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얼마 지나지 않아 알렉스 부대가 도착했다. 은우가 쭉쭉 진행하는 사이, 따로 교전을 치른 듯 그들은 꽤 너덜너덜했다.
“대통령은?!”
알렉스 부대 입장과 동시에 컷신이 시작됐다.
알렉스의 지시에 부하들이 대통령이란 이름의 독재자를 생포했다. 일부는 죽은 클레어의 시신을 확인하기도 했다.
은우는 관찰자가 되어 그 풍경을 지켜보았다. 캐릭터의 시점도 아닌,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시선이다.
“이제… 이 싸움은 끝이야…….”
한 안드로이드가 울었다. 알렉스도 무전으로 보고를 올리며 이를 악물었다. 눈가가 벌게진 것이 눈물을 참고 있는 모양새다.
“전부… 네 덕분이다, 켄. 네 덕에 우리는… 다시 인간이 될 수 있어. 기계 병기 따위가 아니라…….”
감사를 표한 알렉스가 대통령을 데리고 전망 좋은 테라스에 섰다. 연설 같은 것이 작게 퍼져 나가고, 바깥에서 들려오던 총소리와 폭음이 점차 잦아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은우의 캐릭터는 그저 묵묵히 바라보았다. 클레어의 시체가 수습되는 것이나 부하들이 만일을 대비하는 모습까지.
그리고 시점이 점차 멀어진다. 은우의 캐릭터가 아닌, 은우의 시야 한편에 크레딧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게임 제작사, 디렉터, 프로젝트 매니저, 아트 디렉터 등등.
크레딧이 올라가는 와중에도 장면은 계속 바뀌었는데, 대체로 엔딩 이후의 장면 같았다. 캐서린을 필두로 한 이들이 서로를 얼싸안는 모습, 시민군 수장이 안드로이드가 됐으나 폐기당했던 아들의 사진을 보며 우는 모습, 사람들이 기계 공장을 파괴하는 모습 등등.
마지막으로 올라온 건 ‘I'm HUMAN’이라는 게임 대표 썸네일이다.
정말로 게임이 끝났다.
“또 일찍 끝났네요.”
은우의 한마디에, 여운에 잠겨 있던 채팅 창이 화르륵 불타올랐다. 저마다 원하는 게임들을 떠드는 것이다.
후원은 이미 원하는 게임들 말하는 것들로 가득 차 있다. 어둠전 끝난 후 처음 말한 사람의 의견을 따랐던 것이 영향을 끼친 것 같다.
은우는 그걸 보며 게임을 종료했다. 설정해 둔 대기실이 펼쳐지고, 머리에 쓴 헬멧이 약간 바뀌었다. 그는 익숙하게 뒤통수와 목을 매만졌다.
“의견 감사합니다. 다만 오늘 이어서 할 게임은 미리 정해 왔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예정이고요. 그러니까 다음부터는 후원 안 해 주셔도 됩니다. 주신 건 정말 감사합니다.”
웃음기를 담아 나른히 속삭이자 후원이 더 추가됐다. 이유를 알 수 없는 현상에 은우는 떨떠름해졌다.
“후원하셔도 원하는 게임은 못 해 드립니다. 그러니 안 하셔도 됩니다.”
─그냥 받으라 이말이야ㅋㅋㅋ
─아, 짭목소리만 듣다가 찐목소리 들으니까 너무 힐링된다,,,,,
─ㅆㅇㅈ
─!업타입
─오빠 어리둥절해하는거 너무 귀엽다~ (덜렁덜렁)
─변태들 ㄲㅈ
“…일단 감사합니다.”
은우는 뒷목을 더 쓸며 미리 장바구니에 담아 둔 게임을 공개했다. 구매 장면을 보여 줌으로써 최초로 플레이한다는 걸 공고히 하기 위한 퍼포먼스였다.
그리고 게임 썸네일을 발견한 사람들이 열광적인 환호를 내질렀다. 나가려던 이들중 절반이 발길을 돌려 제자리에 착석할 정도의 위력이었다.
“이어서 할 게임은 ‘검은기사’입니다. 10분 쉬고 시작하겠습니다.”
VR 버전은 물론이요 PC, 콘솔 버전에서도 지옥 같은 난이도를 자랑하는 게임에 은우가 출사표를 던졌다.
▣ 011. 스포는 밴이 국룰
[자유의 대가는 죽음.]
게임, 검은기사가 내세우는 모토였다.
극한의 자유로움을 제공하는 대신 끔찍하리 만치 하드한 난이도는 단맛과 매운맛을 함께 선사한다. 사실적이고 아름다운 배경과 달리 혐오스러운 괴물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로 인해 검은기사는 소수만 플레이하는 게임이 되었다. 튜토리얼조차 깨기 힘든 난이도 덕에 피지컬이 제법 되거나 끈기 있는 자들만 남아 버린 탓이다.
그러나 인방을 보는 시청자의 입장에서 난이도는 또 다른 문제다.
본인이 플레이하는 게 아니므로 따지게 되는 건 결국 액션이나 아름다운 배경이다. 요컨대 눈요기가 되면 게임이 어렵든 쉽든 본단 얘기다.
그런 점에서 검은기사는 방송에 적합했다. 웬만한 게임들을 압살하는 배경과 화려하진 않지만, 처절한 전투는 사람들의 주목을 이끌어 내기 좋았으니까.
그저 플레이하는 이가 죽음을 맛볼 뿐이었다.
“데바뱀 해 봤느냐 물으셨습니까? 해 보긴 해 봤습니다. 별로 제 취향은 아니었지만.”
은우는 게임 다운로드를 기다리며 질문에 답했다.
─그럼 진짜 검은양 잡은 킹반인이...?
─설마사카...?!
“어…….”
여기서 긍정해야 하나? 딱히 계속 숨기란 얘긴 없었지? 은우는 잠깐 고민하다가 고개를 주억였다.
“상대가 스트리머인 줄 몰랐습니다.”
─헐 미친, 진짜였냐고ㅋㅋㅋㅋㅋ
─(금지된 채팅입니다)
─옄싴ㅋㅋㅋㅋㅋ켄이면 킹정이지ㅋㅋㅋㅋ
─그래서 뭔 얘기하는 건데 씹덕들아
─개웃곀ㅋㅋㅋㅋ
─타 스트리머 언급 그만합시다
─(금지된 채팅입니다)
은우는 엉망이 돼 가는 채팅을 가만히 보았다. 검은양에 대해 설명하는 채팅, 뻥치지 말라는 채팅, 갓지컬이니 뭐니 떠드는 채팅. 욕설이나 비방은 매니저가 칼같이 삭제하고 있지만, 조금 불편한 것도 사실이다.
“이 얘긴 그만하죠. 다른 스트리머분과 연계된 일이잖습니까.”
그럼에도 채팅 창은 잠잠해지지 않았다. 그는 고민하다가 한 마디를 덧붙였다. 사람 유혹하는 데 일가견있던 누군가에게 배운 한 마디다.
“절 앞두고 과거 일에만 집중하시면 제가 좀 섭섭한데.”
은우로선 장난하듯 던진 말이었으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남자마저 유혹하는 마성의 목소리,,,,
─켄 섭섭했누
─형, 남챙의 길을 걷는 거야...?
─아ㅋㅋ집중할게요ㅠㅠ용서해줘요ㅋㅋ큐ㅠ
─아 빨리 ㄹㅇㅋㅋ만 쳐;;
─ㄹㅇㅋㅋ
─ㄹㅇㅋㅋ;;
데바뱀 일화가 쏙 들어갔다. 은우는 흡족해졌다.
“슬슬 10분 다 됐네요. 시작하겠습니다.”
─님 방제
─방제요
“아, 감사합니다.”
방제를 서둘러 바꾼 그는 게임을 바로 실행했다. 사람들이 초보는 어쩔 수 없다며 키득거렸다.
〚오랜 시간이 흘렀지……. 정말 오랜 시간이…….〛
모두가 아는 인트로 영상이 시작되었다.
〚역사가 전설이 되고 전설이 신화가 되어 버릴 만큼의… 그런 시간이 말이야.〛
오래된 성채를 공중에서 훑고 지나가면서 시작되는 그것은 내레이션과 맞물려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리고 그 끝에서 한 망령이 깨어나니…….〛
성의 한 창문으로 내부에 입성한 시야가 점차 빨리 움직였다. 나선계단, 홀, 복도 그리고 본성과 떨어진 외탑의 지하 감옥.
〚구원인가 절망인가.〛
감춰진 지하실 속 관짝 하나.
〚하나를 택하면 하나를 잃어야 하는 진리 속에서, 모든 것은 그대의 손에 달려 있으리…….〛
눈앞이 새까맣게 물들었다. 둥둥 뜬 것 같던 몸은 다시 묵직해졌다. 육체를 되찾은, 그러니까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다.
캐릭터 설정이나 난이도, 그런 건 없나? 은우는 의아해하며 손을 앞으로 뻗었다. 두툴두툴한 감촉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돌인 것 같다.
그는 주변을 대충 더듬어 보았다. 좁다. 어딘가에 갇힌 상태로 시작하는 듯하다.
덜컥.
일단 앞부터 세게 밀어 보았다. 양 사이드로 옅은 선이 그어졌다.
좀 더 힘을 담아 보니 선이 더욱 두꺼워진다. 은우는 그가 아까 보았던 관 안에 있다는 걸 깨달았다. 발이 거세게 뚜껑을 밀어젖혔다.
쿵!
구분도 안 갔던 아까와 달리, 사물의 윤곽은 확인할 수 있는 밝기가 화악 쏟아졌다. 두웅, 하는 미묘한 북소리와 함께 눈앞에 《지하 감옥》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아임휴먼도 불친절했는데… 이 게임도 어지간하네요.”
고작 맵 이름만 알려 주고 끝이라니. 그렇게 치면 아임휴먼보단 친절한가? 낡은 천 옷차림에 신발은 주지도 않은 걸 보면 마냥 그런 것 같지도 않지만.
─아니, 그건 님이 숙련자부터 해서 그런 거임;;
─정보) 아임휴먼은 입문자, 경험자 모드를 통해 숙달한 다음 숙련자를 하는 게임이다
─카롬 게 원래 다 그래요.
은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헬멧이 쓰여 있지 않은 머리는 무척 가벼우나, 그래서 조금 낯설다.
“아래 난이도부터 해야 하는 거면 재미가 없잖아요? 숙련자도 쉬웠는데.”
─?
─너한테만 쉬운 거야....
─ㅋㅋㅋㅋㅋ여윽시 학살좌,,,
─??: 숙련자도 쉬운데요?
─숙련자 못 깬 사람은 그저 웁니다....
“그걸 왜 못 깨요.”
─아아! 기만 당한다!
─킹언 나왔다...ㅋㅋㅋㅋㅋ
─못 깨서 죄송합니다....
“아니, 탓하는 게 아닙니다.”
그는 관이 위치한 방을 빠져나가며 서둘러 변명했다. 와중에도 천천히 파악한 신체 능력은 그럭저럭 쓸 만하다.
“정말 이해가 안 가서 그래요.”
─네....저흰 인간이 아닙니다...
─그냥 켄이 인간 아닌 건 아닐까? 우리 모두가 인간 아닌 것보단 그게 낫지 않을까?
─더러운 천재!
─아아....이것이 '능재' 차이란 것이다....
은우는 미간을 좁혔다. 그가 전장과 싸움에 익숙하다곤 하지만, 그것을 고려해도 그렇게 어렵진 않았던 것 같은데. 검 한 자루로 썰어 버리는 건 못 해도 차근차근 심혈을 기울이면 충분히 가능하지 않나?
그는 뒷목을 쓸며 일단 게임에 집중했다. 계단의 끝은 우습게도 벽에 가로막혀 있다.
다만 벽 틈새로 빛이 흘러 들어오는 걸 보면 그렇게 단단히 쌓은 건 아닌 듯하다. 그는 한 걸음 물러서서 벽을 걷어찼다.
와르르!
발길질 두 번 만에 벽이 완전히 무너졌다. 이어진 곳은 지하 감옥의 쇠창살 안이다.
「‘킹갓제너럴켄’ 님이 ‘10,000원’ 투척!
튜토리얼 노데스 클리어 시 10만 원」
─새로운 흑우왔누
─미션 안 걸어도 그렇게 깰 것 같은데 ?
「‘킹갓제너럴켄’ 님이 ‘10,000원’ 투척!
단, 맨손으로」
─아 이건 모른다
─맨손은 좀...;;;
─맨손은 힘들지ㅇㅇ
딱히 수감된 죄인이 없는지 철창은 문이 열려 있다. 아까 인트로 영상에서 빠르게 지나가던 배경이 그대로 이어지는 모양이다.
“그 미션, 도전해 보겠습니다.”
은우는 열린 문을 타고 지하 감옥 복도로 나갔다.
으어어어!
검은기사의 악명을 높인 기괴한 괴물들이 철창 속에서 울부짖었다. Bloody Corpse. 한국어 명칭으론 혈시라 불리는 몬스터들이다.
그가 지나가자 혈시 몇몇은 공포에 질린 것처럼 안쪽으로 기어들어 가고, 몇몇은 쇠창살 사이로 손을 뻗었다.
인간형이되 피부가 썩어 들어가고 피투성이 뼈가 드러난 그것들은 제법 참혹하다. 저보다 더한 것도 상대했던 입장에선 ‘볼 만한데?’ 정도지만, 비위 약한 시청자들은 비명을 질렀다.
“저것도 잡아야 합니까?”
─잡아도 되고 안 잡아도 되고?
─잡으면 좋긴 함 잡기 쉬워서 혈석 모으기 좋음
“딱히 그런 의미로 물은 건 아니지만… 혈석은 화폐입니까?”
─화폐 겸 경험치? 혈석으로 템 사거나 능력치 올릴 수 있어요.
─근데 켄님 혹시 미션 관해서 물어보신 거?
“네.”
─꼭 몬스터 다 안 잡아도 돼요ㅎㅎ 걍 맨손으로 튜토 클하시면 됨ㅎㅎ
─본인등판햇네
─깔끔한 정리 편-안
안 잡아도 되는구나. 은우는 혹시나 싶어 늦췄던 걸음을 빨리했다.
─근데 켄 학살좌잖아 쟤네 진짜 안 잡아?
─이걸 여기서ㅋㅋㅋㅋㅋ
“학살좌 아니라니까요.”
저놈의 학살좌. 은우는 눈살을 찌푸렸다가 이내 걸음을 멈췄다.
그르륵.
귀를 기울이면 정말 옅게 발소리가 들린다. 그는 코너 벽에 몸을 붙인 채 조용히 조용히 걸었다.
워우우우우-
감옥 속 혈시들이 울부짖자 저쪽에서도 작은 우짖음 소리가 들려왔다. 발소리가 빨라졌다.
다섯 걸음, 네 걸음, 세 걸음, 지금.
은우의 몸이 코너를 박차고 나아갔다. 갑자기 튀어나온 그에게 혈시는 대항도 하지 못했다.
은우는 혈시를 덥석 붙잡고 그대로 엎어 쳤다. 혈시의 머리 위에 떠오른 체력 바가 주욱 줄었다.
연이어 혈시의 머리를 팔로 휘감고 우둑 꺾었다. 체력 바가 더욱 줄어들었다. 그러나 목이 꺾였음에도 죽지는 않았다.
은우는 주먹으로 대가리를 더 후려쳤다. 그제야 혈시가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혈석 24』
하단에 작게 알림 창이 생겨났다. X 버튼이 있길래 은우는 망설임 없이 제거해 버렸다.
“이거 대미지 계산이 어떻게 되나요?”
─아니 탐지센서 없는데 저걸....?
─사플 잘하네ㅋㅋㅋ
─크리티컬 터지면 1.5배
─아임휴먼처럼 급소 한 번 때린다고 죽진 않음
─그래서 맨손이 어려운 거임;; 맨손은 뎀지가 그닥 안 쎄서;;
─근데 켄한텐 아닌듯
─야 그냥 헌납해라ㅋㅋㅋ이미 미션 쫑난듯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정보 감사합니다.”
현실성을 강조한 아임휴먼과 달리, 이쪽은 HP를 전부 깎지 않으면 안 된다. 팔다리를 부러트리는 일 또한 불가능했고, 사지를 잘라 내지도 못한다. 별의 기사랑 비슷했다.
“이 게임, 꼭 능력치 올려야만 깰 수 있습니까?”
─ㅋㅋㅋㅋㅋ
─설마 이번에도 안 올리고 깰 셈이었나 이 남자...!
─미친 새끼 진짴ㅋㅋㅋ
─근데 켄이라면 모른다ㅋㅋㅋ
─PC버전은 안 올리고 깬 인간이 있긴 한데..ㅋㅋㅋㅋ
그럼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화면을 보고 조작한다는 것과 가상현실이라는 차이가 있지만, 그래도 같은 게임. 깨는 게 완전히 불가능하진 않을 터다.
은우는 혈시가 걸어왔던 계단에 발을 올렸다. 드문드문 횃불이 보이며 시야를 그나마 밝혔다.
“그럼 능력치를 올렸을 때 신체 능력이 달라집니까? 힘이 더 세진다든가, 빨라진다든가.”
─글쎄요?
─가상현실 버전 해본 놈 빨리 튀나와봐
「‘검은기사개어렵’ 님이 ‘1,000원’ 투척!
신체능력 자체가 바뀌진 않을 걸요? 그냥 힘 올리면 댐지 세지고 체력 올리면 피통 늘어나고 그랬던 걸로 기억해요」
─저거 맏따
─기량 올리면 보정이 생겼지 아마?
“정보 감사합니다.”
그러면 진짜 안 올려도 될 것 같다. 대미지 올라가는 건 시간을 단축해 주니 생각해 볼 만하지만, 체력 따위야.
“안 올려도 죽일 수 있겠네요.”
─학살좌가 간다!
─학살의 켄이 간다!
─아무리 봐도 맨손으로 튜토 깰 각ㅋㅋㅋ
─크
아, 학살좌 아니래도. 은우는 뒷목을 쓸었다. 조금 익숙해진 헬멧의 매끄러움 대신 피부 고유의 부드러움이 느껴졌다. 손에 뭐가 걸렸나 싶어 확인하면 짧은 꽁지머리가 하나 있다.
우둑!
은우는 마주치는 족족 혈시들을 죽였다. 감옥 안에 갇혀 있는 것들은 열기 귀찮아서라도 안 죽였지만, 나머진 아니다. 한 마리당 24씩 주는 혈석이 168개 쌓였다.
정말 튜토리얼을 맨손으로 깰 기세였다.
지하 감옥 입구에 셋. 은우는 손가락으로 허벅지를 두드리다가 손뼉을 짝짝 쳤다. 입구 쪽 기척이 술렁였다.
으어어어.
으어어어?
대화라도 나누는 것 같군. 그는 그 점을 유심히 살피며 다시 한번 박수를 쳤다. 짝짝짝. 기어코 혈시 세 마리 중 두 마리가 안으로 들어왔다.
투구를 쓰고 너덜너덜한 갑옷을 입은 그것들은 창대로 계단을 찍으며 내려왔다. 짝짝짝. ㄱ자로 꺾이는 계단 너머에서 재차 박수 소리가 들렸다.
혈시들은 그 소리에 이끌려 계속 내려갔다.
그리고 그것들이 코너를 꺾어 한 발 더 내디뎠을 때.
탁.
아주 작은 소음과 함께 두 혈시의 몸이 앞으로 밀려났다. 혈시 두 마리가 계단에서 굴러떨어졌다.
“어정쩡하게 지능이 있으니 유인이 쉽네.”
혈시의 등을 발로 차서 떨어트린 이가 속삭였다. 참고로 그는 손뼉 친 직후 천장에 달라붙어 혈시들을 기다렸다.
은우는 혈시들이 일어나기 전 계단을 빠르게 내려갔다. 위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혈시 하나가 낌새를 눈치채고 움직이기 시작했지만, 이미 늦었다.
그의 발이 넘어진 혈시들을 짓밟았다. 대미지가 정해져 있다 보니 각각 세 번씩 밟아야 죽었다.
휙!
두 마리가 축 늘어짐과 동시에 그는 몸을 피했다. 급히 뛰어 내려온 혈시가 창을 내질렀다.
은우는 그 창을 그대로 붙잡고 잡아당겼다. 계단에 비스듬히 서 있던 혈시가 균형을 잠시 잃었다. 은우가 노린 모습이었다.
퍼억!
창대를 붙잡은 상태로 발을 이용해 명치 어림을 찼다. 혈시가 기어코 창을 놓치고, 은우는 빼앗은 창을 뒤로 던졌다. 그의 다리가 유려한 선을 그리며 혈시의 머리를 돌려 찼다.
“대미지가 정해져 있는 건 좀 귀찮네요.”
─보통 쟤네한테 얻어맞고 죽는데....
─어림도 없지! 유인해서 밟아버리기!
─아, 켄 같은 피지컬 좀 가지고 싶다.....
─천장에 달라붙을 생각을 대체 누가 하는 건데ㅠㅠ
「‘킹갓제너럴켄’ 님이 ‘100,000원’ 투척!
아직 좀 남았긴 한데....이미 결론 난 것 같아서 미리 드립니다 음머어어어어」
─ㅋㅋㅋㅋㅋㅋㅋㅋ흑우가 운다ㅋㅋ
─사실 깰 거 알고 건 거임ㅋㅋㅋㅋ
─진짜 흑우였누ㅋㅋㅋㅋ
“킹갓제너럴켄 님, 감사합니다. 아, 이런 닉네임은 자화자찬하는 것 같아서 좀 부끄럽네요.”
은우는 아무 생각 없이 그 말을 뱉었다가 곧바로 후회했다.
─ㅋㅋㅋㅋㅋㅋㅋ자화자찬ㅋㅋㅋ
─이미 할 대로 해놓고서ㅋㅋㅋㅋ
「‘세계최강켄사마’ 님이 ‘1,000원’ 투척!
뭐?! 부끄럽다고?! 그럼 더 해야지!」
「‘우주미남켄’ 님이 ‘5,000원’ 투척!
형 뭐가 부끄러워요ㅋㅋㅋ」
─저 미친 놈들ㅋㅋㅋㅋ
「‘KenIsGod’ 님이 ‘122,900원’ 투척!
켄은 신입니다」
“…후원 감사합니다.”
「‘켄이야말로유일신’ 님이 ‘10,000원’ 투척!
오빠 왜 이름 안 불러줘요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세상목소리켄’ 님이 3개월 구독했습니다!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안 불러?」
「‘켄의가운데다리’ 님이 2개월 구독했습니다!
우리가 부끄러워?! 우리 닉네임이 부끄러운 거야?!!」
─이름비on!
─ㅋㅋㅋㅋㅋㅋㅋ
“…다음부터 말 함부로 하면 안 되겠네요. 구독과 후원 감사합니다.”
이런 미친 시청자들. 은우는 현실이었다면 귀와 목덜미가 붉어졌을 창피함을 느끼며 지하 감옥을 빠져나갔다.
─유료 구독을 받고 감사하단 말로 그치는 스트리머가 있다?! 뿌슝빠슝뿌슝
─ㅋㅋㅋㅋㅋㅋ켄 부끄럼 타는 거 넘 귀엽네ㅋㅋ
낡은 성채가 보였다.
“흐흐흐흑.”
《가한의 성채》. 위에 그 글자가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은우는 그가 나온 입구를 비롯해 주변을 찬찬히 살폈다. 인트로 영상에서 한 번 나왔지만, 만일을 대비해 확인할 필요가 있다.
“흐흐흐흑.”
지하 감옥이라 말하지만, 실상 지하가 아니라 탑 전체가 감옥이었다. 지하 감옥이 있는 탑은 모든 성과 동떨어져서 존재하고, 본성은 성벽을 통해 지하 감옥과 분리되어 있다.
3층 정도에 위치한 입구는 사다리로 지상과 오갈 수 있었다.
“흐흐흐흑.”
─저 울음소리 따라가야함
─돌아가면 사다리 있어요
─스포충 미쳤나 그걸 왜 말함
안 그래도 신경 쓰여서 울음소리를 따라갈 예정이었지만…….
은우는 뒷목을 쓸었다. 앞선 방송 때 있었던 일들이 또 벌어지고 있다.
훈수 내지 스포. 아직까진 애교에 불과하지만, 계속 내버려 두면 그 수위가 짙어질 것이다.
아임휴먼에서야 히든 루트를 타는 바람에 그 기세가 한풀 꺾였으나… 검은기사에서도 그런 요행을 바랄 순 없다.
“정보는 감사합니다만, 제가 물어봤을 때만 말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는 다른 스트리머들이 그러듯 정석적인 말을 전했다. 채팅창에 곧바로 반응이 일어났다.
─ㅇㅈ 스트리머가 알아서 하겠지 왜 참견질임
─스포는 밴이 국룰
─솔직히 켄이 헤매도 어지간한 스트리머보다 빠르게 전진할 듯 ㅇㅈ?
─ㅋㅋㅋㅋㅋㅋㅋ이거 맞따
─정 필요하면 물어보겠지ㅡㅡ
─세계최강킹갓제너럴 켄한테는 훈수 필요 없음
이미 이런 문제에 질릴 대로 질린 사람들은 은우의 태도에 호응을 보냈다. 물론 이래도 할 사람은 계속할 것이다. 놀릴 사람은 계속 은우를 놀리듯이.
하지만 그건 스트리머 일을 하기로 한 이상 감수해야 하는 일이다.
은우는 어깨를 으쓱이곤 나무 발판을 밟고 탑을 반 바퀴 돌았다. 올라가는 사다리가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