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0화
“안녕하십니까, 부인? 저는 린턴 퀸타르트 님의 수석 비서관, 말로 드보르타라고 합니다.”
자신을 수석 비서관이라고 소개한 말로는 거리낌 없이 손을 내밀었다. 잠시 고민한 나는 말로의 손바닥을 조심스레 밀었다.
“악수는 생략하고, 뭔 타르트요? 킹타르트께서 나는 왜?”
순간 옆에 있던 샤샤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곤 잽싸게 옆으로 와 귓속말을 속삭였다.
“부인, 킹타르트가 아니라 퀸타르트요. 황태자 전하의 비서관이세요.”
“뭐?! 이분께서 황태자 전하의 비서관이라고?!”
나는 부러 눈을 크게 뜨며 호들갑을 떨었다. 반응이 마음에 든 모양인지, 말로의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서렸다.
그러기도 잠시 나는 두 팔을 교차하며 삐뚜름히 섰다.
“근데?”
이어진 내 말에 주변은 경악으로 물들었다. 데릭 역시 은근히 눈치를 줬으나, 아랑곳하지 않고 자세를 유지했다.
미천한 분께서 귀한 곳은 왜?
황제가 살아 있는 한 황태자는 권력 1순위도 아닐뿐더러, 린턴 퀸타르트는 원작에서도 한 줌 분량으로 유명했다.
에드먼드를 질투해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다 자멸해 버린 비루한 황태자. 원작 속 ‘행인 1’만큼이나 임팩트 없는 인물이 바로, 린턴 퀸타르트였다.
나는 교차한 팔을 툭툭 두드리며 말로의 곁을 맴돌았다. 네가 누군지는 알겠으니, 용건이나 말해 보라는 암묵적 표식이었다.
“린턴 황태자께서 오늘 경합에 사용되는 음식, 소모품, 답례품 등 행사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지원하겠다고 하십니다.”
질 수 없다는 듯 비서관 말로가 어깨를 쫙, 피며 으스댔다. 그러곤 짝짝! 손뼉을 두드렸다.
“필요한 건 모두 준비됐으니 연회장을 안내하시지요, 부인.”
신호와 함께 대기 중이던 시종들이 수레를 밀고 들어왔다. 수레에는 식자재를 비롯한 온갖 잡동사니가 담겨 있었다. 그 뒤로도 커다란 수레들이 줄줄이 사탕처럼 늘여졌다.
“어머, 이걸 많은 것들을 다~ 저희 주신다고요?”
“물론입니다, 부인. 황태자 전하께서 랜돌프를 위해 기꺼이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세상에……!”
나는 부러 두 손을 마주 잡으며 몸을 배배 꼬았다. 그러곤 걸신들린 사람처럼 수레를 뒤적였다. 출처를 증명하듯, 눈이 닿는 모든 곳에 황실의 표식이 그려 있었다.
“너무 눈부시네요. 황실에서 이런 귀한 것들을……!”
나는 조용히 하던 행동을 멈췄다. 그러곤 스르르, 우아한 몸짓으로 자세를 바로 했다.
“그런데 황태자 전하께서 굳이 이걸 왜?”
뾰족한 질문에 말로는 잠시 당황했다. 앞선 행동에 그저 공짜라면 사족을 못 쓰고 달려드는 텅텅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건…… 평민들을 위해 기꺼이 랜돌프의 성벽을 연다고 들었습니다. 황태자께서 공작 부부의 깊은 뜻을 헤아리고 기꺼이 지원하길 원하십니다.”
“그러니까 공은 다 그쪽에서 챙기시겠다? 그러고 보니 오늘 아침에 라비스에서 진짜 재미난 기사가 실렸던데. R 가문 스캔들이라고 들어는 봤나 몰라?”
나는 한쪽 다리를 수레에 걸치며 위협적으로 말했다. 일동 당황했으나 나는 멈추지 않았다. 누구든 내 조각상을 건드린다면, 찢을 각오가 됐다.
내가 폭탄 밭에서도 살아 돌아온 악질 중의 악질이야.
감히 누구 밥그릇을 넘봐.
“아, 라비스 신문이 황실 직속 언론사였던가? 그럼 모를 리가 없겠네. 오늘 아침 1면을 화려하게 장식한 R 가문.”
내 남편 먹으라고 차려 둔 밥그릇에 무전취식을 하고, 그것도 모자라 오늘 신문에선 빚내서 연회나 여는 사치꾼으로 몰았다.
“…….”
핵심을 찔린 듯, 말로는 입을 꾹 다물었다. 수가 훤히 보이는 패에 나는 작게 도리질했다.
어딘지 부족한 린턴의 일 처리에 애도를 표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진리를 파워 직장인인 나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이러니까 행인 1보다도 존재감이 없지.
나는 귀찮은 손님을 처리하듯, 뻗은 팔을 휘휘 저었다. 그러곤 짧고 간결하게 의사를 전했다.
“가.”
“무, 무례하군요, 랜돌프 부인! 황태자 전하의 진심을 이렇게 매도하다니. 라비스가 황실 산하이기는 하나……!”
“가라고. 확 다 주거 침입으로 고소해 버리기 전에.”
“랜돌프 부인!”
약이 오른 말로는 곧장 언성을 높였다. 나는 떨어질 듯한 귀청을 붙들며 인상을 구겼다. 그러곤 멀뚱히 서 있는 데릭을 향해 눈짓했다.
“아, 뭐 해? 내보내지 않고.”
“하, 하지만 부인……!”
“전하께서 기분 상하지 않으시게 예의 갖춰서 입구까지 잘 모셔다드려. 적당히 마음만 받겠다고 서신 하나 들려 보내고. 잘할 수 있지?”
나는 데릭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며 다정히 말했다. 고함치는 말로를 향해 두 번 다시 오지 말라, 으르렁대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 * *
“부인, 대체 어쩌자고 그러셨어요. 모르는 척 눈 딱 감고 받으시지, 오늘 일로 황태자 전하께서 악의를 품으실지도 모른다고요.”
후환이 두려운지 샤샤는 머리를 마는 내내 징징댔다. 나는 무료한 표정으로 두 눈을 끔벅댔다. 요 며칠 무리를 해서인지, 피로가 쏟아졌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굳이 그렇게 척을 질 필요가 있었나 싶어요. 무엇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황태자 전하신데.”
그렇게 샤샤의 무한 닦달이 100번째를 향해 달려가던 찰나, 나는 얕은 숨을 내쉬며 답을 내놓았다.
“그거 받으면 우리 평판 똥 되는 건 순식간이야.”
“똥이라뇨? 린턴 전하께서는 호의를 베푸신 것뿐이잖아요.”
“여기 그걸 곧이곧대로 믿는 호구가 있네. 자, 생각을 해 봐. 갑자기 일면식도 없는 황태자가 ‘어머나~ 너희 연회를 연다고? 돈이 정말 많이 들겠구나. 내가 지원해 줄게.’ 하는 것부터가 이상한 거야.”
나는 부러 일인이역을 해 가며 생동감 있게 말했다. 이런 내 노력에도 샤샤는 여전히 아리송한 얼굴이었다.
“우리가 성벽을 왜 개방하지?”
“그거야…… 모두가 축제를 즐기게 하자는, 부인의 깊은 뜻 아니겠어요?”
“아니, 완전 틀렸어.”
“네? 틀리다니요? 성벽을 열어 나눔의 장을 만들고 싶다고 집사장님을 설득하셨잖아요.”
단호한 내 답변에 샤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나는 검지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했다.
“그거야 그냥 한 말이지. 나는 단지 구경꾼을 많이 부르고 싶은 것뿐이야. 랜돌프가 이만큼 잘났다, 우리는 너희가 생각하는 그런 나쁜 귀족들이 아니다, 보여 줘야 하니까. 이미지 메이킹이라는 게 사업하는 사람한테는 엄청 중요하거든.”
“와…… 부인. 이제는 좀 무서우려고 해요. 저 소름 돋은 거 보이세요?”
“근데 그걸 황태자 놈이 홀랑 가로채려고 했다니까? 치사하게 여론몰이까지 해 가면서.”
“헙! 그럼 신문에 있던 R 가문이 진짜 저희였던 거예요?”
놀란 샤샤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대신에 했다.
“겉으로 위하는 척하면서 감히 지뢰를 깔아? 린턴 퀸타르트…… 생각보다 머리가 좋아.”
홀로 중얼거린 나는 행인 1과 버금가던 황태자 린턴에 대해 다시금 떠올렸다.
린턴 퀸타르트.
완벽한 적통성에 비해 스스로에 대한 불신이 상당히 높은 인물 중 하나였다. 하여, 경쟁이 될 만한 인물들은 모두 제거했고 날조했다.
그런 못난 성정이 가장 극에 달은 건 원작 속 에드먼드가 대중들에게 빛을 발하려던 때였다. 질투에 눈이 먼 그는 클로엔을 회유해 에드먼드를 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쉽게 말해 린턴은 소위 힘순찐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원작 속 린턴의 처소에 별안간 날벼락이 내리쳤고 그렇게 하차했다.
“작가가 변태라니까 진짜.”
상황을 이리저리 조합해 본 결과, 예상에도 없던 린턴 퀸타르트가 불쑥 튀어나온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다.
전무후무하던 랜돌프의 입지가 점점 올라가고 있다던가, 바닥이었던 랜돌프의 평판이 드디어 날개를 돋았다던가?
변화를 인지한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지금껏 최고의 타이밍을 위해 미루고 미뤄 왔던 브랜드 설립의 때가 머지않았음을 직감했다.
“오, 주여……! 기다리는 자에게 복이 오나니.”
나는 감명받은 표정으로 가슴을 부여잡았다. 당분간 원하지 않는 원작에 휩쓸려 귀찮은 일이 생길지도 모르나, 멜리사와 거리 두기를 했던 것처럼 적당히 눈치껏 대처하면 그만이다.
힐끔, 시간을 살핀 나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경합이 시작까지는 30분 남짓한 여유가 전부. 옷매무새를 갖춘 나는 고고한 표정으로 문을 나섰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저 멀리 구름 같은 인파와 함께 랜돌프와 헤슈턴을 상징하는 깃발이 하늘 높이 펄럭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