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은우는 그가 날뛰면 어떻게 되는지 시청자들에게 여실히 전달했다. 금빛 섬광이 번쩍일 때마다 몬스터들이 떼거리로 죽임당했다.
모래 위를 굴러다니는 머리들이 괴이하다 못해 끔찍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은우에게도 마냥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거슬려. 은우는 사냥꾼들의 공격도 일일이 감각권에 넣어 가며 움직였다. 오랫동안 합을 맞춰 온 사이라면 저 공격이 그에게 맞지 않을 거라 생각할 수 있지만, 지금은 그게 아니지 않나.
물론 저들도 실력이 있으니 그를 맞추는 일은 드물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그들 사이에 신뢰가 형성되지 않은 건 둘째 치더라도 은우의 무의식이 저들을 경계했다.
이건 그가 인지하더라도 고칠 수 없는 본능의 문제였다.
─기분탓인가, 켄 아까부터 렉 걸리는 듯?
─렉 ㅁㅊㅋㅋㅋㅋㅋㅋ
─아군이 공격할 때마다 움찔거리는 것 같습니다.
─아 진짜네??
미세한 반응일지언정 그게 몇 번이고 반복되니 사람들도 알아차렸다. 일인칭으로 보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보니 발각은 더욱 쉬웠다.
─그러고 보니 저번 레이드 때도 이러지 않았음?
─그랫나...?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사람들이 알아차린 걸 확인하자마자 은우는 쓰게 웃었다.
“팀전에는 자신이 없다고 했잖습니까.”
─아니 이게 이런 의미였냐고ㅋㅋ
─왜 움찔움찔 거리는 거임
「‘켄의가운데다리’ 님이 ‘5,000원’ 투척!
맞을까봐 그러는 거야, 형?」
“후원 감사합니다. 아무래도 눈먼 공격이 제일 무서우니까요.”
가장 피하기 쉬운 것도, 가장 피하기 어려운 것도 유시(流矢) 내지 유탄이다. 은우는 중간 보스를 지키는 정예 몬스터의 목을 베었다.
근처까지 다가온 기척이 은우를 공격하려던 몬스터의 몸을 후려쳤다. 백두산이다.
“네놈은 뭐냐! 내가 잡아야 할 걸 다 가져가고 있잖아!”
백두산은 유쾌하게 핀잔을 던졌다. 호방한 성격과 정의로운 가치관 덕에 ‘빛두산’이라는 별명도 있는 그의 웃음은 정말 호쾌하다.
“같이 하겠다, 영웅! 백업은 내게 맡겨라!”
은우는 체구가 좀 작지만, 성벽처럼 든든한 백두산을 보며 아련한 기억을 떠올렸다. 성주 녀석도 대충 저렇게 호탕했지. 인성은 차원이 다르지만.
만약 다시 마주친다면…….
“찢어 죽이고 싶네…….”
─네???
─ㅖ?
─백두산 왜 찍힘??
─누ㅜ,,누구요,.,??
“아뇨, 백두산 얘기가 아닙니다. 백두산이랑 닮은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 얘기였어요.”
성주의 방패가 그의 다리를 짓뭉갠 것이 아직 잊히지 않는다. 은우는 번개를 내리꽂았다. 중간 보스의 피부가 구워지고, 그 위로 사냥꾼들의 기술이 떨어져 내렸다.
─대체 뭔 짓을 했길래 찢어죽인단 말이 나옴;;;
─와;; 방금 목소리 너무 무서웠어;;;
─나한테 한 말 아닌 거 아는데도 개쫄았네.,,,,,
이런. 은우는 시청자들이 겁먹은 걸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러려고 한 게 아니었는데.
“무서워하지 마세요.”
이쪽이 더 겁나니까.
“하하! 제법인데!”
은우와 백두산의 등이 맞닿았다. 운우보단 조금 작을지언정 백두산도 만만찮은 거구라 얼추 그림은 되었다. 30대 초반의 사내 얼굴이 씩 웃음을 머금었다.
“광안대교의 영웅, 이번에도 영웅이 되어 봐라.”
“전 한 번도 영웅인 적이 없습니다만.”
“모두를 구해 놓고 살아남으면 그게 영웅이다.”
‘영웅은 죽었다.’라는 퀘스트 제목이 떠오르자 기분이 묘해졌다.
은우는 검을 던져 날아오른 세이렌을 격추했다. 전투 중이라 그런지 알림 창이 떠오르지 않는데도 해야 할 말을 고를 수 있었다. 어쩌면 오래전에 골라 둔 말일지도 모른다.
「넌 영웅이잖냐.」
아주 오래전 들었던 목소리가 귀에 윙윙 울렸다.
“전 한 번도 영웅이었던 적이 없습니다.”
백두산이 이 대사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기어코 입 밖으로 내뱉었다. 벼락이 요란하게 대지를 요격했다.
“전장을 못 잊은 사람일 뿐이지.”
은우의 몸이 앞으로 튀어 나갔다. 바닥으로 추락한 세이렌의 몸에서 흑도를 회수한 즉시 다른 검이 머맨을 참수했다.
“균열주가 등장한다!”
그때, 귀가 찢어질 것 같은 고함과 함께 균열이 더욱 크게 벌어졌다. 그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아주 거대한 괴수였다.
────!
고래와 산갈치를 멋있게 섞어 둔 후, 혐오스러움 한 스푼, 거대함을 한 동이 부은 듯한 괴물이 포효했다.
▣ 034. 지랄하네
박기철은 그에게 도착한 메일을 보고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켄을 상대로 수작 부리는 놈이 나타났다라.
“아주 지랄들을 하네.”
“누가?”
“아, 미안해요. 자기가 신경 쓸 거 없어요. 어떤 멍청이가 우리네 스트리머를 건드리는 걸 발견해서 순간 욱한 거예요.”
“그럼 다행이고요.”
연인을 달래 보낸 그는 안경을 고쳐 썼다. 안 그래도 은우에게 시험해 볼 것이 있었으니 빌미가 생긴 건 나쁘지 않다. 은우의 영상을 본 누군가가 은우를 보고 싶다며 데리고 오라 한 것도 있었고.
그러나 그 순간에도 ‘감히’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건 막을 수 없다.
다이아박스 소속 스트리머를 건드리는 것도 기분 나쁘고, 그게 하필 켄인 것도 짜증 난다. 그의 소원을 이뤄 줄 수 있는 보석을 간신히 찾아냈더니 거기에 얼룩을 묻히려 해? 간도 크지.
나름 지능적으로 건드렸다 생각했겠지만, 그건 틀렸다. 까다로운 방식으로 일을 벌인 건 맞으나, 해결할 방법이 없는 일은 없다. 적어도 박기철의 인생에는 없었다.
그는 사내 법인에 메일을 넣으며 싸늘하게 눈을 빛냈다. 바이러스를 묻힌 쥐새끼들을 찾아낼 시간이다.
* * *
『Main Quest. 영웅은 죽었다3
웨이브가 거의 끝나 가는 듯했다. 그렇지만 나타난 균열주는 항거할 수 없을 것 같은 괴수, ‘리바이어던’이었다.
지금까지의 전투로 사냥꾼들은 전부 지친 상태. 빌어먹을 오성 놈들은 여전히 오지 않는다. 이대로 백두산을 구할 순 없는 건가? 권이금은 정말로 오지 않는 건가?
…만약 그렇다 해도 순순히 받아들일 순 없다.
영웅은 죽지 않는다.
내가 그렇게 만들 것이다.』
은우는 고래처럼 아가리가 크고 산갈치처럼 붉은 갈기를 달고 있으며, 몸통이 매우 긴 그것을 바라보았다.
은빛으로 빛나는 몸은 폐호흡도 하는지 아가미가 끊임없이 들썩였다. 벌어진 입에는 더럽지만 날카로운 이빨들이 고르지 않게 빼곡했다. 작은 눈은 은빛으로 동그랬다.
머리만 해도 어지간한 승용차 크기였고, 몸길이는 바다에 묻혀 확인할 수가 없다.
괴물의 미간에 박힌 청옥이 유독 반짝거렸다.
─저걸 잡으라고 만든 거임??
─주인공 역할 아님ㅎㅎ
─잡으니까 걱정 ㄴㄴ
─ㅇㅎ...깜짝아.....
“설마 혼합형이었냐고…….”
“우린 다 죽을 거야…….”
지금까지 살아남았던 사냥꾼들이 허망한 목소리로 말을 토해 냈다. 웨이브형이라고만 굳건하게 믿었는데, 웨이브와 레이드가 합쳐진 혼합형이었다는 사실이 안 믿기는 모양이다.
사냥꾼들 사이의 사기가 떨어졌다.
─원래 균열주는 다 강하잖아 쟤네 왜 저럼?
─ㄴㄴ 웨이브형 균열주랑 레이드형은 진짜 차이남
─균열주가 보통몹보다 강한 건 맞는데, 웨이브형 균열주는 끽해봐야 잡몹의 두 배? 세 배 정도임
─리바이어던이 솔직히 잡몹 세 배만 강하다곤 안 믿기잖음;;
─상냥한 설명 감사하다.
은우는 시청자들의 설명을 구태여 보지 않았다. 웨이브형 보스든 레이드형 보스든 어차피 잡아야 하는 건 같다. 구분 지어 가며 싸워야 할 이유가 없다.
“다들 정신 차려! 곧 지원군이 온다!”
백두산이 떨어진 사기를 끌어올리기 위해 외쳤다. 그러나 그걸 믿는 이들은 적었다. 전투가 시작된 지 벌써 1시간이 지났지만, 지원군은 올 기미를 보이지 않아서다.
─지원군 존나 안오네 미친 거 아님??
─왜 지원군 안 와요???ㅠㅠ
─이러다 애들 다 죽겠다~~!!
─이 퀘 볼 때마다 암 걸릴 것 같어
─이금 누나라도 와주며뉴ㅠㅠㅠ
“백두산과 비슷한 급의 길드는 오성, 현세, E&M, 강선이죠. 그중 현세와 E&M은 설정상 광주 쪽에 터진 S급 균열을 처리하러 갔습니다. 강선은 부산 쪽을 주름잡고 있으니 빨리 오기 어려울 거고요. 그렇다면 남은 건 오성인데… 그들이 도와줄까요?”
─광휘는요?
─이한성씌ㅜㅠㅠ
“광휘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쪽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구원하고 구조하는 길드니까요.”
주인공을 노린다는 점에서도 구린 면이 드러나지만, 스토리 진행 도중 나오는 단서를 보면 오성은 앞에서도 더럽게 군다. 국내 최고 기업에서 만든 길드라서 그런지, 길드장이 그런 놈인 건지는 모르겠지만, 중요한 건 도움을 기대할 수 없다는 거다.
광휘는 애초에 UN 같은 느낌의 길드라 빨리 올 수가 없다.
─아.....미친....
─정치 한다고 사람 죽어나가는 걸 방치하냐 진자
─오성 개미친 놈들,,,
─현실이나 게임이나 윗대가리들은....ㅉㅉ
─ㅠㅠㅠ그럼 끝가지 안 와요??ㅜㅜㅜ
“아마도 그렇겠죠. 유일한 희망은 역시 권이금 정도겠네요.”
은우는 그 점을 꼬집어 시청자들의 이해를 도왔다.
“확실한 건 적어도 지금은 우리끼리서 해내야 한다는 겁니다.”
‘균열 사냥꾼’이 아무리 현실성 높아도 피와 살점이 말라붙어 무기의 절삭력이 떨어지는 것까진 구현하지 않았으니.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는 검을 털었다. 파랗게 물든 모래사장 위로 파란 핏방울이 더 얹어졌다.
“아주 할 만하죠.”
파란 피를 뺨에 묻힌 채 그는 말했다. 처연할 정도로 처진 눈꼬리와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이 제법 순진해 보이는지라, 핏물에서 오는 위화감이 엄청났다.
─아니 뭐가 할 만해요;;;
─할 만하다,,,,,메모,,,,,
─근데 켄이 한 말이라서 믿음감ㅋㅋㅋ
─그보다 헬멧은 왜 쓰고 다니는 거임 대체?? 커스텀 ㅈㄴ 잘됐는데ㅠ
─이쯤되면 걸어다니는 보증수표임
─오빠 얼굴 까고 다녀요ㅠㅠ
─마! 구울왕은 여기서 안 진다 이거야!
시청자들이 수선한 반응을 보였다.
“내가 앞장선다! 낮은 등급 애들은 다 빠져! 몬스터들이 흘러 나가는 것만 커버하라고! A급 이상들은 나와 함께한다!”
“대장!”
“어떻게 할까!”
“이봐, 영웅. 이쪽으로 합류해!”
“질척거리는 건 질색인데.”
─앗, 주식 타이밍인가?!
─ㅁㅇㅁㅇ
─켄백...?!
─아, 꺼져ㅡㅡ
─취향 존중해줄게 형....
뭐라는 거야. 그는 갑자기 주식 얘길 꺼내는 사람들을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와중에 그를 부른 백두산은 계속해서 말을 걸고 있다. 수다스러운 점까지 성주와 닮았다.
“하, 두렵진 않나?”
『1. 두렵지 않습니다. 저희가 승리할 걸 아니까요.
2.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죠. 그렇지만 도망치지 않을 겁니다.
3. 두려워서 도망치면 뭐가 달라질까요? 그저 싸울 뿐입니다.』
레이드 몬스터가 멈춰 있어서 그런가, 대화 선택 창이 떠올랐다. 아마 숨 돌리라는 시간인가 보다.
“도망쳐 봤자 달라지는 건 없죠.”
“으하하, 현실적인 사람이었군. 그래, 맞는 말이야! 우리에게 뒤는 없지!”
그는 이참에 부서진 헬멧을 대신할 것을 찾았다. 코트의 카라를 세우고 굴러다니는 천을 찢어 얼굴을 가렸다. 스타킹처럼 쫀쫀한 부류였다면 눈, 코, 입만 뚫어 복면을 만들었을 텐데, 아쉬운 대로 스카프 만드는 게 다였다.
“자, 얘들아! 살아서 돌아가자!”
“살아서 돌아가자!”
백두산 휘하 사냥꾼들이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다. 은우에게도 알림 창이 떠올랐다.
『레이드가 시작됩니다.』
알림 창과 함께 지금껏 기다려 주던 리바이어던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탄생한 거대한 파도가 밀려왔다.
“흐랴압!”
백두산이 대지를 후려치자 사냥꾼들이 있던 대지가 위로 솟구쳐 올랐다. 뒤편의 빌딩들이 시야보다 낮아질 정도로 높은 고지대가 생성된 것이다.
은우와 리바이어던의 눈동자가 마주쳤다.
“생선 주제에.”
그는 쌍도를 어긋나게 결합했다. 메인 스토리를 깨며 또다시 업그레이드한 쌍도는 이제 세 가지 무기가 결합된 상태이니. 양쪽에 칼날을 달고 있는 검이 마치 부메랑처럼 날아갔다.
시야를 샛노랗게 물들일 정도로 화려하게 번쩍이는 전격이 검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쏘아지며 리바이어던을 괴롭혔다.
리바이어던이 반짝거리는 시야에 고개를 휘저을 때, 은우는 고지대 위를 내달렸다.
────!
해양 괴수가 그를 향해 대가리를 쏘아붙였지만, 피하면 그만이다. 은우는 바닥을 박참으로써 역으로 다가온 머리 위에 탑승했다. 미간에 박힌 청옥이 눈앞이다.
“바다 괴물은 별로 안 잡아 봤지만, 저게 약점일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아니 애초에 잡아볼 일이 있을리가 없잖아옄
─바다괴물 잡는 게임이 머가 있냐
─드물지 않음?
딱히 게임 얘기는 아니었지만, 알아서 납득하는 걸 막을 필요는 없지.
탁. 은우는 뱅글뱅글 돌아온 무기를 잡아챘다. 다른 사냥꾼들도 놀고 있진 않았는지 리바이어던의 몸체에 공격이 이곳저것에 꽂혔다.
고지대에 머리를 박았던 리바이어던이 다시 고개를 들어 올렸다.
“풍경 좋네요.”
─워우.....
─관람차on!
─강릉 시내 다보인당
은우는 바닷물에 촉촉히 젖은 리바이어던의 콧등 위를 걸었다. 해양 괴수답게 눈도 양쪽에 붙어 있어, 정작 콧등에 얹어져 있는 그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리바이어던의 미간, 청옥에 다다른 그의 손이 검을 치켜들었다.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양을 제외한 모든 마나가 검에 퍼부어졌다.
─??: 야, 넣을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ㅁㅊㄴㅋㅋㅋㅋㅋ
─가즈아!!!
콰직!
청옥이 쪼개졌다. 반신반의했으나, 정말 약점이었는지 피통이 눈에 띄게 깎였다.
─────!
괴물이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휘둘렀다. 은우는 몸을 콧등에 밀착하다 못해 갈기를 붙잡고 버텼다. 엄청난 힘에 남겨 둔 마나가 쭈욱 소모된다.
은우는 마나 포션을 본능적으로 입에 물며 타이밍을 재었다. 그리고 괴물의 고개가 위로 튕겨질 때, 그는 갈기를 놓았다. 은우의 몸이 부웅 날아올랐다.
──────!
괴물이 상공의 그를 향해 입을 쩍 벌렸다. 전등을 달지 않은 터널처럼 새까만 구멍이 그 입 너머로 펼쳐져있다. 시청자들이 비명을 질렀다.
“아주 훌륭하다!”
아주 작게 사람의 목소리가 귀를 스쳤다. 콰앙! 리바이어던의 몸체가 휘청였다. 은우의 몸이 서서히 추락을 시작했지만, 그 아래에 있던 입은 치워진 상태다.
마나 포션 덕에 마나가 천천히 차오른다.
“여기서 그치면 재미가 없죠.”
은우는 무기를 스위칭(switching)했다. 드문 일이었다. 그가 전투에 돌입하면 무기를 바꾸는 경우는 굉장히 드물었으므로.
그러나 그건 하나의 무기로 충분해서 그런 것뿐이지, 은우의 본래 특기는 수십 개의 도구를 교체해 가며 다루는 쪽이다.
시청자가 갖다 바친, 외형만 번쩍이는 활대가 그 손에 잡혔다.
─시위가 안 걸려있는데요?
─시위!!
─켄 님 활시위!!
사람들의 재촉에도 은우는 얇게 웃으며 다만 허공을 쥐었다. 그 순간 활에 걸려 있지 않던 시위와 화살이 생겨났다.
“여러분들이 보기엔 이게 좀 더 멋있을 것 같아서.”
─아니ㅋㅋㅋ와ㅋㅋㅋㅋㅋ
─돌은 자얔ㅋㅋㅋㅋ
─마나 컨트롤 진짜 어떻게 되먹은 겨ㅠㅠㅠ
활에서 천둥이 쏘아져 나갔다. 그것의 타격 지점은 이미 부서진 청옥이다.
찔끔찔끔 줄던 체력 바가 또다시 크게 깎여 나갔다. 이제 거의 반피다.
─아 이제 시작이다ㅠㅠㅠ
─아까 주식 투자한 놈들 어서 빼라ㅋ
─피 더럽게 안 깎이네
─아직도 지원군 안 온 거 실화냐??
─오성 더러운 새끼드류ㅠㅠㅠ
일부 시청자들이 우는 소리를 내고, 사정을 모르는 이들은 피가 안 깎인다며 투덜거렸다. 그 순간에도 공격은 계속되어 기어코 리바이어던의 체력 바를 절반으로 만들었다.
이벤트 신이 시작되었다.
“왜, 왜 아직도 오지 않는 거냐!”
“오성 개새끼들!”
많은 사냥꾼이 죽어 버리고, 남은 건 소수의 A급 이상 사냥꾼들뿐. 이대론 리바이어던을 죽이기 전에 전멸할 상황이다. 백두산이 결연한 얼굴로 앞에 섰다.
“…다들, 퇴각해라.”
“길드장님!”
“이대론 다 죽어! 퇴각해야 해!”
“저 괴물이 우리가 퇴각하는 걸 봐줄 리 없습니다!”
“그래… 그러니까 누군가는 남아서 시간을 끌어야지.”
“…길드장님, 설마?!”
“퇴각해라!”
신파극이군. 은우는 컷신으로 인해 한 마디도 못 하는 상황에서 냉정히 판단했다. 만약 이게 실제였다면 저들은 말도 못 하고 도망쳤을 것이다. 그게 옳은 것이니까.
정말 실제였다면 애초에 그가 저 수룡의 목을 따 버리는 것이 더 현실성 있겠지만 말이다.
“영웅, 너도 도망가라!”
왜 이건 컷신이지? 은우는 멋대로 움직이는 제 몸을 보며 조금 답답해졌다. 이 스펙 그대로 해도 잡을 수 있을 텐데, 시스템상 못 잡는 게 말이나 되나.
그렇지만 그의 투덜거림에도 이벤트 신은 계속 진행되었다.
“제때 도망칠 수 있는 것도 리더의 덕목이야!”
“당신도 리더란 점을 기억하세요, 길드장님!”
“그러니까 이러는 거다! 퇴각할 타이밍을 아는 것 그리고 부하들을 죽게 내버려 두지 않는 것! 그 모든 게 우두머리가 해야 할 일이니까!”
백두산이 바닥을 내려찍었다. 사냥꾼들이 있던 자리가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백두산만이 벽처럼 남게 된 고지대에 서 있다.
“살아남아라, 영웅들아!”
은우의 기분이 침잠되었다. 백두산이 계속해서 누군가를 연상시키는 바람에 도통 좋은 기분을 느낄 수 없었다. 행동은 똑같은 주제에 결정적인 것 하나만 달라서 더욱 그랬다.
…그래, 배신이 흔한 일은 아니지. 아무리 닮아도 하는 인간이 있고 안 하는 인간이 있는 것처럼.
애초에 그걸 알아서 타인과의 협업을 받아들인 거 아닌가? 희수의 말마따나 모두가 그를 배신할 리 없다는 걸 알아서, 그래서.
그렇지만 새삼 이런 식으로 과거의 그가 멍청했노라 질타받을 필요는 없을 텐데.
배신하는 인간이 있다면 희생하는 인간도 있다는 걸 하필이면 배신자와 닮은 녀석을 통해 가르쳐 줄 필요는 없었는데.
이 게임은 정말 여러 의미로 뜻깊다. 의도하기는커녕 그를 노리고 만든 것도 아닌데 그를 계속 엿 먹인다는 점에서 그렇다.
은우의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그러니 당장 꺼져!”
백두산의 일갈에 은우의 캐릭터를 비롯한 사냥꾼들이 주춤주춤 퇴각했다. 백두산의 부하였던 이들은 다들 눈물과 콧물을 줄줄 흘리고 있다.
그리고 그때, 백두산 옆자리에 무언가가 쿵 내려앉았다.
“하, 짜증나게.”
나타난 것은 권이금이었다.
바스러질 것 같은 백색 머리카락이 바람결에 살랑이고, 그녀의 손에 쥐어진 창이 모래에 푹 박혔다. 후드 아래의 얼굴은 여전히 가면에 가려져 있다.
“야, 돌대가리 영웅. 하나만 묻자.”
“마창……?!”
“왜 살고 싶냐?”
그녀의 등장에 리바이어던이 몸을 출렁였다. 그 눈에는 경계심이 한가득이다.
“좋게 행동하려 해도 오성 같은 새끼들이 생지랄을 하는데, 왜 지키려 하냐?”
그 가운데서 권이금은 재차 물었다.
“이따위 세상이라면 차라리 도망치는 게 낫지 않아?”
가면 아래서 건조한 목소리가 웅웅 울었다. 그건 질문보단 자문 같았고, 의문보다는 미련 같다. 이미 미래를 보고 온 자만이 짊어질 수 있는 회의감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어쩌면 은우의 괴행각을 통해 특수 대사를 들은 이후라 더 그리 들리는지도 모른다.
“도망갈 곳은 있고?”
그리고 백두산이 대답했다. 흐리게 웃는 사내의 얼굴은 평소의 호탕함보다는 서글픔이 더 많이 묻어 나왔다.
“난 오성 놈들을 지키는 게 아니야. 내 신념과 내가 소중히 여기는 것들을 지키는 거지.”
그 말을 듣는 순간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만일 너희가 저랬다면 무엇이 달라졌을까? 내가 직시하고 있었다면 뭐가 달라졌을까?
그래도 나는 이 생을 얻었을까.
은우의 숨이 끊어지고, 권이금은 창을 뽑았다. 창에 어리는 것은 아주 뜨겁고 불길한 검은 불꽃이다.
“지랄하네.”
마창이 쏘아지고,
은우는 눈을 감았다.
퀘스트가 종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