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한 게임을 진득이 오래 한 사람들은 스스로에게 페널티를 부여하여 게임을 즐기곤 한다.
난이도를 최상으로 올린다거나, 아이템을 구매하지 않고 클리어하거나, 강화하지 않거나, 스킬을 적게 쓰거나, 피격당하지 않는 걸 목표로 하거나, 특정 기술을 쓰지 않거나 하는 등의.
박기철은 그런 고인물의 특성을 게임 첫 시도 만에 선보이는 이를 목격했다.
▣ 003. 긁지 않은 대박 복권
‘별의 기사와 안개 숲’은 나온 지 좀 된 게임이다. 하여 숙련자가 꽤 많은 편인데, 그런 이들도 쉽사리 해내지 못하는 게 있다. 공중 전투다.
그러나 오늘부로 예외가 생겼다.
서걱!
은우는 벽을 박차고 뛰어올라 검을 휘둘렀다. 검은 오오라를 흘리는 곤충이 검에 베였다.
은우의 몸이 곤충을 지나치고, 그는 공중을 한 번 밟아 몸을 틀었다. 운석을 모아 구매해야 하는 삼단 점프와 달리, 진행하면 반드시 얻게 되는 이단 점프다.
몸을 틀어 뜀으로써 비실거리는 곤충을 발판 삼을 수 있게 되었다. 그의 발이 곤충을 콱 밀어냈다. 반동으로 몸이 더 떠올랐다.
그는 그 상태에서 검을 아래로 휘저었다. 반경이 늘어난 검이 곤충을 반 갈랐다.
은우가 벽에 달라붙은 순간 곤충이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죽음을 확신했기에 뒤돌아보지도 않고 벽을 탔다. 인간의 손과 달리 동물의 손에 더 가까운 이것은 얼마든지 벽 타기가 가능했다.
탁.
벽을 기어오른 끝에 동굴 상층에 다다랐다. 그는 손에 힘을 주어 몸을 끌어 올렸다.
몸이 떠오른 순간, 그 발이 휙 돌아가며 바로 앞에 있던 괴물을 타격했다. 몸을 끌어 올렸던 손은 어느새 대지를 짚고 몸을 지탱했다.
연속으로 두 번 타격. 괴물이 밀려나면 발을 땅에 붙이고 상체를 일으킨다. 그 후에는 팔을 휘두르며 검을 소환, 그대로 괴물을 가르면 되었다.
서걱!
너무 쉽다. 은우는 괴물을 처리한 후 새로 얻은 능력인 올가미를 썼다. 빛으로 이뤄진 밧줄을 생성해 사물에 걸어 당기거나 몸을 역으로 보내는 기술이다.
천장 종유석에 감긴 올가미가 줄어들며 몸을 끌어올렸다. 그 상태에서 적절히 올가미를 캔슬한 그는 그대로 동굴 내부를 날았다.
지켜보는 사람 입장에선 은우가 올라오자마자 괴물을 처리하고 올가미를 쓴 것처럼 보일 테다.
뾱!
숨어 있던 곤충 형태의 괴물이 달려들었다. 은우는 기본 스킬 중 하나인 ‘가속’을 사용했다. 그의 몸이 앞으로 후욱 당겨졌다.
그 상태에서 올가미가 다시 발동했다. 은우는 몸을 앞으로 당겨 이동했다. 대지가 멀쩡히 있건만, 처음 한 번을 제외하곤 밟지 않는 진행이었다.
그는 폭발을 일으키는 슬라임을 피해 검을 휘둘렀다. 기습하려던 괴물이 밀려났다.
지금 보이는 작은 굴을 통해 위층으로 가기만 하면 목적지이니, 그는 괴물을 끝까지 상대하지 않고 올가미로 몸을 빼냈다.
벽에 몸이 부딪치기 전 몸을 돌려 박차면 바로 위층 땅을 밟을 수 있다. 이제 지상이다.
이걸로 동굴 파트는 끝. 은우는 시간을 확인했다. 딱히 스피드 런을 하거나 공략을 본 것도 아닌데 2시간 만에 지역 세 개를 클리어했다. 너무 흥이 난 나머지 진심을 다한 탓이다.
이리저리 쏘다니는 재미가 쏠쏠했건만, 이렇게 플레이하다간 금방 끝날 것 같다. 조금 아쉬움이 남는다.
“전체 중에서 얼마나 남았습니까?”
그래도 좀 남았으려나? 이 게임은 얼마지? 집에 캡슐이 없는데 캡슐도 새로 사야 하나.
은우는 고민하며 물었다. 물어보면 이것저것 대답해 주던─대체로 게임 내용보단 다른 걸 물었다─박기철이 조용했다.
“팀장님?”
다시 불러 보았지만, 답은 없었다.
자리를 비웠나 보다. 은우가 포기하고 다시 진행하려던 찰나 채팅 창이 갱신됐다.
─네, 네? 부르셨나요?
“아, 별거 아닙니다. 그냥 전체 스토리 중 얼마 남았나 싶어서요.”
─전체 스토리 중에서요? 지금 사막이랑 동굴 파트 깨신 상황이죠? 그럼 한 절반쯤 온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절반밖에 안 남았구나. 많이 안타까웠으나, 은우는 그 정도로 만족하기로 했다. 꿈은 아쉬울 때 깨어나기에 꿈인 법이다.
“……?”
그 순간 몸의 지배권이 사라졌다. 이벤트 신이다.
끼아아아아아!
여인의 샤우팅 같기도 하고 사내의 비명 같기도 한 소음이 울려 퍼졌다. 그의 육체가 서둘러 나무 뭉치로 들어갔다. 속이 비어 껍질만 남은 나무다.
이 세상은 나무도, 동물도 모든 게 큼직큼직해서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쿠웅.
새인지 용인지 모호한 생물이 지상에 내려앉았다. 그는 나무껍질에 난 구멍을 통해 그것을 지켜보았다.
〚그는 깨달았다. 저것이야말로 별들의 천적, ‘어둠’이라는걸. 그가 추락한 이유가 저 ‘어둠’ 때문이었음을.〛
내레이션이 설명을 토해 냈다.
〚아직 그는 저것을 상대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 그는 피해서 가기로 했다.〛
설명과 함께 미션 내지 돌파 방법도 알려 주었다. 은우의 눈이 깊어졌다.
저거, 아예 못 잡나?
『게임을 저장했습니다!』
마침 저장도 해 주었다. 이 정도면 대놓고 도전해 보라는 의미처럼 느껴진다.
놀랍게도 은우의 플레이는 노 히트 스피드 런일지언정 노 데스는 아니었다. 몬스터에게 피격되진 않았는데 실험 정신을 발휘하다 몇 번 죽은 탓이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은우는 어둠을 보았다. 어느새 육체 지배권은 도로 돌아와 있다.
호승심이 부글부글 끓었다. 전생의 그를 평생토록 전장에 가둬 버린 천성이다.
“아예 못 잡는 것만 아니면 좋겠는데.”
시스템적으로 막혀 있는 게 아니라면 도전해 보고 싶다. 한 번 죽으면 끝인 현실도 아니고 게임인데, 이 정도는 괜찮지 않겠나.
오랫동안 눌러 죽이고 있던 본능이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좀 더 싸우고 싶다. 좀 더 화려하게, 위험하게, 한계까지.
절실하게 살고 싶어질 정도로.
은우는 입술을 삐뚜름하게 늘이며 검을 들었다. 채팅 창이 한 칸 올라갔다.
─어, 은우 씨? 설마, 저거 잡으시게요?
“네.”
─저거 지금 잡는 거 아닌데요??
“시스템적으로 막혀 있는지만 확인해 보겠습니다.”
그는 검을 쥐고 나무둥치에서 몸을 내밀었다.
둥둥둥둥.
이질적이면서도 자연스러운 BGM이 울려 퍼졌다.
학습된 경험으로 은우는 갑작스러운 BGM의 의미를 찾았다.
그는 다시 나무둥치 안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한 번 시작된 음악은 끊기지 않았다.
둥둥둥, 쿵!
단조로운 템포가 변한 순간 ‘어둠’이 고개를 돌려 그가 있는 곳을 보았다. 나무둥치가 엄폐물이 되어 은우를 가려 주었다. 곧 ‘어둠’이 고개를 돌렸다.
아하, 이런 구조로군.
은우는 바로 움직였다.
둥둥둥.
음악이 이어졌다. 그의 몸은 어둠에서 멀어지는 쪽이 아니라 가까워지는 쪽으로 향한다.
─이렇게 보니 저도 궁금합니다. 지금 잡으면 세계 최초입니다.
앞선 사태로 은우의 실험 정신을 알게 된 박기철은 그를 막지 않았다. 오히려 즐거워했다. 제법 성향이 일치하는 사람이었다.
은우는 바닥을 굴러 엄폐물 뒤로 숨었다. ‘어둠’이 그가 있는 곳을 주시하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움직일 시간이다.
“재밌네요.”
이런 마음을 그간 어떻게 참았던 걸까. 은우는 ‘어둠’을 향해 나아가며 혀로 아랫입술을 핥았다.
자각한 이후 그를 둘러싼 환경이 공부를 강요하긴 했다. 부모님이 눈치를 준 건 아니지만, 다니던 학교 자체가 그런 분위기였다.
고등학생은 공부해야 한다는 가치관이 여전히 사회에 팽배해 있기도 하고.
싸움이 법에 어긋난다는 것과 그의 본능이 상대를 죽이려 든다는 것도 문제였다.
규칙으로 가득한 현대 스포츠는 은우의 취향도, 미래에도 적합하지 않았다. 만약 강행했다면 은우는 지금 감옥에 있을지도 모른다.
차라리 태어났을 때부터 전생을 기억했다면 상황은 나았을까. 중3 후반 때 떠올린 현실은 그 가정마저도 앗아갔다.
날린 2년과 성적은 막 현대에 적응한 은우에게 큰 압박이었다. 전생을 떠올리기 전에도 강박적으로 공부에 매달리던 것 역시 그를 짓눌렀다. 그가 지금껏 공부에 전념한 결정적인 이유였다.
콰득.
은우가 있는 자리 바로 위를 ‘어둠’이 발톱으로 짓눌렀다. 그는 검을 고쳐 쥐었다.
그런데 그는 공부보다는 이런 스릴이 더 좋았다. 죽음을 걸고 아슬아슬하게 벌이는 승부가, 자신을 한계로 몰아붙여 그 벽을 부수는 것이.
이런 전투들이야말로 그가 살아가는 방식이자 그의 삶 그 자체였다. 날카로운 송곳니가 히죽 웃었다.
서걱!
빛의 검이 ‘어둠’의 발을 때렸다. ‘어둠’의 체력 바가 떴다. ‘-1’이라는 표기도 잠깐 시야에 스쳤다가 그대로 사라졌다.
끼에에에에!
‘어둠’이 날아오르고, 은우는 그 발에 매달렸다. 공격이 먹힌다. 체력이 닳는다.
잡을 수 있다.
그는 지체 없이 검을 다시 휘둘렀다. ‘-1’이란 글자가 예닐곱 번 떠오르고 강풍이 일었다. 은우의 몸이 ‘어둠’에게서 강제로 떼어진 채 추락을 시작했다.
끼아아아아아아!
순식간에 멀어진 ‘어둠’이 다시 덤벼들었다. 데바뱀의 야수화 흡혈귀의 돌진보다 수 배는 더 빠르다. 일반인은 절대 반응할 수 없다.
하지만 은우는 범인에 속하지 않았다. 비록 지금은 그를 받쳐 줄 기(氣)가 없지만, 그것의 빈자리는 경험으로 메울 것이니.
그의 검은 눈동자가 시각을 넘어 다섯 개의 감각과 공유했다.
저것보다 빠른 괴수를 얼마나 많이 보았나. 소닉붐을 일으키며 지대를 초토화시키던 괴수가 저것보다 느렸나.
자신보다 빠른 것을 상대할 때 중요한 것은 예측. 상대가 어디서 올지, 어떻게 올지, 언제 올지 맞추지 못하면 죽는다. 그러니 죽기 싫다면 세상 전부를 장악할 것처럼 파악하고 추론해서 예지에 가까운 추측을 내야 한다.
끼이이이이!
그래야만 피할 수 있다.
은우는 아래로 점프 및 가속을 했고, 간발의 차로 ‘어둠’의 비늘과 같은 깃이 그를 스쳐 지나갔다.
즐거워. 공부할 땐 물속에 빠져 사는 기분이었는데, 이 속에선 생생히 삶을 누리는 것만 같다.
은우는 희미하게 웃었다. 어느새 발동한 올가미가 ‘어둠’의 발에 묶였다.
그의 몸이 올가미에 의지해 ‘어둠’을 따라 비행했다. 그러다 방향이 바뀔 때, 그는 ‘어둠’의 몸통에 안착했다.
검이 깃 사이를 비집고 용도, 새도 아닌 것을 찔렀다.
강풍이 다시 일어 그를 떼어 냈다. 은우는 지상으로 떨어지는 순간에도 ‘어둠’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저것이 날아가는 방향, 회선하는 순간 그리고 돌진을 위해 날개를 접는 때 불어오는 바람.
그 모든 것을 확인했을 때 그는 허공을 박차고 가속했다. ‘어둠’이 다가왔을 때 올가미를 던지면 너무 늦는다. 올가미는 가속과 동시에 뒤를 향해 던져야 한다.
이번에도 정확히 ‘어둠’의 몸에 올가미가 묶였다.
패턴이 너무 쉽잖아. 은우는 칼을 또 한 번 박았다. 강풍에 밀려난 몸을 바람이 휘감고 중력이 붙잡았으나, 무섭진 않았다. 바닥에 형편없이 처박힐 일이 없는데 왜 겁을 먹겠나.
은우의 몸이 이번엔 위쪽을 향해 날아올랐다.
─이, 이거 가능한 겁니까?
“조금 오래 걸리긴 하겠네요.”
─아니, 대답까지…….
“패턴이 너무 쉬워서.”
패턴은 너무 쉬운데, 1씩 다는 게 조금 귀찮다. 피 통도 커 보이는데.
은우는 눈을 살짝 찌푸렸다가 ‘어둠’의 몸에 매달려 칼을 휘둘렀다.
이럴 줄 알았다면 대미지 상승 템을 들고 올 걸 그랬다. 끝의 끝까지 한 대도 안 맞을 자신이 있지만, 오히려 있기에 이 반복 작업이 귀찮아진 것이다.
뒤늦은 아쉬움이었다.
그래도 시작이 있다면 끝 또한 존재하는 법. 장장 한 시간여에 걸쳐 ‘어둠’의 체력 바가 바닥을 보였다.
은우는 이 게임에 스태미나가 없는 걸 다행으로 여겼다.
─드디어, 마지막!
푸욱!
박기철의 채팅이 올라옴과 동시에 검이 ‘어둠’의 몸에 박혔다. 체력 바가 부서지며 ‘어둠’이 낙하했다.
이러다 깔리면 죽는다. 은우는 마지막이라고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정신적인 피곤함은 반복 작업으로 인한 지루함이 다다.
그는 여전히 맑은 눈동자로 타이밍을 살피다가 그대로 뛰어내렸다.
올가미로 ‘어둠’을 한 번 잡고 추락 속도를 낮춘다. 물론 저 몸체에 붙었다간 지상에 충돌했을 때 죽을 확률이 있으므로 올가미는 바로 캔슬해야 한다.
‘어둠’과 다시 거리가 벌어졌을 때 다시 올가미. 캔슬.
그렇게 몸을 지상과 가까이 한 그는 올가미 쓰기를 그만두었다. ‘어둠’이 대지와 충돌한 시점이었다.
콰아아앙.
거대한 몸체가 지상을 휩쓸고, 대지가 한차례 떨렸다. 은우는 그런 땅 위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바닥과 마주치기 직전 공중 점프를 한 번 함으로써 속도를 더 낮췄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올가미로 그 근처에서 가장 높은 동산에 올랐다. 수십 미터 떨어진 곳에 ‘어둠’이 몸을 뉘고 있었다.
시체가 사라지지 않은 건 좀 의외다.
“아, 살아 있어서 안 사라진 건가.”
─네???
잘 보면 몸이 후드득 떨리고 있다. 정상적인 생명체의 반응이라기보단 조금 이질적인 떨림이다. 마치… 죽은 것에 전기 충격을 넣는 것처럼 보인다.
─아, 그렇군요. 여기서 잡으면 안 되는 보스라 버그가 걸린 것 같네요.
“그러게요.”
은우는 그러면서 제 시야 한쪽을 힐끗 보았다. 채팅 창 외에 다른 창이 한 종류 더 떠올라 있다.
『게임을 저장했습니다!』
『도전 과제를 달성함! -어둠의 침몰』
『도전 과제를 달성함! -격의 차이』
─이야, 그래도 잡은 걸로 취급은 되나 봅니다. 둘 다 ‘어둠’을 잡으면 뜨는 업적인데.
정확히는 전자가 잡으면 뜨는 것이고, 후자는 ‘어둠’전을 노 히트로 클리어해야 뜨는 것이다. 물론 은우는 둘 다 신경 쓰지 않았다.
“더 진행할까요?”
─아뇨, 아뇨. 버그까지 걸린 마당에 더 진행했다간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요. 은우 씨도 힘드실 테고, 그만하셔도 됩니다.
딱히 힘들진 않지만, 최종 보스인 ‘어둠’을 잡아 버린 상황이다. 은우는 순순히 로그아웃했다.
게임이 종료되고, 세상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 * *
“방송합시다.”
나가자마자 건네진 말이었다. 이 와중에 물잔을 챙겨 주는 게 조금 웃겼다.
은우는 먼저 물을 마셨다. 목이 마른 건 아닌데, 기철이 흥분을 가라앉힐 시간이 필요한 듯 보였다.
“은우 씨는 무조건 됩니다. 합시다.”
그럼에도 진정하지 못하는 건 글쎄. 은우는 뒷목을 쓸었다.
“절 설득할 근거는 찾으셨습니까?”
“찾고말고요! 은우 씨가 방금 하신 일이 명백한 증거입니다.”
기철이 자자, 소리를 내며 자리로 안내했다. 3인용 소파라 좌우로는 넓었지만, 높이가 낮았다. 은우는 카페에서처럼 다리를 옆으로 쭉 밀었다.
“음료는 뭐로 드릴까요? 커피? 주스? 차?”
“아, 그냥 물이면 됩니다.”
금방 물잔이 내려졌다. 제대로 된 대화의 시작이었다.
“먼저 은우 씨, ‘어둠’을 상대하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습니까?”
“…‘패턴이 쉽다’랑 ‘귀찮다’ 정도만 생각했습니다.”
“어렵다는 생각은 하지도 않으셨군요?”
“아무래도 그렇네요.”
기철이 손을 짝 부딪쳤다.
“스트리머나 프로게이머 중 어려움 모드의 어둠을 1트에 잡은 사람은 손에 꼽힐 만큼 적습니다. 일반인을 포함한다면 수가 훨씬 늘 수 있겠습니다만, 알 방도가 없으니 이쪽은 무시하죠.”
손을 비비는 꼴이 꼭 시동 걸리는 엔진 같다.
“자, 그러면 방금 그 구간에서 한 번이라도 ‘어둠’의 공격을 피한 사람이 있었느냐? 없습니다. 단 한 명도.”
“피하기 어렵진 않았는데요.”
“하하, 그러셨습니까? 그런데 정말로 없습니다. ‘어둠’에게 걸리지 않고 한 번에 깬 사람은 있을지언정 걸렸을 때 죽지 않은, 아니 그 공격을 한 번이라도 피했던 사람은 없습니다.”
은우는 조금 놀랐다. 정확히는 알진 못해도 이 게임을 플레이한 사람이 적지는 않을 거다. 그런데도 공격 한 번을 피해 낸 사람이 없다?
이 세계 사람들은 정말이지 나약해 빠졌다.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외모나 목소리의 미추는 더 이상 시선을 끌지 못합니다. 후천적으로 얼마든지 만들 수 있는 종류니까요. 하지만 재능도 그럴까요?”
그사이 기철이 연예인에 대한 예시를 들었다.
좋은 비유였다. 2, 30년 전만 해도 외형이 큰 잣대였던 그들은 현재 각자의 재능만으로 살아남고 있으니까. 뛰어난 연기력이나 훌륭한 작곡, 작사, 재치 있는 언변 등의 재능 말이다.
“운동선수는 또 어떻습니까? 몸은 기계를 통해 얼마든지 만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걸 잘 사용하는지는 별개의 문제죠. 일반인이 운동선수의 몸을 가진다고 잘해 낼 수 있겠습니까?”
거기까지 말한 기철이 웃으며 덧붙였다. “기계로 몸을 만드는 순간 선수 생활은 물 건너간 거니 잘 쓰면 잘 쓰는 대로 문제겠습니다만.” 나름의 유머 코드였다.
“이처럼 재능이 모든 걸 결정하는 시대가 됐습니다. 그리고 방금의 게임 플레이는 은우 씨의 실력을 증명하죠. 그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유일한 실력이란 것을요.”
기철이 혀를 매끄럽게 굴렸다. 저기에 넘어갈 정도로 귀가 얇진 않으나, 확실히 기분은 좋았다.
“유일. 그 단어는 언제나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킵니다. 그리고 매혹하죠. 단 하나뿐이니까요.”
동시에 납득되었다. 설득이 아니라 납득 말이다.
“은우 씨 정도면 말을 적게 하셔도 먹힐 겁니다. 사람들 앞에서 떠드시는 게 힘들다면 아예 안 하셔도 됩니다. 은우 씨는 그래도 됩니다.”
“과찬이시네요.”
“과찬이라뇨. 절대 아닙니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다이아박스는 검증된 인재만을 데려옵니다. 이미 이름을 알려 데려올 가치를 증명해 낸 인재들만 말이죠. 자체적으로 키우는 이들은 퍼텐셜이 그만큼 잠재되어 있는 이들밖에 없습니다.”
“전 두 쪽 다 아닌 것 같습니다만.”
“아니요, 은우 씨는 제가 지금껏 발굴해 왔던 그 어떤 사람보다도 뛰어납니다. 아직 긁지 않은 대박 복권인 셈이죠. 이렇게 애원해서라도 붙잡아야만 하는 복권이요.”
박기철이 깍지를 꼈다. 그건 꼭 기도하는 자세처럼 보였다.
“스트리머가 꺼려지신다면 프로 게이머는 어떠십니까? 다이아박스는 자체 구단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마침 은우 씨라면 어떤 게임을 잡으셔도 잘하실 테니까요. 돈이라면 얼마든지 벌 수 있으실 겁니다.”
선택지가 또 한 번 갈라졌다. 스트리머 또는 프로 게이머로.
고민할 시간을 주고 싶은지 기철은 입을 다물고 눈만 부릅뜬 채다. 과연, 말할 때와 말하지 말아야 할 때를 잘 안다.
자, 그럼 어쩔까. 은우는 잡고 있는 물잔을 톡톡 두드렸다.
일단 그의 재능이 유니크하단 건 알겠다. 이 정도면 형편없이 실패할 가능성은 낮다고 봐도 되겠지.
하지만 너무 뜻밖의 일인 것도 사실이다. 박기철과의 만남을 위해서 어느 정도 조사해 왔을 뿐, 그전까진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직업 아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직 잘 모르고 경험해 본 적도 없다. 새로운 도전은 언제나 즐겁지만, 이건 인생이 걸린 일이다. 함부로 도전할 만한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얼굴 까기 싫다. 두 직업 다 팬들을 거느릴 게 분명한데, 그러면 분명 얼굴에 대한 평가도 나올 거다. 아주 평이 안 좋겠지.
은우의 표정이 살짝 안 좋아졌다.
무슨 의미로 생각했는지 그걸 본 박기철이 다급히 입을 열었다.
“만약 은우 씨께서 번듯한 직장을 가지고 계시거나 갓 성인이 되신 게 아니었다면 저도 이렇게 열성적으로 제안드리진 못했을 겁니다.”
생각지도 못한 발언에 은우는 뒷목을 쓸었다. 뭔 말을 하려는 거지?
“이 분야는 이미 꽉 들어찬 레드 오션이죠. 객관적으로 봤을 때 성공 확률이 낮다, 이겁니다. 은우 씨 입장에선 실력만 보고 함부로 뛰어드시기 어려울 테죠. 특히 안정적인 직장이 있거나 나이가 많다면요.”
그는 감탄했다. 이 사람, 대놓고 들이받는 게 아니라 이것저것 감안하고 들이받는 것이었다.
“아, 물론 저는 절대로 불확실하다거나 도박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은우 씨는 절대적으로 성공합니다.”
목이 타는지 기철이 아랫입술을 핥았다.
“각설하고, 지금 은우 씨는 하는 일도 없으시고 나이는 갓 성인이 된 채죠. 비꼬는 게 아닙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도전하기 딱 좋은 여건이란 겁니다.”
“도전, 입니까.”
“네. 도전이요.”
은우는 숨을 내뱉었다. 확실히 도전하기 좋은 시점인 건 맞다. 해 보고 안 되면 다시 공부 쪽으로 틀어도 되니까.
하물며 두 방송 다 게임을 하는(할 수 있는) 직업이다. 막연한 목표조차 없이 하는 공부보다는 훨씬 나을지도 모른다.
아니, 훨씬 낫다. 적어도 숨이 막히진 않으니까.
뭣보다 이 직업을 택하지 않아도 그는 게임을 할 거다. 몰랐다면 모를까, 알아 버린 이상 안 하고는 못 배긴다. 그는 전장이, 싸움이 너무 그리웠다.
“더구나 제 앞에서도 쉽게 게임을 하시는 걸 보면 사람의 시선은 잘 신경 안 쓰시는 것 같더군요. 사람 앞에 서는 걸 겁내지 않고 재능은 출중. 거기에 다이아박스는 최선을 다해 지원해 드릴 생각이 있습니다. 이만큼 좋은 기회가 어딨겠습니까?”
은우는 마음이 기우는 것을 느꼈다.
해 볼까. 어차피 대학을 가더라도 취직이 될진 알 수 없는 노릇인데.
그의 서늘한 눈매가 얕게 누그러졌다.
“…한 게임만 하고 싶진 않습니다.”
“그럼 프로 게이머보단 스트리머 쪽이 낫겠군요.”
“얼굴 공개는 가능하면 하고 싶지 않은데, 그것도 가능할까요?”
“그것도 가능합니다. 캠 공개를 안 하신 인기 스트리머도 계시니까요. 전례가 있는 이상 어렵지 않을 겁니다.”
“그럼 묻겠습니다.”
“무엇이든 물어보시죠.”
기철의 열의는 하늘을 뚫을 기세다. 아니, 이미 뚫었는지도 모른다.
은우의 입가에 미지근한 미소가 어렸다.
“그 레드 오션을 비집고 제게 확신을 장담하시는 비전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박기철이 웃음꽃을 피웠다.
“당연히 설명드려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