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4화
어느새 해는 저물어 붉은 노을빛을 만들었다. 마지막 대결을 알리는 나팔 소리가 뿌우! 공중에 울렸다.
“어우, 저 언니 말이 많아도 너무 많아. 어떻게 세 시간을 혼자 떠드냐.”
휴게실을 나온 나는 멍멍한 귀를 때렸다. 미리 나와 있던 샤샤가 시원한 음료를 건네며 상황을 보고했다.
“두 번째 대결도 저희가 승리했데요! 쏘는 족족 정중앙을 딱! 이건 뭐, 아마추어와 프로의 대결이었다고 하더라고요.”
“그것참 다행이네.”
나는 건네받은 음료를 쭙쭙대며 건조하게 말했다. 모리 부인에게 기를 모조리 빨린 터라 당이 떨어진 상태였다.
“마지막 종목은 목각검 대결인데, 헤슈턴의 게리타랑 티베로가 붙는데요!”
“티베로? 아, 요즘 통 소원했네. 내가 너무 바빴어.”
“기회를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이죠. 기사단 막내 단원이 이렇게 큰 경기를 운영한다는 게 말이 되나요.”
“놉. 티베로는 자격이 있어. 엄한 데 가서 안 때려 박고 헤슈턴에 때려 박고 왔으니까 이런 좋은 빌미가 생긴 거지.”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캬, 오백 년 묶은 체증이 내려가는 기분이네.”
시원하게 목을 축인 나는 개운한 신음을 토해 냈다. 그러곤 두 다리를 휘적거리며 저택으로 향했다.
“이번에는 또 어디 가시려고요! 이제 곧 마지막인데 자리를 지키셔야죠.”
“나는 갈 데가 있으니까, 샤샤 너 먼저 가 있어.”
“제가 부인을 두고 어디를 가요. 꼭 붙어 있을 거예요.”
제 말을 증명하듯, 샤샤는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잠시 멈칫한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걸음을 다시 했다.
“왜, 그이가 나를 좀 더 꼼꼼히 감시하래?”
“그랬으면 이미 며칠 전에 오두막 문 뜯고 들어갔죠. 그냥 제가 걱정되어서 그래요. 이렇게나 사람이 많은데, 모두가 안전하다는 보장이 없잖아요.”
“오, 언변이 좀 늘었는데. 나에 대한 충심이다?”
“충심이자, 진심이에요. 부인께서 말씀은 그렇게 하셔도 따뜻한 분이신 거 제가 모를 줄 알아요? 아무리 못 배우고 무지해도 그 정도는 안다고요.”
어쩐지 코끝이 시큰했다. 미운 정도 정이라고, 서로에게 느끼는 감정이 비슷한 모양이다.
“원래 서민의 마음은 서민이 아는 거지.”
“그게 무슨 말이세요? 부인께서는 태생부터 귀족이시면서.”
알 수 없는 내 말에 샤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사이 저택 안으로 들어온 나는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드넓은 홀을 지나 1층 끝 쪽에 자리한 집사실로 향하던 그때, 나이 든 집사가 방에서 나왔다.
“아가씨?”
데릭이 주름진 눈을 가늘게 뜨며 대상을 확인했다. 결투장 1열에서 자리를 지켜야 할 공작 부인께서 왜 여기에 있는지, 집사로서는 의문이었다.
“부탁이 있어.”
‘부탁’이라는 말에 데릭은 걸음을 주춤거렸다. 며칠 전, 아가씨의 부탁이랍시고 모디카를 일꾼으로 썼다가 공작께 크게 혼이 난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부탁……이라니요?”
“내가 쓰던 오두막에 가면 커다란 수레가 하나 있을 거야. 거기에 이상한 막대기들이 있거든 그걸……!”
“아뇨! 안 됩니다.”
예상치 못한 답변에 나는 잠시 당황했다. 아가씨 말이라면 죽는시늉이라도 하던 데릭의 변심은 내 완벽한 시뮬레이션에 치명적인 변수였다.
“부인께서 무슨 일을 꾸미시는지 모르겠지만, 공작께서 아시면 안 되는 일이니 제게 오신 것 아닙니까? 절대 안 됩니다.”
오호, 밑장을 빼시겠다?
폭죽을 만드는 데까지는 성공했으나, 모두의 눈을 피해 세팅을 해 놓기란 불가능했다. 고로 모두의 관심이 경합에 쏠린 지금 은밀히 움직여야만 했다.
그렇다고 직접 움직이기에는 시간도 없을뿐더러, 보는 눈이 너무 많다. 잠시 고민한 나는 최후의 보루를 쓰기로 했다.
나는 부러 고개를 푹 숙이곤 두 눈을 부릅떴다. 커다란 동공에 안압이 차오를 즈음, 투명한 눈물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샤샤……. 오늘 내 세상이 무너졌어.”
아련한 목소리에 샤샤는 물론 데릭까지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촉촉한 눈시울로 샤샤를 바라봤다.
“내가 이 집에서 믿었던 건 집사 하나뿐이었는데……. 나는 이제 누굴 믿어야 하니.”
“그걸 이렇게 대놓고 말씀하신다고요?”
샤샤의 속삭임에 나는 조용히 이빨을 드러냈다. 그러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감정을 다잡고 하려던 말을 이었다.
“어려서부터 나 때문에 데릭이 참 고생이 많았지. 어머니 빈자리를 채워 주겠다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내가 어떻게 잊겠어. 데릭이 변한 것도 다 내 탓이야.”
“아, 아가씨……!”
마음이 동한 집사가 촉촉한 눈가를 닦으며 훌쩍였다.
* * *
임무를 마친 나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저택을 나섰다. 정확히 한 시간 뒤, 어두운 밤하늘은 화려한 불꽃으로 장식될 거다.
뒤따를 후폭풍이 걱정스럽긴 했으나 일단은 오늘을 즐기기로 했다. 그간의 노고를 생각하자니 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완벽해.”
홀로 중얼거린 나는 서둘러 결투장으로 향했다. 한참을 정신없이 나아가던 그 순간, 에드먼드와 시선이 맞닥뜨렸다.
“와아아!”
관중석에서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다. 시야에는 헉헉대며 목각 검을 겨누고 있는 티베로와 완전히 제압된 게리타가 보였다.
“부인, 저희가 완승했나 봐요!”
모두가 랜돌프의 승리를 확신하던 그때, 조용히 대결을 지켜보던 요제프가 입술을 아득 물었다.
절망에 찬 요제프의 시선이 클로엔을 향했다. 그러곤 경기장 중앙으로 튀어나왔다.
때아닌 난입에 에드먼드의 시선 역시 빠르게 굴렀다.
“역시나 랜돌프는 비열하고, 약삭빠르군요.”
요제프의 도발에 에드먼드의 눈살이 흥미로운 듯 접혔다.
‘역시나 예상을 벗어나는 법이 없군.’
줄곧 자리를 지키던 그가 거대한 장골을 과시하며 일어났다. 겁 없는 헤슈턴의 장자가 이번에는 또 무슨 헛소리를 할지 내심 궁금했다.
“비열하고 약삭빠르다. 말이 지나치군, 역시 주제를 모르는 건가?”
“말은 바로 해야죠. 주제를 모르기론 랜돌프를 비길 자가 있습니까? 위대하신 공작께서 이따위 저급한 잔꾀를 부릴 줄은 몰랐군요.”
“저급한 잔꾀.”
짧게 조소한 그가 한음 한음 곱씹었다. 그러곤 굳은 표정으로 요제프와의 거리를 좁혔다. 자칫 가문 전쟁으로 번질 일촉즉발인 상황에 주변은 얼어붙었다. 애석하게도 에드먼드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지만 말이다.
사람의 죽음이 어떠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지, 에드먼드는 숱한 전쟁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다. 굳이 손에 피를 묻히고 싶지도, 순진무구한 아내에게 험한 꼴을 보여 주고 싶지도 않다.
요제프가 말했다.
“헤슈턴의 기사들은 검에 능한 자들입니다. 이따위 어린애들 장난질에 승부를 건다는 것 자체가 웃긴 일이지요.”
“그런 애들 싸움에 졌다는 게 자존심이 상하는 거겠지.”
에드먼드가 작게 코웃음 치며 되받아쳤다.
죽음이 뭔지도 모르면서.
나직한 울림에 요제프의 두 눈에 살의가 차올랐다.
“패배? 이런 말 같지도 않은 경합에서는 차라리 이기지 않는 게 낫습니다. 헤슈턴의 패배를 승복하죠. 하지만 오늘로써 랜돌프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더욱 잘 알았습니다.”
“랜돌프가 검을 들었다면 너희는 모두 죽었다.”
“…….”
“나로선 헤슈턴에게 자비를 베푼 거다. 모든 걸 잃지 않도록 면을 세워 줬달까?”
순간 요제프의 두 주먹이 절망과 모멸감에 젖어 바르르 떨렸다. 그 모습을 에드먼드는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봤다.
너는 거기까지다, 나와 대적할 수 없다. 딱 그 정도만 알려 줄 참이었다. 겁도 없이 지껄인 개소리가 아니었다면 끝까지 평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내게서 클로엔을 앗아 갈 때도 그렇게 말했지. 하나를 얻고 모두를 잃고 싶다면 대항하라고. 너란 짐승은 그때나 지금이나 비열하고, 약삭빨랐다.”
‘클로엔’ 단 세글자만으로 이성이 마비됐다. 삐뚜름하던 입가가 싸늘하게 굳었다. 감히 누구 앞에서 제 아내의 이름을 논하는 건지, 그간 유지해 온 평정심이 와르르 무너졌다.
“난 절대 그날의 치욕을 잊을 수가 없어. 내 약혼녀를 눈앞에서 잃던 그 순간을 영원히 기억한다. 그리고 언젠가 모든 걸 제자리로 돌릴 거야.”
요제프의 일격에 에드먼드는 이를 아득 물었다. 기류를 느낀 멜빈이 중재해 보려 했으나, 이미 안전핀은 뽑힌 지 오래였다.
관용을 베풀었음에도, 과거를 운운하며 제 아내를 논했다. 가문도, 기사단도, 자신에 대한 모욕도 모두 참았지만 이건 이야기가 다르다.
조용히 내용을 곱씹던 그가 피식, 작게 코웃음 쳤다. 그러곤 결심한 듯, 요제프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섰다.
“그럼 원하는 대로 해 주면 되겠군.”
무해한 미소와 달리, 공작의 시선이 집요했다. 한순간 싸늘해진 공기에 요제프가 마른침을 삼켰다.
“원하는 대로 해 준다니, 대체 뭘 말하는 겁니까?”
되묻는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전에 없던 살기에 요제프는 등골이 오싹했다. 순간 그는 건드리지 말아야 할 이를 건드렸음을 깨달았다.
그간의 호의에 취해 에드먼드 랜돌프가 피에 미친 살인귀, 전쟁광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것이다.
모두가 숨을 죽이고 대치한 두 사람을 바라봤다. 숨 한 모금조차 조심스럽던 그때, 에드먼드가 고개를 깊이 숙였다.
공작이 말했다.
“내 자비는 여기까지다.”
“……!”
“검을 들어라, 요제프 헤슈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