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1화
“오……레알?”
“응! 오레알.”
나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펜대를 굴렸다. 그러곤 벽보 가장 최상단에 글씨를 새겼다.
“오! 이런 엄청난 물건이 레알 존재하다니, 뭐 그런 뜻이에요. 언뜻 감탄사 같기도 하죠.”
힐끔 살핀 에드먼드의 표정이 좋지만은 않다. 투자자의 눈으로 봐 달랐더니 진짜 그러려는 모양이다.
와, 공명정대의 표본인 줄.
나는 빠르게 시선을 굴려 샤샤에게 턱짓했다. 긴장했는지 한참을 우왕좌왕거리던 샤샤가 봉투 하나를 턱, 벽에 붙였다.
“모리 부인께서 보낸 가든파티 초대장이에요. 여기에서 우리 로레, 아니 오레알을 본격적으로 선보일 예정이에요.”
“멤버십 체계에 대해 자세히 듣고 싶은데.”
에드먼드가 긴 다리를 교차하며 몸을 뒤로 늘였다. 그에 따라 꿀꺽, 전에 없던 긴장이 몰려왔다.
마치 회장님 앞에 선 말단 신입 사원이 된 기분이다. 그간 사랑에 눈이 멀어 오만함이라는 남편의 패시브를 잠시 잊고 있었다.
“흠흠, 멤버십 체계는 말이죠.”
긴장을 풀었다. 그러곤 막대기를 휘둘러 그러곤 막대기를 휘둘러 B, S, G를 순차적으로 두드렸다.
“모든 회원은 첫 구매와 함께 브론즈 등급을 부여받아요. 그리고 실버, 골드, 플래티넘 순으로 구매 횟수와 금액에 따라 순차적으로 등급이 올라가게 되는데, 여기에서 그냥 등급이 올라가기만 하면 재미가 없겠죠?”
이어진 내 물음에 에드먼드는 대답 대신 고개를 주억였다. 어쩐지 등 뒤가 축축하다. 손에 습기가 맺히는 것 같기도 하고. 나는 여유로운 척 양 입꼬리에 힘을 주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등급별로 특별한 혜택을 드릴 예정이에요. 앞서 말했듯이 우리 ‘오레알’은 100퍼센트 회원제와 비밀 보장제를 원칙으로 해요. 별도의 시크릿 룸에서 물건을 구매하게 될 거고, 완벽한 무기명으로 진행될 거예요.”
“저…… 이야기 중에 끼어들어 죄송합니다만, 그럼 구매하신 분이 누군지 어떻게 압니까? 아무래도 앞뒤가 맞지 않는데요.”
말과 동시에 옆에 있던 멜빈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에드먼드 역시 같은 생각인지 자연스레 엮은 팔짱이 견고한 성벽 같다.
“좋은 질문이에요, 멜빈. 오레알의 주 구매 고객인 귀부인들께서는 소문에 무척 민감하세요. 하루에도 몇 번씩 가십지가 업데이트되는데, 거기에는 누가 오늘 빵을 몇 조각 먹었는지까지 기록되죠. 셀럽으로서 너무너무 가혹한 일이에요.”
“음…… 그게 제 질문과 무슨 연관이 있는지요?”
순간 공작의 눈살이 보기 싫게 구겨졌다. 에드먼드의 시선이 적당히 하라며 멜빈을 향했으나, 공명정대한 비서관께서는 오늘도 제 몫을 톡톡히 해냈다.
“아무래도 랜돌프의 예산이 정식적으로 들어가는 부분이다 보니 무례할 수 있다는 점 양해해 주십시오.”
나는 아랫입술을 잘근대며 멜빈을 바라봤다. 그러곤 범인 호명을 앞둔 탐정처럼 비장하게 말했다.
“우리는 이름 대신 회원 코드라는 걸 사용할 거니까요.”
“회원…… 코드요?”
“부여된 회원 코드는 제가 아닌 이상 알 수 없고 알려 주지도 않을 거예요. 그렇다면 자연스레 사람들은 누가 뭘 구매했는지 모를 수밖에 없죠. 불필요한 소문에서 해방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물건을 구매한 사실은 알되, 누가 어떤 물건을 샀는지는 모르게 하는 전략인가요?”
능숙한 비서관답게 멜빈은 내 말의 핵심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나는 감탄하며 맞장구를 쳤다.
“맞아요, 멜빈! 그리고 여기에서 우리 오레알만의 또 다른 차별점이 나오는데, 바로 등급에 따른 배송 제도! 모든 등급은 기본적으로 현장 수령이 아닌 집 앞 배송을 원칙으로 하죠. 하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람은 누구다?”
“플, 플래티넘?”
갑작스러운 질문에 멜빈이 자신 없게 말했다.
“그렇죠. 플래티넘! 이 플래티넘 등급부터는 개별 담당자를 붙여 1:1 밀착 관리를 받게 돼요. 주문은 물론 배송과 상담까지 개별 담당자를 통해 진행함으로써 대우받는 느낌을 주는 겁니다.”
“확실히 다른 길드에 비해 차별화는 되어 있는데, 과연 이게 경쟁력이 있을까? 이미 기존에도 그와 비슷한 고객 우대 제도는 있었는걸.”
줄곤 침묵하던 에드먼드가 턱 끝을 지분대며 말했다. 두 냉각수의 시간 차 공격에 머리가 아찔했다.
“오레알의 핵심은 등급을 돈으로 살 수 있다는 거죠! 계급으로 결정되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돈으로 과시하는 거를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평민도 귀족보다 높은 플래티넘이 될 수 있다고요. 거기다 우리 물건은 아무나 구할 수도 없어요. 한정판! 그 자체만으로 경쟁력은 확실하다고 자부해요.”
“그렇다면 좀 더 확실한 징표를 주는 건 어때? 예를 들면 등급을 나타내는 상징적 물건이라던가. 비밀 보장을 원칙으로 하되, 그 자체만으로 높은 등급의 사람들이 우월감을 느낄 수 있도록 말이야.”
순간 에드먼드의 등 뒤로 후광이 비췄다. 미래에서 태어났더라면 필시 빌 형에 버금가는 큰 수장이 됐을 거다.
“그럼 이쯤에서 설명은 끝난 건가?”
남몰래 감탄하는 사이, 코앞까지 다가온 그가 짧게 물었다. 엄했던 조금 전과 달리 입가에 웃음기가 서렸다.
“네, 뭐…… 대충은?”
“좋아, 랜돌프가 후원하지. 오늘 중으로 오레알에 대한 투자 계약서를 보낼 테니 꼼꼼히 살피고 서명하도록 해.”
“와, 정말요?! 진짜? 나중에 가서 무르기 없어요.”
나는 콩콩거리며 에드먼드 옆에 섰다. 곧바로 누가 말릴 새도 없이 에드먼드의 허리를 꼭 감쌌다. 그에 따라 공작의 거뭇한 피부가 발그레 물들었다.
“대신 성과가 없다면 각오해야 할 거야. 당신 말처럼 부인이라고 봐주는 건 없어.”
“당연하죠! 내가 조만간 기사단 건물 새로 올려 줄 테니까 기대해요.”
호언장담하는 나를 보며 남편의 눈가가 가늘게 휘었다. 그러곤 고개를 갸웃거리며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말이야. 저건 대체 뭐지?”
이어진 물음에 나는 에드먼드를 따라 눈길을 돌렸다. 길쭉한 손끝이 P 옆의 ‘?’를 가리켰다.
“아, 저거…….”
나는 부러 뒷말을 흐리며 샐쭉 웃었다. 궁금증 어린 시선이 여기저기에서 느껴졌으나 나는 답을 내놓지 않았다.
* * *
에드먼드와의 계약 체결 이후, 나는 곧장 농장으로 향했다. 모리 부인의 가든파티가 얼마 남지 않은 만큼 뭐든지 서둘러야 했다.
“어쭙잖은 거로는 씨알도 안 먹힐 거고…….”
농장에 도착한 나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굳어라, 착착’과 ‘백옥의 비밀’로 어느 정도 입소문은 탔으나, 두 제품만으로 길드를 꾸리는 데 한계가 있다.
“좀 더 확실한 거로 입지를 굳혀야 하는데, 뭐가 좋으려나?”
귓가엔 “미유우웅~” 달팽이 울음소리가 울렸다.
“있는 거라곤 달팽이뿐이네.”
나는 무너진 모래성처럼 테이블 위에 늘어졌다. 애꿎은 이마를 콩콩 받으며 고독한 창작의 시간을 이어 가던 그때.
똑똑! 머리 위로 테이블이 울렸다. 나는 말없이 눈만 굴려 소리의 주인공을 찾았다.
“부인?”
“응. 샤샤. 무슨 일?”
“간식거리 좀 가져왔어요. 점심도 거르셨잖아요.”
“옆에 두고 가.”
나는 한쪽 팔을 휘적거리며 기운 없이 말했다. 덕분에 샤샤의 미간이 보기 싫게 구겨졌다.
“아까는 기운이 넘치시더니, 왜 지금은 뭍에 나온 미역처럼 축 처져 계세요?”
“창작의 고통이랄까……? 투자도 받았고, 신제품은 내야겠는데 뭐가 좋을지 모르겠어.”
“일단 드시면서 생각하세요. 부인께서 입버릇처럼 하신 말 있으시잖아요. 당이 떨어지면 될 것도 안 된다고.”
그리 말한 샤샤가 갓 구운 쿠키를 손에 들려 줬다. 와작, 바삭한 쿠키를 입에 넣고 우물거리자 막혀 있던 머릿속이 조금은 환기됐다.
“그런데요, 부인. 궁금한 게 있는데요. 그 물음표 진짜 뭐예요?”
“물음표? 그게 뭐야?”
나는 입에 든 쿠키를 꿀꺽 삼키며 되물었다. 순간 샤샤의 표정이 떨떠름히 변했다.
“공작님께서 여쭤봤던 거 말이에요. 그것만 이야기를 안 하셨잖아요.”
“아~ 그거?”
이어진 반응에 샤샤가 두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거. 진짜 궁금했거든요. 대체 뭐길래 이야기를 안 하시는지……!”
“다이아. 멤버십의 끝판왕. 근데 그건 누군지 정해 놨어.”
“오잉? 누구요? 목표가 이미 있다는 말씀인 거예요?”
샤샤의 물음에 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별일 아니라는 듯, 새 쿠키를 집었다.
“아, 누군데요. 절대 이야기 안 할게요. 저한테만 이야기해 주세요, 네?”
“궁금해?”
“완전히 궁금하죠. 플래티넘도 그 정돈데 다이아는 어떤 서비스를 받는지도 궁금하고요. 아까는 공작님 앞이라 말 못 했지만 진짜 부인께서는 천재세요.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세요?”
“이게 다~ 검증된 방식이랄까. 다이아는 내가 직접 갈 생각이야. 최고 등급인데 그에 맞는 대우를 해 드려야지.”
“헙! 부인께서 직접요? 그래서 그게 누군데요? 누구길래 그렇게 콕! 점찍어 놓으신 것인지 진짜 궁금……!”
“황실. 금수저.”
순간 샤샤의 낯빛이 사색으로 변했다. 원대한 포부와 함께 와르르, 쿠키 바구니가 추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