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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남편과의 이혼을 거부합니다 (85)화 (85/107)

제85화

“오, 오랜만이에요, 부인. 멀리서 익숙한 분이 계시길래 와 봤어요.”

“와! 하마터면 못 알아볼 뻔했어요. 여기서 만나니까 너무 반갑다. 그동안 잘 지냈어요?”

고작 안경을 벗었을 뿐인데 아나샤의 인상은 확연히 달랐다. 그동안 저 예쁘장한 얼굴이 안경에 가려졌던 게 분명했다.

“네……. 다, 부인께서 해 주신 좋은 말씀 덕분이죠. 집으로 돌아가서 많, 많이 반성했거든요. 변하려고 노력도 하고…….”

부끄러운 듯, 아나샤가 손가락을 꼼지락대며 뒷말을 흐렸다. 그러곤 꾸벅, 에드먼드를 향해 인사를 건넸다.

“랜돌프 공작님도 함께 계셨네요. 안, 안녕하세요. 공작님.”

흡사 페이스오프에 버금가는 변화에 에드먼드는 당황한 듯 보였다. 나는 조심스레 ‘아나샤’ 하고 입 모양을 보여 줬다.

“며칠 전, 블론디아 측에서 초대장을 받았습니다. 다음 달 예식이던데 모쪼록 축하해요.”

에드먼드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 자연스럽게 행동했다. 이럴 때 보면 아주 눈치가 없는 것 같지는 않은데, 아무래도 선택적 눈새인 모양이다.

“아…… 네. 감사해요.”

말과 달리 아나샤의 얼굴엔 어둠이 가득했다. 내리깐 시선엔 얼핏 물방울이 걸리기도 했다.

‘기쁨의 눈물인가? 뭐지?’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아나샤를 자세히 살폈다. 그러곤 조심스레 질문을 건넸다.

“혹시…… 무슨 일 있어요?”

아나샤는 말없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을 대신에 했다.

‘굳이 파고들지 말자.’

평소라면 무슨 일이냐며 두 팔 걷어붙였겠지만, 돌아가 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다. 고로 아까운 시간을 소모할 수 없다.

“하하, 별일 없다니 다행이네요. 그럼 다음에 봐요. 우리도 갈까요, 여보?”

간단한 작별 인사와 함께 몸을 돌리려던 그때였다.

“사실은…….”

뒤에서 들리는 작은 흐느낌에 나는 걸음을 멈췄다.

* * *

어느새 두 사람은 카페 한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성격만큼이나 다른 취향 덕분에 한쪽에는 따끈한 홍차가, 다른 한쪽에는 얼음이 잔뜩 들어간 레모네이드가 놓였다.

“그러니까 녹턴인지, 닉턴인지 하는 약혼자가 만나도 시큰둥하고 반응도 없다?”

나는 새로 시킨 레모네이드를 쭙쭙 빨며 시큰둥하게 물었다. 무감한 나와 달리 흠뻑 젖은 아나샤의 눈동자는 슬퍼 보였다.

“어쩌다 손끝이라도 스치면, 곧장 떼어 내는데…… 제가 정말 싫으신가 봐요.”

“그런데 만나기는 하고?”

“네. 그렇다고 해서 거창한 건 아니고 일주일에 한 번 정도 같이 식사하거나, 차를 마시는 정도예요. 아무래도 이목이 있으니…… 녹턴 경께서도 저를 완전히 멀리할 수는 없겠죠.”

아, 이거 초반의 누가 좀 생각나는데?

나는 말없이 옆에 놓인 물병을 바라봤다. 그러곤 천천히 고개를 들어 묵언 수행 중인 에드먼드를 살폈다.

“당신은 대체 안 가고 왜 여기 있는 건데요?”

“해가 지니 바람이 선선하군.”

뾰족한 내 물음에 에드먼드는 엉뚱한 답변을 내놓았다. 바람을 느끼듯, 얄밉게 감긴 두 눈은 절대 자리를 뜨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마저 느껴졌다.

“그래도 두 분은 사이가 참 좋아 보여서 다행이에요. 저도 그러고 싶었는데…… 너무 큰 욕심이었나 봐요.”

으르렁대는 공작 부부의 모습에 아나샤가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타인의 눈에는 이게 좋아 보이는 모양이다.

살아 봐…….

돌부처도 이것보단 나을걸?

나는 하고 싶은 말을 꾹꾹 누르며 정신을 집중했다. 그러곤 품에 있던 손수건을 건네며 아나샤를 위로했다.

“녹턴 쪽에서 대놓고 싫다 한 것도 아니고 부끄러우니 그러는 거겠죠. 우리 공작께서는 여전히 그러시는걸요. 정확히 3년째 내외 중이죠.”

순간 옆통수에서 강렬한 시선이 느껴졌으나 무시했다.

“저도 처음엔 그런 줄 알았어요. 근데……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면박을 주더라고요.”

강한 쓰레기의 기운에 느슨했던 미간이 빠르게 좁아 들었다. 나는 자세를 바로잡으며 준비 태세를 취했다.

“자, 우리 하나하나 차근히 말해 볼까요? 그 새끼가 뭘 어떻게 했죠? 내가 인생 선배로서 조언해 줄게요. 마음 놓고 들어와요.”

“최, 최근 녹턴 경께서 운영하는 무역 사업소가 무척 바빠졌거든요. 그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볼 기회가 없었고요.”

“으흠, 듣고 있어요.”

“시녀들이 말하기를 밤낮없이 일만 해서인지 얼굴이 많이 상했다고 하더라고요. 고생하는 게 안쓰럽기도 하고…… 또 보고 싶기도 하고.”

“알지, 알지. 상사병 1단계. 그건 약도 없어요. 그냥 보러 가야 해. 그래야 나아.”

“네. 그래서 고민 끝에 간단한 요깃거리를 챙겨서 사무실에 갔죠. 새 옷도 꺼내 입고 예쁘게 단장도 하고……. 그날 처음으로 안경도 벗었고요.”

“지금까진 모든 게 완벽한데. 대체 뭐가 문제일까요?”

이어진 내 물음에 아나샤는 작게 도리질하며 쓰게 웃었다.

“절 보자마자 집무실로 데려가더니 옷은 이게 뭐고 얼굴은 또 그게 뭐냐며 나무라더라고요. 그러곤 당장 돌아가라는데…… 정말 비참했어요. 내가 뭘 그리 잘못했나 싶기도 하고.”

이것도 어디서 들어 본 전갠데?

나는 부러 에드먼드를 힐끗거리며 크게 말했다.

그놈은 쓰레기라고.

“와, 이거 완전 쓰레기네. 이참에 아빠한테 말해서 파혼하는 건 어때요? 그런 거 데리고 살아 봤자 속만 썩을 텐데.”

“네? 그, 그건…….”

화끈한 대안에 아나샤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묻던 그때였다. 낮고 굵은 에드먼드의 목소리가 공백을 가르고 들어왔다.

“녹턴이 운영하는 무역 사업소면 남 직원들만 있지 않던가?”

“네, 맞아요. 뱃사람들과 자주 접하다 보니, 험한 일이 많이 생기거든요.”

이어진 답변에 에드먼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닫았다. 이 상황이 어이없는 건 비단 나뿐만이 아닌지, 아나샤가 눈을 끔벅이며 에드먼드를 바라봤다.

“그게 끝이에요?”

힐끔, 눈치를 살핀 나는 에드먼드의 옆구리를 툭툭 쳤다.

“이보다 더 확실한 게 있나? 충분한 답이 됐을 텐데.”

이게 뭔 개떡 같은 소리야.

구겨지는 미간을 바로 잡으며 에드먼드를 빤히 바라보았다. 무언의 압박이 통했는지, 에드먼드가 한쪽 눈썹을 긁적이며 말문을 열었다.

“그거뿐이 더 있나? ……욕.”

“뭐? 욕을 하라고요? 그것도 썩 나쁘지는 않은 방법이네요. 헛소리하면 욕을 좀 먹어야지. 그래야지 정신을 차리지.”

“후……. 당신 지금 전투력이 과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나?”

“어머, 내가요? 남 일 같지가 않아 그런가. 워~낙 누구랑 닮아서 이입을 좀 했나 봐요.”

나는 부러 이죽거리며 얄밉게 웃었다. 숨은 말뜻을 알아차렸는지 에드먼드는 소리 없이 으르렁댔다.

* * *

어느덧 해는 저물어 달빛이 공백을 메웠다. 겨울이 가까운 만큼, 부쩍 해가 짧아졌다.

“바쁘실 텐데 시간 내주셔서 감사해요……. 내내 넋두리만 한 것 같아서 죄송하네요.”

“알기는 아는 모양이군.”

에드먼드가 손에 쥔 회중시계를 딸깍이며 심드렁히 말했다. 덕분에 가뜩이나 울상인 아나샤의 얼굴이 서럽게 변했다.

“하하, 헤어지기 아쉬워서 그래요. 아쉬워서. 그렇죠, 여보?”

나는 에드먼드의 옆구리를 툭, 치며 대답을 강요했다. 살쾡이 같은 시선 처리는 덤이었다.

“휴, 그렇다고 치지.”

마지못한 그가 백기를 들었으나 초상집 같은 분위기는 여전했다. 어색한 미소와 함께 마지막 끝인사를 남긴 그때였다.

‘오 쉣, 장 트러블……!’

꾸르륵, 평온하던 아랫배에서 살살 신호가 왔다. 차디찬 과일 주스 네 잔을 연거푸 먹어댄 게 문제인 모양이다.

“여, 여보?”

나는 불안한 입술을 달달 떨며 에드먼드를 불렀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에드먼드는 대답 대신 오른팔을 휘휘 저으며 다녀와라, 손짓했다.

“그럼 조심히 가요, 아나샤. 나는 안에서 볼일이 좀 남아서. 파혼, 진지하게 생각해 보고요.”

클로엔은 다급한 인사말을 남긴 채, 카페 안으로 사라졌다. 남아 있던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정적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깨졌다.

“그래서 어떻게 할 생각인가?”

“네? 어, 어떤…….”

훅 들어온 에드먼드의 질문에 아나샤가 흠칫 놀라며 물었다.

“파혼.”

“우선…… 어른들과 상의해 봐야겠죠. 저 혼자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니까요…….”

동의한다는 듯, 에드먼드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교차한 팔을 톡톡 치며 무언가 고민했다.

에드먼드가 말했다.

“사람은 관심 없는 무언가에 굳이 시간을 내지 않아. 그게 무엇이든 간에 똑같지.”

“아…….”

“블론디아의 차남이라고 해서 다르지는 않다는 말이야. 하지만 관심을 어떤 식으로 돌리느냐가 중요하겠지.”

“응원……해 주시는 건가요?”

“이참에 반전 매력을 보여 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반전 매력이요?”

놀란 아나샤와 달리 에드먼드는 퍽 진지한 얼굴로 제 할 말을 이었다.

“상대가 예상치 못한 행동을 하면 흥미가 생기기 마련이니까. 그걸 잘 이용해 봐.”

“혹시…… 랜돌프 부인께서 그러셨어요?”

“아니, 그 여자는 예상을 뛰어넘다 못해 경악 그 자체였지.”

잠시 회상하던 그가 진절머리 난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곤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아나샤를 바라봤다.

“나도 질문 하나만 하지.”

위협적인 아우라에 아나샤는 마른침을 삼키며 긴장했다. 제아무리 이빨을 감추고 있다 한들, 랜돌프 공작이 맹수라는 사실만큼은 변치 않으니 말이다.

“말, 말씀하세요.”

되묻는 목소리가 볼품없이 떨렸다. 기세와 달리 공작은 한참을 망설였다. 그러곤 후……. 고심에 찬 숨을 내쉬었다.

“여자들은 뭘 좋아하지?”

이어진 물음에 아나샤는 경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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