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 남편과의 이혼을 거부합니다 (107)화 (107/107)

제107화

“자, 코디들 앞으로.”

이어진 신호에 대기 중이던 23명의 청년이 줄을 맞춰 들어왔다. 몸 좋고 얼굴 좋은 미남자들의 등장에 귀부인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오레알의 회원이 될 여러분을 모실 전문 인력들입니다. 배치된 ‘코디’들이 배송과 상담, 주문까지 아울러 관리할 겁니다.”

나는 샐쭉 미소 지으며 명칭을 소개했다. 곧이어 귀부인들의 무릎 위에 각각의 황금색 종이가 놓였다.

“원하시는 항목에 표기하신 후 파티장 곳곳에 비치된 황금 항아리에 넣어 주세요. 회원 가입을 원하지 않으실 경우, 크게 X표를 그려 주시면 됩니다.”

그저 종이를 배급하는 것뿐인데, 불끈불끈한 코디들은 화려한 이두박근을 자랑했다. 덕분에 영애들의 동공이 풍랑 속 돛단배처럼 이리저리 흔들렸다.

“어머! 저기 지금 나보고 웃어 준 거 맞죠?”

“아니에요, 마리타 영애. 분명 나를 보고 웃었다고요.”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그저 보고만 있어도 녹는데. 심장이 한여름 태양이라도 된 것처럼 뜨거워요.”

“겉옷을 벗어요, 모일라. 아직 늦가을인데 모피를 입고 오니 뜨겁죠.”

이미 눈대중을 마친 어린 영애들은 각자의 소유권을 주장하며 신경전을 이어 갔다. 그중 가장 인기가 좋은 건, 한국 배우 박 씨를 닮은 보베르토였다.

“그러고 보니, 지정 코디는 어떻게 해야 할 수 있다고 했죠?”

“조금 전 설명하기론 플래티넘 이상부터 된다고 하던데요.”

명쾌한 해답에 영애들의 두 눈이 활활 타올랐다. 그 모습이 꼭 먹이를 노리는 승냥이 같았다. 예상과 꼭 맞는 반응에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보베르토, 미남계, 성공적.

* * *

“아으, 오래간만에 긴장했더니 온몸이 쑤신 것 같아.”

밀실에서 나온 나는 곧장 볼멘소리를 늘렸다. 풀린 긴장 때문인지 팔다리가 너덜거렸다.

“고생하셨어요, 부인! 그래도 반응이 엄청 좋은 것 같아서 다행이에요.”

“당연하지. 좋아할 수밖에 없는 거로 쏙쏙 골라 넣었는데.”

“와, 근데 코디 제도는 정말 대박인 것 같아요. 아까 영애님들 눈빛 보셨어요? 진짜 살벌하던데요.”

“덕질과 한정판이라는 인간 욕구의 결집체들을 넣어 놨으니 애가 안 닳고 배겨? 됐고, 그이는 지금 어디에 있어? 별일 없으면 대충 마무리하고 돌아가자.”

나는 결린 어깨를 주무르며 노곤한 목소리로 말했다. 몇 시간 동안 홀로 강행군을 이어 갔더니 피로감이 몰려왔다.

“공작님께서는 아마 멜빈 님이랑 같이 계실 거예요. 이쪽으로 오시……!”

순간 낭랑했던 샤샤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달라진 기류에 나는 감긴 눈을 느리게 뜨며 정면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곳엔 마주치고 싶지 않은 기피 대상 1호가 서 있었다.

“멜리사?”

나는 미간을 가늘게 좁히며 마주한 인영을 살폈다. 전보다 눈에 독기가 그득한 걸 보아, 보통 일은 아닌 모양이다.

싸늘하다…….

예리한 촉이 온몸에 빨간 경고등을 울렸다. 멜리사와의 만남이 우연의 일치인지, 운명의 장난인지, 아니면 정말로 내 뒤를 밟은 건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건 어느 쪽이든 내게 득 될 게 없다. 숙련된 타짜는 속을 보이지 않는 법! 처음에야 멜리사의 행동에 말렸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오랜만이다, 멜리사. 네가 여기 올 줄은 몰랐는데.”

나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며 반갑게 이야기했다. 자연스레 오른손을 내밀었으나, 되돌아온 건 싸늘한 시선이 전부다.

뻘쭘해진 손을 스르르 내리던 찰나, 멜리사가 말했다.

“할 이야기가 있어.”

“응! 듣고 있어.”

나는 해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둘만의 대화를 원한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으나, 부러 눈치 없는 척 너스레를 떨었다.

“할 이야기가 있다고.”

“응, 듣고 있다니까? 말해.”

잇단 내 반응에 멜리사가 아랫입술을 질끈 물었다. 그러곤 한 발짝 가까이 와 허리를 숙였다.

“네가 이렇게 비협조적으로 나오면…… 나도 생각이라는 게 있어, 클로엔.”

작게 소곤거린 멜리사가 말아 쥔 손을 쥐었다 폈다. 그와 동시에 멜리사의 손 위로 작은 소용돌이가 쳤다.

“너, 너! 멜리사, 너……! 지금 나 협박하는 거야? ”

“듣기에 따라 다르겠지. 여길 물바다로 만들고 싶은 게 아니면 나랑 이야기 좀 해. 잠깐이면 되니까.”

놀란 나를 뒤로한 채, 멜리사가 싸늘한 표정으로 돌아섰다. 어차피 한 번은 담판을 지어야 함을 모르지 않았다. 그리고 그 결전의 날이 바로 오늘임을 나는 확신했다.

‘쫄지 마, X발. 쫄지 마.’

잠시 고민한 나는 후, 마른 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비장한 표정으로 멜리사의 뒤를 따르려던 그때였다. 샤샤가 작게 도리질하며 내 앞을 막아섰다.

“부인, 가지 마세요. 멜리사 영애님 눈이 좀 이상해요. 전이랑 다르게 독기가 잔뜩 서린 게 불길하다고요!”

“네가 봐도 눈이 좀 돌았지?”

힐끗, 눈치를 살피던 나는 소리를 낮추고 속닥거렸다.

“네. 완전.”

“근데 내가 안 갈 수는 없어. 그럼, 여기서 질문. 샤샤 너는 과연 뭘 해야 할까?”

“글, 글쎄요? 쫓아가서 부인을 지켜드려야겠죠?”

“아니, 지금 당장 공작님께 달려가. 되도록 사람들 눈에 띄지 말고 조용히 움직여. 알겠지?”

흡사 첩보 작전에 버금가는 긴장감이었다. 혹여 사람을 많이 불러왔다가 폭주한 멜리사가 마법을 쓰기라도 한다면 이대로 끌려가 머리가 매달릴 거다.

“너만 믿는다.”

나는 샤샤의 손을 꼭 붙들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부디 사달이 나기 전에 강력한 아군을 불러오길 바라며.

* * *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복도 가장 끝에 마련된 작은 쪽방이었다. 파티가 한창인지라 사람은커녕 인기척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그 순간, 탁! 구두 굽 소리와 함께 멜리사의 몸이 달빛을 등지고 돌아섰다.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에 등골이 곧추섰다.

“무, 무슨 일이야! 굳이 여기까지 사람을 불러서는. 혹시 날 해칠 생각이라면 지금에라도 꿈 깨는 게 좋을 거야. 순순히 당해 주지 않을 거니까.”

나는 부러 목소리를 높이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동시에 멜리사의 두 손이 감정을 누르듯 바들바들 떨려 왔다.

“무슨 일? 내가 널…… 해쳐?”

멜리사가 한음 한음 곱씹으며 원망의 눈길을 보냈다. 나는 부러 시선을 외면하며 대답을 아꼈다. 속으로는 이대로 말리면 안 된다, 되뇌고 되뇌었다.

멜리사가 말했다.

“정말 이대로 끝낼 생각이야?”

“뭐, 뭘?”

“이대로 정말……!”

벅차오르는 감정에 멜리사는 크게 숨을 내쉬고 말을 이어 갔다.

“나와 단원들을 외면할 생각이냐고.”

순간 뭐라고 답을 해야 할지 망설여졌다. 절박한 시선을 마주하자니 자연스레 감정이 동화되는 기분이었다.

“벌써 단원들의 반 이상이 잡혀갔어.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까지 우리 단원들을 외면하면 안 되는 거잖아. 적어도 네가 아메트린의 수장이라면……! 나는 몰라도 단원들한테까지 그럴 수는 없는 거라고.”

순간,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당장에라도 무너질 듯한 멜리사를 보며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멜리사가 정확히 내게 무엇을 원하는지, 내가 이곳에 오기 전 무슨 일을 하고 계획 있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이들과 함께하는 자체만으로 내게 위험이 될 거라는 사실은 너무도 명확했다. 조용히 숨을 삼키던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러곤 툭, 모진 말을 뱉었다.

“그래서?”

“……뭐?”

“내가 한때는 너랑 뜻을 같이한 게 맞아. 뭐 상황을 맞춰 보니 대충 그런 것 같더라고. 그런데 뭐? 나보고 뭘 어떻게 하라는 말인데.”

“클로엔, 너…….”

싸늘한 내 반응에 멜리사는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나는 입술을 지그시 물며 할 말을 이어 갔다. 냉정하게 끊어 내야, 더는 미련이 남지 않을 테니까.

“난 이제 위험하게 살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너도 남아 있는 단원들도 본래 자리로 돌아가. 나는 돌아갈 마음이 없으니까.”

목소리에 감정을 빼고 할 수 있는 최대한 싸늘하게 말했다.

“제발, 죽기 전에 도망쳐.”

대화를 갈무리하며 몸을 돌리던 그 순간, 악에 받친 비명이 쏟아졌다.

“몇 년 전, 민간 마법단 대학살에서 죽은 우리 단원들만 수십이야! 너…… 내가 알던 클로엔이 맞기는 하니? 언제부터 우리가 목숨에 연연했는데! 대체 언제부터! 넌 비겁한 겁쟁이가 돼버린 거니?”

“…….”

나는 의미 없는 변명 대신 침묵을 택했다. 정적이 길어질수록 멜리사의 얼굴 위로 갖가지 감정이 들었다.

“너한테 정말 실망이야. 내가 지금까지…… 사람을 잘못 봤어. 다시는, 두 번 다시는 연락하는 일 없을 거야.”

배신자.

멜리사가 혼자 뇌까리고는 문 쪽으로 걸음을 두었다. 나는 소리 없이 굳어 그 모습을 바라봤다.

문이 열리고.

열린 문틈 너머로 커다란 그림자가 보였다. 에드먼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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