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7화
뭘 잘못 먹은 건가?
훅 끼친 온기에 나는 멀뚱히 눈만 끔벅였다. 갑자기 저 버터 500개 먹은 듯한 대사는 무엇이며, 지금 이 포옹의 저의는 무엇인가 혼란스러웠다.
아니면…… 혹시 내일 죽나?
나는 놀란 심장을 가다듬으며 가만히 손을 올렸다. 그러곤 에드먼드의 반듯한 이마에 살포시 가져다 댔다.
“열은 없는데.”
엉뚱한 내 반응에 에드먼드는 할 말을 잃고 작게 코웃음 쳤다. 그러곤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위층으로 올라갔다.
“이거는 놓아줘야죠.”
나는 잡힌 손목을 너풀거리며 툴툴댔다. 그런 내 말이 들리지 않는 듯 에드먼드는 하던 행동을 이어 갔다.
그렇게 계단을 반쯤 올라갔을까, 커다란 그림자가 우뚝 멈추며 천천히 돌아섰다.
“오늘부터 부부 침실에서 같이 자. 당신이 있어야…… 잠이 올 것 같아.”
미쳤나 봐, 진짜.
조금 전 의심은 눈 녹듯 사라졌다. 내일 죽던, 오늘 죽던 그게 무슨 상관일까. 존잘인 남편께서 같이 자고 싶다는데.
이참에 첫날 밤 같은 분위기 내 보자고.
민망한 듯, 할 말을 마친 그가 걸음을 재촉했다. 어쩐지 거뭇한 목덜미가 발갛게 달아오른 것 같기도 하다.
의도가 다분한 몸짓에 나는 자연스레 힘을 풀고 흐물거렸다. 덕분에 잡힌 손목이 속절없이 딸려 갔다.
* * *
홀렸네, 홀렸어…….
부부 침실은 본래 에드먼드가 사용하던 방의 맞은편에 자리했다. 대체 이런 건 언제 만들어 둔 건지, 침실에 도착한 나는 그제야 현실을 자각했다.
“피곤할 텐데 어서 누워.”
그사이 차림을 달리한 그가 침대 옆자리를 툭툭 두드렸다. 고작 같은 공간에서 숨을 쉬는 것뿐인데, 보이는 게 판타지니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조각상에 버금가는 완벽한 외모와 얇은 잠옷 사이로 은은히 비치는 성난 근육, 피로에 살짝 풀린 눈매까지 삼박자가 고루 맞았다.
“드레스룸은 저쪽.”
넋이 나간 나를 향해 에드먼드는 친절히 해야 할 것을 알려 줬다.
쾅!
나는 뛰는 심장을 잠재우며 드레스룸으로 들어왔다.
“와, 삼각근이 그냥 미쳤는데? 운동을 얼마나 한 거야.”
한차례 감탄을 토해 낸 나는 두 눈을 감고 히죽댔다. 드디어 꿈에 그리던 그날이 왔음을 온몸으로 직감했다.
“아, 이럴 줄 알았으면 저녁 조금만 먹을걸. 배 나왔는데.”
그렇게 행복한 투정을 이어 가던 찰나, 잊고 있던 무언가가 번뜩이며 스쳤다.
구슬.
서랍 한편에 고이 잠들어 있을 그것들이 떠오르고 만 것이다.
“엄…… 일단 재우고. 재우고 움직이지 뭐. 금강산도 식후경인데 일단은, 부부 금술이 우선 아니겠어?”
나는 발그레한 뺨을 문지르며 우선순위를 다시 세웠다. 폭탄 열매 따위, 내일 모디카가 오기 전까지만 바꿔치기하면 된다.
하지만 남편과의 은밀하고도 농밀한 대화는 오늘이 아니면 언제 또 기회가 올지 모른다.
“그래, 폭탄 따위가 문제야. 우리 남편과의 돈독한 관계가 먼저지. 꽃은 새벽에 몰래 다녀오면 되니까.”
아, 근데 새벽에 몰래 못 가는 상황이 되면 어쩌지?
그건 좀 많이 곤란한데.
나는 홀로 상상을 더해 가며 음흉하게 웃었다. 그러곤 손을 뻗어 옷장 문을 열었다.
“명색의 첫날밤인데 허투루 보낼 수는 없지.”
나는 콧노래를 부르며 옷장 안을 살폈다. 안에는 서너 벌쯤 되는 일상복과 잠옷 두어 가지 있었다.
첫 번째는 단추를 목까지 잠그는 헨리넥 타입.
“입고 자다 질식하기 딱 좋겠네.”
두 번째는 치맛단이 발끝까지 내려오는 롱 드레스 타입,
“와, 포댓자룬 줄.”
그리고 마지막은 가장 무난한 네글리제였다.
“방이 춥다더니, 진짠가 보네.”
흰 레이스 원사로 만들어진 잠옷은 치맛단이 정강이 아래까지 내려오는 원피스 형태였다.
“그래, 그나마 이게 낫다.”
퍽 단조로운 의상이었으나, 앞서 본 저것들에 비하면 양반이었다. 준비를 마친 나는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그러곤 빼꼼, 고개를 내밀고 밖을 살폈다. 어두운 내부는 정적만이 가득했다. 뜨거운 환영을 기대한 건 아니었으나, 이런 평화를 예상하지도 않았다.
“여보?”
나는 총총걸음으로 빠르게 다가섰다. 에드먼드는 두 눈을 감은 채, 평온히 누워 있었다. 목까지 끌어 올린 이불은 마치 결계를 보는 듯했다.
‘얘 지금 자니?’
나는 황당한 표정으로 에드먼드를 바라봤다. 사람 설레게 해 놓고 혼자 잠들다니, 이건 아무래도 상도가 아니었다.
“아니, 이렇게 잘 자면서 뭔 꿈자리가 뒤숭숭하다고. 세상 숙면은 제 혼자 다 하는구먼.”
기분이 상한 나는 툴툴대며 이불을 펄럭였다. 곤히 잠든 남편을 깨울까도 싶었으나, 실낱같은 이성이 나를 붙들었다.
‘잠깐, 되레 기회일지도?’
떠오른 생각에 나는 빠르게 숨을 죽였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이라면, 에드먼드가 잠든 지금이 적기였다.
‘열매부터 처리하고 오자.’
계획을 바꾼 나는 인기척을 줄이고 천천히 몸을 돌렸다. 세운 발끝이 지면에 닿으려던 찰나, 손목이 붙들렸다.
“뫄아악!!”
훅 끼친 온기에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커다란 눈망울이 에드먼드와 마주한 건 불과 몇 초 사이였다.
“클로엔?”
반쯤 잠긴 목소리가 유혹적이었다. 살짝 들어 올린 상체는 다부졌으며, 잠옷 사이로 언뜻 비춘 살결은 치명적이었다.
에드먼드가 말했다.
“어디 가려고?”
저 모습을 마주하고 있자니, ‘후원에 가려고요.’라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네? 엄…… 그게.”
당황한 난 대답을 채 잇지 못하고 어물댔다. 잔잔했던 남편의 시선이 조금씩 의심으로 물들던 그때, 꺼져 가는 벽난로가 보였다.
“아, 불! 불 좀 더 때려고요. 밤새 감기라도 걸리면 큰일이잖아요. 하하하.”
나는 그럴싸한 핑곗거리를 대며 난로 앞에 섰다. 돌아선 등 뒤로 뾰족한 시선이 느껴졌으나 모르는 척 너스레를 떨었다.
“장작이 하나, 둘……!”
“이리 줘.”
어느새 옆으로 온 그가 들고 있던 집게를 빼앗아 갔다. 그러곤 능숙한 손길로 불길을 살리고 주변을 정리했다.
“나도 할 수 있는데.”
“당신은 그냥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거야.”
뻘쭘해진 나는 입술을 쭉 내밀고 삐죽거렸다. 할 일이 없어진 난 조용히 손바닥을 폈다. 그러곤 호랑이도 울고 갈 늠름한 뒤태를 측량했다.
크…… 뉘 집 아들인지 실하다.
남편의 완벽한 자태에 넋을 놓고 있는 사이,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천천히 돌아섰다.
빛을 등져서일까, 마주 본 시선이 유독 짙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 자연스레 어우러진 그를 보며 괜한 위압감이 들었다.
에드먼드가 말했다.
“이제 잘까?”
꿀꺽, 마른침을 삼킨 난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그토록 바라고 바란 일이었으나 긴장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런 내가 가소로운지 에드먼드는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러곤 조금씩 간을 보듯 거리를 좁혀 왔다.
쿵, 쿵, 쿵.
궤도를 벗어난 심장이 빠르게 요동쳤다. 그런 나를 놀리듯, 에드먼드는 눈을 가늘게 뜨며 시선을 맞췄다.
“오, 오늘 참 달이 밝네요.”
뚝딱대는 나와 달리 마주 선 인영은 사냥감을 앞둔 맹수처럼 느리고 여유로웠다.
나…… 떨고 있니?
가까워진 그림자를 따라 주춤주춤 물러서기도 몇 번. 드러난 피부 위로 침대 발치가 닿았다. 달빛을 등져서인지 남편의 눈매가 위압적으로 번뜩였다.
떨리는 눈망울이 에드먼드의 움직임을 서서히 쫓았다. 마디 굵은 손끝이 조금씩 나를 향했다. 그에 따라 우뚝 서 있던 두 다리가 침대 위로 무너졌다.
“여보…….”
아슬한 분위기가 두 사람을 감싸고, 마주한 거리가 한 뼘을 채 남기지 않았던 그때였다.
피식, 작게 코웃음 친 그가 방향을 돌려 뒤쪽으로 향했다. 그러곤 휙! 이불을 걷어 젖히곤 곧장 그 안으로 들어갔다.
이런다고?
나는 황망한 표정으로 에드먼드를 바라봤다. 꼭 감긴 두 눈은 애초에 너 따위 관심도 없었다는 양, 굳게 닫혀 있었다.
“피곤할 텐데, 어서 자.”
이미 잘 준비를 마친 그는 인심이라도 쓰듯 덧붙였다. 그러곤 톡톡, 빈 옆자리를 팔로 두드렸다.
마지못해 자리에 누운 나는 소리 없이 씩씩댔다. 지금껏 수많은 시도를 했고, 수많은 거절을 받아왔으나 이런 치욕은 또 오랜만이었다.
“진짜 이대로 잘 거예요?”
“그러면?”
“긴긴밤 잠만 잘 거면, 나를 뭐하러 데려오냐고요. 잔뜩 기대했는데, 정말 김샌다니까.”
“막상 다가서니까 떨던 사람이 누군데?”
“그, 그건……! 갑자기 당황해서 그렇죠. 산만 한 사람이 어슬렁거리면서 오는데 겁을 좀 먹을 수도 있지, 안 그래요?”
“그렇다 치자고.”
당황한 내 반응에 에드먼드가 작게 코웃음 치며 대화를 갈무리했다. 감긴 눈을 보고 있자니, 가슴 깊은 곳에서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스멀스멀 올랐다.
“진짜 이럴 거예요? 오랜만의 합방인데 잠만 잘 거냐고요! 이건 농락이라고요, 농락!”
“이런 건 농락이 아니라, 배려라고 하는 거야.”
“배려는 무슨. 희망 고문이지. 과정이 있으면 결과가 있어야지, 사람이 왜 그러나 몰라.”
괜한 도전 의식에 객기를 부려 보았으나, 에드먼드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커다란 손바닥이 되레 내 눈을 가리며 시야를 차단했다.
“알겠으니까, 제발 좀 자.”
“이대로는 못 자. 못……!”
가로막힌 시야에 바르작거리기도 잠시, 손에 닿은 낯선 온기에 나는 하던 행동을 멈췄다. 가려진 눈 때문인지 촉각을 비롯한 다른 감각들이 곤두섰다.
“오늘은 손부터.”
그와 함께, 가느다란 손가락이 얼기설기 얽혔다. 마주 잡은 손바닥이 빠듯이 맞붙을 때면, 전에 없던 열기가 일었다.
“천천히 가. 남들처럼.”
잠긴 목소리 때문일까, 이어진 남편의 말에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