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슬리퍼 님> 불쌍한 목자들을 도와주실 켄 님 구합니다.』
『나> ……? 네?』
▣ 042. 그렇지 않고서는
현실에서의 운동을 마친 후, 은우는 정중한 초청을 받고 슬리퍼의 대기실로 이동했다. 미리 예고받은 대로 레리와 산호도 그곳에 있었다.
“안녕하세요.”
그는 어색함을 곧잘 숨기며 인사부터 건넸다. 어정쩡하게 일어선 세 사람도 곧 고개를 숙였다. 애매한 침묵이 그들 사이를 오갔다.
“…제게 부탁하고 싶으신 게 있으시다고…….”
결국 궁금한 사람이 운을 떼었다. 헬멧 위로 세 사람의 얼굴의 반질반질 비쳐졌다.
“네, 네!”
다행히 그들은 그를 너무 오랫동안 머쓱함 속에 방치해 두지 않았다. 레리가 나서서 설명을 해 주었다. 어째서 그를 초청했는지, 그에게 배우고 싶은 게 뭔지.
“결국 제게 싸우는 방법을 배우고 싶은 겁니까?”
구구절절 말하지만, 결국 요점은 그것이었다.
은우는 목덜미를 살살 쓸었다. 그에게 싸움을 배우고 싶다는 요청을 처음 받은 건 아니지만, 이 세계에서는 최초가 맞다.
애초에 쌈박질의 재능을 게임에서야─스포츠는 목숨을 건 사투가 아니니 제외다─인정해 주는 세계니 어쩔 수 없지만 말이다.
다만 궁금한 것은 어째서 그를 골랐냐는 것.
평화에 찌든 이 세계 사람들을 생각하면 전장에서 굴러먹은 그를 고른 건 탁월한 선택이 맞다. 이 세계의 전쟁터에서 굴러먹은 이들조차 은우만큼 경험이 다분하진 않을 테니.
그러나 저들은 그 점을 모른다는 게 문제다.
대체 무엇을 보고 그를 택한 것일까? 다들 하나씩 뭘 배웠던 흔적이 있는데, 그곳에 다시 가면 되는 거 아닌가?
아니면 기철이 저번에 데려갔던 그 도장이라거나. 다이아박스 소속인 이상 저들에게도 제공되는 혜택일 거다.
“왜 접니까?”
은우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 나름 질문할 만한 주제기도 했다.
“그게… 저희가 본 사람 중에서 켄 님이 가장 잘 싸우셔서요.”
“무술 도장은?”
“거긴 아무래도 정해진 것만 배우니까요. 반면 저희가 다루는 것들은… 솔직히 일반적인 무술은 아니잖아요? 물론 기본기가 중요한 건 아는데…….”
“이해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저들은 Nebula War의 대회 참가자들이었다.
무술을 배워서 나쁠 건 없지만, 단기간에 실력을 끌어올리기 위해선 일반 무술보단 Nebula War 성좌들에 맞는 기술들을 배우는 게 더 낫긴 하다. 더구나 그의 움직임은 실전성이 강한 편이고.
저들이 바라는 것도 아마 그 부분일 테지.
완전히 납득했다.
하면 이제 생각해야 할 것은 저들을 가르쳐서 얻을 만한 이익이 무엇인가 하는 것.
솔직히 겉으로 보기엔 시간 낭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가르칠 자신이 없는 건 아니나, 저들을 가르친다고 해서 새삼스럽게 좋은 스승이노라 소문날 건 아니지 않은가.
그렇지만…….
“여러분에게 맞을진 모르겠습니다만, 못 할 건 없죠.”
유형적 이득이 없을 뿐 무형적 이득은 있다. 은우는 저들이 그의 평판을 좌지우지하는 자들임을 아직 기억했다.
무엇보다 그를 무서워하지 않고 제의해 주었지 않나. 같은 업계 사람이기도 하고… 저번 합방도 조금 불편했을 뿐 나쁘진 않았고… 박 팀장처럼 꿍꿍이를 숨기는 것 같지도 않고…….
어차피 대회 전까지만 할 텐데, 그래 봤자 2주 남짓이다. 매일 해 달라고 하진 않을 테니 고작해 봐야 몇 번일 터. 더구나 변하기로 마음먹은 게 고작 며칠 전 아닌가.
뭣보다 그는 희수 그 녀석에게 친(구)없(는)찐(따)란 소리를 작작 듣고 싶었다.
스트리밍만 아니면 백수처럼 노는 인생, 까짓거 조금 어울려 주는 것도 괜찮겠지. 나중에 집이나 방송 장비에 관한 것도 물어볼 수도 있을 테고. 응, 나쁘지 않다. 나쁘지 않아.
나쁘지 않은데…….
은우는 목덜미를 계속 쓸었다. 그냥, 그냥 ‘몇 번 어울려 주는 것 정도는 괜찮겠지.’라고 생각했을 뿐인데 어쩐지 간지러운 기분이 든다. 목덜미에 열이 오르는 것 같기도 하다.
동시에 불안했다. 이 사람들이 그의 기준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전생에서도 혹독하다 평가받았는데 허여멀건 이 양반들이 과연?
“일단… 네뷸라 대전 모드로 가죠.”
“가, 감사합니다!”
“와! 영광입니다, 켄 님!”
“잘 부탁드려요.”
조그만 세 사람(그보다 나이 많은)을 보며 은우는 지금 너무 충동적으로 움직였나 후회했다. 다만 방금 전의 순간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딱히 거절하고 싶진 않았다.
시청자들과 함께 파티를 짜기로 마음먹었던 날이나 저들과 합방을 하기로 했던 그날처럼.
“근데… 정말 괜찮으신 거 맞으세요?”
상념을 깨고 산호가 조심히 물었다. 모델 일을 하는 사람답게 스트리머들 중에서도 특히 늘씬한 그녀는 말투가 그 못지않게 건조한 편이다.
다만 은우의 건조함이 한겨울의 바싹 마른 장작을 떠올리게 한다면, 그녀는 가을날 새파란 창공의 메마름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저희가 지금 한 부탁은 켄 님께 전혀 이득이 되지 않을 텐데.”
“어후, 직설적인 것 봐. 켄 님, 산호가 원래 이렇습니다. 기분 나빠 하진 마세요.”
“아, 괜찮습니다.”
“근데… 산호 말이 맞긴 맞아요. 무리한 부탁이라면 편히 거절해 주셔도 돼요.”
은우는 뫼산(山)모양으로 서 있는 그들을 보며 고개를 살짝 저었다. 물론 순서는 슬리퍼, 산호, 레리다.
“어려운 부탁이 아니라서 수락한 거니 걱정 마세요. 장기적으론 무리었겠지만, 고작 2주 아닙니까.”
오히려 저들이 그의 방식을 받아들일 수 있긴 할는지. 은우로선 그 부분이 걱정이었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요.”
“그럼 나중에 제가 밥이라도 사겠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공짜로 입 씻을 순 없죠.”
“저도요.”
밥……? 은우는 ‘그러세요.’라고 답하려다가 순간 멈칫거렸다. 헬멧을 쓰고는 밥을 못 먹는다. 그리고 그는 아직 저들에게까지 헬멧을 벗고 싶진 않다.
우유에탄산은 음, 그땐 얼굴의 위력이 절실했으니 넘어가자. 통하지 않았다는 게 함정이다만.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은우는 그 말로 적절히 넘어갔다. 이제 게임에 접속할 시간이다.
* * *
대전 모드는 아직 일대일만 제공하고 있다. 때문에 은우는 세 사람 중 한 사람씩 봐주고, 나머지 두 사람은 관전 모드로 돌리기로 했다.
“근데 실력은 안 보시네요?”
“이미 한차례 봤거니와… 안 봐도 됩니다.”
저들 수준이면 딱히 손속을 섞어 보지 않아도 대충 감이 잡힌다. 반사 신경이야 직접 겪어 봐야 알 문제긴 하지만, 저 정도 실력이면 가르치면서 봐도 충분하다.
은우의 대답에 첫 타자, 레리의 표정이 묘해졌다.
“자신감이 엄청나시네요.”
“뭐…….”
목숨을 걸고 싸워 본 적도 없는 애송이들을 두고 긴장하는 게 우스운 일 아닐까. 은우는 설명할 수 없는 말 대신 머리를 긁적이는 것으로 상황을 무마했다.
“이미 검술은 배우셨던 것 같으니 저는 특별히 무술이나 그런 걸 가르치진 않겠습니다. 너무 오래 걸리기도 하고.”
“어, 어떻게 아셨어요?”
“그냥 보입니다.”
“역시 자신감에는 다 이유가 있는 거군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은우는 어깨를 으쓱이며 오래전 신입을 키우던 때를 떠올렸다.
그때 참 별꼴을 다 보았던가. 신입 잘못은 아니었지만, 당시 일 때문에 학이란 학은 다 뗐던 것 같다. 이번엔 설마 그러지 않겠지? 아니, 그냥 그만둘 걸 더 걱정해야 하는 건가.
“레리 님, 잘 싸우는 사람의 특징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일단 지금은 가르치는 상황이다. 은우는 불안감을 지우고 차분히 레리에 맞춰 성좌를 택했다. 성별이 다른 페르세우스 성좌의 사도가 둘 나타났다.
“움직이는 방법을 잘 안다는 거겠죠?”
“움직일 줄 안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진짜 교육의 시간이 도래하니 은우의 얼굴은 사감을 완전히 제거한 사람의 것이 되었다. 전생부터 이어져 온 버릇이었다.
아무리 잘 가르쳐도 생사를 결정하는 것은 결국 행운과 운명과 재능이었으니. 그들에게 필요한 건 상냥함과 부드러움이 아니다. 그들이 죽음을 마주했을 때 코웃음 칠 수 있도록 만들어 줄 또 다른 공포였지.
잇따른 반향으로 레리의 얼굴도 괜히 딱딱해지고 자세도 꼿꼿해졌다.
“그건… 재, 재능이 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싸움에는 재능이 제법 많이 작용합니다.”
재능뿐인가. 보통 재능과 많이들 헷갈려 하는 본능 역시 싸움에선 중요한 문제였다. 행운도 그렇고.
“그렇다면 잘 싸우는 걸 넘어서 이기려면 무엇이 필요할 것 같습니까?”
“재능에… 노력이 아닐까요?”
“그 노력이란 것은?”
“재능을 갈고닦는 거겠죠?”
“갈고닦는다라…….”
은우는 설핏 웃다가 곧바로 검을 뽑아 레리에게 내질렀다. 레리가 황급히 방패를 들었지만, 은우의 검로는 교묘했다. 검날이 레리의 목젖에 닿았다.
“재능은 충분히 있습니다만, 그걸 갈고닦을 시간이 당신에게 있습니까?”
바다가, 어쩌면 녹음이 얼어붙었다. 에메랄드빛 눈동자는 마치 얼음처럼 빛을 투영했지만 머금지는 못했다.
레리의 몸이 그리고 관전하던 슬리퍼와 산호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방금 전까지 있던 사람은 어디 가고 불가해의 무언가만이 남아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검이자 사람이었고, 사람이자 무기였다. 병기였다.
거죽 아래 야수를 숨기고 있는 이가 검은 숨결을 내뱉었다.
“1분 후에 파티가 열립니다. 파티 참가자는 다섯 명이고, 케이크는 잘려져 있지 않습니다. 당신은 파티가 시작하자마자 케이크를 나눠 줘야 합니다.”
은우는 검을 거두고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방금 전 일 때문인지 레리는 무어라 말을 꺼내지 않았다.
“이런 상황일 때 사람들은 보통 눈대중으로 자르겠죠. 그렇지만 약간씩 크기 차이가 나게 잘릴 겁니다.”
“…그렇겠죠.”
“케이크끼리 크기 차이가 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연습이라는 노력을 기울였다면 오차를 줄일 수 있었을 텐데, 당신에겐 시간이 없습니다. 결국 의지해야 하는 건 당신의 직감뿐이죠.”
“…그렇죠?”
더듬더듬 대답이라도 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강단이 있다고 해 줘야 할까. 그의 목소리가 아주, 아주, 아주 조금 부드러워졌다. 듣는 세 사람은 눈치채지 못했다.
“그 직감이 재능입니다. 그렇지만 재능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약간의 오차가 있는 건 어쩔 수 없겠죠. 정말 하늘이 내린 재능이 아닌 이상.”
“…네.”
“그런데 만약에 그때 레리 님에게 줄자가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레리의 눈이 껌뻑였다.
“줄자가 있었다면 더욱 쉽게 잘랐겠죠? 잰 길이를 5로 나누면 되니까. 오차도 적겠네요, 그러면.”
은우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 줄자는 이성이자 인지입니다. 제가 가르쳐 드릴 것이기도 하죠.”
“이성… 인지?”
“자기가 낼 수 있는 힘이 얼마만큼인지 파악해 두는 건 생각보다 쓸모 있는 일입니다. 실력 자체가 느는 건 아니지만, 좀 더 효율적으로 움직일 수 있게 되죠.”
설명을 해 주었으나 레리는 아직 아리송한 표정이었다. 은우는 친절히 예시를 들어 주기로 했다.
“예를 들자면… 레리 님은 10m를 걸을 때 자신이 호흡을 몇 번 내쉬는지, 호흡을 내쉴 때의 시간은 어떤지 알고 있습니까?”
“그걸 아는 사람이 있나요?”
“네. 당신 앞에 있습니다.”
은우의 담담한 답변에 레리는 웃었다가 ‘에이, 설마…….’ 하는 표정을 지었다가, 창백해졌다.
“그걸 왜 알고 있어요?”
“알아 두면 힘의 낭비를 줄일 수 있으니까요.”
그날 움직인 양을 전부 기억하고 소모된 열량이 어떤지 파악하고 있어야 전장에서 굶어 죽지 않는다. 자신이 괴수 하나를 잡아 죽일 때 소모한 기의 양을 정확히 재지 않으면 부족한 자원으로 인해 역으로 사냥당한다.
반대로 말하면 파악한 상태일 때 굶어 죽지도, 역으로 사냥당하지도 않는단 소리다. 자칫 낭비될 수 있었던 힘까지 다할 수 있게 되니까.
결국 자기 자신을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은 어느 순간에도 최선의 힘을 낼 수 있다는 것이니.
은우가 아는 승리법이자 전투의 기본이었다. 비록 상대는 모르는 듯하지만.
“아니, 그러니까 제 말은 이거예요. 그걸 꼭 알아야만 하는 거예요?”
“질문이 이상하네요.”
그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페르세우스의 투구, 퀘네에 속 눈동자는 순수한 의문으로 들어찼다.
“이기고 싶은 것 아니었습니까?”
너무도 순수한 나머지 승리라는 천칭에 목숨이 내걸려 본 적 없는 인간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은우 또한 그러지 못한 인간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비틀림을 그저 인지할 뿐.
“…모르면 못 이기는 거예요?”
“글쎄요. 모르죠.”
은우는 페르세우스의 검, 하르페의 나신을 쓰다듬었다. 불사의 괴물도 죽일 수 있는 사멸의 검은 비록 전설상의 위상은 없을지언정 아름다움 만큼은 비슷했다.
그에게 있어서 검 따위가 아름다워 봤자 장식용에 불과하다마는, 이 사람들은 결국 아니란 거겠지.
“다만 당신에겐 시간이 없고 저는 이런 방법 밖에 모릅니다.”
“왜…요?”
은우의 눈꺼풀이 한차례 나풀거렸다. 왜, 라고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어째서 그것밖에 모르냐고 질문한다면.
“그렇지 않고서는 승리할 수 없었으니까요.”
그렇지 않고서는 생존할 수 없었을 뿐이다.
그는 새삼스럽게 그 자신이 부적응자라는 걸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