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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자도 방송할 수 있습니다-25화 (25/233)

25화

상대의 정체가 확정되지 않은 이상 심하게 할 생각은 없었다. 입을 더럽게 털어도 그랬다. 전장에선 저 정돈 애교였다.

그러나 ‘심하지 않은’ 수준이라면 어떨까. 조금 놀리는 것 같더라도 그게 시연회에 걸맞은 퍼포먼스라면?

은우는 드물게 선공에 나섰다. 신체에 익숙하지 않은─전지적 상대방 시점─이가 다짜고짜 선공하는 모습을 보거든 저치가 저를 초짜라고 오해할 게 분명해서다.

“하하, 병신 새끼!”

역시나 걸려들었다. 허초조차 싣지 않은 정직한 펀치에서 파공권 같은 게 나왔다.

은우는 유유히 몸을 틀었다. 옷 한 겹을 두고 상대의 공격이 헛나갔다. 그사이 접근한 은우의 팔은 정확히 적의 옆구리와 어깨를 두 번 후려쳤다.

“어쭈. 새끼, 좀 한다? 그래 봤자 뽀록이지!”

퍼억!

타격감이 좋다. 은우는 뒤로 물러나며 다리로 적의 다리를 걸었다. 흔들리는 일은 절대 없겠지만, 애초에 넘어뜨리는 걸 노린 게 아니다.

“한 대 맞고 뒈지기나 해!”

그가 몸을 다 물리기도 전에 적의 공격이 시작됐다. 근력 캐는 한 발, 한 발이 강력한 대신 속도가 느리니. 발을 거느라 소모된 시간이 적에게 2타 넣을 여유를 준 거다.

주먹이 닿기 직전, 은우의 몸이 백스텝을 발동했다. 몸이 잔상을 남기며 뒤로 물러났다. 아슬아슬하게 주먹이 엇나갔다.

다만 여기서 중요한 건 방금 그가 공격을 피한 것에 대해 적은 ‘아직까지’ 우연이라고 생각할 거란 점이다. 초보자가 아니고서야 자세가 무너지지 않은 이에게 태클을 걸진 않으니까.

이건 그가 격투 게임을 모르더라도 싸움꾼인 이상 당연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상대방의 공격을 다만 기민한 감각으로 제때제때 마크하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은우는 그렇게 상대에게 블러핑을 던졌다. 상대가 긴가민가하여 계속 간을 보도록. 그 간을 보는 동안 캐릭터가 가진 모든 스킬을 보여 줄 수 있도록. 동시에 그가 격투 게임만의 시스템에 익숙해지도록.

“이 새끼가아아!”

한 1분쯤 되니 상대도 슬슬 눈치를 채기 시작했다. 실력이 아예 없는 놈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연승하고 있는 거겠지만.

파동권이 날아오는 걸 보며 은우는 씨익 웃었다. 다른 스킬은 몰라도 백스텝 시 제공되는 무적 시간만큼은 제대로 파악하고 왔다. 스킬이나 궁극기와 달리 모든 캐릭터 공용이었으니까.

파공권이 그의 몸이 닿기 전, 은우가 뒤돌았다. 그리고 백스텝. 파공권과 그의 몸이 교차하며 지나쳤다.

“이런 씹……!”

팡, 팡, 팡!

파공권과 시간 차를 두고 덤벼든 상대의 공격이 전부 그의 블로킹에 막혔다. 오히려 은우는 화를 돋우기 위해 블로킹하는 중간중간에도 자잘하게 공격했다.

“개새끼, 죽여 버린다!”

기어코 상대가 궁극기를 꺼내 들었다. 근육이 빵빵하게 부푼 팔로 대지를 치는 기술이다.

이 경우 반경 몇 미터가 통째로 흔들리며 대미지를 주고 자세를 무너트린다. 그다음 상대를 향해 돌진하며 연이어 때리는 형식이었다.

다만 상대는 바닥을 때리는 대신에 그를 맞출 것처럼 굴었다. 아직 이 게임을 파악 못 한 은우가 공격 스킬인 줄 알고 무작정 피하기만을 유도하기 위해서다.

실제로 은우도 해당 스킬의 완벽한 성능을 몰라 눈을 가늘게 좁혔다. 그렇지만 스킬의 성능을 몰라도 기본적으로 추측할 수 있는 것들은 있다.

팔이 뒤로 젖혀졌으니 아마 내려치는 타격기일 터. 근육이 부푼 만큼 대미지는 상승됐을 테고, 지금까지 본 적 없는 기술인 걸로 보아 특수 스킬 내지 궁극기. 아마 부가 효과가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아무리 게임이라도 어떤 스킬에 어울리지 않는 부가 효가를 넣진 않는다. 타격기니까 대략 충격파 같은 게 나오거나 파공권 같은 게 전방으로 쏘아지지 않을까? 그렇다면 공중으로 피하는 건?

쾅!

기어코 상대가 대지를 후려친 순간에 맞춰 은우는 기본 스킬을 발동했다. 허공으로 뛰어올라 드릴처럼 꽂히는 기술이다.

화려하긴 하지만, 동작이 너무 커서 역공당하기 좋다. 그러나 상대방 역시 동작이 크다. 곧바로 대처하긴 힘들겠지. 또한 적의 스킬은 지진을 일으키는 류였다. 예상에 맞게 공중에 떠오르면 타격을 입지 않았다.

은우의 캐릭터가 쏘아지며 적의 명치를 맞혔다. 궁극기를 발동 중이어서 그런지 상대는 튕겨 나가지 않고 바로 공격 태세를 갖췄다.

지진으로 끝이 아닌가 보지? 은우의 눈동자가 예리하게 빛나고 궁극기의 연타가 시작됐다. 전부 경로가 보였다.

상단, 상단, 하단, 중단, 하단, 상단. 근력 캐라곤 믿을 수 없는 속도의 공격들이 쏟아졌다.

그렇지만 은우는 그것들을 차분히 응시하며 전부 블로킹했다. 어려울 것도 없었다. 몇 주 전 상대했던 검은기사의 배신자를 생각하면 이건 식은 죽이나 다름없다.

“이 미친……!”

기어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전부 막아 낸 그는 바로 반격에 들어갔다. 끌어낼 건 다 끌어냈으니 이제 그가 보여 줘야 하지 않겠나.

은우의 궁극기가 시작됐다.

▣ 025. 궁금한 게 있죠?

연승자는 계속 남아 싸움을 이어 갈 수 있지만, 은우는 그리하지 않았다. 상품이 별로 탐나지 않아서다.

굳이 고른다면 10연승짜리가 그나마 괜찮았는데, 그건 너무 오래 걸릴 거 같다. 그는 시원하게 포기했다.

그는 캡슐에서 나와 헬멧을 썼다. 답답하긴 하지만, 이건 이것 나름의 안정감이 있다. 사람들이 그를 좋아해 주었기에 더더욱 사수하게 되는 방어막이었다.

혹시라도, 혹시라도 얼굴을 공개했다가 무섭다고 그를 저어할까 싶어서.

그는 옷매무새를 정리한 후 밖으로 나갔다. 헬멧 덕에 한층 어두운 시야지만, 모여든 사람은 잘 보였다.

“게임 영상은 전자 노트에 넣어 놨습니다. 한데 그… 무대에서 얼굴만 살짝 비춰 주실 수 있을까요?”

직원이 드론과 전자 노트를 건네며 슬쩍 부탁했다. 은우는 거절하지 않았다.

본래 무대 위에 있는 캡슐을 써야 하는 걸 얼굴 보이기 싫다는 그의 억지를 들어주지 않았나.

“20분 정도 떨어져 있었는데 되게 오랜만 같네요. 제 경기는 볼 만했습니까? 나름 노력했는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볼만해..? 볼만했냐고...?

─나름? 나르음???

─상대도 진짜 격겜 고인물 티가 났는데 켄은 정말.....

─아 킹받네ㅋㅋㅋㅋ지금 레전드 만들어놓고 볼만 했냐니

─켄은 신인가? 켄은 신인가? 켄은 신인가?

─무족온 유튭에 올려

─올려ㅡㅡ

부스 앞 단상으로 올라가며 물으니 사람들이 아우성을 질렀다. 반응 보니 전체적으로 문제 소지 없이 괜찮게 잘한 모양이다.

격투 게임 부스는 그다지 크지 않기에 무대도 작은 편이었다.

일반인 기준 골반쯤 오는 단상, 단상 양쪽에 놓인 캡슐 두 개, 마지막으로 게임 플레이를 비추는 커다란 화면. 대체 무슨 생각인지 직원은 방금 전 플레이 영상을 되돌려 보여 주고 있다.

은우는 그 가운데 잠시 올랐다. 옹기종기 모여 있던 사람들이 환호를 쏟아 냈다.

“와아아아!”

“켄!”

“진짜 개오졌다!”

은우는 새삼스럽게 얼떨떨해졌다. 이건 정말 봐도 봐도 적응 안 된다.

전생 때는 어떻게 사람들의 환호를 듣고 살았지? 그땐 그냥 개선식 같은 형식으로만 감사를 받아서 그런가? 이렇게 근거리에서 혼자만 감사받은 적은 없었으니까…….

그는 볼이 화끈거렸다. 그의 큼지막한 손이 목덜미를 쓱쓱 쓸다가 머쓱한 움직임으로 손을 흔들었다. 사람들이 열성적으로 반응해 주었다.

이럴 땐 무슨 말을 해야 하지. 보통은 무대 위 캡슐을 통해 게임을 하고, 나올 때 손 한 번 흔들어 준 뒤 가는 것 같지만, 그는 좀 다르다.

은우는 편의의 대가가 이런 어색함임을 깨닫고 얼굴을 굳혔다.

그런 그를 구해 준 건 아이러니하게도 그에게 농락당한 이였다. 무대 위 캡슐이 열리자 사람들의 시선이 그쪽으로 잠시 돌아갔다.

대충 재밌었다고, 잘하신다고 입바른 말을 내뱉으면 되지 않을까. 은우는 어설픈 대인 관계 속에서도 그럭저럭 괜찮은 답을 찾아냈다.

그사이 상대방이 캡슐을 박차고 나와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아까 그 씹새, 어디 있─.”

저 씹새가 그를 뜻하는 걸까. 심정도 이해하고 딱히 기분 나쁘지도 않지만, 무대 위에서 욕이라니. 일반인이든 스트리머든 경솔하다.

─저 시키 말 ㅈㄴ 더럽게 하네

─? 얼굴보니까 진짜 반반쉑 아님?

─저 얼굴에 걸레문 입 아무리 봐도 인성반반 놈인데

─타 스트리머 언급 ㄴㄴ

─매니저님이 1절만 하랬잖

매니저님께 성과급이라도 드려야 할 것 같다. 그가 없는 사이 고생 좀 하신 모양이니까. 평소에도 그렇지만.

은우는 뒷덜미를 쓱 쓸곤 한 발자국 나섰다. 헬멧의 버튼을 꾹 누르면 바깥에도 소리가 새어 나간다.

“넌 또 뭐─.”

“방금 즐거웠습니다.”

그는 정중하게 손을 먼저 뻗었다. 상대의 입이 꾹 다물렸다. 은우는 그 눈에 떠오른 감정을 익숙하게 파악했다.

위축 그리고 공포, 말실수했다는 곤란함.

은우는 헬멧 안쪽 입술을 삐뚜름하게 늘렸다. 딱 봐도 감이 잡힌다. 이 새끼, 강약약강 타입이다.

“제가 스트리머라서요. 볼거리를 만든다는 게 너무 과했나 봅니다. 기분 나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그는 그보다 30cm는 작아 보이는 이에게 바짝 다가섰다. 모르는 타인과의 거리치곤 가깝지만, 그렇게 어색하지도 않은 모호한 거리다.

그 상태에서 앞으로 몸을 살짝 기울이면 상대는 아마 벽을 앞에 둔 기분이 될 거다.

내가 살다 살다 성주 그놈을 따라 하게 될 줄은 몰랐군. 은우는 불쾌함 어디쯤에 위치한 감정을 느끼면서도 착실히 은근한 위협을 가했다.

“많이 기분 나쁘십니까? 악수도 ‘못’ 하실 정도로?”

그의 목소리가 착 가라앉았다. 동시에 주위 공기도 무거워졌다. 살의를 뺀 살기, 적의를 뺀 투기 따위를 살짝 흘렸을 뿐인데도 상대는 벌써 고양이 앞의 쥐가 된 표정이다.

단상 아래의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여전히 말간 얼굴로 이쪽을 지켜봤다. 다만 예민한 사람들은 미묘한 반응을 보였다.

“그, 아, 아닙니다.”

상대는 덜덜 떨면서도 손을 내밀었다. 은우는 그 손을 가볍게 잡았다. 성인 남성끼리 맞댄 것임에도 손 크기는 현격히 차이가 난다.

은우는 상대의 뼈가 부러지거나 멍이 들지 않되 압박감을 느낄 만한 수준으로 점차 힘을 끌어올렸다. 상대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거 다행입니다.”

은우는 적절한 시점에서 손을 놓고 사람들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비위치 스트리머, 켄입니다. 여러분께 재밌는 구경이 되었다면 좋을 것 같네요. 즐거운 G페스티벌 되세요. 뮤턴트 컴뱃, 화이팅.”

대충 이 정도면 되지 않을까. 모르겠다. 이런 반공식적인 행사는 그의 적성과 맞지 않는다. 은우는 바로 자리를 떴다. 남겨진 이가 반반마니든 뭐든 이제 알 바 아니다.

─현피 뜨려다가 덩치 보고 화들짝ㅋㅋㅋ

─속 시-원

─ㅋㅋㅋㅋㅋㅋ와....쟤 진짜 개쫄았겟다...

─이걸 일케 멕이네ㅋㅋㅋ

─캬!! 사이다 한 통 깐 것도 모자라 추가 리필!!

─솔직히 아무리 화나도 무대에서 욕은 좀 아니지

─켄 오빠 넘 멋있어요 (덜렁덜렁

─저 새끼 진짜 맞네ㅋㅋㅋㅋ꼴 좋다

『희수> 굳』

『희수> 반반마니 새끼, 꼴좋다』

사람들이 돌려 말하는 거나 희수의 문자를 보면 아무래도 진짜 반반마니 같지만 말이다.

* * *

3시간 정도 더 돌아다닌 끝에 그는 라운지로 왔다. 체력이 부족하진 않은데 정신적 피로감이 제법 되었다.

“라운지에선 방송 불가네요. 30분 후에 다시 켜겠습니다.”

─아쉽다ㅠㅠ

─알림 켜둠ㄱㅊ

─켄바

─이따 봐요!

은우는 방송을 종료하고 라운지에 입장했다.

초대장을 받지 못해도 일정 수 이상의 구독자 수를 가졌다면 누구나 쓸 수 있다던데. 그래서 그런지 테이블이 제법 차 있었다. 시설이 좋은 것도 한몫할 테다.

은우는 그중 구석 테이블에 앉았다. 분명 1인용 테이블이건만 그 앞에 있는 건 꼭 0.5인용 같다.

은우는 그 사실을 익숙하게 받아들이며 벽에 몸을 기댔다. 테이블 위엔 주의 사항과 제공되는 것들이 적혀 있다.

과자랑 아이스티가 무료네. 은우의 눈가가 첨습해졌다. 먹고는 싶은데, 그러려면 헬멧을 벗어야 하는 탓이다. 그렇지만 벗자니 사람이 많다.

그러지 말고 룸을 쓸까. 라운지에서 보이는 G페스티벌의 모습이 퍽 근사해서 놓치기 아깝긴 한데.

“헉.”

“대박…….”

치열한 고민이 이어지던 와중 카페가 소란스러워졌다. 대단한 사람이라도 왔나 보지. 은우는 추가된 기척을 셈하며 고민이나 이어 나갔다. 단 거 먹고 싶다.

똑똑.

“합석해도 괜찮을지요.”

허스키한 목소리가 정중한 제의를 건넸다.

다가오는 건 알았지만, 하필이면 이쪽에 말을 걸 줄은 몰랐다. 은우는 오늘 여러 번 편견이 깨진다 생각하며 자세를 고쳤다.

적갈색 머리카락을 정갈하게 넘긴 이가 그를 향해 웃고 있다.

“합석해 주시면 저야 영광입니다.”

“아, 고마워요.”

다행인지 불행인지 은우는 상대방이 누군지 알았다.

평균 시청자 3만의 종합 게임 방송인, 20년째 인터넷 방송계에서 버텨 온 노장, 200만의 구독자를 데리고 있는 거대 기업, ‘우유에탄산’이었다. 업계의 거장이면서도 인품이 좋아 사람을 함부로 무시하는 법이 없는 호인이기도 하다.

“한번 만나 보고 싶었는데 여기서 이렇게 보네요. ‘우유에탄산’이라고 해요. 만나서 반가워요.”

그런 거물이 왜 그를 보고자 했을까. 그렇게 치면 합방 제의를 했었다는 게 제일 신기한 일이지만.

은우는 상대가 어째서 그를 노리는지 그 저의를 알기 위해 경계를 올렸다.

“켄이라고 합니다. 탄산 님 방송에서 항상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목소리가 조금 단단해졌다. 우유에탄산은 아는지 모르는지 부드럽게 웃고 있다. 40대라는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젊고 생기 있는 얼굴이었다.

“내게 배울 게 뭐가 있다고. 말만이라도 고맙네요.”

“진심입니다.”

은우는 일어서서 의자를 빼 주었다.

“매너 좋네요.”

우유에탄산이 음료를 들고 자리에 앉았다. 은우는 그저 어깨만 으쓱였다. 나이 차이가 스무 살을 훌쩍 넘는데 가만히 있어서야 쓰나. 거리감 유지를 위해 말 놓으란 말은 못 해도 이 정돈 할 수 있다.

“켄 님 방송, 잘 보고 있어요. 세상에, 그렇게 게임 잘하는 사람이 있는지 처음 알았지 뭐예요.”

“감사합니다.”

겸손을 떨까 하다가 그냥 받아들였다. 자신이야 별거 아니라고 생각한다지만, 보통 사람들에겐 아니란 걸 알고 있으므로.

“농담 아니고 진짜예요. 나는 검은기사 깨는 데 4주는 걸렸거든.”

4일 만에 엔딩 본 누군가는 대답했다.

“그렇군요.”

왜 4주나 걸리는지 이해 못 하겠지만, 수긍은 하겠다는 말소리다.

“직접 보고 싶었는데, 정말 아쉽네요.”

은우는 책상 위에 포개어 올려 둔 손을 톡톡거렸다. 이건 제의를 거절한 것에 대한 암시인가.

“궁금하죠?”

그러다 불쑥, 우유에탄산이 물었다. 주어가 생략된 말이었으나, 지금 떠올리는 것과 연계하면 답은 나온다.

저건 합방 제의를 ‘어째서’ 했는지 알고 싶느냐 묻는 것이다. ‘왜’에 대한 답은 이미 대회로 해결되었을 테지만, ‘어째서’ 그인지는 알 수 없으므로.

“예, 조금. 아무래도 저는 방송한 지 얼마 안 됐으니까요.”

은우는 헬멧을 벗고 싶어졌다. 나이와 연륜에서 밀리는 이상 꺼려지더라도 쓸 수 있는 패는 다 쓰는 게 나으니.

불호를 떠나서 그의 얼굴은 협상에 제법 쓸모가 있다. 겁먹지 않는 사람에게야 안 통하겠지만, 상대가 겁쟁이라면 일단 유리함을 먹고 들어가지 않나.

“얘기 못 해 줄 일은 아니니까 말해 줄게요. 대신 자리를 좀 옮겨도 될까요? 여긴 너무 탁 트였어.”

우유에탄산이 고갯짓을 했다. 룸을 가리키는 턱짓이다.

아무래도 30분 안에 방송은 못 켜겠네. 은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 끄는 소리가 소박히 울렸다.

“고마워요. 갑자기 난입한 사람의 부탁을 들어줘서.”

“아뇨… 별것 아닌걸요.”

그들은 적당한 크기의 룸으로 들어갔다. 창문이 크게 달려 있어 조금 작은 방임에도 답답하단 느낌은 들지 않았다.

은우는 룸의 문을 살포시 닫곤 헬멧을 벗었다.

“벗어도 괜찮은 거예요?”

“예, 뭐.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데다가, 탄산 님께서 주변에 알릴 거라곤 생각하지 않으니까요.”

“예의 문제라면 난 별로 신경 안 쓰는데…….”

시청자들에게 보이지만 않으면 된다. 은우의 헬멧이 천천히 벗겨졌다.

“오.”

서양인의 것처럼 뚜렷한 이목구비가 룸의 온화한 공기와 맞닿았다.

시원시원한 콧날과 움푹 팬 눈두덩이는 날 선 눈매와 맞물려 흉흉한 기운을 흘렸다. 짧게 리젠트 컷 한 머리카락이 반듯한 이마와 굵직한 눈썹을 드러내서 더욱 서늘한 느낌이 강했다.

머리가 짧은 덕분에 헬멧에 눌린 티는 별로 나지 않는다. 아마도.

은우는 그런 얼굴로 우유에탄산을 지그시 응시했다. 처음엔 좀 당황하던 우유에탄산이 손뼉을 짝, 쳤다.

“난 또 무슨 문제가 있어서 얼굴 가리는 줄 알았네. 멀쩡하다 못해 완전 근사한 얼굴이잖아요? 잘생긴 얼굴을 왜 감추고 다닌담?”

겨우 여유를 가장했던 기철과는 달랐다. 우유에탄산은 진짜 여유에서 근사하다는 (빈)말을 꺼냈다.

역시 게임 방송 업계 1위란 타이틀은 아무나 따는 게 아니구나. 은우는 무서워하지 않는 우유에탄산을 보며 아쉬움을 삼켰다. 겁먹었다면 조금이나마 고지를 점했을 텐데.

“별로……. 다들 무서워해서요.”

“허어. 어딜 봐서? 키도 크고 얼굴도 잘생겼고. 모델하면 딱이겠구만, 왜 무서워하지? 아, 요즘은 그런 걸로 모델 안 되나?”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그쪽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나도 세대 차이가 나서 뭐라 말 못 하겠네요. 하여튼 기술이 너무 발전해도 안 좋아요. 직업 구하기도 힘들고. 그렇죠?”

“예. 많이… 힘들죠.”

은우는 말을 쉽게 쉽게 이어 나가는 탄산을 보며 감탄했다. 그도 저렇게 넉살 부릴 줄 알아야 하는데. 시청자와 핑퐁하는 것엔 익숙해졌어도, 이런 자리에서 말 길게 하는 건 여전히 재주가 없다.

“켄 님은 조금 말재주를 늘릴 필요가 있겠네요.”

“…저도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은 합니다.”

이렇게 면 대 면으로 사람과 대화할 일이 적어서 문제일 뿐이다. 애당초 겁 안 먹고 떠벌떠벌 말 이어 줄 사람도 없었고.

은우는 목을 쓱 쓸었다. 이럴 거면 그냥 음료라도 떠 올걸. 짧은 후회가 들었다.

“무슨 말 하러 들어왔더라……. 아! 그래, 합방 제의. 합방 제의에 대해 궁금한 게 있죠?”

그리고 본론이 터져 나왔다. 은우의 까만 눈동자가 우유에탄산을 직시했다.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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