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재능이라는 칼날이 벨 경로를 그리는 것은 본능이란 놈이다. 그렇지만 본능이란 것은 너무 추상적이고 불명확하다. 변수가 너무 많고 컨디션에 따른 변화도 있었다.
생사의 기로에 설 몸으로서 그런 불분명한 것에 목숨을 맡길 수 없다.
그래서 그는 발버둥 쳤다. 그 본능이란 놈조차 통제 아래에 둘 수 있도록. 그가 알고 인지할 수 있도록.
고도의 본능과 철저한 이성 간의 경계가 허물어졌다.
그가 괴수들의 신을 죽였던 날의 일이었다. 동시에 동료였던 자들을 죽인 날이었고.
“…진짜 뭐, 특수부대셨나요?”
“글쎄요.”
은우는 질린 기색의 레리를 두고 검을 고쳐 잡았다.
“그만두셔도 됩니다.”
가볍게 고한 말은 도망칠 기회를 주는 것이다.
“일반적인 건 아니니까요. 굳이 이런 방식이 아니더라도 강해지는 방법이 없진 않을 거고.”
말이야 쉽지, 자신의 육체에 대해 그리고 자신의 움직임에 대해 전부 파악하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수치로 잴 수 없는 것에게 스스로 수를 매기고 계속 정보를 갱신해야 하는 일인데 쉬울 리 없다.
하물며 저들은 절박하지가 않다. 그처럼 목숨이 걸려 있는 것도 아니고, 이것의 실패로 많은 이가 죽는 것도 아니니. 필사적으로 매달려도 부족할 판에 저런 어중간한 마음으로 얼마나 얻어 갈 수 있을까.
“…이건, 이건 정말 궁금해서 묻는 건데요.”
“네.”
“알면, 많이 달라지나요?”
레리의 말에 은우는 입술을 삐뚜름하게 올렸다. 아주 멍청한 질문이었다.
“신도 죽일 수 있을 겁니다.”
농담은 아니었다. 잘만 배워 간다면 인간으로서 인외의 행적을 실현할 수 있긴 하니까.
▣ 043. 쫄?
“자신의 최선을 파악하는 게 중요합니다. 자신을 파악한다는 것은 한계점을 명확히 알 수 있다는 거고, 한계점을 알면 언제든 원할 때 한계까지 임할 수 있으니까요.”
그것에 익숙해지면 언제나 한계에 걸쳐 있는 것도 가능하다. 진짜 육체가 대상이라면 몸 망가지기 십상이지만, 다행이 그들이 하는 건 게임이었다.
게임 속 육체는 공격받아 대미지를 입을 순 있어도 험하게 다룬다고 고장 나진 않았다.
“아니……! 그렇다고 해도 이건 말이 안 되는……!”
나가떨어진 레리를 대신해 2번 타자로 참가한 슬리퍼는 악을 썼다. 그가 날린 화살을 가볍게 피한 켄이 물었다.
“뭐가 말이 안 됩니까?”
“저, 지금까지 100발은 넘게 쐈는데요?!”
“그래서요?”
켄의 고개를 기울어졌다.
“그 100발로 활 솜씨가 느셨습니까?”
명치를 때리는 말에 슬리퍼의 입이 다물렸다.
“처음보다 느려졌습니다. 스태미나가 있는 게임도 아니고 몸에 손상이 가는 일도 없는데 손이 왜 꼬입니까?”
“그만큼 쏘면 누구나 다…….”
“누구나 다?”
아, 그냥 말을 안 하는 게 현명하겠구나. 슬리퍼는 뒤늦은 깨달음을 얻었다.
“슬리퍼 님은 평타 칠 때 래피드 샷이 조금 더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적어도 궁수 성좌에선. 그런 분이 손 꼬이면 안 되죠.”
“잠깐, 지금처럼 빨리 쏘라고요……?”
“네.”
“그럼 보정이 안 먹는데?”
켄은 기다렸다는 듯 바닥에 꽂힌 화살들을 가리켰다.
“보정 안 먹인 화살.”
다음으론 조금 떨어진 곳에 꽂혀 있는 화살들을 가리켰다.
“보정 먹인 화살.”
슬리퍼는 어쩐지 뒤에 올 말을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놈의 입. 현명한 깨달음을 얻자마자 멍청하게 굴었다.
“둘 다 절 못 맞추셨죠.”
“…뼈가 아프다.”
“너무 실망하진 마세요. 둘 다 못 맞춘 건 사실이지만, 래피드 샷의 경우 쏘아 내는 속도에 비해 명중률이 나쁘지 않습니다.”
다행히 켄은 채찍만 치는 타입이 아니었다.
“슬리퍼 님이 보정을 받아 가며 저격한 경우 한 발당 2.8초 정도 걸립니다. 제가 아닌… 그래요, 레리 님을 기준으로 하면 두 발에 한 발 정도는 맞췄겠네요.”
그러면 대충 5.5초에 1발을 맞추는 셈이다. 슬리퍼는 크게 생각해 본 적 없던 부분에 눈살을 가늘게 좁혔다. 이래서 자신을 아는 게 중요하단 건가 싶다.
“반면 속사의 경우 0.9초에 한 번씩 쏘아 냅니다. 10발 정도 발사하시면 3발은 맞추실 거고요.”
이렇게 되면 9초에 3발이다. 심지어 적이 뭉쳐 있을 때는 더 많이 맞을 테니, 아무리 봐도 후자가 이익이다.
슬리퍼는 자신이 지금껏 잘못 생각해 왔다는 걸 자각했다.
“제가 알아본 바로는 화살 재생성까지 걸리는 속도는 0.5초. 쏘는 속도를 단축하면 단축할수록 래피드 샷이 더 빨라질 겁니다. 곡사를 잘하신다면 인위적인 화살 비를 만드는 것도 불가능은 아니겠죠. 어렵긴 하겠지만.”
과연, 천재는 시각부터가 다르다. 정확도를 버리고 속도를 선택하라는 방식을 제시하다니. 이런 발상의 전환이 어려운 것은 아니나, 그것이 낫노라 단정하고 실행에 옮기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슬리퍼는 궁수 성좌를 메인으로 플레이해 온 자신보다 켄의 이해도가 더 높은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낼 수 있는 한계치부터 파악한다 말한 만큼 정말로 켄의 이해도가 더 높은지도 모른다.
“정확도를 높이려 하신 것 같은데, 슬리퍼 님은 정밀 조준에는 별 재능이 없습니다. 연습으로 나아질 거라 생각하셨겠지만, 제가 보기엔 2주로는 턱도 없습니다.”
근데 그렇다고 뼈 맞는 아픔이 줄어들진 않는다.
슬리퍼의 손이 그의 가슴을 붙잡았다. 갈비뼈를 넘어서 그 안의 내장까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대회 기간에는 에임보단 속도에 치중하세요.”
“옙.”
“그리고 스킬, 남용하지 마십쇼.”
“아니, 그럼 딜로스가…….”
“맞추지도 못하는데 뭐가 딜로스입니까?”
슬리퍼는 울상을 지었다. 켄의 말이 구구절절 맞다. 안 써서 딜로스가 나나, 못 맞춰서 딜로스가 나나 그게 그거였다. 오히려 후자는 기회를 써 버린다는 점에서 더 안 좋다.
“맞출 수 있는 기회가 오면 쏘라고 했을 텐데요.”
“맞출 수는 있는 겁니까, 이거……?”
그는 결국 징징거리는 것으로 자신의 억울함을 표현했다. 그럴 필요가 없는데 그들을 위해서 시간을 내주는 켄을 차마 비난할 수는 없고, 넘어가자니 힘겨워서 약간의 우는 소리를 내는 거다.
물론 차디찬 눈길 한 번이면 그것도 바로 들어갔다.
켄은 정말이지… 사람을 한심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그러니까, 경멸이나 분노는 아닌데 묘하게 시선을 받는 사람이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그런 눈빛이었다.
“맞춰야죠. 그게 당신의 몫입니다.”
“그렇죠… 딜러가 맞춰야죠…….”
틀린 말은 아닌데 왜 이렇게 뼈가 아플까. 슬리퍼는 내적 오열을 하며 다시 활을 들었다. 아직 교육은 끝나지 않았다. 이 와중에 실력 느는 게 그의 눈에도 보여서 더 멈출 수가 없었다.
그리고 10분 뒤, 슬리퍼가 나자빠지고 세 번째 타자인 산호가 나섰다.
“산호 님은 반사 신경이 나쁘지 않습니다. 쿨 계산도 빠르시고요.”
“그렇군요.”
“근데 그래도 느립니다.”
산호의 눈이 살짝 흐려졌다. 그녀의 앞에 있는 사람에게 가져다 댔을 때 과연 누가 느리지 않다는 말을 들을 수 있을까.
그 순간에도 켄은, 아니 은우는 여상스럽게 말을 이어 나갔다.
“산호 님은 다른 두 분과 조금 다릅니다. 이성을 중점으로 내세우는 분께 자각하고 싸우는 법을 가르치는 건 중복되는 일이니까요. 그렇다고 연습 몇 번으로 피지컬을 끌어올리는 것도 어렵죠.”
은우가 봤을 때 산호는 육체 타입은 아니었다. 기본적인 피지컬이야 수준급이긴 한데, 레리나 슬리퍼처럼 지적한다고 단번에 나아질 재능은 아닌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그녀는 머리가 좋았다. 다루기 힘든 쌍둥이 성좌를 시기적절하게 사용하는 점이나 그 특성을 사용하는 수법부터가 그랬다.
“머리가 좋으시니 그쪽은 건드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판단이 조금 더 빨라질 필요는 있겠네요.”
“그렇다면?”
“산호 님은 반대로 이성보다 본능이 먼저 나가는 연습을 해야겠습니다.”
은우는 고갯짓을 했다.
“무기를 드세요.”
앞서 레리와 슬리퍼의 지적과 교습을 지켜본 산호의 심장을 떨리도록 하는 말이었다.
* * *
간단한 교습을 2시간에 걸쳐 끝낸 후, 은우는 약간의 휴식을 거치고 방송 준비를 했다. 여러 심정이 겹쳐 그들에게 도움을 주기로 했다지만, 그의 본업은 스트리머였다.
오늘 할 게임은 당연히 ‘엔젤 돈 크라이’의 나머지 부분. 악마 장군 두 마리는 이미 전편 방송에서 다 잡았다. 악마 대공의 성 역시 절반 넘게 격파된 상황이다.
엔젤 돈 크라이 최고 난이도를 원트에 노 데스 원 클을 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퍼지자 시청자 수는 또다시 최고치를 갱신했다.
박 팀장이 환하게 웃는 이모티콘과 기력 보충 하라며 보약을 보내 온 건 여담이었다.
은우는 살덩이나 뼛조각들이 울룩불룩 뒤덮고 있는 복도를 거닐었다. 극사실적인 시각과 달리 감촉은 종이 뭉치를 밟는 기분이라 현실감은 크지 않다. 그래도 은우는 만족했다.
애초에 그는 살육 자체를 바라는 미치광이보다는 전장의 향수를 그리워하는 사회 부적응자에 더 가까웠다.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기보단 이민 온 사람의 고향 생각 정도?
그게 그건 거 같지만, 일단 다르다. 아마도 그럴 거다.
은우의 팔뚝이 적의 대가리를 위로 올려 친 후, 다른 쪽 팔꿈치로 내려찍었다. 파각, 소리와 함께 머리가 터져 나갔다.
─이게 엔크다.....
「‘사이다다이마리야’ 님이 ‘1,000원’ 투척!
너무 시원해」
─진짜 10년 묵은 묵변까지 내려가는 느낌
─징그러운데 도저히 안 볼 수가 없음ㅠㅠ
─ㅇㅈ.....1인칭은 도저히 무리
─캬아아ㅏ 켄은 진짜 겜못들의 구원자;;
─겜잘스들한테도 켄은 초월자임ㅋ
─ㄹㅇㅋㅋㅋㅋ
퓨퓨퓨퓽!
탄환을 엄청나게 쏴 재끼는 괴물이 나타났다. 은우는 적이 탄환을 쏘아 내는 곳에 점착 성류탄을 날리며 대검을 들었다.
사출 부위가 파괴됨으로써 살짝 충격을 받은 적이 비틀거렸다. 은우의 대검이 그것의 커다란 눈깔을 자르고 그 안쪽의 내장과 뇌를 으깨었다.
「‘이게진정한힐링겜이지’ 님이 ‘5,000원’ 투척!
킬링으로 힐링하는게 최고잖어ㅋ」
─아주 현명하다.
“그러게요.”
그는 잡악마의 몸을 걷어차 띄운 후 대검으로 내려쳤다. 아래로 끌려 내려가진 않고 그 몸뚱이가 둘로 갈라졌다.
피 보라 속에서 대검을 놓고 허리춤의 쌍검을 뽑는 신부는 굉장히 기이하고 신비롭다. 폭력이 어느 정도를 넘어가니 난폭함보다는 그 강고한 무력이 도드라지는 것이다.
“자, 대공 잡을 무기 모십니다.”
─아 미친 무조건 창가죠
「‘형님@!!!’ 님이 ‘10,000원’ 투척!
대나아아앗!!!」
「‘켄의가운데다리’ 님이 ‘5,000원’ 투척!
와이어!!!!!」
채팅과 후원, 구독이 줄지어 올라왔다. 은우는 언제나처럼 후원이나 구독 중 가장 먼저 올라온 것을 뽑았다. 쌍검이 덤벼드는 적의 수급을 베고 심장을 꿰뚫었다.
그의 긴 다리를 휘감다가 풀어지곤 하는 옷자락은 꼭 드레스처럼 곱고 우아했다. 비록 피에 흠뻑 젖어 빛을 비추면 검붉게 번들거리겠지만 말이다.
은우가 팔을 크게 들었다가 그대로 앞을 향해 휘둘렀다. 쌍둥이 검이 빙그르르 날아가며 저편에서 달려들던 악마들의 미간에 박혔다.
그의 손이 등 위로 솟아 있는 손잡이를 붙잡았다.
철컥.
접혀 있던 낫의 몸체가 펼쳐지며 본래 형태를 되찾았다.
“진입합니다.”
은우가 보스 방의 문을 열었다. 그러자 이제껏 없던 컷신이 시작되었다.
“기어코 이곳까지 왔구나, 빌어먹을 신의 개야.”
대공의 말에도 캐릭터는 반응하지 않았다. 그저 들고 있는 대낫을 한 바퀴 돌리며 자세를 취할 뿐.
“너는 모른다! 네놈이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글쎄. 꼭 알아야 할까? 은우는 주인공의 캐릭터 설정을 떠올렸다. 악마들이 득시글거리는 지옥에 혼자 떨어진 천사. 생존을 위한 싸움.
─뭐래ㅋㅋㅋ
─천사가 악마 조지면 되는 거지 머
─(금지된 채팅입니다)
─스포ㄴㄴ
─켄이 하도 대사 치기 전에 죽이니까 제작자에서 대사 좀 들으라고 이벤씬 넣어줌ㅋㅋ
─너 천재냐?ㅋㅋㅋㅋ
그는 눈을 감았다. 슬프게도 알아야 했다. 정말로 살고자 했다면 알아야 했다. 과거의 그는 미련이 없었기에 그 사실을 두고서도 외면했지만.
“무지하여 가여운 것아! 네놈의 목숨을 내가 취하리라!”
정말 짧은 컷신이 끝나며 악마 대공이 쫄들을 불렀다. 은우는 기다렸다는 듯 대낫을 휘둘렀다. 이런 기형적인 무기는 실전엔 그다지 좋지 않지만, 그래 봤자다.
“목을 자를까요, 몸을 반으로 가를까요.”
대낫의 백색 날이 허공에 하얀 궤적을 그렸다. 그것은 꼭 상모를 돌린 것과 비슷하다. 얇은 베일을 휘두른 것처럼 잔상이 오래 남았다.
사각!
다루기가 어렵고 불편한 대신인지 대낫은 다른 무기에 비해 절삭력이 정말로 좋았다. 흰색 궤적이 나풀거릴 때마다 적의 몸뚱어리가 양단되고 분리되어 붉은 소용돌이를 만들어 냈다.
장식이라고 하기엔 너무 끔찍하고, 죽음의 흔적이라 말하기엔 너무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ㅗㅜㅑ;;;
─진짜 이게 사람이냐;;
“가로? 세로?”
「‘뭘물어봐요’ 님이 ‘1,000원’ 투척!
당근 세로가로땃땃따해야죠ㅋ」
─세로가로땃땃따 ㅁㅊ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그러네요.”
은우는 태연하게 잡담을 나누며 대공을 놀리듯 잡악마들을 유린했다. 분명 그의 목숨은 하나뿐일진대 보스를 잡지 않고 회복 약들을 먼저 잡는 꼴이 사람들의 웃음을 새삼 자아냈다.
─아, 이제 켄 액션 아니면 만족 못하는 몸이 되버렸음;;
─책임져ㅡㅡ
─신의 의지 모드 맞냐고~~!!
─이건 진짜 켄 잘못이다
고릴라처럼 상체가 두꺼운 악마의 상체를 쳐 넘어뜨리고, 그 머리를 발로 밟아 터트린다. 그러면서도 눈동자는 채팅 창에 고정했다.
시청자의 억지를 본 은우의 눈매가 미미하게 삐뚜름한 웃음을 머금었다.
“억울하네……. 이런 건 보통 형이랑 누나가 책임지지 않나? 응?”
그는 오랜만에 전생의 지인에게 배웠던 것을 꺼내 들었다.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조소하듯, 그러면서도 장난이란 느낌이 들게 속삭인 것이다.
과연 유혹에 자신 있어 하던 그 사람의 장담은 맞았다.
─심장아 나대지 말자;;
─형이 책임지면 게임 해주냐ㅋ
─아ㅠㅠ 동생인데 오빠라고 부르고 싶네ㅠ
─아 설렌다ㅠㅠㅠ
─덜렁이 OUT!!
─그 덜렁이들도 조져졌음ㅋ
은우는 그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한 반응에 키득거리며 웃었다. 새소리에 비유하기엔 너무 저음이지만, 사람들은 그래도 좋다고 넘어갔다. 고급 양주처럼 독하면서도 부드러운 목소리에 안 넘어가고 배길 자는 드물었다.
“그럼 이제 너만 남았나?”
“이… 이 괴물 같은 것……!”
그는 대공의 외침에 귀를 후비고 터는 척을 했다. 명백한 도발이었다.
“절대 용서하지 않으리라!”
대공의 몸이 울룩불룩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은우의 발이 대지를 박찬 것도 그때였다.
은우의 대낫이 대공의 다리를 잘랐다. 대공의 키가 수어 미터나 되기에 팔 대신 택한 것이다.
“변신하는 걸 내버려 둘 이유가 있나요?”
─ㅋㅋㅋㅋㅋㅋㅋㅋ
─대공 울어욧!!
─진짜 무자비한 거 보소ㅋㅋㅋㅋㅋ
─사탄: 아 이건 좀;;
은우의 가차 없음에 사람들은 아쉬워하면서도 동의 표를 내던졌다. 대공의 변신이 끝났다. 온전히 잘려 나가진 않았지만, 힘줄이 끊어진 대공의 몸이 엉거주춤해졌다.
“죽음이 현신했다!”
대공의 거대한 팔이 은우를 짓누르려 들었다. 은우는 그것을 가볍게 피하며 대낫을 그 두툼한 팔뚝에 걸고 빙글 돌았다. 피가 나선으로 튀고, 은우의 몸이 조금 떨어진 곳에 안착했다.
촤아악-!
피가 미끌미끌하여 몸이 밀려났지만, 그마저도 의도한 바였다. 은우의 몸이 위로 날아올랐다. 그 자리에 대공이 쏟아낸 탄환들이 두두두 박혔다.
날개가 펼쳐지며 바닥으로 곤두박칠치는 것처럼 방향을 바꾸었다. 구두가 바닥과 맞닿더니 그대로 뛰쳐나갔다.
은우의 다른 손은 대낫을 빙글빙글 돌리며 혹시라도 튀는 잔해들을 막아섰다. 대공을 중심축으로 반원을 그리던 몸이 점차 대공에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그의 발이 순간 달리기를 멈추었다. 반동으로 몸이 밀려나려 했지만, 펼쳐진 날개가 그를 반대 방향으로 튕겨 내었다. 떠오른 그의 몸이 한 바퀴 회전하며 쏟아지던 탄환들을 넘었다.
“이익!”
적이 다급하게 엇나간 총구를 돌리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엄청나게 접근한 은우의 발이 겅중 뛰어올라 대공의 팔을 밟고 등 뒤로 넘어갔다. 그 순간에마저 대낫의 칼날은 그 어깨에 걸렸다.
은우는 낫 대를 아래로 끌어당겨 대공의 어깨를 베었다. 그러곤 자신의 어깨가 베이지 않도록 하되, 야구 배트 휘두르듯 팔을 오른쪽으로 최대한 당겼다.
막 은우를 잡기 위해 틀어지던 대공의 가슴팍이 훤히 드러났다.
대낫이 대공의 가슴부터 허리선을 곧장 베었다. 반격이 들어오려 했지만, 그걸 예상 못 할 멍청이는 없다. 은우의 날개가 다시 한번 펄럭이며 그의 몸을 뒤로 이끌었다.
─날개 진짜 씹사기;;
─근데 우리한텐 아님ㅋ
─켄 한정 사기템
─ㅠㅠㅠ이거 신의모드면 리얼액션일 거잖아ㅠㅠ 운동신경 어떻게 되먹은 거이뮤ㅠㅠ
─켄이라서 그럼
시청자들이 자조하며 킬킬거릴 때, 대공이 크아아악 하고 포효를 내질렀다. 핏방울과 진동파가 같이 퍼져 나왔다. 은우는 더 뒤로 한 번 더 점프해서 물러났다.
“나를 보호해라! 내가 회복할 시간을 벌어!”
“흠, 쫄?”
─ㅋㅋㅋㅋㅋㅋㅋ
─쫄따구할 쫄이 맞을 텐데ㅋㅋㅋㅋ
─ㅋㅋㅋㅋㅋ쫄!? 쫄았냐?!
은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낫을 부메랑처럼 던졌다. 창대로 인해 균형이 맞지 않아 금세 추락할 테지만, 어차피 그와 적 사이의 거리는 그렇게 멀지 않다.
대공의 어깨를 대낫이 스치고, 핏줄기가 솟구쳤다.
“원래는 끝까지 대낫으로만 상대해 보려고 했습니다.”
─??
─돈 먹고 튀할 생각?
─켄이 그러겠냐ㅋㅋ
─아 먼가 레전드 튀나올 각
“그런데 생각해 보니까 저번 방송에서 와이어를 얻어 놓고 데뷔를 안 시켰더라고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설마ㅋㅋㅋㅋ
─이거 대찬성이다
─개똥무기 출동인가요ㅋㅋㅋ
장갑의 손등 부분에서 살짝 뽑아져 나온 조그만 작살과 실이 그의 손가락에 뱅글뱅글 꼬였다.
“대공만 대낫으로 잡고 쫄은 와이어. 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