다니…….”
그렇게 굴리다 보니 그런 오해도 받았다. 반반마니를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던 은우로선 뜻밖의 오해였다.
“좋아하진 않는 건 사실입니다만, 복수할 정도로 싫어한다까지는…….”
“엄청 싫어서 저희 도우시는거 아니에요?”
“반반마니, 그 사람이 계기가 돼서 돕는 건 맞습니다만, 싫어한다는 말에는 어폐가 있습니다.”
놀랍게도 그것은 진심이었다. 만나자마자 도발당했을 때에도 유감이 없었듯, 지금도 별 유감 없었다.
물론 그가 보살이어서는 절대 아니다. 단지 신경 쓸 가치가 없어서였다.
인간상만 보면 싫어할 만한 타입이긴 한데, 은우는 맞지 않은 부류의 인간을 보거든 싫어하기보단 관심을 끄는 편이었다. 싫어하는 것에도 체력이 소비되는데 별 가치 없는 것에 관심 기울일 이유를 찾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자원봉사 하는 이유는 첫째로, 한 대 얻어맞고 가만히 있는 건 얕보이기 십상이어서다. 둘째로는 단순히 진지한 정도로 그치려던 게 저들이 악을 지르면서도 따라와 주니까 좀 더 흥이 난 것이고.
“에? 진짜요? 안 싫어해요?”
“혹시 당한 일 때문에 싫어할 거라고 생각하셨다면, 네.”
탄산과 개불은 피지컬이 조금 부족한 대신 경험이 많아서 잔재주를 잘 부렸다. 그가 요령 두 개를 알려 주면 세 개를 알아챌 정도였다.
또한 슬리퍼와 레리는 굴리면 굴리는 대로 실력이 쑥쑥 늘었다. 산호는 그 둘보다 조금 떨어졌지만, 머리가 좋고 집중력이 괜찮아서 보완됐다.
다만 여기서 중요한 건, 그들이 그렇게 되기 위해서 악착같이 그의 지도를 따라왔다는 것이다. 포기할 수도 있을 텐데 승리 하나 하자고 그 험한 고행을 계속하고 있는 거다.
“고작 그런 일에 일일이 이를 갈 정도로 속이 좁진 않습니다.”
이쯤 되면 무엇이 계기가 됐건 이 악물고 따라오는 저들의 열정을 높이 사서라도 더욱 심혈을 기울이게 된다.
이를테면, 제자 한 번 들인 적 없던 전생의 그가 눈이 반짝거린다는 이유로 그 녀석을 들였던 때와 비슷하다.
“그럼에도 이렇게 나선 건…….”
문득 저처럼 영웅이 되고 싶다던 말 뒤에 붙었던 또 다른 이야기가 떠올랐다.
「고향조차 지키지 못한 저지만, 그런 저라도 영웅이 될 수 있는 거잖아요?」
꼭 그러쥔 주먹, 울 것 같으면서도 아리게 웃던 표정.
「전요, 꼭 영웅이 돼서 고향 사람들이 저를 볼 수 있도록 할 거예요. 하늘에서도 제가 보일 정도로 빛날 거예요.」
솔직하되 말간 욕심은 언제나 사람의 눈을 사로잡는다. 아무나 가질 수 없고 쉽게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러분들이 욕심내는 모습이 마음에 들어서.”
그래서 그는 정말 필사적으로 사는 사람들의 눈은 외면하기가 어려웠다. 그가 가진 갈망에서는 항상 피비린내가 나는데, 저들의 것에서는 풋풋한 뙤약볕 냄새가 나서인지도 모른다.
그가 잃어버린 순수의 냄새.
“쪽에 가깝네요.”
“예?”
“호의로 돕는 건 안 되는 겁니까?”
“아니, 그건 아니지만…….”
“어…….”
생각 외의 말이었는지 우유에탄산 팀은 쉬이 받아들이질 못했다.
상관없다. 그들의 이해까지 그가 고려해 줄 필요는 없었다. 변덕으로 알아듣든, 다른 꿍꿍이가 있는데 그걸 숨기려 하는 빈말로 알아듣든, 그건 알아서 할 문제다. 후자로 이해한다 해서 딱히 틀린 말도 아니고.
그때, 오직 그에게만 들리는 귓속말 알림이 떴다.
『밀키스한잔(귓속말): 본보기는 아니고?』
보아라. 이처럼 후자로 이해한다고 한들 틀린 건 아니란 말이다.
은우의 눈동자가 한쪽으로 쏠렸다. 타자를 치는 듯한 손동작의 우유에탄산이 보였다. 그녀는 이쪽을 보며 싱긋 웃고 있다.
그는 목을 쓸었다. 그의 손가락이 채팅 창(귓속말)을 불러냈다.
『켄(귓속말): 본보기보단 맛보기에 가깝겠습니다.』
정말 본보기를 보여 주고자 했다면 직접 나섰을 거다. 이쪽 세계가 너무 온건해서 그러지 못했을 뿐.
메시지를 받은 우유에탄산의 눈매가 곱게 휘었다.
* * *
지옥왕의 첫째 아들을 죽인 후, 분노한 지옥왕이 직접 나섰다. 은우는 옳다구나 그 녀석을 죽였다. 사제도 죽이지 않았는데 왕이 나와도 되나 싶지만, 일단 스토리가 그러니 마음 편하게 사냥했다.
지옥왕은 그의 아들보다 강했지만, 딱 그뿐이었다.
은우는 그의 입에 샷건 총구를 박아 넣고 빛의 산탄을 선물해 주었다. 지고지결하다는 지옥왕이 지옥에 홀로 떨어진 천사에 의해서 사망하는 순간이었다.
“예언이 이뤄졌구나.”
지옥왕의 사망과 동시에 컷신이 시작되었다. 은우의 캐릭터, 루치페르─일단 그리 불렸으니─가 고개를 틀었다. 바라본 곳에는 악마 사제가 천천히 걸어오고 있다.
“예언의 서는 이야기했지. 파멸이 지옥을 찾아오는 날, 지옥은 새롭게 탄생될 것이라고.”
“…….”
루치페르는 알 바냐는 듯 샷건을 들어 사제를 겨냥했다. 자비 없다 못해 성급하기까지 한 행동이었으나, 사제는 외려 껄껄 웃었다.
빛의 탄환이 사제를 지나쳤다. 적중했으나, 그 몸이 환상이라도 되는 것처럼 통과한 것이다.
“오만한 자여, 그러나 버림받은 자여. 예언이 궁금하지 않은가?”
사제의 말 따위, 루치페르에겐 안 들리는 모양이었다. 방금 탄환이 통과했다는 걸 직접 목격했음에도 그는 재장전과 사격을 반복했다.
“악마도, 천사도 아닌 것이 태어나 파멸의 이름을 부여받을 것이오. 다만 살육과 끝없는 분노, 파멸을 숭상하니, 천사도, 악마도 그를 두려워하리라.”
탕!
“균형이 망가진 세상은 무너질 것이매, 파멸 끝엔 창조가 존재한다. 하니 끝을 두려워하지 마라. 종은 시작을 부른다.”
탕!
“선하지 않은 선, 악하지 않은 악에 의해 시작될 창세를 숭배하라.”
탕!
총의 격발음이 멎었다. 루치페르는 어느새 사제의 거짓된 육신 앞에 선 상태였다.
“무엇에 그리 분노했는가?”
“…….”
“천사로 키워졌으나 천사가 아닌 것에 분노하는가? 그대를 속인 천상에 분노하는가? 아니면 배신?”
“…….”
“그대는 그저 죽일 뿐, 악마를 싫어하진 않지. 거짓 하나 때문에 천상에 분노할 그릇 또한 아니야. 무엇 하나 가치가 없을 테니까.”
루치페르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차분한 호흡을 내쉴 뿐, 어떤 컷신에도 그는 분노나 슬픔 따위를 표하지 않았다.
“아니면 그래, 이 모든 것에?”
탕!
샷건이 사제의 온몸을 통과했다. 빛이 탄피 떨어지듯 바닥에 흩뿌려졌다.
끌끌. 사제가 웃었다. 살갗이 벗겨지고 근육으로만 이뤄져 있는 듯한 얼굴이 흉악하다.
─딴 천사들은 항상 날개가 있고 주인공은 아닌게 설마 이 떡밥이었음....???
─미쳤다 미쳤어ㅋㅋㅋㅋㅋ
─상상도 못한 정체
─이런 반전 무냐고ㅋㅋㅋㅋ
그사이 시청자들은 새롭게 밝혀진 사실에 기함을 내지르며 떠들었다. 아무렴 천사일 거라고만 생각했던 주인공이다. 갑작스레 천사도 아니었다고 밝혀졌는데 당황하지 않을 자는 적다.
주인공의 이름이 루치페르라는 게 밝혀졌을 때 정도로 채팅 창이 뜨거워졌다.
“끝까지 이야기하지 않을 셈인가. 그 또한 좋다. 천사로 키워진, 그러나 아닌 것아. 너는 이미 운명을 따라 걷고 있으니.”
사제의 몸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오라. 나는 신전에서 그대를 기다린다.”
마지막 목적지가 정해졌다. 이벤트 신도 거기서 끝났다.
“주인공 이름이 루치페르라기에 타락 천사라도 되는가 했더니, 애초에 천사도 아니었군요.”
─천사가 아니면 뭐지 악마?
─악마면 얼굴 자체가;;
─악마는 일단 아님
─인간인가 그럼?
─정체가 뭐지
은우는 가장 먼저 그 부분을 건드렸다. 시청자들이 바로 동의했다. 아까 그렇게 떠들어 놓고도 그러는 걸 보니 어지간히 충격적인가 보다.
─악마를 싫어하지 않는다는 것도 조금 의외임...
─싫어하는 게 아닌데 저렇게 집요할 정도로 죽이냐고ㅋㅋㅋ
“호전적이면 호불호가 없더라도 싸울 수 있지 않나요?”
─아무리 그래도;;;
─목숨 거는 건 좀 에바지 않음?
─모르지 싸패일수도
─누가? 루치페르가? 아니면 켄이?ㅋ
─ㅋㅋㅋㅋㅋㅋ
시청자들의 농담에도 마냥 웃을 수가 없는 건, 실제와 크게 다르지 않아서일 것이다.
은우는 목덜미를 쓸었다.
그도 어린 시절을 제외하면 괴수가 싫어서 죽이고 다닌 건 아니었다. 어린 시절에야 가족과 그를 거둬 준 용병단마저 몰살당했으니 싫어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 마음마저 무뎌졌다. 증오조차 귀찮아진 것이다.
대신 그를 전장에 서게 만든 것은 죽어도 상관없다는 마음이었으니. 당장 죽어도 남는 미련이 없다는 게, 살아서 하고 싶고 이루고 싶은 게 없다는 것이 아이러니하게도 그를 살게 만들었다. 미련이 없는 만큼 하나의 전투에 모든 것을 걸 수 있었고, 그게 기어코 승리를 이끌어 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은우는 루치페르를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싸움에 목맨 것처럼 달려드는 그 심리를 조금이나마 알 것 같다.
루치페르는 어쩌면 공허함을 해소할 수 있는 공간으로 전장을 택했을 뿐이리라. 과거의 그가 그랬듯.
“일단 사제 목부터 따러 가죠.”
─ㅋㅋㅋㅋㅋ일단 목부터ㅋㅋㅋ
─사제 잡으면 엔딩이에요ㅋㅋㅋㅋㅋ
─아 첫트 최초클 가나요ㅋㅋㅋㅋ
그렇지만 그가 사람 심리에 통달한 것도 아니거니와 주인공의 과거도 알지 못하는데 어찌 생각을 완전하게 점칠 수 있을까.
은우는 쓸데없는 것에 심력을 소모하는 대신 게임의 본래 목적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의 걸음이 신전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신전이 가깝다는 사실이었다. 그 과정에서 악마 700마리가량을 찢어 죽여야 했지만, 일단 거리가 먼 건 아니었다. 저항이 강렬해서 그렇지.
“오오, 드디어 왔군.”
그리고 그 여로의 끝에서 은우와 시청자들은 혼자 서 있는 사제를 발견할 수 있었다. 들어서자마자 이벤트 신이 시작되었다.
세계 최초 신의 의지 모드 클리어를 앞둔 상태여서 그런지 시청자 수는 역대 최고치를 또 한 번 갈아치웠다. 엔젤 돈 크라이가 검은기사만큼이나 인기 있는 게임인 데다가, 시간에 따라 은우의 이름값이 치솟은 게 이번 시청자 수를 만들어 냈다.
타앙!
정말 호쾌하게도 루치페르는 안에 들어서자마자 총을 갈겼다. 허무하게 엔딩을 보나 싶었지만, 사제 또한 만만한 이가 아니었다.
방어막에 빛이 튕겨 나갔다. 루치페르의 성격을 알고 대비한 게 분명했다.
“성질 급한 건 아네만, 그대가 그런 성격으로 여기까지 온 게 가끔은 궁금해지는군.”
이쪽도 비슷한 감상이다. 사람들은 사이다니, 시원하다느니 말하지만, 은우의 입장에선 조금 성마른 느낌이었다. 판단이 빠른 건 좋지만, 많은 순간에서 너무 급하게 결정한다.
“내 아래를 보라.”
방어막에 몇 번이고 총을 갈기던 루치페르가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내렸다. 사제가 밟고 서 있는 신전의 대지는 유리로 만든 것처럼 투명했다. 동시에 그 아래에는 펄떡이는 무언가가 있었다.
심장인가 싶어 보니 그보다는 웅크린 태아에 가깝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무엇이 실제든 징그러운 형상이다.
“이곳은 여정의 끝이 아니다. 창세의 시작점이지.”
사제가 그의 앞에 있던 촉수 다발─무언가의 입 같기도 했다─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자세히 보면 그것은 유리판 아래의 태아 내지 심장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걸 알고 보면 촉수 다발이나 입 같다는 감상보단 탯줄에 더 가깝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들고 만다.
“죄악의 병사를 죽이고 신이 되게.”
사제가 쓸데없는 말을 남기며 그 촉수 다발 가운데에 몸을 밀어 넣었다. 오그라든 촉수들이 나팔처럼 펼쳐지며 사제를 삼키기 시작했다.
“그게 그대의 마지막 운…….”
마지막까지 운명 타령을 하던 사제는 그렇게 촉수 다발에 삼켜져 연결된 태아에게로 흘러 들어갔다. 대지가 부르르 진동하기 시작했다.
아니다. 대지 아래 잠든 거대한 생명체가 몸을 일으키려는 것이다.
루치페르가 진동을 이기지 못하고 뒤로 물러났을 때, 기어코 신전의 바닥 유리창이 깨지기 시작했다. 안에 잠들었던 것─그러니까 죄악의 병사였던가?─이 일어서자 유리창 부서지는 게 더욱 가속화되었다.
결국 그 거대한 몸뚱이가 유리창을 전부 부수고 유리로 이뤄지지 않은 신전 바닥에 섰다.
우어어어어!
슬라임을 대충 굳혀 둔 것처럼 몸이 무른지, 그것의 형태가 조금씩 무너졌다. 녹은 밀랍이 그러듯 한 방울, 한 방울 살점이 녹아내리기도 했는데, 그 살점이 대지에 떨어질 때마다 악마가 되었다. 거기까지가 이벤트 신이었다.
보스전이 시작되었다.
우어어어어어어어!
그 녀석의 이마에 솟아나 있는 뿔 사이로 적색 빛이 모이기 시작했다.
레이저 같은 것이라도 쏠 셈인가. 은우는 바로 자리를 피했다. 직감은 틀리지 않았다. 그가 있던 자리부터 일직선으로 붉은 광선이 휩쓸었다. 은우를 향해 달려오던 악마─살점이 녹아내리며 만들어진─들이 광선에 휩쓸려 타 죽었다.
“크네요.”
─이걸 잡으라고 만든 거임??
─홀리쉣
─징그러;;;
─짐살라빔짐짐살라빔짐살라빔짐짐살라빔짐짐~~
─와 틀니냄새
─뭔데 뭔 드립인데
신전이 거대해서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저것은 납작 엎드려야 했을 것이다.
은우는 저것을 어떻게 요리할까 고민하며 칼을 들었다. 저런 거대 괴수를 잡는 것에는 이골이 났다. 차라리 어려운 것은 그와 비슷한 크기인데 따라 할 수 없는 괴력과 괴랄한 속도를 가진 것들이다.
─어, 근데 장소 이동 안함?
─???
─아니 이번 작 난이도 더 올렸다더니 설마;;;
그때, 사람들이 의문을 제기했다. 은우의 눈썹이 까닥 올라갔다.
“뭐, 문제 있습니까?”
─다른 난이도에선 장소 이동해요;;
─머리통 갈구기 쉽게 고층 건물로 이동함
─설마 신의 모드 바닥에서 상대하는 거냐?
─돌은 거 아님?? 이걸 잡으라고?
─이건 진짜 못 깬다
─포탈 없어요 포탈?
─더 무서운 건 여기서 죽으면 처음으로 돌아감;;
─신의는 목숨 하나죠 미친
시청자들이 아우성을 치는 사이, 은우는 주변을 훑어보았다. 딱히 포탈처럼 생긴 건 없다. 그렇다고 신전 안에 저 괴수의 머리통을 노릴 만한 높은 장애물이 있는 것도 아니다.
“최고 난이도라 그런지 여기서 잡는 건가 보네요.”
─진짜 미친 거 아님??
─게임을 깨라고 만들어야지;;
─라고 말한 후 검은기사를 보시오
─라고 말한 후 아임휴먼 히든루트를 보시오
─아 그러네ㅋ
─ㅋㅋㅋㅋㅋ아니 켄만 깰 수 있는 걸 내놓지 말라고ㅋㅋ
─진짜 제작사 ㅁㅊ놈들.....
은우로선 딱히 별생각 없는 부분이었다. 그는 낮은 난이도를 해 본 적 없을뿐더러, 그런 발판이 없어도 충분히 잡을 자신 있었다.
죄악의 병사가 그가 있던 자리를 손으로 내려쳤다.
은우의 몸이 흔들거리며 그것을 피하고 공중에서 몸을 틀었다. 손등에서 사출된 작살이 병사의 팔목에 박혔다.
“별로 상관없지 않습니까?”
실이 줄어들며 은우를 그쪽으로 끌어당겼다. 보통은 은우에게로 끌려오는데, 벽에 박았을 때처럼 질량 차이로 인해 이번엔 은우가 끌려갔다.
“어차피 커다란 샌드백에 불과할 뿐인데.”
최종 보스로의 포스는 충분하지만, 싸움의 상대로선 글쎄. 인간의 육신을 따라 하면서까지 그를 죽이려 든 괴수신을 떠올리면 이런 커다란 놈은 같잖기만 하다. 요리하기 귀찮고 오래 걸릴 뿐인 고깃덩이에 불과하다. 재미가 없다.
─저게 샌드백이라뇨;;
─켄한테서 오만함 빼면 시체일듯
─아님 구울임
─ㅋㅋㅋㅋㅋ구울단 진짜 미쳤네
─구울도 이건 못잡을듯
─야 구울 악마인 거 모름??? 쫄악마임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오만함이 아니라 그저 사실을 말했을 뿐이다. 그렇지만 여기서 실망했단 티를 내는 것도 좋을 것 같진 않다.
은우는 속내를 꿀꺽 삼켰다. 그래도 아쉬움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병사의 팔에 안착한 그의 몸이 빠르게 달렸다. 찐득찐득한 지방이 부츠에 달라붙었지만, 감촉은 여전히 구긴 휴지 갑을 밟는 정도다.
그럼 이제 이걸 어떻게 죽여 볼까. 은우는 그를 공격하려 드는 살점의 악마들을 그리고 병사의 기술로 보이는 불덩어리들을 보며 쌍검을 들었다.
은우의 노련한 검술이 마주치는 악마들의 팔다리를 가르고 머리를 베었다.
그때, 병사의 몸에서 붉은 기운이 흐르기 시작했다. 마치 파랑처럼 그것은 발부터 시작해 허리, 가슴을 타고 올라와 양팔과 머리 방향으로 나눠졌다. 파동에 닿으면 아무리 봐도 좋을 것 같지는 않다.
은우는 파도가 다가올 때 냅다 팔 바깥으로 뛴 후 넓게 펼쳐진 병사의 가슴에 작살을 박아 이동했다. 파동은 다행히 하나만 왔기에 이미 지난 가슴 부분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의 몸이 암벽등반을 하듯 죄악 병사의 가슴을 푹푹 찔러 가며 쌍도로 올랐다.
어떤 생물이든 보통 목을 자르거나 눈을 파내어 그 안쪽의 뇌를 가르거나 내장을 휘저으면 죽기 마련이니.
은우가 그중 하려는 것은 두 번째였다.
그때, 죄악의 병사가 몸을 떨었다. 은우는 버티기보단 미련 없이 떨어진 후 더 위쪽으로 실이 연결된 작살을 박았다. 그리곤 흔들림에 맞춰 몸을 시계추처럼 기울인 후, 가장 높이 상승했을 때 병사의 몸에 발을 대었다.
두다다다!
그의 몸이 수직이다 못해 역경사가 져 있는 가슴 위를 내달렸다. 추락하려 할 때마다 날개를 꺼내 점프하고 작살을 박아 가는 솜씨가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냈다.
그리고 그 어깨에 도달했을 때, 은우는 핑그르르 돌며 옆으로 빠졌다. 예측 샷이라도 날리고 싶었는지 병사가 어깨를 짚었다. 은우가 올라갔을 어깨다.
날개가 펄럭 생겨나고 은우는 손이 얹어진 어깨에 다시 안착했다. 그리곤 그 위를 질주해 병사의 뺨에 닿았다.
“많이들 오해하십니다만, 커다란 놈들은 오히려 잡기 쉽습니다.”
밀빛 머리카락 사이로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찬란한 빛을 뿌렸다.
“타고 오를 능력만 되면 이쪽을 절대 못 잡거든.”
거인의 뺨을 밟고 선 파멸은 검을 들었다. 그의 앞에는 커다란 죄악의 눈동자가 있다.
“죽이기 얼마나 쉽습니까?”
지옥의, 또는 게임의 종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