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0화
이어진 물음에 나는 샐쭉, 미소 지으며 화두를 던졌다.
“아, 궁금한 거! 다른 건 아니고~ 오늘 테리샤 부인께서 재미난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무슨 이야기를 했길래? 듣자 하니 다 같이 몰려가 후원 구경을 했다던데.”
“그건 모리 부인께서 하도 보고 싶다고 하시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지 뭐예요. 그래도 당신이 가지 말라던 꽃밭에는 맹세코 안 갔어요. 약속을 지켰다고요.”
“약속은 무슨. 터질까 봐 안 갔겠지.”
“또, 또 꼬투리. 그거 진짜 안 좋은 버릇이라니까 그러네. 사람이 적당히 잊어버리기도 하고 넘어갈 줄도 알아야지. 하나하나 신경 쓰고 살면 피곤하다니까요. 하여간 장수하긴 글렀어.”
“그냥 빨리 죽으라고 기도를 하지 그래? 자기 혼자 살겠다고 내뺐는데 그걸 어떻게 잊지!?”
퍽 서운했던 모양인지, 에드먼드가 들고 있던 나이프와 포크를 부들거렸다.
“으! 알겠어요, 알겠어. 그날은 내가 실수. 앞으로 죽을 고비가 생겨도 절대 놓고 안 갈게요.”
“진작 그렇게 나왔어야지.”
“아무튼! 테리샤 부인이 재미난 이야기를 했는데……!”
“오늘 오리가 아주 잘 구워졌군. 식기 전에 먹어.”
비단 잘린 건, 내 말뿐이 아니었다. 말과 동시에 잘게 자른 오리고기가 접시 위로 수북이 쌓였다.
죽으면 이런 호사도 못 누려. 정신 바짝 차리자. 저 말하는 조각상이 진짜 폭탄이라도 만들면 우리 2세 계획을 지하 감옥에서 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나는 짧게 다짐하며 입에 든 고깃덩어리를 바지런히 씹었다. 그러곤 사냥을 앞둔 흑표범처럼 다음 기회를 노렸다.
“이번에 테리샤 후작 부부께서 여행을 다녀오셨는데……!”
“뭘 이렇게 흘리면서 먹지? 애도 아니고.”
에드먼드는 친히 가슴팍에 꽂혀 있던 행커치프를 꺼내 내 입가를 닦았다. 평소라면 남편의 외모에 치여 아크로바틱을 500번은 했겠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즈끄 끊즈믈르그.”
나는 부러 이를 아득 물며 말했다. 목석 같은 반응에도 눈치 없는 남편 놈은 태연히 하던 일을 이어 갔다.
“다 됐군.”
작게 코웃음 친 그가 조금씩 시야에서 멀어졌다. 한차례 심호흡한 난 흐트러진 심신을 정리했다.
“오늘 온 손님 중 한 분이 펠라라는 곳을 다녀왔는데……!”
오랜 눈치 싸움 끝에 다시 한번 말문을 열려던 그때였다.
“이것도 좀 먹어 보지. 채소가 아주 신선……!”
친절한 내 남편께선 기어코 또 한 번의 호의를 베풀었고.
“뫄아아악! 내가 지금 말하고 있잖아!! 내가 알아서 먹는다고! 내가! 그냥 좀 닥치고 들으라고, 왜 자꾸 말해 왜!”
나는 결국, 성난 황소처럼 날뛰었다.
* * *
테이블 위엔 어색한 공기만이 흘렀다. 기껏 베푼 호의에 찬물을 들이부었으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저…….”
스치듯 살핀 남편의 표정은 제법 심각했다. 나름 티 내지 않으려 노력하는 듯 보였으나, 얼굴 곳곳에 박힌 심술은 감출 수가 없었다.
잘생긴 게 귀엽기까지 하면 나는 어떻게 하라는 거야, 진짜.
치인다, 치여.
한차례 감상을 마친 나는 고민 끝에 질문을 던졌다.
“혹시 화났어요?”
“아니.”
에드먼드는 반사적으로 답했다. 쿨한 대답과 그렇지 못한 표정을 보고 있자니, 순간 웃음이 터질 것 같았으나 가까스로 참았다.
“그럼 삐졌어요?”
물음과 동시에 에드먼드의 날카로운 시선이 피부에 닿았다. 퍽 살벌한 표정임에도 왜 이리 웃음이 나오는지, 알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당신이 자꾸 내 말을 끊으니까 화나서 그런 거죠. 뭘 그런 거로 삐지고 그래요? 내가 잘못했으니까, 화 풀어요, 응?”
나는 부러 두 눈을 깜박이며 거리를 좁혔다. 마주 본 동공이 요동치며 흔들렸다. 순간 홱! 하고 고개를 돌린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접근 금지란 내 말은 이제 완전히 무시하기로 한 모양이군.”
“그거 없어진 지가 언젠데요. 부부 사이에 너무 내외하시네.”
“그런 사람이 매번 합방은 거부하나?”
“그거야 우리 둘 다 바쁘니까. 몸도 마음도 여유로울 때, 즐기자는 거죠.”
“됐고, 궁금한 게 뭔데?”
훅 들어온 질문에 순간 당황했으나 머지않아 평정을 찾았다. 꿀꺽, 마른침을 삼킨 나는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혹시…… 불꽃놀이 좋아해요?”
“뭐?”
터무니없는 질문에 에드먼드는 양 눈살을 찌푸렸다. 닥치라는 말까지 해 가며 한 질문이 고작 불꽃놀이라니, 황당하다 못해 어이가 없는 노릇이었다.
“불, 불꽃놀이! 불꽃놀이 좋아하냐고요. 테리샤 부인께서 펠라에서 불꽃놀이를 봤다는데 당신도 좋아하나 궁금……!”
“싫어하다 못해 혐오해. 시끄러운 데다 한번 터지면 무가치해지는 쓰레기 따위를 좋아할 리가.”
아…… 그냥 싫어하는 것도 아니고 혐오하는구나. X팔…….
나는 흡사, 세상을 잃은 기분이었다. 고작 1퍼센트였던 희망이 제로가 되는 기적을 보고 만 것이다.
반응을 보아, 후원에 핀 폭탄 꽃이 폭죽이 될 일은 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 열매를 바꿔치기하자.
“하하하…… 그렇구나. 어쩐지 그럴 것 같았어요.”
그 후, 물을 붓던 폭죽을 만들던 뒷일은 나중 문제였다. 일단 저 문제의 씨앗부터 치워 버리는 게 모두의 안위를 위한 길이다.
“고작 이거 하나 때문에 나한테 그런 막말을 한 건가?”
“아니, 난 또 당신이 좋아한다고 하면 우리도 펠라로 여행이나 가 볼까 했죠. 하하, 하.”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같지도 않은 변명을 더했다. 대뜸 여행이라니 자다가 봉창 두드려도 이것보다는 나을 거다.
“흠흠, 경합이 끝나면…… 한 번 가 보든지, 여행.”
허술한 대응과 달리 에드먼드는 퍽 진지한 얼굴로 답했다. 대체 무슨 바람이 분 건지, 검은 그림자가 느른한 시선을 유지하며 조금씩 거리를 좁혔다.
갑자기 장르가 에로로 변한다고? 눈이 완전히 가 버렸는데?
이런 감개무량할 때가……!
달라진 분위기에 나는 속으로 환호했다. 비록 폭탄이 폭죽으로 변모하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으나, 적어도 우리의 2세 계획에는 변화가 생긴 게 분명했다.
“클로엔.”
귓가에 울리는 낮은 울림이 온몸을 녹였다. 오롯이 직진뿐인 남편의 유혹에 들뜬 입술을 감출 길이 없었다.
가 보자, 끝까지.
나는 머지않은 미래를 떠올리며 두 눈을 꾹, 감았다.
* * *
“와, 진짜 어이없네.”
홀로 방으로 돌아온 나는 이를 부득 갈았다.
맹세컨대 당장 에드먼드의 침실로 가더라도 이상하지 않은 분위기였다. 되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게 비정상이었다.
그런데 결과는?
‘아무한테나 웃어 주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