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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남편과의 이혼을 거부합니다 (93)화 (93/107)

제93화

한차례 게워 내기를 마친 나는 젖은 입을 쓱쓱 닦았다. 꾸역꾸역 밀어 넣은 꼬치가 기어이 탈을 낸 모양이다.

“괜찮으세요, 부인? 많이 안 좋으세요? 의사를 불러올까요?”

“아냐……. 그냥 좀 많이 먹어서 그렇지, 금방 괜찮아져.”

나는 지친 몸을 늘어뜨리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비록 내 입과 위는 망쳐 버렸으나 상인들의 감동을 얻어 냈으니 그걸로 됐다.

“헙! 부인, 지금 우시는 거예요? 제가 빨리 가서 이부자리라도 펴 둘까요?”

하지만 촉촉한 눈시울은 미처 감추지 못한 모양이다. 놀란 샤샤가 한걸음에 달려와 내 얼굴을 요리조리 살폈다.

“으흑, 아까 그게 너무 맛있어서. 비둘기, 내가 비둘기…….”

서러움이 밀려온 나는 살포시 입을 틀어막았다. 잠시 각성의 시간을 가진 나는 차림새를 정돈하고 문을 나섰다.

동시에 뿌우!

다음 대결을 알리는 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뒤에 있던 샤샤가 바짝 따라붙었다.

“두 번째 종목은 석궁이래요. 과녁 중앙에 가장 많이 맞춘 쪽이 승리한다고 하더라고요. 기사단 최고 연장자이신 피터 님께서 출전하신다고 하는데 상대편도 만만치는 않아요.”

“누구길래?”

“루스라고 헤슈턴의 부단장을 맡고 있다는데, 그 살기가 보통이 아닌가 봐요. 그래도 피터 님을 따라올 수는 없죠. 경력이 얼만데.”

“암, 원래 노장은 죽지 않는 법이지. 근데 부인들께서 안 보이네? 분명히 왔을 텐데.”

“아마 결투장 뒤쪽에 마련된 휴게실에 모여 계시지 않을까요? 괜히 나와 있다가 얼굴이라도 타면 곤란하잖아요.”

“오오, 휴게실.”

나는 손가락을 튕기며 걸음을 멈췄다. 수많은 잠재 고객이 있는 그곳에 클로엔 랜돌프가 빠질 수는 없다.

랜돌프의 평판이 안정되어 가는 지금! 바로 지금이 물건을 푸는 적기였다. 깨달음을 얻은 나는 단전 깊은 곳에서부터 탄식을 쏟아 냈다.

“아……! 내가 지금 여기 있을 때가 아니었네. 나를 부르는 황금성이 저기 있는데.”

“예? 황금성이요?”

“됐고, 그쪽으로 가자. 지금 대결이 중요한 게 아니야.”

“그래도 부인께서 자리를 지키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사기 증진도 되고.”

“에이, 어차피 우리가 이겨. 주인공 버프가 괜히 있겠어? 그들은 그들의 일을 하고, 나는 이제 내 일을 해야지.”

“부인의 일이 뭔데요?”

샤샤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질문을 던졌다. 그 순간 크큭, 내 안의 흑염룡이 날뛰었다.

“길드 창궐.”

“네?! 길드요? 그냥 소소하게 물건이나 좀 파시려던 거 아니셨어요? 갑자기 길드라니요.”

“오래전부터…… 계획했달까?”

나는 부러 목소리를 내리깔며 분위기 있게 말했다. 순간 샤샤의 미간이 일그러지기는 했으나 금세 낯빛을 바꿨다.

* * *

“클로엔 님!”

휴게실로 들어섬과 동시에 저 멀리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리하프와 릴리스, 이 세계 인싸들이었다.

“어머, 리하프랑 릴리스 양이군요. 그동안 잘 지냈어요?”

나는 다정한 공작 부인 행세를 하며 사람 좋게 웃었다. 어느새 옆으로 온 리하프가 자연스레 팔짱을 엮었다.

“요즘 통 보이지를 않으셔서 보고 싶었어요, 클로엔 님. 많이 바쁘셨던 거예요?”

“경합 준비 때문에 정신이 없었지 뭐예요. 안 그래도 소식이 궁금했었는데 이렇게 와 줘서 고마워요, 리하프 양.”

“경합 준비요? 부인께서 따로 준비한 게 있으신 거예요?”

조용히 발을 맞추던 릴리스가 타이밍 좋게 질문했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곤란한 듯 망설였다.

“엄…… 그게 말이죠. 오늘 연회 마지막까지 남으면 볼 수 있을 거예요.”

“물론이죠! 무슨 일이 있더라도 끝까지 남을게요! 역시 마지막에 엄청난 이벤트가 준비되어 있는 거죠?”

신이 난 리하프가 발을 동동 구르며 말했다. 뒤따르던 릴리스 역시 반응은 비슷했다. 라비스텔에서 가장 가볍고 파급력이 좋은 두 마당발에 정보를 흘렸으니, 경합 마지막까지 인파가 빠질 일은 없다.

‘목숨 걸고 만든 내 역작을 모두가 감상하는 거지……!’

끌끌, 나는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랜돌프의 승리와 함께 검은 하늘 위로 펑펑! 폭죽이 터지고, 그 밑에선 감동에 젖은 사람들이 “언빌리버블!”을 외치며 랜돌프의 위대함을 깨닫는다.

그리고 등장하는 희대의 천재, 클로엔 랜돌프와 그녀를 지키는 근육 조각상 에드먼드 랜돌프.

얼굴 합 완벽, 시너지 완벽.

“이런 전개라면 그이도 나를 탓할 수는 없지.”

홀로 망상에 젖은 나를 보며 리하프와 릴리스가 잠시 주춤거렸다. 눈치 빠른 샤샤가 남몰래 옆구리를 찔러 주지 않았더라면 이대로 4절까지 갈 뻔했다.

“하하, 미안해요. 잠깐 다른 생각 좀 하느라. 어…… 여기서 이러지 말고 안으로 들어갈까요?”

시선을 의식한 나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동시에 리하프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안 그래도 다들 부인께서 언제 오시나 기다리고 있어요. 제 피부가 요즘 너~무 좋아졌다고 비법이 궁금하다길래 정말 어쩔 수 없이 말씀드렸거든요.”

“제 기침도 눈에 띄게 좋아져서 모두 궁금해했어요!”

앞서가던 릴리스가 닫힌 문을 열며 샐쭉 웃었다. 그와 동시에, 바글바글한 내부가 시야에 들어왔다. 적어도 스무 명, 동행한 시녀들을 포함한다면 그 수는 배였다.

“저기 랜돌프 부인이 오네요!”

“부인께서 만드신 크림이 효과가 그렇게 좋다던데 혹시 남는 게 있으면 얻을 수 있을까요?”

“저희 헨리가에서 초대장을 몇 번 보냈는데, 답신이 없으셔서 섭섭했지 뭐예요. 이렇게라도 뵙게 되어 너무 영광이에요.”

소문을 듣고 찾아온 하이에나들이 벌떼처럼 몰려들었다. 나는 조용히 샤샤를 향해 눈짓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밀봉된 상자 하나가 휴게실 정중앙에 놓였다.

궁금증 어린 시선이 하나둘 모였다. 짝짝, 손뼉을 두드리자 빈 테이블 위로 동전만 한 작은 용기가 일렬로 늘어졌다.

테이블 위 물건들은 소문의 ‘백옥의 비밀’이 담긴 비매품 용기였다. 나는 양팔을 부드럽게 늘이며 샐쭉 미소 지었다.

“시간 내어 찾아 주신 모든 분께 성의 표시를 조금 해 보려고 해요. 전부터 문의가 많아 준비해 봤답니다. 두당 하나씩, 양심껏 가져가 주세요.”

동시에 벌떼 같은 인파가 우르르 몰려왔다. 옆에선 언제쯤 정식으로 살 수 있냐는 문의가 빗발쳤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모리 부인이 있었다.

“이렇게 조금씩 나눠 주느니, 차라리 정식으로 팔아 보는 게 어때요?”

한껏 멋을 낸 모리 부인이 고고한 목소리로 말했다. 덩달아 옆에 있던 귀부인들이 입을 모아 이야기했다.

“그래요, 우리가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정식으로 판매하면 파는 사람도 사는 사람도 편하잖아요.”

“이참에 랜돌프에서도 제조에 손을 대보는 거죠. 공작께 말씀드리면 설마 막기야 하겠어요?”

동이 난 테이블을 바라보며 부러 뜸을 들였다. 그러곤 자신 없는 목소리로 뒷말을 흐렸다.

“글쎄요……. 제가 뭘 해 본 적이 없어서 잘할 수 있을는지.”

“원한다면 내가 도와줄 수도 있어요. 나도 이렇게 감질나게 가져가느니, 제값 주고 사는 게 마음이 편하고.”

애가 닳은 모리 부인이 두 팔을 걷어붙이며 나섰다.

기본적인 케어 제품도 전무후무한 이곳에서 기능성을 겸비한 달팽이 크림은 그야말로 혁신 중의 혁신.

이미 효과를 본 사람들은 혹여, 클로엔이 ‘하지 않겠다.’ 못을 박을까 싶어 입술을 잘근잘근 물었다.

“저는…….”

힐끔, 주변을 살핀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모두가 내 대답에 집중한 지금, 경연 프로그램 MC들이 왜 그리 결과에 뜸을 들였는지 알 것 같다.

“모리 부인께서 도와주시면 당연히 해 봐야죠. 감사해요.”

나는 수줍게 미소 지으며 모리 부인 옆에 섰다. 동시에 안도 섞인 신음이 곳곳에서 들려왔다. 모리 부인이 말했다.

“그래요. 잘 생각했어요. 이참에 정식으로 이름도 짓고 많은 사람에게 좋은 물건을 제공해 주는 거죠. 따로 이름을 정해 둔 게 없다면 내가 좀 도와줄까요? 사업 선배로서……!”

“아뇨. 이름은 이미 정해 둬서.”

“아…… 그래요? 전혀 생각이 없었던 건 아닌 모양이네요.”

단호한 내 반응에 모리 부인이 떨떠름히 물었다. 뒤바뀐 공기의 흐름에 나는 재빨리 상업 미소를 장착하며 살갑게 굴었다.

“호호호, 이렇게들 좋아하시니 저 혼자 나름 고민을 하기는 했었거든요. 말이 나온 김에 언니께서 여시는 가든파티에서 소개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언, 언니……?”

생소한 호칭에 모리 부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멈칫했다.

‘모리 부인께서는 외동으로 자라셨어요. 젊어서 남편까지 잃으셨으니 정이 고프신 분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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