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자도 방송할 수 있습니다-2화 (2/233)

2화

흡혈귀는 매칭 대기실에서 보이지 않기에, 흡혈귀의 닉네임은 판이 끝난 후에만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지금, 희수는 입을 닫기가 힘들었다. 개인 점수 창과 랭크 창을 치우면 나오는 참가자 점수 비교 판 때문이었다.

그곳에는 흡혈귀의 닉네임, 스트리머 검은양이 곱게 적혀 있다.

“진짜 검은양 님이었어?!”

“검은양?”

아까 그 인방 얘긴가. 은우는 알아서 이해하고 넘어가려 했다. 그걸 그냥 넘어가지 못한 건 희수였다.

희수의 손이 은우의 옷자락을 잡았다. 참고로 두 사람 다 외형 변경을 안 한지라 현실 모습에서 옷차림만 바뀐 채다. 여전히 50cm 키 차이가 존재한단 이야기다.

은우는 어쩔 수 없이 몸을 낮췄다. 엉거주춤한 자세였다.

“왜 또.”

“미친놈아! 네가 지금 데바뱀 고인물 스트리머를 죽였다고! 완전 오져!”

“방금 그 흡혈귀?”

“그래!”

그렇게 어려운 상대는 아니던 것 같은데. 심리전이나 게임 룰에 익숙해 보이긴 했지만, 움직임이 워낙 뻔해서.

은우는 호들갑 떠는 희수를 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기분 풀린 거 같으니 됐다. 그도 오랜만에 스릴감─별로 무섭진 않았지만─을 누려서 즐거웠고.

“그래서, 다음 판?”

“당근 가야지.”

DEAD BY VAMPIRE에 랭크 대변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 002. 게임 한 번만 부탁드립니다

희수가 문자를 보내 온 건 다음 날 밤이었다. 문자에 적힌 링크에는 유어튜브 영상 하나가 실려 있다.

[한 대만, 딱 한 대만 맞아라!]

삼인칭 시점의 영상은 데바뱀인 듯했다. 우측 상단에서 당시 채팅 내용이 주르륵 올라갔다.

[뭐, 뭐야! 뭔데! 잠깐, 억!]

“…뭐야 이거.”

화면 속에서 누군가가 흡혈귀와 대치했다.

초상권 침해 방지 설정을 켜 뒀는지 녹화 영상에는 몸뚱이와 얼굴이 새까맸다. 아직도 연재되고 있는 장수 만화, ‘명탐정 코X’에서 볼 수 있는 범인 실루엣이다.

이걸 왜 보라고 한 거지? 은우는 의아함을 느끼며 계속 지켜보았다. 화면 속 검은 실루엣이 흡혈귀의 팔을 너덜너덜하게 만든 후, 잽싸게 멱을 땄다.

그제야 그는 저 검은 실루엣이 자신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다른 시점으로 봐서 바로 못 알아봤다.

그는 영상을 되돌렸다. 자신인 걸 알고 보니 기분이 색달랐다. 이렇게 보니 움직임 하나하나가 정말 어색하다.

당시엔 추억에 젖고 희열에 휘감겨 별생각 없었지만, 이제 보니 허점투성이다. 신체 능력이 하락했다는 건 둘째 치더라도 감각이 녹슨 모양이다. 은우는 혀를 찼다.

곧 흡혈귀가 죽고, 화면에 점수 창이 떴다. 스트리머의 목소리가 허망하게 울려 퍼졌다.

[방금 뭐였어? 나 진짜 목 따였어? 삼인칭으로 보던 늑대들, 빨리 말해 봐.]

스트리머가 묻자마자 채팅 창 올라가는 속도가 엄청나게 빨라졌다.

─레전드다 진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리얼 목 따임ㅋㅋㅋㅋㅋ

─와 이걸ㅋㅋㅋㅋ이걸 생존마가ㅋㅋㅋㅋㅋ

─뒤로 훅하고 가서 등타고 오르더니 그대로 목 따 버림ㅋㅋㅋㅋㅋ

─유튭각 제대로 떴네

─처음엔 그냥 겜 던졌나 했더니 놀리려고 온 거였누

─상대 피지컬 진짜 개미쳤다ㅋㅋㅋㅋㅋ

─도망 다니면서 이길 수 있는데 왜 굳이 기어 나왔나 했더니ㅋㅋㅋㅋㅋ

─아ㅋㅋㅋㅋ얼굴 궁금하다ㅋㅋㅋ

은우는 채팅 창을 적당히 읽어 보았다. 대부분 그의 실력에 찬사를 보내고 있었다.

[얼마나 고인물이신 거야. 초보자 옷 입고 있을 때부터 예상은 했지만, 진짜 썩었다. 응? 아, 못 봤어? 초상권 방지 설정해 놨나 보네.]

고인물 아닌데. 저거 첫판이었는데. 딴지 걸어 봤자 얻을 것도 없긴 하지만.

그가 실속 없는 생각을 할 무렵, 스트리머가 이번 판 점수 창을 닫았다. 이어서 랭크 점수 판이 떠올랐다.

[얘들아.]

고랭크가 저랭크로 뚝 떨어졌다.

[나 랭크 겁나 까였는데?]

영상에 설명이 짤막하게 떠올랐다. ‘DEAD BY VAMPIRE’는 상대방 랭킹에 따라 플레이어의 랭킹 변화 정도가 달라지는 시스템을 도입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은우도 몰랐던 사실이었다.

[이 정도로 랭킹 까이려면 활약한 사람 중 한 명이 저랭크란 소린데? 게임 점수 판 까 봐. 몇 랭이야. 잠깐, 씁… 30랭? 쟤, 나 죽인 애 아니냐?]

스트리머가 비명 같은 소리를 지르고, 채팅창이 또 한 번 폭발하듯 올라갔다. 자막으로 30랭은 진짜 초보자 아니면 나올 수 없는 랭크라는 설명이 떠올랐다.

영상은 거기서 끝이었다. 아래로 내리면 무수한 댓글이 그의 실력을 찬양 중이다.

『희수> ㅊㅋ 방송 탔네ㅋ』

영상 보는 사이 온 문자였다.

은우는 공부하던 것을 잠시 미루고 침대에 누웠다. 그의 손가락이 전자 노트가 띄운 홀로그램의 위치를 시야 내로 옮겼다.

인정받아서 좋다 해야 할지, 그의 플레이가 박제돼서 이상하다고 해야 할지 복잡 미묘한 기분이다. 그러면 안 되는데 게임을 다시 해 보고 싶기도 했다.

“…초상권 설정해 두길 잘했네.”

멍하니 대답했다. 음성을 인식한 전자 노트가 곧이곧대로 문자를 보내 주었다.

곧 희수의 답장이 화면에 떠올랐다.

『희수> ㅋㅋㅋㅋㅋ아, 아깝네ㅋㅋ알려 주지 말걸ㅋㅋㅋ』

“그럼 얼굴 바꿨지.”

『희수> 진짜 얼굴 드러내는 거 싫어해ㅋㅋㅋㅋ』

『희수> 솔직히 말해봐, 너』

『희수> 저번에 애기가 너 보고 운 것 때문에 그런 거지?』

“아닌데?”

『희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맞네ㅋㅋㅋㅋㅋ』

“아니라고.”

『희수> 맞다구우우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 녀석, 신나서 타자로 치고 있군. 초성을 보내지 못한다는 음성인식의 단점을 떠올리며 은우는 손가락을 움직였다.

『나> ㅗ』

『희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걸 친구라고. 그는 울컥 차오르는 화를 삼키며 창 닫기를 누르려 했다.

『희수> 놀리는 건 여기까지 하고, 게임 한판만 하자. 나랑 말고 다른 사람이랑』

창을 닫기 직전, 손가락이 멈췄다. 앞마디가 굉장히 얄미워서 그냥 꺼 버릴까도 했는데, 그러기엔 뒷말이 걸렸다.

친구라 읽고 원수라 쓰는 이 녀석은 함부로 사람 소개해 주는 유형이 아니다.

“뜬금없네. 누구랑?”

『희수> 내 애인의 언니의 약혼자』

그것참 가까운 사이였다.

『희수> 그게, 오늘 지수랑 저녁 먹는데 어쩌다 보니 지수 언니랑 그 애인분도 자리에 꼈단 말임?』

『희수> 근데 지수가 그분을 별로 안 좋아해ㅋ 너보다 그 사람 더 싫어할 정도면 이해 가지?』

은우는 어쩌다 마주치면 그를 견제하려 드는 희수 애인을 떠올렸다. 그가 희수를 좋아할까 봐─우웨엑─그러는 거라는데, 그것보다 더 미움받는다니. 그건 그것대로 대단하다.

『희수> 문제는 그 전에 내가 걔한테 오늘 검은양 바른 걸 자랑햇단 말임ㅋ』

질투하는 모습 보려고 일부러 말했네, 이거. 은우는 친구의 취향에 한숨 쉬며 뒷 내용을 잠자코 들었다. 사실 이쯤 되면 안 들어도 예상이 갔다.

『희수> 그분이 겜 잘 못 하는지 네 영상 가지고 이거 못하죠? 이런 거 못하죠? 이러는데 ㅈㄴ 귀엽더라』

“애인 자랑 꺼라.”

『희수> 차가운 새끼. 하여간 지수는 그분 놀리려 한 거였는데ㅋㅋㅋㅋㅋㅋ』

“반대 효과가 났구만.”

『희수> 반대 효과 난 수준이 아니라 완전 좋아하셨음. 그 자리에서 다섯 번은 돌려 보더라? 지수가 오늘 처음 한 애라고 추가 도발 넣었을 땐 아는 사이냐고 지수 털었고ㅋㅋㅋ』

그렇군. 그래서 이 사태가 된 건가. 그는 책상 위 콜라를 집어 들었다.

『희수> 보다 못해서 내가 내 친구라고 말하니까 나한테 소개해 달라고 애걸복걸하시더라』

칙, 소리가 나며 뚜껑이 따였다. 너무 갑작스러운데. 은우는 콜라를 꿀꺽꿀꺽 삼켰다.

『희수> 나쁜 일은 아닌 것 같은데 한번 해 봐』

“음.”

그렇다고 거절하자니 희수의 권유가 걸린다. 저 녀석이 제의할 땐 보통 그럴 만한 이득이 걸려 있었으므로. 돈이든 기회든 뭐든 말이다.

『희수> 참고로 그분, 다이아박스 팀장님임. 보기에 너 좀 탐내는 눈치더라』

“연락처 부탁드립니다.”

이번은 기회인 모양이다.

* * *

전화 통화로 간단한 설명과 약속을 잡았다. 이쪽은 백수라서 시간이 남아돌았고, 저쪽은 만남에 열의를 보여서 타협이 쉬웠다.

금세 약속 날이 다가왔다.

“어, 그… 서은우 학생?”

그렇게 만난 박기철은 인상 좋은 인텔리 계열이었다. 안경과 핏 좋은 정장이 유독 그런 느낌을 강하게 남겼다. 저 두 가지를 착용하는 사람이 적은 요즘이라 더욱 그랬다.

“안녕하세요, 서은우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은우는 덤덤히 고개를 숙였다. 경악한 상대의 반응이야 너무 익숙해서 거슬리지도 않았다.

“…와, 키가 엄청 크네. 아차, 박기철이에요. 만나서 반가워요.”

그래도 저 정도면 양반이다. 대부분은 대화 시도는커녕 표정 수습부터 실패하곤 했다.

“사과부터 할게요. 통화할 때 목소리가 너무 좋아서 맘대로 상상한 이미지가 있었거든요. 생각과 달라서 당황해 버렸네요. 미안합니다.”

“괜찮습니다. 제가 무섭게 생긴 건 맞으니까요. 저도 거울 볼 때마다 깜짝깜짝 놀랍니다.”

“무섭게 생기다뇨? 은우 씨, 되게 잘생겼어요. 체격이 커서 놀랐을 뿐이지 완전 연예인감입니다.”

진정한 듯 기철이 당황이나 공포를 완전히 지우고 이야기를 풀어 갔다. 빈말이라도 칭찬을 들으니 기분은 좋았다.

은우의 얼굴이 온화해졌다. 그러자 기철이 조금 움찔거렸다.

…무서움을 이긴 게 아니라 그냥 표정만 담담해진 거였나 보다. 그는 웃음을 도로 제거했다.

“큼, 먼저 많이 당황스러웠을 거라 생각해요. 제가 생각해도 황당무계할 것 같거든요. 솔직히 좀 웃긴 상황인 것도 맞고.”

애인의 동생의 애인의 친구를 만나는 상황이 우습긴 하다. 그 점을 꼬집어 박기철이 넉살 좋게 화문을 열었다.

“그럼에도 실례를 무릅쓰고 만남을 부탁한 건, 은우 씨가 탐나서였어요.”

“제가 말입니까?”

“네.”

그건 뜻밖의 이야기인 동시에, 어느 정도 감이 잡히는 말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MCN(Multi Channel Network) 중 최정상을 달리는 다이아박스의 팀장이 그에게 연락할 리 없다.

문제는 은우가 인터넷 방송을 비롯해 웹 속에서 활동하질 않는단 점이다.

“다이아박스에 대해 혹시 아십니까?”

“유명 인플루언서들이 포진해 있다는 것 정도만 압니다.”

“예, 맞습니다. 인플루언서들, 특히 인터넷 방송 쪽을 관리하고 지원하는 곳이죠. 요즘에 이르러선 발굴도 겸하고 있고요.”

“그럼 더더욱 납득이 잘 가지 않네요. 저는 그런 활동을 일절 하지 않는데요.”

“지금 하지 않는다 해서 앞으로 하지 않으란 법은 없지 않습니까. 저는 은우 씨가 대단한 인터넷 방송인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기철이 씩 웃었다. 안경 속 가는 눈초리가 제법 개구져 보이면서도 만만하진 않았다.

“들어보니까 게임을 안 했다고, 데바뱀이 처음이라고 하던데… 맞나요?”

“네, 뭐.”

“그런데도 상위 랭크 플레이어들을 가지고 노셨고.”

저렇게 들으니 뭔가 대단한 일이라도 한 것 같다. 은우는 주문한 초코라떼를 한 모금 마셨다.

특별한 능력 없이 괴수들을 썰고 다닌 기억 내지 경험이 있다. 그런 주제에 일반인들에게 당해 줄 수 있나.

굳이 티 내진 않겠지만, 이렇게 추켜세워질 일이 아니라 생각한다.

“키보드나 게임기를 통해서 하는 게임은 말이죠, 한 게임을 잘한다고 해서 나머지까지 잘하란 법이 없어요. 조작법이나 시스템이 판이한 경우가 많거든요.”

그사이 박기철이 담담히 설명했다.

“하지만 가상현실 게임은 다릅니다. 시스템이야 물론 다를 수 있지만, 게임 자체는 본인 스스로가 몸 움직이는 걸 바탕으로 한단 말이에요?”

올라가는 입술 끝은 자신감을 담고 있다.

“몸을 움직일 줄만 알면 결국 거기서 거기예요. 취향에 따라 장르가 갈리겠지만 기본적으로 어느 정도 실력이 보증된다 이거죠.”

기철이 손을 움직였다. 시선을 집중시키고 공기를 환기하는 제스처다.

“문제는 몸 쓰는 법을 아는 사람이 드물단 겁니다. 실력파 스트리머들이나 프로게이머들? 잘하죠. 잘하는데, 압도적이느냐 물으면 사실 아니잖아요.”

그거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욕하겠군. 게임을 해 보질 않아서 잘은 모르겠지만.

은우는 잔을 내려 두었다. 그날 이래 잘 싸운다는 사실이 삶에 도움 될 거라곤 생각해 본 적 없는데.

“저는 아는 것처럼 보였습니까?”

“네.”

“과분한 평가네요. 감사합니다. 한데 우연이었다면 어쩌시려고 그리 자신하십니까?”

“4분이 넘게 흡혈귀와 대치하며 한 대도 안 맞으신 분이요? 거기에 그다음 판에서도 활약했다고 전해 들었습니다만……. 역시 아니죠? 우연.”

박기철이 능글맞게 되물었다. 연륜이라고만 치부하기엔 과한 확신이었다.

저런 사람은 보통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보는 눈이 너무 없거나, 보는 눈이 너무 있거나.

그리고 여기서 그가 보내야 할 반응 또한 두 개다. 완전히 회피하거나, 인정하거나.

이쪽 생각이 아예 없다면 회피하는 게 낫겠지. 그렇지만 이왕 다가온 기회를 저버리기 아까운 것은 사실이었다.

거듭해서 말하지만, 은우는 재수생에 백수였다.

거기에 게임, 재밌었지. 은우는 아직도 아른거리는 싸움터의 공기를 떠올렸다. 방향도 모른 채 바다를 표류하던 이가 지평선에 걸쳐진 무언가를 발견한 기분이었다, 그건.

과연 그 끝에 있는 게 천상일지 지옥일지. 다만 확실한 것은, 뜻 없이 표류하는 것보단 나으리란 사실이다.

결정은 빠르고 쉬웠다. 그는 송곳니가 살짝 드러나는 미소를 지었다. 박기철이 찰나간 움찔거렸다.

“아니죠, 우연.”

“역시!”

얼떨결에 다이아 원석을 주운 사람의 눈으로 박기철이 벌떡 일어섰다. 30대면 젊은 게 맞으니 참 제 나이답게 사는 사람이었다.

“근데 말씀하신 인터넷 방송 활동에 큰 메리트를 못 느끼겠습니다.”

은우는 차분히 찬물을 끼얹었다. 진심 반, 유리함을 선점하기 위한 마음 반인 찬물이다.

그러나 박기철은 그마저도 각오하고 있었는지 주저앉으며 대답했다.

“그럴 수 있습니다. 아무래도 갑작스러운 이야기니까요. 방송이라는 게 섣불리 접근할 수 있는 분야도 아니고.”

기철이 가방을 쓰윽 집었다. 목이 마른가. 입술을 핥는 모습이 보였다. 은우는 그 모든 걸 살피며 유리잔을 들었다.

“하지만 은우 씨, 전 은우 씨의 성공을 확신합니다. 은우 씨 정도면 반드시 됩니다.”

기철은 종이를 한 장 꺼냈다. 계약서였다. 오늘 하루 서은우의 6시간을 빌려 게임 하나를 시킬 것이며 절대 다른 일은 시키지 않겠다 등등이 적힌 계약서.

“그러니 은우 씨, 게임 한 번만 부탁드립니다. 제가 은우 씨에게 확신을 전염시킬 수 있도록요.”

중요한 건 6시간 동안 게임 한 번 함으로써 주어지는 돈이 50만 원이란 점이다.

백수가 거절하기엔 너무나도 많은 돈이었다.

* * *

박기철이 고른 게임은 ‘DEAD BY VAMPIRE’가 아닌 ‘별의 기사와 안개 숲’이었다.

몽환적이고 수려한 그래픽, 웅장하고 아름다운 음악과 달리 악몽 같은 난이도로 유명하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채팅창은 어찌, 괜찮으십니까?

“네. 생각보다 방해되진 않네요.”

싱글 게임이기 때문에 기철은 외부에서 관전하기로 했다. 참고로 그들의 현재 위치는 다이아박스의 사옥이었다.

─그럼 게임 목록을 불러 주세요.

은우는 캡슐에 접속하면 나오는 기본형 대기실에서 손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시스템 창이 나오며 이것저것 기능들을 띄웠다. 그중 그가 누른 건 게임 목록이었다.

─거기서 ‘별의 기사와 안개 숲’을 찾아 누르시면 됩니다.

“네.”

서은우는 차분히 해당 게임을 눌렀다. 그 순간 발밑부터 대기실이 부서지며 어둠으로 물들었다.

『난이도를 선택하세요. 쉬움 / 보통 / 어려움』

어둠 속에서 창 하나가 떠올랐다.

─원하시는 대로 고르세요!

은우는 고민했다.

“뭐가 다릅니까?”

─음, 아이템 가격이나 적들의 HP, 적들의 공격력, 속도 같은 게 달라지죠?

“그럼 어려움 모드의 속도는 보통 어느 정돕니까? 데바뱀의 야수화 흡혈귀가 쓰는 돌진보다 빠른가요?”

─그 정돈 아니죠. 몇몇 보스가 순간적으로 그 정도 속도를 낼 수는 있겠습니다만, 일반 몹들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됐다. 은우는 그 이상 고민 않고 어려움을 눌렀다. 야수화 흡혈귀도 느린 마당이다. 그것보다 해당 게임의 어려움 모드 몬스터가 더 느리다는데, 택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리고 세상이 살짝 밝아졌다. 유성우가 쏟아지는 밤하늘이 펼쳐진 덕이다.

그 별들은 마치 새처럼 하늘을 날았다. 그러다 잠깐, 구름에서 튀어나온 무언가가 별들의 한가운데에 있는 것을 낚아챘다. 남은 별들이 깜짝 놀라 그것을 쫓았다.

별의 공격에 그것이 저항하다 움켜쥐고 있던 것을 떨어트렸다. 떨어진 그것은 여러 갈래로 쪼개지며 지상으로 추락했다.

남은 별들이 우왕좌왕했다. 그렇게 새벽이 밝았다.

장면이 바뀌어 별이 떨어진 자리 중 하나. 은우는 몸을 움직일 수 있다는 감각을 받았다. 손가락을 움직이고 발가락을 꼼지락거리자 자신이 웅크리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은우는 몸을 일으켜 제 몸을 확인했다. 소지품이라곤 가벼운 천 옷이 전부다.

특징이랄 게 있다면 머리가 하얗게 변한 것도 모자라 은은히 빛나고 있다는 점과 손에 털이 복실복실하다는 점? 아무래도 수인 캐릭터인 듯하다.

─궁금한 게 있으면 언제든 물어봐 주세요!

채팅창이 갱신되었다. 글쎄. 물어볼 일이 있을까.

은우는 우거진 수림을 보았다. 딱 봐도 이쪽으로 가라는 듯 길이 하나 있다.

그보다 그래픽 참, 동화가 떠오르는 화풍이다. 예쁘다.

“배경이 엄청 예쁘네요.”

─그렇죠? 배경 예쁘기로 엄청 유명한 게임입니다.

길을 벗어나는 건 못하나? 은우는 한 번 시도해 보았다. 양쪽 다 투명한 막으로 막혀 있었다.

조금 아쉽네. 은우는 전혀 아쉽지 않은 표정으로 정해진 길을 따랐다. 물론 그냥 따르기만 하진 않았다.

그는 달리면서 속력을 확인했고, 숨이 차는지를 살폈으며, 뛰었을 때의 점프력 또한 체크했다.

캐릭터의 신체 스펙이 금세 그의 머릿속에 입력되었다.

“데바뱀보다 좋네.”

이 정도면 그래도 재밌게 놀 수 있겠다. 여전히 전생에는 비빌 수 없지만.

〚그는 자신이 왜 여기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절벽을 오르고, 좁은 통나무 다리를 통해 개울을 건넜다. 길이 정해져 있어 미아 될 일은 없지만, 상승한 신체 능력에 맞춰진 길이라 적응하지 못한 이는 제법 어려울 것이다.

〚자신이 누군지도 알지 못했다.〛

은우는 그 모든 곳을 달리면서 통과했다. 넝쿨을 잡고 튀어나온 돌들을 밟으며 뛰어오르면 절벽의 끝이었고, 개울은 점프해서 중간을 한 번 밟고 다시 박차면 건너편이었다.

이미 알고 있는 감각이나, 작금의 현실에선 구사할 수 없는 능력.

그는 유쾌해졌다. 완전하진 못할지언정 몸이 가벼워진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두눈박이 사이에서 살던 외눈박이가 드디어 외눈박이들의 세상으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동시에 후회도 조금 들었다. 이 좋은 걸 여태까지 그는 모르고 살았다 내지는 이걸 알아 버렸으니 게임을 모를 때로 더는 돌아갈 수 없다.

〚유일하게 기억하는 것은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 하나.〛

내레이션이 캐릭터 설명을 해 주었다. 은우는 그것을 기억에 담아 두었다.

그러다 잠깐, 운석 하나가 하얀빛을 품은 채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운석을 만지세요!』

때마침 안내 창이 떠오르며 그가 해야 할 일을 알려 주었다. 은우는 운석을 건드렸다. 운석의 빛이 그의 몸에 흡수되었다.

『게임을 저장했습니다!』

『새로운 능력을 획득했습니다! 별의 검을 소환해 보세요!』

별의 검. 은우의 뇌파를 인식한 게임이 무섭게 기술을 발동시켰다. 그의 손에서 빛이 솟아올랐다.

대충 1m 어림의 빛줄기는 언뜻 보면 검처럼 보이기도 하니.

그는 그것을 빙빙 돌려 보다가 그대로 휘둘렀다. 휘두른 순간 검이 길어지며 리치가 두 배 이상 늘어났다. 사라지는 건 소환 때와 마찬가지로 직접 떠올려야 없어지는 것 같다.

“재밌네.”

그는 몇 번 더 검을 시험해 보았다. 약하게, 적당하게, 강하게, 빠르게, 느리게.

검이 늘어나는 원리와 최대 반경이 금세 파악되었다. 검의 소환 속도와 해제 속도도 외웠다.

무기를 얻었다는 것은 쓸 일이 생긴단 것. 은우는 앞으로 나아갔다. 바스락. 귀에 소리가 잡히기도 전에 물러난 몸이 검을 뽑았다.

키에─!

서걱!

검은 오오라를 풍기는 동물이 별의 검에 베였다. 동물 위에 체력 바로 보이는 빨간색 게이지가 떠올랐다. ¼도 깎이지 않았다.

그것을 확인한 순간, 은우는 검을 추가로 휘둘렀다. 그가 파악한 캐릭터 신체는 이 정도 빠르기의 검격이 가능했다.

순식간에 동물이 네 대를 더 맞고 그대로 죽었다. 꼴에 전체 이용가라고 핏물이 튀기거나 상처가 남는 이펙트는 없었다. 시체마저도 빛이 되어 흩어졌다.

대신 그 자리에 남은 건 돌멩이 다섯 개였다. 줍자 안내창이 떠올랐다.

『운석 알갱이 5』

『운석 알갱이를 통해 다양한 아이템과 스킬을 얻을 수 있습니다.』

화폐인 듯하다.

“팀장님.”

─네.

“진행하려면 꼭 모아야 합니까?”

─그게… 좀 복잡한데, 안 모아도 깨는 게 완전히 불가능하진 않습니다. 진행에 꼭 필요한 스킬은 알아서 주거든요. 게임사 말로는 대충 그렇습니다. 없이 깬 사람이 안 나와서 문제지.

그럼 됐다. 은우는 그대로 자리를 박찼다.

“그럼 됐습니다.”

주는 걸 마다하진 않으나, 없는 채로도 깰 자신이야 있다. 무엇보다 지금은 그가 타인에게 능력을 선보이고 입증하는 자리이니. 은우는 편의보다 그의 몸값을 올리는 걸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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