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북으론 괴수가, 남으로는 제국이 있던 보잘것없는 왕국 하나.
“북방의 괴수신을 사살하라.”
그곳에서 나고 자란 영웅에게 왕자의 명령이 떨어졌다. 죽음과 삶의 경계를 오랫동안 걸어온 그에게도 그곳은 사지나 다름없었다.
괴수신. 한낱 짐승으로 태어났으나 스스로 하늘에 닿아 신이 된 존재를 사살하기 위해선 괴물들이 득시글거리는 북부를 가로질러야 했으므로.
“아예 죽으라는 거잖아!”
동료들의 외침에도 영웅은 침묵했다. 다만 고뇌했다.
나는 이런 부당함으로 인생을 끝마치기 위해 지금까지 싸워 왔던가? 전장에 길들여져 이 자리에 남았다지만, 이렇게까지 수호해 왔던 가치가 부정당할 일인가? 나는 정말 이런 걸 바라서 여기까지 왔나?
“─, 너는 화도 안 나?”
“─, 이제 어쩔 것인가?”
전우들의 재촉 앞에 영웅은 그 고민을 매듭지었다. 존재하지 않는 이유를 찾아서 무엇할까. 어차피 죽음을 위해 내달려 가는 생일진대.
죽느냐 사느냐. 무엇이 운명이든 그는 피하지 않으리라.
“잊었나 본데 난 헌터야. 영웅이 아니라. 괴수를 잡아 죽이는 헌터라고. 그러니까 난 간다. 너흰 안 와도 돼. 나는 갈 거지만.”
영웅은 나아갔다. 같은 명령을 받은 이들과 함께, 오랫동안 합을 맞춰 온 전우들과 함께.
“정말로 죽일 수 있는 거야?”
“너희가 길을 터 준다면 뭔들 못 하겠어? 알잖아, 내가 다수 대 일은 못 버텨도 일대일은 절대적이라는 거.”
수백의 병사가 수만의 괴수를 상대했다. 수십의 전우가 수백의 정예를 막아섰다.
그 끝에 영웅은 지상에 선 신 앞에 섰다.
한 번의 낮과 두 번의 밤을 거친 끝에 영웅은 신을 베어 냈으니. 동이 틀 때 핏물이 둥지 위로 흘러내렸다.
비록 괴수신에 의해 영웅 또한 한 팔이 잘렸지만, 그것은 명백한 승리였다.
“───.”
잘린 머리의 속삭임을 뒤로한 채 영웅은 자신을 뒷받침해 준 이들을 돌아보았다.
“우리가 이겼어?”
“우리가 이겼어.”
웃으며 대답한 순간, 태양빛에 더없이 고결한 빛깔로 변한 피가 그의 배에서 터져 나왔다.
“왜……?”
영웅은 기침과 함께 피를 뱉었다. 그의 배에는 생사고락을 같이하던 전우의 레이피어가 꽂혀 있었다. 화검사의 레이피어다.
“우린 널 버리기로 결정했어. 그동안 수고했어, ─.”
어째서. 영웅이 묻기도 전에 레이피어가 뽑혀 나갔다. 금빛으로 물든 핏줄기가 눈물처럼 흘러내렸다.
▣ 035. 줄 잘 잡았네요
은우는 헐떡이며 잠에서 깨어났다. 그의 손이 목의 앞부분을 매만지다가 그대로 뒤로 넘어가 쓸었다. 다른 손은 복부를 매만지고 있다.
빛을 머금지 않은 눈동자가 잠시 망연한 색을 띠었다.
일어… 일어나야지.
은우는 기계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전자 노트를 켜서 시간을 확인하니 4시 52분이라고 알려 준다.
보편적인 기준으로 보면 이른 시각이나, 그에겐 한 달 전 기상 시간이다. 방송 시간 때문에 늦게 잔 점을 포함하면 조금 문제가 생기겠지만, 하루 덜 잔다고 아플 몸은 아니다.
오랜만에 운동이나 일찍 갈까. 마침 오후에 박 팀장님도 만나야 하고.
생각을 돌리기 위해 언제나처럼 평상시를 그렸다. 그건 꽤 효과가 좋다.
그는 어둠이 아직 가시지 않은 거실을 거쳐 주방으로 들어갔다. 아침을 거를 순 없으니 뭐라도 챙겨 먹을 심산이었다.
문득 냉동실을 열었을 때 보인 건 누가 사 뒀는지 모를 아이스크림이다.
그러고 보니 전생에선 단 음식이 별로 없었지. 열량 높은 식량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건 죄다 괴수들의 고기를 말린 것이라서 맛이 참 끔찍했다.
그땐 잘만 먹었으나, 지금 먹으라 하면… 글쎄, 먹을 수 있을까 모르겠다. 전생을 자각한 직후 이 세상에서 제일 마음에 들었던 것이 음식, 그것도 달달한 종류였으니까.
은우는 아이스크림을 두고 고민하다가 이만 문을 닫았다.
그냥 나가서 먹어야겠다. 간식으로 아이스크림도 사 먹고. 그 정도 사치는 이제 허락된다. 돈의 맛이다.
“…뭐야, 어디 가?”
소리 없이 옷을 챙겨 입고 현관에 섰을 때, 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화장실을 가려다가 그를 본 모양이지. 은우는 신발을 신으며 조곤조곤 단답했다.
“운동.”
“이 시간에?”
“어.”
“위, 위험하지 않아?”
그건 굉장히 평범하고 이상한 물음이었다. 그는 몸을 틀어 형과 눈을 마주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이 체구의 사람이 위험할까, 마주치는 사람이 위험할까. 뒷말은 붙이지 않았으나 뜻은 알아챘을 것이다.
은우는 우물쭈물거리는 형을 확인한 후 눈을 깔았다. 그의 몸이 본래대로 현관문을 향해 돌아섰다.
“…다녀와.”
은우의 몸이 잠시 멈칫거렸다. 저 인사를 들어 본 게 얼마 만이더라.
“그래.”
잘 기억나지 않는다.
* * *
“이곳은 어딥니까?”
“여긴 처음이신가 보네요? 전 아실 줄 알았는데.”
평소 만나던 카페에서 만날 생각이었으나, 박기철의 요구로 약속 장소가 달라졌다.
은우는 뒷덜미를 쓸며 기철을 따라 도장으로 들어갔다.
“미리 박기철이란 이름으로 약속했습니다.”
“아, 잠시만요…….”
이곳에 대해 잘 모르는 은우 대신 기철이 나서서 처리했다. 한두 번 와 본 게 아닌 듯 자연스럽다.
“자주 오시나 봅니다?”
“소속 스트리머분들을 종종 이곳에 데리고 오거든요.”
“일반적인 도장은 아닌 것 같습니다.”
“스포츠용 무술 말고, 정말 싸울 때 쓰이는 무술을 알려 주는 곳입니다.”
은우의 시선이 기철에게로 향했다.
“일반적인 도장은 스포츠 형식의 무술만을 가르치고 대련에 사용하잖습니까? 이 도장은 그런 스포츠가 싫은 사람들이 모여 만든 곳입니다.”
“스트리머 분들을 데려오는 이유를 알겠네요.”
“진짜 싸울 줄 알아야 게임에서도 활약을 하니까요.”
너무 험하다 보니 대부분은 하다 만다며, 기철은 으쓱였다. 은우의 눈동자가 침잠되었다.
“전… 별로 생각이 없습니다만.”
“현실이라서 그렇습니까? 은우 씨 정도면 현실에서도 잘 싸우실 텐데요.”
기철의 말에 그는 한숨을 내뱉듯 숨을 흘렸다.
“고등학교 때 일을 아시면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안경 너머, 기철의 눈매가 빙그레 휘었다. 드리운 낚싯줄을 물까 물지 않을까. 은우의 손가락이 목 위로 얹어졌다.
“사고잖습니까, 그건?”
은우는 매끄러운 목덜미를 손끝으로 간질였다.
기철은 방금 은우가 말해 주지 않은 예전 일을 알고 있노라 수긍했다. 뒷조사를 했다고 긍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사건이 될 수 있는 사고였죠.”
능구렁이 같은 인간. 은우는 담담히 반박했다. 기철이 어깨를 들썩였다.
“고등학교 유도부원과 이 안에 계신 분은 다릅니다.”
“글쎄요…….”
그는 기철의 말에도 안심하지 않았다. 안심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가 지금 걱정하는 건 혹시라도 사람을 죽여 버리진 않을까 하는 부분이었으니까.
“그때도 다르다고 생각했습니다.”
3학년이니 1학년인 자신보다 강하겠지. 그를 핍박한 자신감의 원천이 있겠지. 경고를 어기고 덤빈 근거가 있는 거겠지. 대회에 나가 1등을 타 왔다니 정말 강하겠지. 5명이 동시에 덤빌 정도면 합공을 할 줄 안다는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맞서 싸웠다가 벌어진 게 다섯 명 전원 팔다리가 부러지는 결말이었다. 희수가 끼어들어 말리지 않았다면 그중 하나는 죽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도박은 사양하고 싶네요. 제 무력 증명은 게임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때야 아직 체구가 작았고 인원수의 차이로 정당방위를 인정받았다. 그렇지만 지금은 어떨까.
자칫했다가 형을 받으면 남은 인생이 망한다. 그런 이유로 은우는 현실에서 싸우는 것만큼은 지양하고 싶었다. 날뛰는 한 마리의 야생마였던 그때와 지금이 다르다는 걸 인지하고 있어도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 제 트라우마를 고쳐 주실 친절함이 팀장님께 있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지라.”
은우는 걸음을 멈추고 기철을 마주 보았다. 날 선 눈매에 기철이 움찔거렸다.
“뭘 말하고자 데려오셨습니까?”
“…하여튼 진짜 노련해요, 은우 씨는.”
일단 안에 들어가서 이야기하자며 기철은 시간을 끌었다. 은우는 그 능청을 봐주었다. 지금 듣나 나중에 듣나 결과는 같을 것이므로.
기철이 도장 안채의 문을 열었다. 안에는 도장 직원─직원이라는 명칭이 올바르진 않겠지만─이 한 사람 있었다. 나이대가 조금 있어 보이는 사람이었다.
아마도 자신이 받아들였다면 상대가 되어 줄 사람이겠지. 은우는 그를 찬찬히 살폈다.
“안 받아들이길 잘했네요.”
상대는 강했다. 이 육체로 그가 소화해 낼 수 있는 능력을 장난 삼아 상대했다간 사고가 터지기 딱 좋을 정도로.
“그러십니까?”
“네.”
“관장님은 아쉬우시겠어요.”
기철이 낄낄 웃자 관장님이라 불린 사내가 눈을 힐끗 떴다.
“애초에 안 받아들일 확률이 높다고 네놈이 말했잖느냐.”
“제가 그랬던가요?”
능구렁이. 은우는 박기철을 다시 한번 정의하며 묵례했다.
“안녕하십니까. 서은우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갑네. 오현일세.”
“자, 앉죠!”
은우는 오현을 힐끗 보았다. 앞으로 할 이야기는 남의 귀에 들어가서 좋을 거 없을 텐데.
“걱정 마세요. 관장님은 입이 굉장히 무거우시니까요.”
은우의 눈길이 박기철의 피부 위로 향했다. 새까만 눈동자는 이제 막 사회에 내보내진 어설픈 성인의 것이 결코 아니다. 겪어 본 고난과 시련의 숫자만큼 새겨진 홍채의 물결이 모노그램을 넘어서 오롯이 검정으로 화했다.
“박 팀장님이 그렇게 말하신다면 그러신 거겠죠.”
그는 기철이 미리 마련해 둔 차를 들이켰다. 쓴 물은 그의 입에 영 맞지 않았지만, 적어도 분위기를 풀어 헤치진 않았다.
“연예계도 그렇지만… 이 판도 어지간히 더러운 편입니다. 똑같이 이미지 장사이다 보니까 더욱 그런 면이 심하죠.”
“제게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은우 씨는 문제없습니다. 은우 씨를 질투하는 쪽이 문제지.”
박기철이 사진을 꺼내 들었다.
“혹시나 해서 묻습니다만, 은우 씨. G페스티벌 당시 누군가에게 위해를 가한 적 있습니까?”
뜻밖의 질문에 은우는 눈을 껌뻑였다. G페스티벌?
“게임을 물으시는 건 아닐 테고, 협박이라면… 조금?”
“…협박하셨습니까?”
“스트리머 세모도 님이 본의 아니게 제 맨얼굴을 보셔서 이야기 말아 달라고 정중히 부탁드렸습니다. 다만 세모도 님 입장에선 아닐 수 있겠죠.”
박기철이 바로 알아들은 표정을 했다.
“그건 괜찮습니다. 세모도 님이 다음 날 사과하셨잖습니까?”
“반협박 때문일지도 모르죠.”
“그건 아닐 겁니다. 어쨌든 그것밖에 없으십니까?”
“이 이상 떠오르는 건 없습니다.”
은우의 대답에 박기철은 고개를 주억였다. 그가 다음으로 꺼내 든 건 사진이 프린팅된 A4 용지였다. 예전부터 생각한 건데, 의외로 아날로그 좋아한다.
“이걸 잠시 봐 주시겠습니까?”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손에 난 검푸른 자국 사진이라. 멍인가? 아니, 멍이 저런 색과 저런 형태로 날 순 없는데.
“진짜 멍 같진 않은데, 이건 왜 보여 주십니까?”
“…바로 알아보시네요?”
기철이 떨떠름해하는 걸 보며 은우는 어깨를 으쓱였다.
“손에 멍이 자주 들어본지라.”
물론 현생이 아니라 전생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반반마니’란 스트리머가 찍은 자기 손 사진입니다. 은근슬쩍 지인들에게 보여 주며 은우 씨에 대한 부정적인 루머를 퍼트리고 있더군요.”
그래서 그게 뭔, 잠깐. 반반마니? 루머를 퍼트려?
은우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어째서 이곳을 고집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기철이 왜 그를 불렀는지는 알겠다.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확실히 하기 위해서 묻겠습니다. 아니죠?”
“이런 걸로 힘 실수할 나이는 지났습니다.”
본능 단계에서 반격하느라 상대의 팔다리를 부러트릴 순 있어도, 단순히 겁주기 위한 용도에서 실수할 정도는 아니다.
은우의 확답에 기철은 ‘그럼 됐습니다.’라며 사진을 집어넣었다. 은우의 손이 마른세수를 했다.
“…무슨 가치가 있다고 저러는지 모르겠군요.”
“열등감이죠. 이런 건 물질적 이익을 노리고 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감정적 이익을 노리는 거지. 물론 그치는 물질적 이익이 있을 거라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만.”
기철의 말이 없더라도 이미 안다. 한두 번 당한 게 아니니까. 그러나 경험이 있다 해서 겪을 때마다 기분 더러워지는 걸 막을 수 있는 것 또한 아니다.
은우는 찻잔을 들어 입에 한 모금 담았다. 쓴 물에 혀를 담그니 정신이 또렷해졌다.
“…뭘 해야 합니까?”
“그쪽에서 어떻게 언플을 하든 저희는 다 대응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은우 씨가 특별히 해 주셔야 할 것은 없습니다.”
박기철의 말에 은우는 입술을 삐뚜름하게 내렸다. 정말로 그랬다면 그를 이곳에 부르는 일은 없었겠지.
“뭘 해야 합니까.”
“며칠 전, 본의 아니게 반쯤 합방하셨지요? 아직도 많이 거부감 드십니까?”
은우의 눈이 감겼다. 그래, 저쪽에서 인맥을 사용하면 그도 인맥을 사용하는 게 맞겠지. 빌어먹게도 그는 인맥이 없지만.
그러나 이 상태로 머문다면 결과는 극명하다. 기철도 그것을 알기에 그를 부른 것이리라.
그는 아직 눈을 감은 채 그의 한 손에 다 가려질 정도로 작은 찻잔을 매만졌다.
문득 오늘 아침 꾸었던 꿈이 떠올랐다. 그건 과거를 비롯하여 미래를 예언한 꿈일까. 아니면 그의 두려움을 비추어 낸 거울일 뿐일까.
언제까지 그곳에 머물러 있을 거냐 속삭이는 자기 자신의 비난은 아닌가.
은우는 결연히 눈꺼풀을 거두었다. 미래가 무엇이든 과거에 영원히 묶여 있진 않으리라.
“안 그래도 레드바 님과 할 예정이었습니다.”
마침 그쪽이 워낙 왕성하게 달려들어 준 덕분에 합방은 기정사실이 된 상태였다. 날짜가 문제였지.
“레드바 님은 스트리머계의 마당발이시죠. 일단 그분 한 분하고만 하셔도 상황은 뒤집어질 겁니다. 레드바 님은 반반마니 쪽과 사이가 안 좋으니까 절대 그쪽 편을 들지 않겠죠.”
기철이 환한 미소를 머금었다. 은우는 그곳에 한숨을 목소리로 변환한 듯한 음성을 토해 냈다.
“우유에탄산 님과 슬리퍼 님, 개불은… 어깨 위에? 님, 산호 님, 레리 님도 같이 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아, 설마 네뷸라 약속 잡으셨습니까?”
“아직 확정은 아닙니다.”
박기철이 잇몸이 만개하는 웃음을 머금었다. 아무렴 지금 은우가 입에 담은 사람들은 죄다 대기업이었다. 심지어 Nebula War에 참가하는 팀이기도 했고.
“은우 씨, 은우 씨는 역시 방송의 신이 따라다니는 것 같습니다.”
은우는 정색했다.
“그건 좀 아닌 것 같습니다.”
참고로 은우는 신이란 존재가 매우 싫었다. 아주, 매우.
* * *
“이만 가 봐도 되겠습니까?”
좀 더 대화를 나눈 후, 더 이상 할 말이 없을 때 즈음 은우가 물었다. 기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거구의 몸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체격도 체격이지만, 사람을 위축시키는 공기가 그 움직임에 맞춰 진동을 했다.
덩치에 맞지 않게 정적인 움직임과 실제로도 소음이 거의 없는 성질 덕에 유독 그런 분위기가 두드러지는 느낌이다.
“그럼 부득이하게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정중하지만 건조한 음성이 기철과 오현을 차례차례 지나친 후 스러졌다. 지금껏 온갖 부류의 사람을 만나온 박기철조차 감당하기 어려운 무게의 목소리는 잔향처럼 그 자리에 남아 메아리쳤다.
헬멧을 뒤집어쓰고 가상이라는 벽을 세워 상대할 때와는 또 다르다.
기철은 새삼스레 은우가 현실에서 목소리 칭찬을 받아 본 적 없다고 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저런 분위기를 두고 목소리 자체에 집중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리 없다.
그는 아니지만.
문이 열리고, 서은우가 방과 복도 사이의 경계에 몸을 걸쳤다. 다만 그는 완전히 몸을 밖으로 빼지 않았는데, 아직 할 말이 남아 있는 듯했다.
“박 팀장님.”
“네?”
“제가 거절할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주어가 생략된 말이나, 기철은 어렵지 않게 은우의 말을 알아들었다. 그건 분명 오현과의 대련을 뜻함이라.
“은우 씨와 계약하기 전에 저는 희수 양에게 은우 씨가 어떤 사람인지 물어봤었습니다. 사람을 아는 데는 가까운 사람의 평가만큼 정확한 게 없으니까요.”
보통 사람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는 눈매가 살짝 찌푸려졌다. 처음엔 불쾌감이라 생각했던, 그러나 몇 번 마주치며 깨달은 저 표정의 진짜 의미는 유쾌함이다.
“겁쟁이라덥니까?”
“네. 제가 뒤도 보지 않고 은우 씨를 택하기로 한 평가였죠.”
친구라서 그런지 단박에 정답을 맞혔다. 기철은 어깨를 으쓱였다.
“걘 겁쟁이에요. 사고 칠까 봐 전전긍긍하는 겁쟁이.”
김희수에게 들었던 평가가 다시금 들려오는 기분이다.
“인간관계를 겁내는 이들은 타인으로 인해 사고에 휘말릴지언정 스스로 사건 터트리는 일은 없으니까요.”
타인이 일으킬 사고야 기철이 방지해 주면 그만. 돈이 썩어 넘치는데 그거 하나 못 해 줄 리가 있겠나. 정신과를 다녔다는 게 조금 걸리긴 했지만, 은우가 사는 걸 대충 보니 큰 문제 같진 않다. 요즘 시대에 정신과 가는 게 큰 흠도 아니고.
그래서 그는 은우를 망설임 없이 골랐다. 프로게이머로 끌어들일까 하다가 스트리머로 설득 노선을 굳힌 가장 큰 이유기도 했다.
“그렇죠?”
동의를 구하는 의미로 물으니 ‘다음에 뵙죠.’ 하는 답변이 돌아왔다. 얕은 웃음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하여튼 스무 살 같지 않다니까. 그래서 관장님은 어떠셨─.”
“어디서 저런 물건을 주워 왔지?”
답지 않게 말을 툭 자르고 묻는 오현이었다. 기철은 눈썹을 위로 들어 올렸다가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했다.
“문제 있어요?”
“네가 걱정하는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 같다. 이상한 점은 많지만.”
기철이 걱정하는 것은 혹여라도 폭력 사태가 벌어질까 하는 것. 그가 봐 온 서은우란 사람은 그럴 성격이 아니지만, 세상일은 모르는 법이었다.
하지만 이 걱정도 은우가 싸움을 저어하는 것으로 한시름 놓았다. 고등학교 때 폭력 사건에 휘말려서 혹시나 했는데, 그것이 오히려 안전장치가 되어 준 모양이다. 본인에겐 큰 트라우마겠지만, 이쪽 입장에선 그저 감사한 일이다.
“제가 걱정하는 것 말고는 뭐가 이상한데요?”
그러나 그런 것만 알자고 이곳까지 은우를 데려온 건 아니었다. 기철은 오현의 눈을 빌려 그가 보지 못하는 문제를 보고자 했다. 만일을 대비하기 위해.
“…아니다. 말해 봤자 넌 모른다.”
“에이, 관장님. 그러지 마시고.”
“됐고, 제대로 된 놈이나 보내라. 네놈 회사에서 보내는 놈들마다 뭐 그리 재능이 없는지.”
“제법 실력 있지 않나요?”
“움직일 줄 아는 놈과 싸울 줄 아는 놈은 다르다. 그놈의 체력이나 반사신경을 키우려는 거면 그냥 다른 데 보내. 나 귀찮게 굴지 말고.”
“은우 씨는요?”
오현이 잠시 침묵했다.
“…그놈은 이미 완성되어 있다.”
“네?”
“오히려 내가 자문을 구해야 하는 건 아닌가 싶군.”
“…은우 씨는 이제 갓 성인이 된 사람인데요? 지금까지 이런 거 배워 본 적도 없고?”
“그래서 이상하다는 거다.”
오현의 말에 기철은 안경을 추슬렀다.
“쯧, 이기기는커녕 비등하기라도 할는지 모르겠어.”
기철은 잠시 떨떠름해졌다. 드라마의 전투 신을 찍을 때 무술 감독의 첨언을 받듯, 게임사도 싸움 관련 AI를 만들 때 수시로 각국의 무술가들을 초청하곤 한다. 그 앞에 있는 오현은 초청 목록 상위권에 위치한 사람이었고.
그런 그가 저렇게 말할 정도라는 건…….
“저 정말 줄 잘 잡았네요.”
은우가 피지컬 문제로 타인에게 따라잡힐 일은 없다. 기철의 눈이 환희로 물들었다.
“…저런 놈이 회사 꼭대기 올라가면 회사가 잘 돌아가긴 할는지…….”
그런 기철을 오현은 한심하게 바라볼 뿐이다.
* * *
우유에탄산은 대회를 준비하다 말고 켄의 유튜브 영상을 재생했다. G페스티벌 날, 팬이라고 했던 건 정말 진심이었으니까. 애석하게도 켄 쪽은 빈말이라고 여기는 것 같지만 말이다.
그녀는 어쩐 이유로 헬멧을 벗고 싸우는 켄을 보며 감탄했다. 원래 얼굴도 잘생겼는데 저 얼굴도 잘생겼다. 10년만, 아니 15년만 젊었어도 콱 잡아먹었을 텐데. 우유에탄산은 아쉬움을 느끼며 영상을 지켜보았다.
10% 이하로 체력이 떨어진 상태인데 종횡무진 해변을 헤집고 다니다니. 리바이어던을 저렇게 몰아붙이다니.
그저 놀랍기만 하다. 만약 그녀가 켄과 같은 입장에서 싸워야 했다면 절반도 못 죽이고 리타이어했을 것이다.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엄청나게 잘하는 실력은 아니니 말이다.
정말이지, 보면 볼수록 아깝다. 켄만 합류했다면 대회 우승은 따 놓은 당상일 텐데. 박 팀장에게 들어 보니까 사회인으로서 미숙해서 그렇지 기본은 된 것 같고.
아쉽다, 아쉬워. 이미 팀원을 다 구해서 이젠 들어오고 싶다고 해도 못 받아 준다마는…….
『레리> 탄산 님, 레드바가 켄 님과의 합방 약속을 받아 냈거든요. 그에 관련해서 드릴 말씀이 있어요.』
“뭐?!”
그렇기에 우유에탄산은 레리의 메시지에 벌떡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만약 음성 인식을 켜 놨다면 지금 이 외침이 고스란히 전달되었으리라.
어떻게 합방 약속을? 역시 레드바. 젊어서 그런가, 행동력이 장난 아니다. 그녀조차 거절당한─조금 다르긴 하지만─것을 받아 내다니.
『레리> 켄 님이 합방으로 ‘네뷸라 워’ 해도 괜찮다고 하셨거든요. 다른 분들도 괜찮다고 하시면 다 같이 합방은 어떨까요??』
탄산이 팀에 들인 건 레리뿐이나, 레드바도 종종 네뷸라 워를 켜서 합방하곤 했다. 시청자들과 팀을 꾸려 적 팀으로 나와 주는 것이다. 레리가 이야기하는 것도 아마 그 부분일 터.
우유에탄산의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나> 다른 이들에겐 내가 연락 돌릴게요. 켄 님께 정말 괜찮으시냐고 다시 여쭤봐 주시겠어요?』
『레리> 네.』
비록 팀원으로 들이는 덴 실패했지만, 연습 때 적 팀으로 나와 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
아무렴 다른 팀에는 분명 그들보다 피지컬 좋은 사람들이 많을 테고, 켄은 그들보다 확실히 윗줄의 실력을 가지고 있으니. 상대해 보는 것만으로도 파티의 전체적인 기량이 끌어올려질 거다. 탄산이 지금 노리는 건 그 부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