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3화
의상을 갖춰 입은 나는 서둘러 드레스룸을 빠져나왔다. 늦은 기상만큼이나 하루가 짧다는 게 그 이유였다.
“상점을 둘러보려면 지금 출발해도 빠듯하겠는데…….”
힐끔, 살핀 시계 초침은 어느덧 2에 가까워 있었다. 초조한 시선을 읽었는지, 샤샤를 대신해 온 티모의 손이 바빠졌다.
“단장이 끝났습니다, 부인.”
말과 동시에, 감겨 있던 눈꺼풀이 느리게 올라갔다. 잘 닦인 거울 위로 예쁘장한 얼굴이 비쳤다. 그리고 그 모서리엔.
“외출이라도 할 생각인가?”
1인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앉은 에드먼드가 있었다. 남편의 관심이 싫지만은 않았으나, 꼭 이럴 때면 과도한 관심을 보이는 그였다.
“당신, 아직도 안 갔어요?”
나는 난감한 얼굴로 에드먼드를 바라봤다. 그에 따라 무표정하던 얼굴 위로 하나둘, 실금이 그어졌다.
“내가 있어서 불편한가?”
“그런 건 아니고 내가 지금 나가 봐야 하거든요. 꼭 사야 할 게 있어서…….”
‘다른 날도 아니고 굳이 오늘?’
순간 에드먼드의 머릿속엔 ‘그날, 그곳’이라는 발칙한 문구가 쉴 새 없이 떠올랐다. 줄곧 저택에 콕 박혀 달팽이 농장과 식당만을 오갔던 아내였다.
그랬던 그녀가, 농장 속 달팽이보다도 단조로웠던 클로엔의 일상에 변화가 생긴 것이다. 그것도 요제프의 비밀스러운 서신이 날아온 바로 오늘 말이다.
‘순진한 이 여자를 붙들고 꼬드기려는 게 분명해.’
묵직한 감각이 목덜미를 타고 흘렀다. 이따금 머리가 지끈거리며 두통이 일기도 했다.
딱히 클로엔에게 감정이 있는 건 아니었으나, 요제프에게 빼앗기는 기분이 드는 건 싫었다. 그건 제 소유의 말, 칼, 활 등도 마찬가지였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건 랜돌프 가문의 소유를 확실히 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절대 이 여자에게 관심이 있다거나, 감정이 있는 게 아니라.
“오랜만에 부부의 시간을 보내는 건 어때? 이야기도 할 겸.”
에드먼드는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인내심을 나타냈다. 여유로웠던 마음가짐과 달리 그의 속은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다음에, 다음에요. 경합까지 얼마 안 남았잖아요.”
“다음은 없어. 어디 갈 건데? 데려다줄게.”
“괜찮아요. 티모랑 같이 다녀오면 돼요. 굳이 당신까지 힘들일 필요 없어요.”
“내가 안 괜찮아서 그래. 어디 갈지 말만 해. 그 앞까지 내가 데려다줄 테니까.”
에드먼드의 과도한 친절에 나는 하하, 어색하게 웃었다. 어떻게든 이 의심 많은 남자를 돌려보내야만 했다.
“제 걱정은 마시고 가문을 위해 힘쓰셔야죠. 농땡이는 이쯤 마무리하시고 연무장으로 돌아가세요, 랜돌프 공작님?”
나는 부러 가문을 들먹이며 남편을 어르고 달랬다. 날렵한 턱선에 손끝을 비비자, 에드먼드의 두 눈이 가물가물 감겼다.
“……내가 질까 봐 걱정되나?”
“그보다는 반대죠.”
순간 느른했던 에드먼드의 시선이 번쩍 뜨였다. 가늘게 접힌 진실의 미간은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다.
뭐야, 지금 이거 질투?
남자는 소유욕의 동물이라더니, 그 불변의 진리가 완전히 빗겨 나가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변화를 알아차린 나는 재빨리 뒷말을 덧붙였다.
“요제프 놈이 흠씬 두들겨 맞고, 배상을 요구할까 봐 걱정된달까? 우리 여보가 좀 세냐고요. 완전 돌주먹이지, 돌주먹.”
조그마한 손바닥이 에드먼드와 손을 맞췄다. 크기도 색도 현저히 다른 두 개의 손이 허공에서 맞물렸다.
“그래서 어딜 갈 생각인데?”
한결 부드러워진 시선이 피부에 닿았다. 잠시 고민하던 난 마음을 정했다. 빙빙 돌려 애를 태우느니, 사실대로 털어놓기로. 다는 아니고…… 반 정도만?
“경합 전까지 만들고 싶은 게 있는데 거기에 필요한 재료들을 좀 사려고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우선 가장 필요한 건, 별빛 열매랑 꽃 기름이랑 또 송진 가루랑…… 그 외 이것저것?”
나는 부러 뒷말을 흐리며 너스레를 떨었다. 설마하니, 영민한 공작께서 들은 재료만으로 눈치를 채진 않을까 걱정이 들었기 때문이다.
“출발하지. 좋은 물건이 있는 곳을 알아.”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앞장서 문을 나섰다.
‘아니, 괜찮아. 나서지 마!’
나는 속에 든 말을 간신히 삼키며 미소를 유지했다.
“그냥 요 앞 광장에 후딱 다녀오면 돼요. 뭐 대단한 거 한다고…… 하하하.”
“경합 때 쓰려는 거 아닌가? 랜돌프에서 주최한 모처럼의 연회인데, 가장 좋은 재료로 좋은 물건을 만들어야지.”
잇단 거절에도 에드먼드는 물러설 기미가 없었다. 아무래도 이번만큼은 눈치가 없기로 작정을 한 모양이다.
* * *
목적지에 도착한 두 사람은 텅 빈 거리를 나란히 걸었다. 부쩍 줄어든 인파와 문 닫힌 점포들은 일전에 방문했던 것과는 또 다른 분위기였다.
“오늘 정기 휴일인 곳이 많은가 봐요. 열린 데가 많이 없는 걸 보면. 우리 가려는 곳은 열었겠죠?”
힐끔, 주변을 살핀 나는 자연스레 말을 붙였다. 헤슈턴과의 대결까지 남은 시간은 고작 6일이 전부다. 그사이 제조와 시범을 거치기 위해선 오늘 반드시 재료를 구해야만 했다.
“응? 열었겠죠?”
이어진 채근에 에드먼드는 두어 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오래된 이야기를 해 주듯, 듣기 좋은 저음의 목소리로 다음 말을 이어갔다.
“수도와 밀접한 베델른 광장은 유동 인구가 가장 많은 곳 중 하나였어. 1년 내내 꺼지지 않는 불빛으로 유명했지.”
“에이, 그렇다기엔 너무 한산한데요. 지난번에도 딱히 사람이 많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불과 몇 년 전까지는 그랬지. 우리가 이곳에 막 왔을 때만 해도 활기가 넘쳤었으니까.”
에드먼드가 휑한 주변을 살피며 씁쓸히 말했다. 그와 동시에, 잊고 있던 원작 속 설정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에드먼드 랜돌프, 베델른으로 와 내게 충성을 증명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