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9화
한동안 서로의 애정을 확인하던 그때,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흠흠, 저, 저기…….”
난감한 목소리에 나는 맞붙은 입술을 서둘러 뗐다.
힐끔 살핀 주변엔 샤샤가 얼굴을 발갛게 익힌 채, 서 있었다.
“샤, 샤샤! 그러니까 그게 우리 공작님 얼굴에 뭐가 좀 묻어서 그것 좀 떼 주느라.”
나는 지나가던 개도 안 믿을 새빨간 거짓부렁을 늘이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런 내 주장을 뒷받침하듯 에드먼드가 턱 끝을 지분대며 말을 이었다.
“아, 그거 말하는 건가?”
“그, 그래요. 그거. 아까 그거. 하하.”
에드먼드의 노력에 나는 격렬히 호응하며 맞장구쳤다.
“그래. 잘생김.”
예?
얼토당토않은 말에 다문 입술이 떡하고 벌어졌다. 샤샤 역시 상황은 비슷했다. 이건 또 무슨 개소리냐는 듯, 진실의 미간이 살포시 구겨졌다.
휘잉. 어색한 분위기가 한동안 계속됐다. 숨 막히는 눈치 싸움이 이어지던 찰나, 샤샤가 기지를 발휘했다.
“와……, 공, 공작님! 너무 재미있으세요. 얼굴에 묻은 게 잘생김이라니. 아하하……!”
샤샤는 고장 난 원숭이 인형이라도 된 듯 까르륵댔다. 눈가에 맺힌 물방울이 제법 절박했다.
마치 ‘죽이다’의 반대가 ‘밥이다’이라던 부장님 개그에 박장대소해 주던 나를 보는 듯했다.
우리 샤샤 열심히 사네.
나는 측은한 얼굴로 샤샤의 어깨를 두어 번 토닥였다. 그러곤 “무슨 일이야?” 다정히 물었다.
“아! 지시하셨던 차랑 디저트가 준비되어서요.”
이어진 답변에 나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샤샤에게 ‘무언가’ 지시한 건 맞지만 디저트를 준비하라 한 기억은 없다.
잠시 고민한 나는 생글거리는 샤샤를 향해 “갑자기?”하고 입 모양을 냈다. 대답을 기다리는 사이, 나란히 선 에드먼드가 사뿐히 허리를 감쌌다.
오, 주여……!
맞닿은 온기에 온몸이 간질거렸다. 이런 존잘남과 마음만 먹으면 뭐든 할 수 있다니, 뒤바뀐 상황에 나는 쾌재를 불렀다.
“어디로 가면 되지?”
“후원 뒤 야외 테라스에 준비해 뒀습니다.”
에드먼드의 물음에 샤샤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러곤 스르르 빠져 뒤쪽으로 왔다.
“부인.”
샤샤가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슬쩍 돌렸다. “왜?”라고 입 모양으로 묻자, 힐끔 눈치를 살피던 샤샤가 슬며시 다가와 귓속말했다.
“공작님께서 제게 따로 이야기하셨어요.”
“응?”
“부인께서 배고프실 거라고 가장 좋아하는 것들로만 준비하라고 신신당부하셨거든요.”
출구 없는 마성의 매력에 나는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더는 천천히 갈 생각이 없다더니 애정 표현은 물론 주변에도 스스럼이 없었다.
이게 바로 사랑받는 삶?
샘솟는 감정에 나는 에드먼드의 팔목을 꼭 붙들었다. 한참을 비비적대자 머리 위로 시선이 느껴졌다.
“간지러워.”
겉바속촉이시네요.
무뚝뚝한 말과 달리 눈에는 애정이 담겨 있다. 짐짓 허리를 붙든 손에 힘이 더해지기도 했다. 나는 그런 남편을 보며 샐쭉 미소 지었다. 꿈이라면 절대 깨지 않길 바랐다.
* * *
도착한 야외 테라스는 완벽 그 자체였다. 따스하게 내리쬐는 가을볕, 계절에 어울리는 밤 페이스트리와 폭신한 호박 파운드케이크, 디저트의 단맛을 중화시킬 씁쓰름한 홍차까지!
“와…… 맛있겠다.”
나는 도도도 달려가 군침을 다셨다. 재빨리 테이블에 착석한 나는 발을 동동 구르며 에드먼드를 기다렸다.
“먼저 먹지 왜?”
어느새 곁으로 온 그가 맞은편에 앉아 흥미로운 듯 물었다. 그러곤 투박한 손을 들어 갓 구운 빵을 먹기 좋게 잘랐다.
“그래도 같이 먹어야죠. 원래 행복은 함께하면 두 배거든요.”
말과 달리 내 시선은 접시 위에 고정됐다. 몽글몽글 피어나는 연기를 보며 극한의 인내심을 끌어냈다.
“날 그렇게 봐 주는 건 어때?”
에드먼드가 퉁명스레 말하며 포크를 집었다. 그러곤 콕, 잘라 둔 빵 조각을 내게 건넸다.
“음……! 진짜 맛있다.”
입 안 가득 퍼지는 달콤함에 아드레날린이 솟구쳤다. 음식은 역시 제철이라더니, 오독거리는 알밤이 일품 중 일품이었다.
무아지경에 빠진 나는 씹는 족족 환호성을 내질렀다. 중간중간 에드먼드에게도 먹을 것을 권했지만 사양했다.
“점심을 먹으려면 배를 비워 두는 게 좋을 거야.”
“먹고 또 먹으면 되죠. 이런 애매한 시간에 음식을 먹인 당신이 잘못이라고요. 나는 공복을 유지할 생각이었다고요.”
“그 작은 몸에 이게 다 들어간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군.”
에드먼드가 텅 빈 케이크 틀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그러곤 바지런히 손을 놀려 빈 접시를 채웠다.
“먹는 건 좋은데 아프지만 마. 체하기라도 하면 곤란하니까.”
그러곤 힐끔, 에드먼드가 옆에 있던 홍차를 쓱 밀며 엄히 말했다. 집요한 눈동자에 나는 마지못해 찻잔을 들었다.
비교적 단맛을 좋아하는 나로선, 홍차 특유의 씁쓰름한 맛은 불호 중의 불호였다. 굳이 고생해 가며 과일 청을 담근 것도 그런 이유 중 하나였다.
“치, 이건 별로 맛이 없는데.”
나는 부푼 뺨을 우물거리며 툴툴댔다. 그러곤 꿀꺽, 식어 버린 찻물을 삼켰다.
응? 뭐야, 고소하잖아?
예상과 다른 맛에 나는 눈동자를 굴려 샤샤를 바라봤다. 마주친 시선에 샤샤는 조용히 검지를 들어 에드먼드를 가리켰다.
“아이를 키우는 집에서는 우유를 넣어 먹인다더군.”
하, 치인다. 치여.
완벽한 외조에 나는 말문이 막혔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에드먼드 옆에 터를 잡고 앉았다. 그러곤 커다란 눈을 깜박이며 그와 시선을 맞췄다.
“여보가 먹여 줘요.”
이어진 요구에 풉! 에드먼드의 낯빛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뭐, 뭐? 먹여 줘?”
“아, 먹여 줘요. 팔이 너무 아파서 못 먹겠어요.”
나는 부러 어린애처럼 굴며 칭얼거렸다. 이왕 느끼는 연애의 맛, 1부터 100까지 제대로 느껴볼 심산이었다. 순간 에드먼드의 입가에 웃음이 서렸다.
“하여간 어리광은.”
작게 코웃음 친 그가 쪽! 가볍게 입을 맞추곤 순순히 장단을 맞췄다.
이런 게 사는 거지.
클로엔, 그동안 고생했다.
나는 먹먹한 심장을 부여잡으며 행복에 몸서리쳤다. 그렇게 한참을 어린애처럼 음식을 받아먹던 그때, 문득 데릭의 얼굴이 스친 건 지독한 우연이었다.
“저기…… 내가 노파심에 묻는 건데요.”
“응?”
이어진 내 말에 에드먼드가 포크를 내려놓고 집중했다. 꿀꺽, 마른침을 삼킨 나는 긴장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혹시 나 때문에 누군가 일자리를 잃는다거나, 아니면 잃을 예정이라거나, 혹은 이미 잃었다거나 그렇지는 않죠?”
순간 두 사람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잠시 고민하던 그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글쎄.”
“아니, 속인 것도 나고 훔친 것도 난데 혹시라도 나 때문에 피해를 볼까 봐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열매를 바꿔치기하던 날, 내가 데릭을 부추겼거든요. 모디카를 불러서 일을 시키라고. 아마 모디카도 내가 그럴 줄은 꿈에도 몰랐을 거예요.”
“…….”
“그리고 폭죽을 터뜨리기 전까지도 집사는 전혀 몰랐어요. 그저 나에 대한 충성심이 높았던 것뿐이고 그걸 이용한 건 나예요. 혹시 두 사람에 대한 처분이 있다면……!”
그때 커다란 그림자가 나를 향해 기울었다. 한 뼘 남짓한 거리에 나는 입술을 달싹이며 뒷말을 흐렸다.
에드먼드가 말했다.
“내가 그 두 사람을 어떻게 할 것 같지?”
이어진 물음에 나는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정했던 조금 전과 달리 에드먼드의 표정이 딱딱히 굳어 있었다. 그에 따라 내 시선은 죄인처럼 꺾였다.
순간 에드먼드의 미간이 와락 구겨졌으나 숙인 고개로 인해 미처 보지 못했다.
“당신과는 별개로 합당한 처벌을 내려야겠지. 모디카는 지키지 못했고, 집사는 막지 못했으니까.”
밀려든 죄책감에 나는 입술을 꾹 눌렀다. 거인족인 모디카는 공작저의 보호가 없다면 금세 표적이 되어 노예 시장으로 팔려 갈 것이다. 나이 든 노 집사는 곧 닥칠 겨울을 준비도 못 한 채, 맨몸으로 쫓겨날 거다.
모두의 안위를 위해서라도 에드먼드를 설득해야 한다. 다시 한번 생각해 달라 호소해 보려던 그때였다.
“하지만……!”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을 생각이야. 이번만큼은 예외를 둘까 하거든.”
이어진 대답에 나는 두 눈을 깜박이며 에드먼드를 바라봤다. 놀란 나와 달리 느른히 미소 지은 그가 우아한 몸짓으로 거리를 좁혔다.
“대신에 조건이 있어.”
닿을 듯 말 듯 한 틈을 사이에 두고 에드먼드가 자리에 멈췄다. 그러곤 커다란 손을 뻗어 흐트러진 백금색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앞으로 있을 모든 걸 나와 공유해. 단 하나의 숨김도 없이.”
듣기 좋은 울림에 나는 홀린 듯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