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G페스티벌은 생각보다 유익했다. 은우는 그가 방송에 써먹을 수 있을 만한 게임들을 메모장에 기록해 두며 G페스티벌을 즐겼다.
출시가 아직 안 된 게임도 많지만, 이미 나온 게임도 꽤 많았다.
티켓도 부족하거니와 일주일 내내 이것만 방송할 수 없는 노릇이므로 수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게임 방송을 따로 했다.
시청자분들이 현실 후원 삼아 준 선물들을 개봉하는 방송도 했다. 제법 쏠쏠했다.
또한 하나의 티켓을 소비하는 대신 방송 끄고 돌아다니는 G페스티벌은 색다른 매력이 있었다. 그놈의 덩치 때문에 정체를 들킬 것이 자명하므로 차마 헬멧을 벗고 다니진 못했지만 말이다.
덕분이랄지 스트리머들과도 종종 마주치며 친분이라고 하긴 모호한 것을 쌓았다.
특히 그의 얼굴을 우연히 목격했던 ‘세모도’라는 스트리머는 직접 찾아와 사과까지 건넸다. 너무 뜻밖의 순간에 마주쳐서 놀랐다던가.
실례를 저질렀다며 인기 게임의 굿즈를 선물해 주었다. 파들파들 떨면서도 꿋꿋이 사과하는 모습이 제법 인상 깊었다. 어쩌면 그의 반협박 때문에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그리고 대망의 마지막 날, 은우는 ‘Nebula War’의 발표를 지켜보았다. 우유에탄산이 예고했듯 그들은 비위치와 합작하여 대회 하나를 발표했다.
게임 출시 기념 스트리머 대전이었다.
▣ 027. 이게 되네
“스트리머 대전이 열린다던데 너는 뭐, 제의 같은 거 안 왔냐?”
“…오긴 왔지.”
너무 많이 와서 기함할 정도였다. 침착하게 발표 날 후에 온 메일들을 제해 보았지만, 그래도 세 개나 됐다.
은우는 그 세 명의 닉네임을 희수에게 알려 주었다. 그중 희수가 아는 것은 우유에탄산과 빌리였다.
그녀의 까만 생머리가 흔들렸다.
“우유에탄산?! 잠깐, 그 사람 완전 머기업 아니냐? 다른 사람도 인기 스트리먼데 그 사람은 차원이 다르잖아!”
“그렇지?”
은우는 콜라 캔을 든 채 창가에 몸을 기댔다. 고층 건물에 위치한 이 카페는 통유리 창가에 몸을 기댈 수 있어서 좋다.
기대지 말라는 경고문이 적혀 있긴 하지만, 그걸 지키는 한국인은 적다. 대충 ‘당기시오’란 글자를 못 보는 수만큼 될 거다.
“야, 해라. 좋은 기회잖아.”
“…너도 팀장님이랑 똑같은 말 하네.”
“그만큼 누가 봐도 좋은 기회다, 이거지. 잠깐, 그럼 한 달 전인가? 그때 말한 것도 이 얘기였냐?”
“어.”
“미친놈아, 빨리 받아.”
은우는 희수의 과격한 반응에 콜라 캔만 홀짝였다. 희수의 얼굴이 불쾌함과 짜증으로 가라앉았다. 강요하는 성격은 아니나, 그가 한심해 보이기라도 하는 모양이다.
“내가 어지간하면 참견 안 하는데… 아오, 이 겁쟁이, 쫄보, 멍청이.”
“뭐, 인마?”
“틀린 말 했냐, 내가?”
희수는 소파에 털썩 앉았다.
“먼지 인다.”
은우는 짧은 핀잔을 주었으나, 그녀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그렇게 겁낼 거면 박 팀장님이랑 일은 어떻게 하는 건데?”
“그건 그냥 완전한 기브 앤 테이크 관계니까.”
“머저리 새끼 아니야, 이거. 합방은 뭐, 아닌 것 같냐? 그냥 게임 같이 하고 땡이거든? 뭐… 인맥 관리 하면 좀 복잡해지긴 하겠지만, 막막 엄청난 건 아니거든?”
“그런가.”
은우의 무던한 반응에도 희수는 투덜거림을 멈추지 않았다. 이참에 다 쏟아 내겠다는 태도다.
“어이고. 까탈스러워요, 아주. 실시간으로 맞추는 거나 뒤에서 서포트하나 그게 그거구만.”
“합방한다고 반드시 배신당하는 것도 아니고, 방송에선 배신도 하나의 콘텐츠야. 전업 방송인할 거면 네가 익숙해져야 해. 언제까지 그럴 건데?”
“넌 너무 겁이 많아. 합방 한 번 한다고 다 친구 먹는 사이가 어디 있다고.”
전부 그의 가슴을 찌르는 비수들이자 웅크린 그를 다독이는 걱정이다. 은우가 이미 아는 사실들이기도 했다.
알지만, 그래도 무시하는 것들. 혹은 그래서 무시하는 것들.
“아주 배가 불렀지, 불렀어. 다른 스트리머들은 시청자 모으겠다고 기를 쓰고 합방하려 하는데.”
“…그러게.”
은우는 희수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는 운 좋게 시작부터 인기를 끌었고, 그것은 절박함을 잃게 만들었다. 합방을 하지 않아도 풍족할 상황이 이 옹고집을 유지시킨단 이야기다.
심지어 그는 처음부터 방송에 뜻을 두고 시작하지도 않았다. 지금이야 게임에 그리고 시청자들과의 교류에 매료되었다지만, 인생 전부를 내걸 정도냐 하면 그건 애매하니.
배가 불렀다는 말은 틀리지 않다. 그렇지 않고서야 거북하다는 이유만으로 더 나아갈 수 있는 길을 걷어찰 수 있을 리 없다.
“후… 제발 나 말고 다른 친구 좀 사귀자, 친구야. 내가 우리 지수 냅두고 언제까지 너랑 놀아 줘야겠니.”
“그래.”
은우는 짧게 대답했다. 건성건성과 무미건조함의 사이에 위치한 목소리로.
그건 걱정하던 이의 마음을 빡침으로 물들이기 딱 좋았다.
“아오, 저 화상!”
희수가 결국 냅킨을 똘똘 뭉쳐 던졌다. 다만 냅킨은 은우의 몸에 닿기도 전에 아래로 꼬꾸라졌다.
“큽.”
“…지금 웃었냐?”
“아니?”
“아오, 쓰발!”
기어코 희수의 엉덩이가 소파와 작별했다.
“타임.”
황급히 건넨 휴전 제의는 당연하게도 먹히지 않았다.
* * *
“구하, 유하.”
─켄하!
─시간 맞춰 착석
─켄님 대회 나가세요?
─켄 ㅎㅇㅎㅇ
─성운대전 나감?
은우는 익숙하게 방송을 시작했다. 시청자들이 조금씩 얹어지며 인사들을 건넸다. 그중에는 이번에 발표된 ‘Nebula War’에 대한 이야기가 껴 있다.
─켄이면 제의 음청 왔을 듯
─누구랑 팀 먹든 무조건 우승각ㅇㅈ?
「‘오겜무?’ 님이 ‘1,000원’ 투척!
설마 모정숲 임니까?」
─아무리 켄이라도 팀전은 좀 에바지
─모정숲 박물관 거의 다 채우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켄 패배 코인 투자하싈?
─작전주 퉷
─켄이 참가하면 좋겠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참가를 상당히 기대하는 눈치였다. 은우의 손이 헬멧의 뒤통수를 살살 쓰다듬었다.
“오늘 할 게임은 ‘균열 사냥꾼’입니다. 그리고 대회는 안 나갑니다. 후원 감사합니다.”
─G페에서 균열사냥꾼 눈독 들이시더니 기어코 가져오시네ㅋㅋ
─대회 안 나가신다니ㅠ
─처음보는 게임이다.
─균사가 외국에서 유명하진 않지
─나온 지 얼마 안 돼서 그럼ㅋ
─왜 대회 안 나가요
“팀전에는 제가 자신이 없어서 민폐 끼칠 것 같거든요. 그리고 이건 숙제입니다.”
공부나 과제를 뜻하는 숙제는 물론 아니다. 스트리머에게 특정 상품의 홍보를 위해서 방송을 부탁하는 일종의 은어였다.
덕분에 은우는 이 게임에 한해 저작권비를 지불하지 않아도 됐다.
“물론 해 보고 재밌으면 더 할 예정입니다만… 일단 오늘 하루는 이걸로 꽉 채울 거예요.”
─ㅗㅜㅑ.....
─돈 엄청 썼나 보네;;
─우유 님이나 빌리 님이 켄 님 엄청 탐내든데ㅠ
─곧 외국 섭 연다고 하지 않았냐? 그래서 그런듯
─하긴 우리 구울왕은 외국에서 더 유명하자너~
─대회 나갔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당
─그렇습니다. 요즘 자국방송보다 켄 방송을 더 많이 봅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은우는 대회 얘기가 더 나오기 전에 게임을 실행했다. 사람들의 투덜거림은 쉽게 식지 않았지만, 차츰차츰 매니저에게 잘리고 같은 시청자들에게 까이면서 진정되었다.
“로딩이 좀 기네요.”
─정보) 우리나라가 제일 빠르다
─여윽시 82의 나라
온라인 액션 MMORPG라서 그런지 로딩이 좀 더 걸린다는 느낌이 있다. 다행히 길지 않은 기다림 끝에 곧 영상이 시작됐다.
스킵이 가능하지만 처음 마주했을 때는 끝까지 시청하는 게 예의인 법. 은우는 광화문 광장을 고스란히 옮겨 둔 듯한 배경을 지켜보았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이순신 장군 동상 앞 허공에 균열이 나타났다. 사진의 한 가운데에 칼을 박아 구멍을 낸 후 그대로 찢어 낸 듯한 형상의 균열이다.
그 균열이 바닥까지 다다랐을 때, 새까만 안쪽에서 무언가가 발을 내밀었다. 몬스터다. 판타지 소설, 그것도 이천십 몇 년 대에 유행했던 현판에서 자주 나오는 몬스터들 말이다.
그 후로는 뻔했다. 몬스터들이 인간을 도륙하고, 희망을 잃어갈 즈음 등장하는 영웅들. 온갖 능력을 쓰는 모습이 멋있긴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영상이 끝났다.
사람들이 흔한 게임 영상이라며 킬킬 웃었다.
“서버는 서울 사니까 서울 고르고… 채널은 대충 고르겠습니다.”
─강남!
─ㄴㄴ 무조건 성동구져
─뭐래 종로구
─보통 사는 곳 고르던데....설마?
“어림도 없지.”
은우는 그가 태어났다던 노원구를 택했다. 사람들이 그곳에 사냐고 떠들어 댔지만, 알 바 아니었다. 저런 걸로 신상 털릴 일 없다는 건 그도 알고 시청자들도 알았다.
게임이 시작되었다.
“나 참, 귀한 휴가 날에 기억을 잃은 사람을 떠맡을 게 뭐람.”
불만에 잠긴 채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높은 확률로 그─플레이어─를 탓하는 말이었지만, 그다지 불쾌하진 않았다. 누구나 휴가 날을 방해받으면 저럴 것이다.
“자, 여기가 각성 센터예요. 참 다행이죠. 각성자는 기초 생활 지원비를 받으니까요. 기억도, 지인도 없는 당신이라지만, 기초 생활 지원비 정도면 제법 살 만할 거예요. 집도 대출 끼고 구할 수 있을 거고요.”
그는 구청 비슷한 형태의 건물 안으로 은우를 밀어 넣었다. 안으로 비척비척 들어선 은우가 떨떠름하게 입을 열었다. 사라진 헬멧에 허전함을 느낄 시간도 없다.
“…기억을 잃은 설정인가 보네요.”
─그게 흔하니까염ㅋㅋ
─설정 짜기 귀찮았나 봄
─반드시 뒷설정 나올 거임
─그거 ㅇㅈ
“각성 센터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각성 확인을 하시겠습니까?”
“이건 다른 의미로 진짜 현실 같네요.”
“뭐해요, 신청하지 않고.”
“네.”
재촉에 못 이겨 대답하자 직원이 그를 안쪽으로 이끌었다. 그를 처음부터 안내했던 사람 역시 졸졸 따라왔다. 얼굴엔 귀찮음과 심드렁함이 반반 섞여 있다.
『캐릭터 생성이 시작됩니다. 캐릭터 삭제 시 일주일 간 재생성이 불가능하오니 신중한 선택을 하시기 바랍니다.』
“수정구에 손을 올려 주세요.”
은우는 순순히 수정구 위에 손을 얹었다. 동영상의 정지 버튼을 누른 듯 세계가 멈췄다.
『능력 속성을 선택합니다.
불/물/바람/대지/전기/빛/어둠/무』
“선택지가 많네요.”
그 속에서 알림 창이 떠올랐다. 은우는 힐끗 채팅 창을 바라보았다. 예상대로 사람들은 특성마다 가지는 성질을 토해 내고 있다.
「‘왜건왠건’ 님이 ‘1,000원’ 투척!
불은 딜, 물은 힐탱, 바람은 서폿, 대지는 탱, 전기 딜, 빛은 힐, 어둠은 딜탱, 무는 PVP전용이에용」
─전기가 극딜은 맞는데 속도가 지랄맞지 않냐
─ㅇㅇ 전기 다루기 너무 까다롭지,,,
─무는 PVP외엔 무쓸모 진짜ㅋㅋㅋ
“정보랑 후원 감사합니다. 그런 거군요.”
은우는 사람들의 설명을 꼼꼼히 읽곤 결정을 내렸다. 그의 선택은 속도로 파괴적인 대미지를 넣는다는 전기였다.
“한 대도 안 맞으면 힐탱은 필요가 없잖아요?”
─ㅋㅋㅋㅋ킹존심 봐
─ㅋㅋㅋㅋㅋㅋㅋㅋ맞긴 맞는데ㅋㅋㅋ
오래 고민하지 않고 전기를 택하자 수정구가 노랗게 물들었다. 손에서 찌릿한 느낌이 들었다.
은우가 그 기시감에 손을 물끄러미 바라볼 때, 멈췄던 세계가 도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전기 속성이네요. 나쁘진 않네.”
“신체 능력 검사가 있겠습니다.”
직원은 운동기구 앞으로 그를 안내했다. 운동기구에 올라가자 이번에도 세계가 멈추며 알림 창을 띄웠다.
『능력치 분배를 해주세요. (20)
근력: / 지구력: / 단단함:
지혜: / 지능: / 저항력:
재생력: / 회복력: 』
─이 겜은 무조건 신체 반영이니까 투자하셔야 됨ㅋ
「‘킹갓전기’ 님이 ‘10,000원’ 투척!
근력, 지구는 넘어가고 단단함은 방어력이에염 지혜는 스킬 뎀지및 마나량 지능은 배울 수 있는 스킬 수, 저항력은 마방임 재생은 HP 회복력은 MP 시간당 채워지는 거구연」
─스텟 안 찍고 막보스클까지 가즈아
─이건 피지컬로만 깨는 겜 아니라서 절대 안 될걸요
능력치 분배에는 조금 애먹었다. 은우는 고민하다가 사람들이 알려 주는 근접 딜러형 능력치를 찍었다. 그러자 근력과 지구력, 회복력에 대부분 몰린 불균형 능력치가 되었다.
─ㅋㅋㅋㅋ딜은 개쎈데 종잇장 몸ㅋㅋㅋ
─??: 한 대도 안 맞으면 필요가 없잖아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훌륭한 자신감이다.
“이름을 적어 주시면 각성자 등록이 완료됩니다.”
그는 시청자들의 웃음을 뒤로 한 채 종이 위에 이름을 적었다.
“완료되었습니다.”
직원이 서류를 걷어 갔다.
『캐릭터 생성이 완료되었습니다.』
여기까지가 딱 캐릭터 생성 과정인 듯하다.
“이제 기초 생활 지원비는 나오겠네요. 그렇지만 이 험한 세상에 기초 생활비로 사는 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진 않죠? 웬만하면 사냥꾼 일도 해요. 기억도 없고 이력도 없는 당신조차 할 수 있는 일이니까.”
“…말 참 퉁명스럽게 하네요.”
은우의 말에 사람들이 우르르 공감했다. 그들도 많이 쌓였던 모양이다.
“사냥꾼 일은 신청하면 돼요. 설마 그것까지 도와줘야 하진 않죠?”
─아오 진자 싸가지 없어;;
─쟤 나중에 시원하게 후려 좀 패봤으면.....
─몬스터로 안 나오나 몰라
“이거 거절 가능인가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거절 안 나오나 했다ㅋㅋㅋㅋㅋ
─거절 안 되옄ㅋㅋㅋㅋ
그것 참 아쉬운 일이다. 은우는 마지못해 대답했다.
“제가 알아서 하죠.”
“좋아요. 그럼 난 가 볼게요. 잘 살아남아 보세요.”
끝까지 말 참 곱게 하는 NPC였다.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카운터로 도로 돌아갔다.
“사냥꾼 등록.”
“사냥꾼 등록을 원하십니까?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등록 완료 되었습니다. 켄 님의 사냥꾼 등급은 F급입니다.”
직원이 참고하라며 등급표를 보여 주었다. 등급표에는 최저 등급이 F이며 그 위로 E, D, C, B, A로 이어진다고 적혀 있다. 참고로 A 다음은 S, S 다음은 SS, SS 다음은 EX라 한단다. 비록 업데이트가 안 돼서 현존 최고 등급은 S라지만 말이다.
“인재 보호를 위해 사냥꾼 협회에서는 새내기 사냥꾼분들께 기본 전투 훈련 교육을 실시합니다. 강제는 아니지만, 수료하실 경우 소정의 선물을 드립니다. 참가하시겠습니까?”
이건 튜토리얼일까. 은우는 직원의 제안을 수락했다. 안 그래도 이 게임에 적용되는 시스템을 알고 싶었다.
시야가 깜깜해지더니 풍경이 뒤바뀐 곳에서 다시 밝아졌다.
『튜토리얼이 시작됩니다.』
[균열은 징조가 나타난 후 보통 30분에서 최대 5시간 사이에 나타납니다. 균열에서는 갖가지 몬스터가 튀어나오죠. 사냥꾼님께선 몬스터들이 일반 시민을 공격하기 전에 막아 내셔야 합니다.]
그곳은 연습장이었다. 현대 거리를 베껴 오긴 했지만, 상당히 어설퍼서 연습장이란 걸 쉽게 알 수 있다.
“엄청 대충 만들었네요.”
─머 연습장이니까요ㅋㅋㅋ
─종이판 머임 진짜ㅋㅋㅋㅋㅋ돈없냐?ㅋㅋㅋ
[저지선 바깥으로 몬스터들이 나갈 경우 실격됩니다. 몬스터들이 새어 나가지 않도록 빠른 처치 부탁드립니다. 시작하겠습니다.]
저지선이란 건 딱 봐도 알 수 있었다. 그의 뒤에 방지 판 같은 것이 세워져 있었으니까.
삐익, 하고 시작 휘슬 소리가 들려왔다.
“무기도 안 주고 시작하는 겁니까?”
─맨손으로 잡을 수 있어서 그래요
─튜토는 쉬움ㅋ
─놀은 너무 약해서;;
“아까 그 속성 선택한 것은요?”
─그건 좀 이따가
─곧 설명해줘요
시청자들의 설명에 은우는 고개를 주억이며 앞으로 튀어 나갔다. 근력을 많이 찍어서 그런지 속도가 제법이었다.
이 정도면 그가 현실에서 낼 수 있는 속도보다 더 빠르다. 그 사실에 만족스러워하며 은우는 일직선으로 달렸다. 몬스터들이 맞은편에서 달려오고 있다.
깨깽!
개보다 머리가 크고 털 없이 매끌매끌한 몬스터, ‘놀’이 걷어차였다. 다른 녀석들이 덤벼들었지만, 움직임이 너무 둔했다.
은우는 손쉽게 피하며 다른 놈들을 때렸다. 대부분 한 대만 때려도 픽픽 죽어 나갔다. 잘 보면 체력 바가 한순간에 바닥으로 떨어지는 걸 알 수 있다.
“예상은 했지만, HP 겜이네요. 부위를 자른다거나 그런 건 불가능합니까?”
─아녀 부위파괴 쌉가능
─상태이상도 있슴다 쓰앵님
─근데 우리도 당함ㅋ
─현실성은 아임휴먼 급입니다. 스킬이 세서 전투가 어렵지 않을 뿐.
“정보 감사합니다.”
그렇단 말이지. 은우는 순식간에 놀들을 해치우며 정보를 머리에 담았다.
놀 하나가 죽었을 때 무언가를 톡 떨어트렸다.
[몬스터들을 죽이면 몬스터들의 사체는 마나화되어 허공으로 흩어집니다. 다만 낮은 확률로 무언가가 남는 경우도 있습니다. 해당 물건들은 판매할 수도 있고 장비를 제작할 수도 있습니다.]
“이건… 일일이 주워야 하네요. 조금 불편하다.”
─꼭 안 주워도 됨요ㅋㅋ
─안 주워도 클리어하면 인벤토리에 다 들어와요
“아, 진짜요? 좋네.”
시청자 덕분에 줍는 작업이 생략 가능해졌다. 은우는 마저 놀들을 해치웠다.
[훌륭합니다, 사냥꾼님. 하지만 균열은 균열주가 등장하기 전까지 끊임없이 몬스터를 토해 냅니다. 또한 균열주를 잡지 않으면 균열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니 균열주가 나오기 전까지 긴장을 늦추지 마세요.]
저편에서 몬스터가 새로 등장했다. 등장 타이밍으로 미루어 보아 저게 균열주를 담당하는 놈일 것이다.
[균열주는 보통 몬스터보다 더욱 강합니다. 체내에 있는 마나를 발휘해 대항하세요.]
『전기발현 Lv.1
전기 속성의 마나를 신체나 사물에 두른다. 신체에 두를 경우 근력이 일시적으로 상승한다.
전기 속성 대미지가 추가된다. 낮은 확률로 적에게 경직을 일으킨다.
기본 소모 마나량: 초당 1』
알림 창이 스킬의 존재를 알렸다.
─아, 피지컬요소 드디어 등장쓰
─기본보정만으로도 게임이 어렵진 않은데 PVP에선 얘가 젤 중요해요
─난 저거 어떻게 다루는지 감도 안 잡히더라
─그, 상상 잘하면 저거 뭐 어떻게 응용 된다던데ㅋㅋㅋ
─저거 진짜 상상력이랑 공각지각능력 ㅈㄴ 좋아야함...;;;
─ㅇㅈ 범위지정 좆같이 하면 팀킬 되잖어ㅠ
“그렇습니까?”
요컨대 랭커와 범인을 가르는 가장 큰 기준이란 것 같다.
그는 일단 시스템 메시지를 얌전히 따랐다. 전기 발현을 떠올리니 손에서 찌릿한 느낌이 들었다. 희미한 빛이 그의 손에 깃들고 그 위로 전깃불이 파직파직 튀었다.
“느낌이 묘한데…….”
이건, 기? 은우는 익숙하지만 낯선 감각에 손을 쥐었다 펴 보았다. 살아 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지만, 성질은 비슷한 것 같다.
그는 오감을 기울였다. 기는 전신에 퍼져 있는 것을 자극해 이끌어 내야 했으니. 이것도 그럴까.
집중해서 몸을 관조하니 금세 기운의 근원지를 찾을 수 있었다. 배꼽 부근에 뭉쳐 있는 기운들이 손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전기 속성이라는 걸 증명하듯 찌릿찌릿했다.
그는 조금 아쉬워졌다. 기랑 다르게 이건 그냥 몸 안에 물주머니 하나를 가지고 있는 형식이다. 훨씬 더 직관적이고 편하지만, 전생과 다르니 조금 아쉽고 그랬다. 같았다면 오히려 놀랐을 것임에도.
별개로 다루긴 어마어마하게 쉽겠다 싶다. 은우는 아쉬움을 삼키고 입을 열었다.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잘하면 엄청 재밌겠네요. 일단 잡졸부터 처치하고 연구하겠습니다.”
호기심이 몸을 간지럽혔지만, 은우는 흥분하지 않았다. 거의 접근한 놀들을 죽이고 확인해도 늦지 않다.
그의 발이 나무를 형상화한 인공 구조물을 밟고 측면으로 뛰어들었다. 뻗어진 다리가 잡몹들 사이에 있는 균열주, 놀 보스를 정확히 후려쳤다.
놀 보스가 무게와 힘을 버티지 못하고 무릎 꿇었다.
은우의 몸이 바닥에 착지하며 뒤로 주먹을 뻗었다. 전기를 두르지 않은 팔에 뛰어올랐던 잡몹 하나가 저 멀리 나가떨어졌다.
연이어 그는 몸을 틀며 발을 들어 올렸다. 또 다른 하나가 차였다.
은우는 일어나려는 균열주의 발을 걸었다. 그러곤 전기를 발현시켰다. 오른손이 아니라 오른발에. 그러자 짜릿한 기운이 발로 모여들었다.
문득 손톱만 한 기를 가지고 전장을 활주하던 그때가 떠올랐다. 기의 양은 쓰레기나 다름없었지만, 조절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던가.
“일단 발현 부위는 마음대로 가능하네요.”
─? 저게 저렇게 쉽게 된다고?
─난 저거 C급 되고 나서 겨우 깨달았는데ㅋㅋ....
─무쳤다 무쳤어
─와,,,,
“가중이나 응용도 될 것 같은데.”
은우는 보스 몹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머리를 지그시 밟으며 손에도 기운을 일으켰다.
발로만 움직이던 기운이 두 갈래로 갈라지며 하나는 발에, 하나는 손으로 움직였다. 대신 마나 소비량이 두 배로 늘었다.
그는 이어서 의도적으로 기운을 억눌렀다. 손과 발로 향하는 기운의 양을 조절했다는 소리다.
둘 다 절반으로 줄이니 마나 소비량이 도로 초당 1로 돌아왔다.
너무 다루기 쉬운 거 아닐까. 기랑 비교하면 이건 뭐, 검정과 하양 정도의 채도 차이가 있다.
은우는 발현을 껐다.
“되네요. 게임 잘 만들었네.”
─본인 A급인데 지금 현타옴 나도 저거 저렇게 쉽게 못 다루는데....?
─말로만 에이급이라 떠들지 마셈
─저걸 누가 못해?
─저거 ㅈㄴ 힘든 거야 멍청이들아
─그보다 보스몹ㅋㅋㅋㅋㅋ
─렙 좀 올리시고 PVP 뛰시면 무조건 랭킹 다시겠는데
─우리놀 울어욧!
“대미지 확인만 하고 끝내겠습니다.”
그는 전기를 두르지 않은 발로 몬스터를 들어 올렸다. 복부에 발등을 밀어 넣고 위로 힘을 주어 던진 것에 가깝다.
퍼억!
이어 기본 양의 전기를 두른 주먹으로 놀 보스를 때렸다. 평타론 ¼이 좀 넘게 깎였었는데, 전기 주먹 한 대 맞자마자 바로 절반이 넘게 쭈욱 줄어들었다.
놀 보스의 몸이 바닥을 구르며 저만치 나가떨어졌다.
“대충 2배인가…….”
혹시 이것도 되려나. 전생에선 기 낭비라서 쓴 적이 없는데.
은우는 전생의 감각을 몸에 덧씌우며 손을 총 모양으로 바꾸었다. 그의 손끝에 기운이 응집되었다.
─?
─설마?
─에이,,,,,
응집된 기운의 형태를 다듬고 나선의 회전을 건다. 그리고 손끝과 연결되었던 부분을 끊는다.
끊을 때 약간의 힘을 폭발 형태로 돌리면 총알 형태의 번개가 손끝에서 출사하는 걸 볼 수 있다.
파지직!
멀리 날아간 놀 보스의 몸에 번개 탄환이 박혔다. 맞은 부위를 기점으로 정전기가 촤악 뻗어 나가며 그 거죽 일부를 태웠다.
놀 보스의 HP가 0이 되었다.
『튜토리얼이 완료되었습니다. 30초 후 퇴장합니다.』
“이게 되네. 앞으로 근력 말고 지혜 올려도 되겠는데요. 재밌네.”
탄환이라는 스킬을 배워야 가능한 일을 감각과 이성의 계산만으로 해낸 뉴비가 등장한 순간이었다.
─저거 대단한 일인가?
─대충 가상현실 처음 한 사람이 검은기사 패링을 연속으로 해낸 수준
─.......
「‘заявление об отставке’ 님이 ‘166,400원’ 투척!
뭔진 모르겠지만 켄이 켄했다는 건 알겠다.」
‘켄이 켄 했다.’라는 문장이 완전한 밈으로 자리 잡는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