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서은우는 중학교 졸업이 다가올 무렵 전생을 자각했다. 괴수들이 북쪽에서 난무하고 남쪽에선 인간들끼리 싸움을 벌이던 세계의 기억이었다.
덕분에 중학교 3학년 마지막 학기와 고등학교 생활을 대차게 말아먹었다. 판이해진 환경을 전생의 가치관이 낯설어한 탓이다.
조그만 소음에도 예민하게 반응했고 뒤에서 접근하면 발작하듯 경계했다. 신뢰 관계에 대해 집착하는가 하면 원초적인 싸움을 갈구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정상적인 학교생활이 가능할 리 없다.
다행히 병원에도 다녀 보고 친구의 행동을 전반적으로 따라보는 등 적응을 위한 발악을 하다 보니 어느 정도 나아지긴 했다. 그러나 그땐 이미 2년이란 시간이 흘러 고등학교 3학년이 된 뒤였다.
성적은 하위권이요 애들 사이에서 도는 평판은 바닥이니, 소꿉친구가 아니었다면 대놓고 왕따였을 거다.
결국 그는 학창 시절을 엉망진창으로 끝맺었다.
▣ 001. 고인물 게임에 던져진 청정수
서은우는 문손잡이를 잡아당겼다. 막 나오려던 손님이 그에게 묵례를 하려다가 그대로 굳었다.
먼저 지나가란 의미로 비켜 주었으나, 상대의 움직임은 조금 굼떴다. 꼭 겁에 질린 소동물처럼.
은우는 혀를 찼다. 이 때문에 사람 많은 데서 만나는 것이 싫다. 마주치는 사람마다 겁을 먹거나 제멋대로 오해해서다.
선량한 백수를 대체 왜 무서워하는 거야. 197cm에 달하는 신장이 카페 안으로 입장했다.
“여기다.”
누군가가 안쪽 테이블에서 손을 들었다.
“그냥 집에서 하면 안 되냐.”
“응, 절대 안 돼.”
소꿉친구, 김희수가 단호히 대답했다. 테이블엔 전자 노트가 듀얼 모니터를 띄우고 있었다.
“너무하네.”
“그러게 누가 징글징글하게 키 크래?”
“그건 네가 너무 작은 게 아닐까?”
참고로 희수는 147cm다. “개새끼야.” 테이블 아래로 구두가 튀어나오며 그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하필이면 끝이 뾰족한 구두였다.
“씁.”
“네가 큰 거야. 내가 작은 게 아니라 네가 더럽게 큰 거라고. 알았어?”
“발은 매워서……. 네 애인은 네가 이런다는 거 아냐?”
“알겠냐?”
은우는 이를 갈며 자리에 앉았다. 희수가 끼고 있던 이어셋을 뺐다.
“뭐 하는데.”
“과제지 뭐겠냐.”
그런 것치곤 듀얼 모니터 중 하나가 작은데.
그는 주머니에서 전자 노트부터 일단 꺼냈다. 그리곤 희수의 화면을 확인했다. 홀로그램 형식으로 띄워져 있는 화면에는 각각 PPT와 어떤 영상이 띄워져 있다.
“이것도 과제?”
“아니, 그건 ‘검은양’ 생방.”
“…검은양?”
“인방, 인마. 인방.”
은우는 눈을 껌뻑였다. 인방을 몰라서는 절대 아니고, 지금껏 연이 없던 단어여서다.
“뭐, 왜, 뭐. 징글징글하게 공부만 했는데 이제 좀 놀아도 되잖아.”
“누가 뭐래? 뭔가 해서 본 거다.”
고3 생활도 청산했겠다, 희수 말엔 틀린 게 없다. 그저 그에게 해당 사항이 아닐 뿐이지.
아무렴 난데없는 전생 자각으로 말아먹은 성적은 대학교 진학마저 막았다. 즉, 은우는 재수생이었다. 인방은 개뿔, 닥치고 공부해야 하는 재수생.
“너도 볼래?”
“악마 새끼네. 너는 대학생이다, 이거지?”
“그거야 당연하지.”
은우는 싱긋 웃으며 중지를 들어 올렸다. 희수가 중지를 꺾으려 들었다. 다행히 꺾이기 전에 피해 냈다.
“야, 근데 진짜 재밌어.”
“재수생 놀려 먹으면 재밌냐?”
“놀리려는 게 아니라, 찐으로.”
희수는 커피를 쪼옥 빨았다.
“종일 공부할 순 없잖아, 어차피. 쉴 때 보라고.”
“글쎄다.”
은우는 회의적이었다.
재수생이 인방을 본다? 자제할 자신이 없는 건 아니나, 때론 무지한 게 더 좋은 경우가 있다. 주로 쾌락 관련된 것이 그랬다.
더군다나 전생이 너무 스펙터클했던 나머지 그 이전 삶의 상당 부분을 잊은 그다.
일상생활에 대한 상식은 몸에 배어 있을지언정 중학교 3학년 때까지 배웠던 대부분의 지식은 잊었다. 기초부터 빡세게 다져야 해서 다른 사람보다 시간을 더 필요로 했다.
“어휴, 재미없는 새끼.”
“알바도 해야 하는 마당에 인방 볼 시간 없어.”
덤덤히 고백한 말에 희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알바? 웬 알바? 설마, 용돈 안 주신대?”
“…뭐, 이제 성인이잖아.”
“병원은?!”
“끊었지.”
“허, 허!”
그녀는 기가 찬다는 듯 숨만 크게 토했다. 저 뒤로 욕이 나올 거라는 걸 알기에 은우는 재빨리 일어섰다.
“생각해 보니 음료 안 시켰네. 나 좀 시키고 온다.”
대답은 듣지 않았다. 그는 서둘러 계산대를 향해 움직였다.
주문은 당연히 가장 싼 아메리카노다. 그는 돈 없는 백수였다.
그렇게 계산이 완료됐을까. 카페 전용 BGM이 두 번 지나치고 나서야 커피가 나왔다. 이즈음이면 희수의 답답함도 가셨을 거다.
은우는 아메리카노에 시럽을 다섯 번 뿌리고 돌아섰다.
“야.”
자리에 앉자마자 희수가 입을 열었다.
아직 화가 덜 풀렸나. 은우는 혀로 볼을 찼다.
“게임 한판 하자.”
“…갑자기?”
“3시간만 투자해. 시급 쳐준다.”
“친구한테 돈 받을 정도로 염치없진 않은데.”
“닥치고 받아.”
화 아직 덜 풀렸네.
은우는 나지막한 한숨과 함께 목덜미를 쓸었다. 게임은 별로 하고 싶지 않은데.
“게임 아니면 안 되겠지?”
“왜, 싫냐?”
아니면 직성이 안 풀릴 목소리다.
오늘치 공부는 여기서 쫑 났군. 거기에 애써 눈 돌려 온 게임까지 하게 생겼고. 은우의 눈동자가 데굴 굴렀다.
“아는 게 없어. 안 해 봐서.”
“그거야 가르쳐 주면 되는데. 진짜 아예 안 했어?”
“했겠냐.”
“…그래, 네가 뭔 정신이 있다고 했겠어. 나 말고 널 게임방에 데려갈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희수의 말이 맞았다. 그는 중3 마지막 학기를 기준으로─그 전은 기억이 안 난다─게임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처음엔 정신이 없었고, 적응한 뒤엔 공부하느라 할 겨를이 나지 않은 탓이다. 중독성이 강하단 걸 알고 회피한 것도 어느 정도 한몫했다.
희수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싸움도 더럽게 싫어하는 새끼였지, 너. 아씨, 게임은 글렀나.”
참고로 정정하자면, 그는 싸움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 무서워하는 거다. 무심코 사람의 목을 분지르거나 급소 찔러서 죽여 버릴까 봐. 사지 부러트리는 걸로 끝난다 해도 합의 문제가 있고.
“하자.”
하지만, 뭐. 게임이니까 그런 부분은 괜찮겠지. 은우는 큰맘 먹고 선언했다.
희수가 매번 이러는 애도 아니고, 그가 혼란스러워하던 시기를 지켜 준 친구에게 게임 한 번 못 해 줄까. 그는 자신이 그렇게 절제력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까짓것 해 보지 뭐.”
“괜찮은 거 맞아?”
“못 할 것도 없지. 그보다 뭔 게임 할 건데.”
“데바뱀.”
“…그게 뭔데?”
“흡혈귀 피해 다니면서 토템 부수는 게임.”
왜 하필 싸우는, 아니다. 차라리 그게 나을지도.
굉장히 축약된 설명이었지만, 그는 납득하고 넘어갔다. 무지한 뉴비란 그런 법이었다.
“걱정 마. 쉬워.”
“그래.”
약을 판 누군가 덕에 고인물 게임에 청정수 하나가 던져졌다.
* * *
VR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가상현실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 작금이라.
PC 혹은 콘솔 게임도 여전히 존재하나, 대세는 가상현실이었다.
생존형 공포 게임인 ‘DEAD BY VAMPIRE’, 약칭 데바뱀도 마찬가지였다.
게임의 룰은 흡혈귀를 피해 4명의 인간이 토템 다섯 개를 부숴 탈출하는 것. 간단해 보이지만 의외로 난이도가 높은 게임이다. 가상일지언정 현실은 현실이라서 피지컬을 요구하는 탓이다.
하나, 피지컬을 요구해서 어렵다는 건 반대로 피지컬이 좋을 때 어렵지 않다는 말도 된다.
“크아악!”
시작과 동시에 자외선 전등을 얻었다. 흡혈귀와 상극인 이 전등은 흡혈귀에게 정면으로 쪼이면 3초간 스턴을 걸어 준다는 게 희수의 설명이었다.
“왁!”
은우는 자외선 전등으로 흡혈귀에게 빛을 쬐었다. 흡혈귀가 얼굴을 가리며 뒷걸음치고, 그사이 희수가 다급히 도망쳤다.
“팔 다쳤냐.”
“아까 팔 피격됐어. 팔 하나 못 써도 클리어엔 문제없으니까 치료는 안 해도 될 듯.”
“소소한 데서 현실성 챙겼네.”
듀오로 설정한 덕에 가능한 보이스 채팅을 나누며 그들은 서둘러 도주했다.
흡혈귀가 고유 특성인 야수화를 펼친 후 돌진 자세를 취했다. 반드시 잡겠다는 뜻일 테다.
은우는 그걸 힐끗 보다가 희수를 들고 옆으로 굴렀다. 그들이 구른 직후 야수화한 흡혈귀가 그 자리를 지나쳤다.
“너, 이거 처음 아니지?”
“뭐래.”
은우는 희수와 함께 달리다가 다시 옆으로 굴렀다. 흡혈귀가 또다시 그들을 지나쳤다.
옛날 생각나네. 은우는 흐리게 웃었다. 익숙한 전장의 향기에 향수가 도졌다. 그때와 비교하면 형편없는 신체에 조건이라 해도, 목숨이 노려진다는 것 자체가 그리움을 불러들였다.
“그럼 어떻게 피하는 건데!”
“들리잖아.”
“뭐가? 저 돌진이?”
“그거 말고 더 있어?”
은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돌진하겠다고 대놓고 소리와 기척으로 알려 주는데 그걸 왜 모르는 척하지?
“그걸 어떻게 들어?”
“그냥 들리는 걸 어떻게 들리냐고 물으면 난처한데.”
“내가 괜히 물었다.”
은우는 희수를 잡고 그대로 골목길 안으로 던진 뒤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흡혈귀가 그를 지나치고 벽에 처박혔다.
그사이 빠르게 일어난 그는 희수가 있는 골목길로 몸을 넣었다. 던져졌던 희수가 세모꼴 눈을 했지만, 화내진 않았다.
“저거, 아마 우리 포기하고 다른 사람들 잡으러 갈 거야. 이렇게까지 했는데 잡으려 들면 흡혈귀 아니지. 그사이에 토템 찾아서 부숴야 해.”
무엇보다 돌진기도 이리저리 꺾인 골목길 특성상 써 봤자 벽에 부딪혀서 딜레이만 는다. 야수화 흡혈귀가 대체로 고인물 픽임을 아는 그녀는 경험자다운 판단을 내렸다.
“토템은 왜 부수는 거야.”
“그래야 탈출이 가능하니까 그렇지.”
“그래야만 왜 탈출이 가능한데?”
“아, 성가신 설덕(설정 덕후) 놈!”
골목길 안쪽에 토템이 있었다. 그들은 서둘러 그것을 팍팍 부쉈다. 파괴하는 데 시간깨나 걸리는지라 희수는 마지못해 세계관 설명을 해 주었다.
“흡혈귀가 인간들의 도주를 막기 위해 결계를 세웠다는 설정이야. 토템 다섯 개를 부숴야지만 결계가 부서져서 탈출할 수 있고.”
토템이 결계의 축이구나. 은우는 수긍했다. 마법사를 본 적이 있기에 이해는 더더욱 쉬웠다.
그때 전자 노트가 소리 없이 울렸다. 은우는 발로 토템을 걷어차며 진동의 근원지를 집어 들었다. 토템을 파괴하는 행위 중에도 생존자들의 상태를 확인하는 등의 행위는 가능한 덕이다.
“하나 쓰러졌다.”
“괜찮아.”
토템이 완전히 부서졌다. 그들은 서둘러 자리를 옮겼다. 골목길을 외운 건 희수였기에 은우는 그녀만 졸졸 따라다녔다.
그때 진동이 또 울렸다. 아까보다 더 진하고 묵직한 진동이다. “제단행이네.” 경험자는 그 의미를 금방 알아차렸다. 그건 희수와 은우 외 인간 한 명이 흡혈귀에게 잡혔다는 알림이다.
전자 노트에 떠올라 있는 생존자의 상태와 부숴야 하는 토템 수가 바뀌었다.
생존자 둘은 정상에 하나는 경상, 하나는 제단에 바쳐진 상태. 토템 수는 4였다가 숫자 하나가 더 줄어 3이 됐다.
“좋았어.”
“저거, 구하러 가?”
“가긴 가는데, 지금 바로는 안 돼.”
잘못하면 캠핑하는 흡혈귀에게 잡힌다. 희수의 말에 은우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사람 잡을까 봐 성질 죽이고 다닐 뿐, 싸움 하난 자신 있다. 전생의 것과 비빌 수 없는 성능의 몸을 주어도 마찬가지다. 하드웨어의 질이 낮다고 해서 소프트웨어의 질까지 떨어지진 않는다.
“안 잡힐 것 같은데.”
그런 점에서 현 캐릭터의 능력은 제법 가능성이 보였다. 흡혈귀의 속도, 움직임 등을 파악한 이후라 더욱 그렇다.
시스템상 흡혈귀를 잡을 순 없어도 피해 다닐 자신은 있다.
“뭐래.”
물론 희수는 뉴비의 근자감으로 치부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생각이었다.
“이 게임, 꼭 탈출만 되냐.”
“그건 아닌데, 탈출이 제일 쉬워.”
“있긴 있다는 거네. 탈출 외 방법도 알려 줘.”
“별 쓸모 없는데……. 일단 숨겨진 공간을 찾아야 해.”
“어디 있는데?”
“완전 랜덤이라서 몰라. 대신 벽이나 가구, 바닥 같은 데에 동전만 한 석궁 무늬가 그려져 있어.”
“저런 거?”
은우는 한쪽을 가리켰다. 얼떨결에 은우가 가리킨 곳을 본 희수가 대답했다.
“어, 저런 거.”
희수는 빠르게 건물 벽에 다가가 석궁 무늬를 더듬었다. 금세 무언가가 꾹 눌렸다. 새로운 길이 열렸다.
“와, 이거 어떻게 봤냐.”
“그냥 보였어. 들어가면 되냐.”
“엉.”
은우는 희수를 먼저 들이고 그다음으로 입성했다. 흡혈귀는 뭐 하고 있는지 보이지가 않았다.
“지금처럼 무늬 찾아서 누르면 길이 열리는데, 그 안으로 들어가면 보통 셋 중 하나야. 무기가 있거나 성수가 있거나 탈출로가 있거나.”
계단을 따라 내려가니 작은 방이 나왔다. 그들이 들어온 입구 외에 사방이 막힌 방은 그 중심에 상자가 있었다.
“아까비. 성수네.”
“이걸로 보통 뭐 하는데?”
“이거 하나론 할 수 있는 게 없어. 무기 찾아야 해.”
“찾으면?”
“무기에 성수를 발라서 흡혈귀에게 반격하는 거지, 뭐.”
근데 어지간한 피지컬이 아니면 못 죽인다며 희수는 어깨를 으쓱였다.
은우의 눈이 빛났다. 흡혈귀를 죽이는 방법이 완전 없진 않은 모양이다.
“이건 내가 가지고 있을게.”
“그러든가.”
희수가 소지하기로 한 성수는 황금빛을 옅게 품은 물이었다.
전생에서 봤던 성수는 희뿌옜던 것 같은데. 은우는 저게 더 신성스럽다고 생각했다. 비록 병자를 치료하거나 괴수가 퍼트린 바이러스를 치료하는 능력은 없지만, 보기엔 저게 더 예쁘다.
“그래. 근데 탈출로는 또 뭐냐.”
“그건 속칭 개구멍이라고 부르는 건데, 혼자 남았을 때만 쓸 수 있어서 어차피 지금은 못 써.”
그렇구나. 은우는 고개를 주억였다. 이해는 했으나 크게 와닿진 않는다.
“그럼 슬슬 찢어지자. 넌 토템만 찾아서 조져. 나는 구출하거나 할 테니까.”
“오케이.”
골목길 부분을 완전히 빠져나온 그들은 서로 갈라졌다. 희수가 생존자들이 있다고 뜨는 위치로 향했다.
토템, 토템.
은우는 빠르게 뛰며 토템을 찾았다. 설정상 빠르게 뛰면 혈류가 빨라지며 피 냄새가 진해지기 때문에 흡혈귀가 추적할 수 있게 된다지만, 어차피 위치가 다르다. 문제 되는 일은 없을 거다.
은우는 귀를 사방에 기울이며 맵을 외웠다. 다행히 늦지 않게 토템 하나가 발견됐다. 그는 그것을 부수기 시작했다.
살펴본 근황은 생존자 하나가 중상, 둘이 경상, 하나가 정상이다. 구출에 성공한 듯하다.
우웅. 경상 중 하나가 중상 표시로 바뀌었다.
토템 파괴가 꽤 걸리네. 은우는 시스템적으로 정해져 있는 시간을 보며 눈살을 좁혔다. 곧 중상 중 하나가 제단에 바쳐졌다.
곧 토템이 완전히 망가졌다. 이제 남은 토템 수는 2개다.
은우는 거기서 짧게 고민했다. 희수의 말대로 토템을 부술까, 인간들을 구출할까.
중상 상태에 돌입하면 스스로 치료가 불가능하며, 치료하지 않으면 4분 뒤에 사망에 이른다고 했다.
일반 사망보다 제단 사망이 흡혈귀 입장에서 점수가 더 높다 하니, 그걸 내버려 둘 리 없다. 4분 이내에 둘 다 제단에 보내려 할 것이다.
더구나 희수의 말로는 야수화 흡혈귀는 고인물들의 픽. 점수가 높아서 좋은 게 뭔지는 몰라도, 그런 걸 포기하는 사람이 고인물 소리를 듣진 않을 테다.
심리전이다. 구원인가, 토템인가.
은우는 토템을 택했다. 현실이었다면 당연히 인명을 우선했겠지만, 이건 게임 아닌가. 우승 가능성이 높은 쪽을 고르는 게 당연하다. 낯설지만, 어렵지 않은 선택지다. 딱히 해 본 적 없는 선택도 아니었다.
그가 토템 하나를 찾는 사이 제단에 바쳐진 이가 둘이 되었다. 은우는 괘념치 않고 토템을 부쉈다.
그가 다 부쉈을 즈음엔 제단 사망 하나에 제단행 둘 상태였다.
흡혈귀도 지금쯤 고민하고 있겠지. 대기할지, 정상인 마지막 인간을 찾을지.
제단에서 대기하면 둘은 확실히 죽이지만, 그새 토템 하나가 부서지면 은우가 탈출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니 분명 움직일 거다. 은우는 자신의 직감에 확신을 걸고 움직였다.
과연 제단 방 근처를 서성이던 흡혈귀가 곧 우다다 달려 나갔다. 은우는 조심스레 제단 방 안으로 들어갔다.
“이 미친 새끼! 그냥 혼자 도망칠 것이지!”
제단 방에 들어가자 희수가 욕설로 반겨 주었다.
은우는 심리전이 성공한 것에 만족하며 제단에 바쳐진 희수와 남은 한 명을 구했다.
“나가서 흡혈귀 있으면 이번엔 은우, 네가 맞아야 해.”
“오케이.”
편의상의 이유인지, 제단에 바쳐지기 전엔 중상이었던 그들은 다시 경상으로 돌아왔다. 세 사람은 서둘러 제단 방을 탈출했다.
제단 방을 탈출하는 길은 총 두 개. 은우와 희수는 뒤쪽 길을 택했고 한 사람은 앞쪽 길을 택했다.
쾅!
제단 방을 완전히 나왔을 즈음 굉음이 울렸다. 야수화한 흡혈귀가 벽에 몸을 박는 소리다. 보지 않아도 다른 한 사람이 중상 상태가 됐을 것 같았다.
“저 사람 3스택이라서 바치고 오겠네.”
“그게 뭔데.”
“처음 제단에 바쳐졌을 땐 2분 동안 살아 있거든? 그사이에 구조되면 사는 거고, 아니면 죽어. 근데 구해진 다음에 또 잡혀서 바쳐지면 2분이 아니라 1분으로 준단 말이지? 세 번째엔 즉사고.”
그렇군. 이건 또 새로 알았다. 은우는 쉬운 설명에 감사하며 아까 찾았던 토템 위치로 희수를 안내했다. 작업을 살짝 해 둔지라 시간이 조금 단축됐다.
“이거 외에 하나 더 있냐?”
“저쪽에 하나.”
“좋아. 그럼 흡혈귀 오거든 내가 저쪽으로 가고 네가 반대쪽으로 가라. 너한테 끌리면 나는 저거 부술게. 만약 나한테 끌리면 넌 이거 부숴라.”
“알았어.”
그들은 서둘러 토템을 부쉈다. 전자 노트 화면에 사망 표시가 떠올랐다.
“곧 온다.”
토템은 ⅔쯤 파괴됐다. 그들은 흡혈귀가 뜨자마자 약속한 대로 흩어졌다. 흡혈귀가 토템을 고친 후 희수를 쫓아갔다.
그를 쫓았다면 더 좋았을 텐데. 은우는 아쉬움을 삼키며 다시 돌아와 토템을 부쉈다. 다 망가트리기도 전에 희수가 중상 상태에 돌입했다. 생각보다 더 이른 타이밍이었다.
이렇게 되면 저쪽은 중상 상태라 운신이 힘든 희수를 내버려 두고 그를 잡으러 올 거다.
이대론 안 된다. 은우는 눈을 가늘게 떴다가 흡혈귀가 오기 전에 일단 움직였다.
문득, 그의 눈에 석궁 무늬 하나가 보였다.
* * *
희수는 혀를 찼다. 보통 돌진을 잘 못 써서 야수화를 안 고르는데, 이번 흡혈귀는 ‘진짜’인 모양이다. 준비 자세가 길어서 피하기 쉬운 돌진을 잘도 교묘하게 썼다.
검은양 님 뺨치네. 설마 본인은 아니겠지? 그보다 은우, 걘 이걸 어떻게 피한 거야.
그녀는 혀를 찬 채 회복 게이지를 채웠다. 은우가 그녀를 구하러 올 수 있을진 모르지만, 어차피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은우가 다치면 치료해 주려고 일부러 치료 특화 특성 골랐건만, 쓸모가 없었네. 다음 판엔 다른 거 고를까.
그녀는 다음 판을 생각하며 한참을 누워 있었다. 무언가가 팍, 하고 날아왔다.
하필이면 머리 옆에 꽂힌지라 희수는 심장이 벌렁거리는 걸 느껴야 했다. 그녀의 눈이 느릿하게 머리 옆에 박힌 것을 살폈다.
“이건 뭐야……? 단검?”
이거 그 석궁 방에서 나오는 무기 중 하나 아닌가? 그녀가 긴가민가할 때 친구 새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성수 좀 발라 줘라.”
은우가 흡혈귀를 피해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그 움직임이 절묘함 그 자체라, 희수는 잠깐 어안이 벙벙해졌다.
약속한 것처럼 친구 놈이 피하고 흡혈귀가 빈자리를 공격한다. 분명 인간은 흡혈귀보다 느리건만, 저놈은 그 공격을 다 피하는 거다.
마치 춤사위 같다.
“빨리.”
은우의 재촉에 그녀는 아차 했다. 무기에 바를 성수는 그녀에게 있었다.
저놈이 초보자라서 그녀가 챙겼던 건데,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줄 걸 그랬다. 희수는 성수를 쿠크리 위에 뿌렸다.
“야, 던진다!”
“세게 던져.”
에잇! 희수는 단검을 막 던졌다. 하필이면 은우의 머리 쪽이었다. 잘못 던졌다! 희수가 당황하려던 찰나, 은우의 손이 휙 올라왔다.
탁
“땡큐.”
친구 놈은 뒤도 보지 않은 채 단검을 낚아챘다. 검지와 중지만으로 머리 옆을 향해 날아오던 단검의 날을 잡아챈 것이다.
그 기행에 희수가 놀라움을 표하기도 전, 은우 녀석이 뒷걸음질로 흡혈귀의 공격을 피했다. 그의 손이 쿠크리를 역수로 잡았다.
그리고 더 경악스러운 광경이 펼쳐졌다.
야수화한 흡혈귀가 두꺼운 주먹을 뻗었을 때, 은우가 대각선으로 물러났다.
이어 단검으로 흡혈귀의 팔을 베었다. 단순히 휘둘러 벤 건 절대 아니었다.
한 발 앞으로 나아가며 단검을 밀어 넣은 그는 흡혈귀의 손목부터 팔꿈치까지 쭉 갈랐다.
연이어 팔꿈치 끝으로 빠져나온 단검을 왼손에서 오른손으로 옮기더니 허리를 낮췄다.
은우의 오른손이 흡혈귀의 겨드랑이를 사악 긋고 흡혈귀의 뒤편으로 물러났다. 흡혈귀의 팔이 축 늘어졌다.
대체 뭔 일이 벌어진 거야? 희수는 자신의 시력에 대해 신뢰성을 잃었다. 그러나 그녀의 믿음과 관계없이 상황은 진행됐다.
흡혈귀가 당황해서 은우를 쫓고자 몸을 뒤틀었다. 허리를 뒤튼 흡혈귀를 따라 움직인 은우가 흡혈귀의 등을 밟고 어깨를 짚었다.
인간보다 커다란 흡혈귀의 등을 타고 오른 이는 손을 움직였다. 단검이 흡혈귀의 목에 박히고 그대로 촥 휘둘러졌다.
흡혈귀의 몸이 무너졌다.
“말했잖아, 안 잡힐 것 같다고.”
초보자 고유의 해진 옷을 입은 친구 녀석이 씩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