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기철과 헤어진 이후, 희수와 항상 스터디하던 카페로 이동했다.
언제나처럼 과제를 하던 녀석은 집중이 안 되는 듯 그가 보던 방송을 힐끗 보며 물었다.
“익숙해지면 합방할 거냐?”
“글쎄. 익숙해져도 별로 할 것 같진 않은데.”
“왜, 아직도 겁나?”
희수에게 기철과 나눈 대화 일부를 말해 주었으니. 그녀의 질문에 은우는 쉬이 답을 하지 않았다.
“글쎄.”
한참에 걸쳐 겨우 내놓은 답이었다.
“아쉽네.”
그녀는 강요하지 않는다. 그저 은우가 합방을 하지 않는 것에 안타까움을 표할 뿐.
“왜.”
“별건 아닌데…….”
희수가 머뭇거렸다. 은우는 다시 한번 물었다. 예의상 그리고 친구로서 물은 말에 기어코 희수가 브레이크를 내렸다.
“검은양이 어쩌다 반반마니랑 붙었는데 아, 시발. 그 새끼가 검은양을 운발로 이겨 놓고 하는 말이……!”
언성은 높지 않았으나 분노로 이글이글했다.
이 녀석, 그런 의미의 합방을 바란 게 아니었군. 심각한 게 아니란 걸─그보단 다른 의미로 심각한 일이었음을 깨닫자 안도감도 뭣도 아닌 감정이 들었다. 괜히 진지하게 물어봤다.
“여자는 이래서 게임을 하면 안 된다고 지랄이잖아! 제가 20년 전 사람이야, 뭐야!”
그사이 희수는 결국 들고 있던 머그잔을 책상에 쿵 내려놓았다. 안쪽에 있던 음료가 찰랑였다. 다행히 튀지도, 소리가 크지도 않았다.
그런 사람이랑 합방했다간 문제가 터지겠지만… 여기서 그런 지적 하면 불똥이 튄다.
다년간의 경험을 통해 은우는 침착히 대답을 골랐다. 여차하면 희수 애인에게 전화 걸 준비도 했다. 그녀는 훌륭히 희수를 만류해 줄 거다.
“…내가 반반… 뭐를 이긴다고 복수가 될까?”
“누가 너보고 복수하랬냐? 검은양이 복수의 칼날 갈고 있거든? 단지 나는 그 새끼가 더 박살 났으면 하는 거야.”
매우 사적인 동기였다. 사유가 타당하긴 했지만.
은우는 뒷목을 쓸었다.
“하게 되면 해 줄게.”
▣ 015. 절대 아닌데요
시작 지역인 가한의 성채를 깨면 그때부터 검은기사의 진실한 모습이 드러난다.
여러 개가 열려 어디부터 가야 할지 알 수 없는 맵, 무엇을 고르든 꼬여 있는 데다가 함정 밭인 길, 안 그래도 높은 지능에 다양한 기술들을 구사하기 시작하는 몬스터.
그렇지만 검은기사의 콘텐츠 중 꽃은 역시 멀티플레이였다. 인터넷을 끊어 두지 않으면 멋대로 쳐들어오는 다른 플레이어들 말이다.
『미쳐 버린 망령, 《옥상강아지》가 침입했습니다.』
방송을 시작한 지 30분. 은우는 갑자기 떠오르는 메시지에 걸음을 멈췄다.
“이건 또 뭐야.”
─인터넷 연결 안 끊어두셨나보네ㅋㅋㅋ
─저거 다른 플레이어가 쳐들어오는 거예요
─설정상 세계를 구하지 못한 애들이 딴 세상 가서 깽판 치는거ㅋ
─죽으면 장비랑 혈석 뺏겨요, 조심하세요
아임휴먼 때보다 전체적인 수는 줄었지만, 소위 검크리트(검은기사 마니아층)라 불리는 이들의 합류 덕에 채팅은 활발했다. 오히려 마니아들이 많다 보니 정보 전달이 빠르고 정확해졌다는 장점도 있었다.
뺏긴다는 말에 은우는 모인 장비들을 힐끗 보았다.
파밍을 딱히 하지 않은지라 모인 건 단출하다. 유리기사의 헬름, 파발꾼의 천 옷 세트, 대거, 직검과 단창이 다인 것이다.
이것엔 그가 스탯을 올리지 않아 안 좋은 장비만 낄 수 있다는 것도 한몫했다.
어쨌거나 약탈해 간다고 해서 별 이득은 없을 것 같다.
“전 빈털터리입니다만.”
─친구 아니면 랜덤매칭이라서 뭐ㅋㅋㅋㅋ
─ㄴㄴ켄님 혈석 많잖슴
─혈석부자 켄
“아, 그러네요.”
내구도 때문에 수리를 한 적 있는데, 그때가 대충 6만 어림이었다.
“딱히 쓸 곳도 없으니 빼앗겨도 별문제는 없지만…….”
그래도 적선이 아닌 약탈은 기분 나쁘다. 은우의 단창이 빙그르르 돌며 날아오던 화살을 쳐 냈다.
“약탈당해 줄 순 없죠.”
─ㅋㅋㅋㅋ절대적 자신감ㅋㅋ
─그치만 말한 사람이 켄이다ㅋㅋ
─켄이라면 저런 말을 할 자격 있습니다 lol
“뺏길 수 있다면, 빼앗을 수도 있습니까?”
화살이 날아온 곳을 지그시 응시하니 주춤거리고 있는 석궁병이 있다. 입은 옷은 은우와 비할 바가 없는 뻔쩍뻔쩍함을 자랑했다.
─아녘ㅋㅋㅋ
─절대요ㅋㅋㅋㅋㅋ
─학살모드 on!
─장비보니까 고인물 같은데ㅋㅋㅋㅋ
“아쉽네요.”
연이어 날아오는 화살을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해 내며 걸음을 내디뎠다. 은우의 손에 들린 창과 대거가 흉흉한 위용을 뽐냈다.
“저 헬름 좀 탐나는데.”
채팅창이 ‘ㅋㅋㅋ’로 메워지고, 은우와 적의 위치가 가까워졌다.
철컥.
상대가 검을 뽑고 방패를 들었다. 방패의 형태는 라운드 실드. 충격은 덜 흘려 주지만 가벼워서 휘두르기 좋다.
아, 참. 그러고 보니 패링이란 게 있다고 했다. 혈시가 쓰는 건 못 봤지만, 적 플레이어는 가능할 터. 은우는 대거를 위로 던지고 창을 뱅그르르 돌리듯 휘둘렀다.
역시나 적은 패링을 시도했다.
카가각!
은우의 창은 방패를 스쳐 지나가지 않고 바닥을 긁었다. 하나 상대방은 이미 방패를 크게 휘두른 상태다.
가슴이 열렸다. 은우는 바닥을 살짝 긁어냈던 창을 멈추지 않고 돌려 상대방의 가슴을 베었다. 창끝에 달린 창날이 상대방의 갑옷을 대차게 때렸다.
상대방의 체력 바가 약간 줄었다.
그즈음, 아까 던졌던 대거가 팽그르르 돌며 바닥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은우는 자연스럽게 대거를 잡아채곤 뒤로 물러났다.
“#%#@%!”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가 귀에 울렸다. 침입은 해도 대화는 못 나누는 모양이다.
그는 창을 한 손으로 내질렀다. 상대가 또 한 번 패링을 시도했으나, 이번에도 페이크였다. 은우는 휘두르는 방패 반경에 창이 들어서기 전 바로 회수했다. 그리고 상대가 방패를 휘두르는 것을 피해 창을 찔렀다.
“패링 때문에 그런가, 몹보다 더 쉽네요.”
말을 할까 말까 하다가 그냥 질렀다. 채팅 창이 바로 반응했다.
─아니ㅋㅋㅋ패링 시도하는 시점에서 진짜 개고인물이라는 건데......ㅋㅋㅋㅋ
─패링 쓸 걸 예상하고 훼이크 거는 것 보소...
─역시 구울왕....
은우는 채팅 창을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이런 잡기술에 호응하는 사람들을 보면 기분이 정말 묘해진다. 조금만 연습하면 누구나 쓸 수 있을 정도로 쉬운 기술이건만.
“근데 아까부터 왜 절 구울이라고 부르십니까.”
─ㅋㅋㅋ커뮤니티 안 보셨군요?
─님 별명 이제 구울왕임ㅋㅋㅋ
─그리고 우린 구울단임ㅋㅋㅋㅋㅋ
“왜 하필…….”
은우는 눈살을 찌푸렸다. 전생에서도 구울이란 몬스터가 있었던 탓이다.
개념에 대해서 이쪽 설화에 빗댄다면 구울 내지 좀비와 도플갱어를 합쳐 둔 정도? 먹은 대상의 얼굴을 고스란히 따라 하는 성질이 있다. 덕분에 전장에서 정말 최악으로 꼽혔다.
“싫다고 해도 부르실 거죠?”
─당연하지ㅋㅋㅋㅋ
─ㅋㅋ이미 님은 구울왕임
─마! 우리가 붙여준 애칭이 싫나!!
은우는 방송 4일 차에 큰 깨달음을 얻고 해탈했다. 그사이 침입한 적은 야금야금 피가 깎여 실피가 되었다.
“@#%@[email protected]$.”
뭐라 막 소리를 지른 적이 후다닥 뒤로 물러났다. 그리곤 손으로 뭔 문양을 그리듯 휘둘렀다.
“인사?”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무시하고 죽이셈
─ㅋㅋㅋㅋㅋㅋ존웃ㅋㅋㅋㅋ
「‘고인물수듄ㅡㅡ’ 님이 ‘5,000원’ 투척!
형 저 자세하면 살려주는 게 국룰이에요ㅋ」
─저거 나 뉴비니까 좀 봐주세요 하는 거임ㅋㅋ
─정보) 켄은 오늘이 검기사 2일차인 뉴비다
─청정수 앞에서 고인물이 져버렸누
“아, 그럼 살려 줘야 하는 겁니까? 고인물수듄 님, 후원 감사합니다.”
─ㅋㅋ아 진짜 켄 실력은 고이다못해 썩은 물인데 지식면으론 청정수라서 넘 웃김ㅋㅋ
─살려주셔도 되고 안 살려주셔도 되고?
─그냥 장난이니까 마음대로 하세요.
그렇군. 은우는 몸을 곧추세웠다. 그걸 공격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상대도 자세를 풀었다.
“미안합니다.”
은우는 투구 때문에 보이지도 않을 미소를 머금으며 창을 굳게 잡았다.
“제가 한 대 맞고 넘어가는 성격이 아닌지라.”
먼저 싸움을 걸어 놓고 이제 와서 휴전협정? 어림도 없다.
그의 손이 창을 날렸다. 적이 화들짝 놀라 방패를 들어 막아 냈지만, 이미 은우는 자리를 뜬 뒤다.
─ㅋㅋㅋㅋㅋㅋㅋ역시!!
─학살좌 간드앗!!
─휴전? 킹림도 없지!
─우리 켄은 2일차 청정수라서 봐줄 이유가 없다 이거야!
튕겨 나온 창을 손으로 잡아 내며 대거를 휘둘렀다. 반사 신경은 나쁘지 않은지 상대방이 검을 맞춰 휘둘렀다.
째앵!
은우의 대거가 검을 튕겨 냈다. 패링 특유의 흰 불똥 이펙트가 나타나며 상대방의 몸이 경직됐다.
푸욱!
창이 그 몸을 꿰뚫고, 실피였던 체력 바가 순식간에 바닥으로 처박혔다. 적의 몸이 검은 가루가 되며 흩어졌다.
『미쳐 버린 망령, 《옥상강아지》를 퇴치했습니다.』
은우는 잠시 패링에 쓰인 대거를 바라보았다. 이거 잘하면… 아니, 시스템상 무리인가? 그는 떠올린 가능성을 일단 뒤로 미뤘다.
“진짜 주는 게 없네요.”
─헬름 안 나와서 실망한 거냐고ㅋㅋㅋ
─켄무룩
─그래도 죽이면 혈석 5천 정도 줘요ㅋㅋㅋ
“전 혈석을 안 쓰니까요.”
돈은 별 쓸모가 없다. 쓸 곳도 없고 필요도 없는데 모아서 뭐 한단 말인가.
은우는 그 점을 안타까워하며 창을 버릇처럼 털었다. 그러다가 문득 떠오른 것은 아까 채팅 창에서 두었던 훈수였다. 필요도 없었고 물어본 적도 없었던지라 무시했었는데, 이제 와 생각해 보니 괜찮은 것 같다.
“아까 상인이 있다고 하셨던 것 같은데.”
─? 넹.
─왜요??
“돈도 많은데 뭐 잔뜩 사 볼까요? 쓸 건 아닌데 돈 모아 봤자 쓸모도 없잖습니까.”
그라고 돈 쓸 줄 모르는 건 아니다. 강화하지 않아도, 좋은 무기를 쓰지 않아도 게임이 쉬워서 그냥 진행할 뿐이지.
애당초 전생에선 저축이라는 걸 모르면서 살 정도였다. 새로 나온 소모품은 전부 써 봐야 직성이 풀렸고, 무기는 돈을 부어 가며 관리하고 모았으니까. 전장에서 죽으면 저축이고 뭐고 무쓸모란 점도 있었지만 말이다.
각설하고, 은우는 어차피 쓸 일 없는 돈들 모조리 쓰기로 했다. 흔치 않은 대쇼핑의 기회에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재밌는 거 있으면 좋겠네요.”
─와ㅋㅋㅋ나 검은기사에서 충동구매하는 거 처음 봄ㅋㅋㅋ
─ㅋㅋㅋㅇㅈㅋㅋㅋㅋㅋ
─이참에 무기도 모으져ㅋㅋㅋ대장간에서 기본무기도 팜ㅋㅋㅋ렙업 안해도 쓸 수 있음
─그거 성능 개구리지 않음?
─켄이 들면 무기 is 뭔들
─ㅇㅈ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구매하는 건 은우인데 더 신난 건 시청자들이었다. 그들은 은우가 상인에게 가 구매 목록을 띄우자마자 이것저것 채팅을 띄웠다.
“체력 회복…은 필요 없고. 어, 수리 키트?”
─없을 것 같고 가 아니라 없고ㅋㅋㅋ
─자신감 미쵸ㅋㅋㅋㅋ
─와중에 내구도 집착공ㅋㅋㅋㅋ
─채찍이 부서졌던 건 아직도 충격적이다. 그럴 수 있다.
그가 수리 키트 여럿을 구매했으나, 그게 잘못됐노라 지적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단지 웃을 뿐.
“무기 강화…도 필요 없고… 속성? 혹시 속성 안 맞으면 공격 아예 안 들어가는 몬스터도 있습니까?”
─아녕, 그런 건 없어영. 걍 뎀지 업
─그런 거 있었음 이 겜 접었음ㅋㅋㅋ
─지금도 겜 아닌데...속성따라 갈린다? 진짜 겜 아님
그들은 상점 앞에 쪼그리고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아이템을 구입했다. 앞선 방송에서 말을 많이 하지 않았던 켄이기에 사람들은 그와의 잡담 기회를 더욱 반겼다. 의외로 재미난 게 많다는 점 역시 좋았다.
“유혹 방울은 한 번에 몹 쓸기 좋겠네요.”
─정보) 몹의 어그로를 돌려서 도망칠 때 쓴다
─ㅋㅋㅋㅋ역시 학살좌....
“회복 방울… 던져서 회복시킨다? 이런 걸 쓸 일이 있습니까?”
─침입 외에도 협력 멀티플도 가능해서 그럼ㅇㅇ
─근데 별 쓸모는 없음
─몬스터도 회복시켜서; 잘못 던지면 대참사;;
몬스터도 회복시킨다고? 은우의 눈이 흥미로 가득 찼다.
“만약 실피 상태에서 이거랑 공격이랑 동시에 맞으면 그 몬스터는 살까요, 죽을까요?”
─에이, 그게 됨?
─동시에 맞추는게 가능할까요?
─근데 이 말을 한 게 켄이네....?
─본인 지금 소름 돋음ㅋㅋㅋㅋ
“아까 보니까 폭탄 병도 보이던데. 끈으로 두 개를 붙여 두고 던지면 어떨 것 같습니까?”
─실험왕이냐고ㅋㅋㅋㅋ
─켄 은근 호기심 많다ㅋㅋㅋㅋㅋㅋ
─호기심 때문에 어둠 잡고 실험정신 때문에 아임휴먼 히든루트 뚫고ㅋㅋㅋㅋ존웃ㅋㅋㅋ
─아ㅋㅋ근데 궁금하긴 하다;;
은우는 조금 고민하다가 10개 정도 구매했다. 시험해 보고 싶은 것도 있었고, 왠지 사 두면 좋을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돈이 워낙 많았던지라 사람들은 쓸모없을 것 같다 할지언정 그 이상 참견하지 않았다.
“신성한 결투의 부적… 룬 회복을 금하게 만드는 것도 있네요. 쓸모가 있나?”
─보통 PVP에 씀
─남한테 맞춰서 쓰는 겁니다ㅋㅋ본인이 쓰는 게 아니라ㅋㅋ
아하. 그는 바로 이해했다. 동시에 사람들이 알려 주지 않은 발상도 떠올렸다.
“PVP 때 본인한테 쓰는 식의 도발도 있겠네요.”
─정보) 진짜 개고인물들만 하는 짓이다
─어지간한 고인물 아니면 하지 않는 짓을 바로 생각해내는....
채팅 창도 마음껏 구매할 수 있는 환경이 제공되자 이것저것 설명하며 다양한 물건들을 구매하길 촉구했다. 은우는 그들의 제안도 받아들였다.
「‘켄의가운데다리’ 님이 ‘10,000원’ 투척!
인터넷 연결 안 끊어도 됨?」
“켄의가운데… 님, 후원 감사합니다. 인터넷은 일부러 안 끊었습니다.”
─끝까지 안 불러ㅋㅋㅋㅋ
─나 같아도 안 부른다ㅋㅋㅋㅋㅋ
은우는 뒷목을 쓸었다.
“어차피 쳐들어와도…….”
끝까지 말을 잇는 대신 적당히 흐렸으나, 사람들은 손쉽게 뒷말을 유추했다. 그 말들 뒤에 초성으로 이뤄진 웃음소리가 붙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30분간 이어진 쇼핑이 끝났을 때, 하늘이 그의 방송을 돕는 것처럼 새로운 침입이 들어왔다. 은우의 입술이 삐뚜름해졌다.
* * *
가한의 성채와 연결된 다음 맵 중 은우가 택한 것은 고요한 산림이었으니.
안개 때문에 길 찾기 어렵기로 유명한 산림 초반 구역에서 은우는 다섯 번째 침입자를 효수했다. 상점에서 구매한 밧줄이 큰 도움이 되었다.
─살다살다 밧줄을 채찍으로 쓰는 사람이 나올 줄이얔ㅋㅋ
─밧줄도 대미지 주는 게 제일 충격적임ㅋㅋㅋ
“혈시보다 침입자를 더 많이 보는 기분입니다.”
─?
─??
─ㅋㅋㅋㅋ??
─침입자 만나기 전에 썬 멧돼지는 몬스터가 아닙니까??
“그게 몹이었습니까? 그냥 숲이라서 있는 거 아니었나요?”
숲에 짐승이 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기에 몬스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은우의 되물음에 사람들이 허허롭게 웃었다. 진심과 장난의 미묘한 차이를 구분해 낸 것이다.
─초보자들이 산림에서 제일 무서워하는 몹이 멧돼지거늘,,,,
─아아....이것이 능재라는 것인가....
─그럼 그건요ㅋㅋㅋ임프 녀석들도 몹인 줄 몰랐어요ㅋㅋ?
“임프라면 그 쪼만한 애들 말하시는 거죠?”
─넹
─ㅇㅇ기습하는 애들
“…그거 그냥 혈석 벌라고 있는 거 아니었습니까? 너무 약하던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절대 아닌데요
─아, 킹받네;;
─켄 진짜 겸손한데 관점이 너무 달라ㅋㅋㅋ
─난....걔네들이 멧돼지보다 더 끔찍하던데.....
절대 아니구나. 은우는 뒷목을 쓸었다. 몇 방이면 죽길래 그냥 플레이어들을 배려해 만든 혈석 파밍용인 줄 알았다.
─근데 진짜 켄님, 임프 기습 어케 아시는 거임?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나 이제 기습할 거예요, 기습할 거야, 한다,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대놓고 소리를 들려주던데.”
─??
─롸?
─ㅋㅋㅋㅋㅋㅋㅋㅋㅋ검린이들 단체 그로기ㅋㅋㅋ
─검기사 103시간 했는데 이제보니 막귀였누....
─아, 저 공략법을 들키네ㅋㅋㅋ
그는 안 들린다는 사람들의 말에 뒷목을 다시 쓸었다. 이미 아는 이들도 많지만, 모르는 이들이 더 많았다.
“잘 들어 보세요.”
은우는 걸음을 천천히 옮겼다. 밧줄로 목을 매달아 둔─죽지는 않았다─침입자는 내버려 둔 채다. 침입자가 버리고 가지 말라는 듯 버둥댔지만, 알 바 아니었다.
“보통 걸을 때는 풀 스치는 소리, 바람 소리, 강 소리가 들립니다. 좀 더 귀를 기울이면 몬스터들의 걸음 소리도 들리고요. 거리가 머니까 신경은 안 쓰셔도 됩니다.”
─ㅇㅇ
─몬스터들 걸음소리부터가 안 들립니다 쓰앵님....
“그리고 이렇게 걷다 보면…….”
온다. 은우는 사람들이 듣기 쉽게 걸음을 멈추었다. 여러 소리 중에서 그의 걸음 소리가 빠졌다.
“가지가 흔들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어....진짜다
─??
─그냥 바람 소리 아님?
“아뇨. 바람 소리는… 흐우웅, 정도인 반면 가지 밟는 소리는 휘이익 소리랑 바스락 소리가 겹쳐서 납니다.”
─흐우웅ㅋㅋㅋㅋㅋ
─근데 저렇게 말하니까 확실히 알 것 같다
─아ㅋㅋㅋㅋ이렇게 구별하면 머함ㅋㅋㅋ내가 직접 게임할 땐 걍 흐우우우ㅜㅇ 밖에 안 들림ㅋㅋㅋ
─ㅇㅈㅋㅋㅋㅋㅋ
이래도 알지 못한다면 어떻게 할 방도가 없다.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메이스를 옆으로 휘둘렀다. 나무 위에서 떨어져 내리던 임프 한 마리가 메이스에 직격당했다.
“뭐, 슬슬 끝이니 크게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이 게임은 나무나 바위 같은 오브젝트에 흔적을 남기지 못하므로 순전히 기억력으로만 숲길을 헤매야 한다. 안개로 인해 반경 3, 4m만 구분 가능한 시야 또한 사악한 방해 요소였다.
그럼에도 은우는 숲이 거의 끝나 간다는 걸 확신했다.
“길 찾기가 어렵다고들 겁주셔서 조금 긴장했는데, 생각보다 쉬워서 다행입니다.”
─지금 1시간 넘게 헤매고 계시면서요?
─여기 보통 대여섯 시간은 헤매는 곳인디요ㅋㅋ
─'그 말'.
─아 근데 켄이라서.....
“아뇨… 이제 곧 끝입니다.”
은우의 장담에 사람들이 반신반의했다. 그러나 그 말의 진의는 금세 밝혀졌다.
“제 말이 맞죠?”
정말로 고요한 산림의 안개가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