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9화
어쩐지 등골이 서늘했으나, 뻗은 손을 멈출 수는 없었다.
“이건 또 뭐라고 쓰여 있는 거야? 아메트린? 에메트린?”
“쀼!!”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다시 한번 귀를 때렸다. 케이지 창살에 찰싹 붙은 쀼는 열매를 빼앗겼을 때보다 화가 나 보였다.
“하여간 쟤는 알 수가 없다니까. 갑자기 왜 저런담.”
알 수 없는 행동에 나는 고개를 두어 번 갸웃거리곤 시선을 돌렸다. 쀼의 급발진이 하루 이틀도 아닐뿐더러, 서신에 대한 궁금증이 더 컸다.
“보자, 어느 집 쥐새끼가 겁도 없이 러브 레터를 보냈나?”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밀봉된 입구를 열었다. 곧이어 툭, 반으로 접힌 양피지가 책상 위로 떨어졌다.
[랜돌프에 대해 할 말이 있어.
아마도 이건 네게 보내는 마지막 서신이 될 거야.
나도, 단원들도 지쳤어.
로너스 스트릿 8번지, 붉은 차양 카페.
부디 널 기다리는 이들을 실망시키지 마. 클로엔 엘리테른.]
화르륵!
내용을 확인함과 동시에 손에 들린 서신이 빠르게 타올랐다. 눈 깜짝할 새 사라진 종잇장은 작은 흔적 하나조차 남기질 않았다.
“와, 와…… 대박! 마법. 지금 마법. 와, 눈앞에서 사라졌어. 멜리사 얘 물건이네, 진짜.”
나는 놀란 입을 닫을 생각도 못 한 채 어버버 댔다. 내가 단물 빠진 마법사라면, 멜리사는 아직 현직인 게 분명했다.
“차라리 얘한테 가 볼까?”
-이런 미친, @#%!&?
한동안 잠잠하던 환청이 귓가에 윙윙거렸다. 묘한 기시감에 나는 조용히 눈알만 굴렸다.
주변은 고요했고, 아래엔 케이지에 붙은 쀼가 창살을 팡팡 쳐댔다.
혹시…….
나는 성난 쀼를 보며 잠시 잠깐, 그런 생각을 했다. 설마 이 목소리의 주인공이 저 작은 생물체가 아닐지에 대해.
“아무리 그래도 동물이 어떻게 말을…… 아니지? 생각해 보면 쀼랑 같이 있을 때만…… 저 목소리가 들렸잖아?”
순간 심장이 쪼그라드는 느낌이 들었다. 기분 탓인지, 멀쩡했던 손바닥이 간질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에이! 아냐, 아냐. 말도 안 돼. 매칭이 안 되잖아, 매칭이.”
나는 그럴 리 없다며 고개를 빠르게 내저었다. 머릿속에선 그간 들었던 기상천외한 폭언이 스쳐 지나갔다.
동물도 동물이지만, 저 귀엽고 사랑스러운 얼굴로 걸쭉한 육두문자를 날린다는 건 정말이지, 말이 되지 않았다.
이야기를 안 해서 그렇지, 환청 속 목소리는 꽤 입이 더러운 축에 속했다. 흐릿해 모두 들리진 않았으나 욕으로 시작해서 욕으로 끝나는 게 대다수였다.
“말도 안 돼. 내가 저 미친 여자한테 들은 욕이 얼만데.”
잠깐이지만 귀여운 쀼를 두고 그런 생각을 한 것조차 죄스러웠다. 무슨 억하심정인지, 나는 곧장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거기 누군지는 몰라도 한 풀어 줄 사람 찾아가라고요! 나는 무당이 아니래도 그러네. 이 몸이 탐나는 거면, 늦었다고! 여기는 내가 이미 터를 잡았다고요. 솔드 아웃, 오케이?!”
나는 두 손을 휘휘 저으며 엑스자를 그렸다. 뒤이어 욕으로 추정되는 환청이 들려왔으나, 늘 그렇듯 30초를 채 넘기진 못했다.
“조만간 팥을 구해 오든지 해야지, 시끄러워서 못 살겠네.”
휴, 낮게 한숨 쉰 나는 구시렁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빈 허공에 대고 뭐 하는 짓인가 싶었으나, 내심 속은 편했다.
* * *
“멜리사가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뭘까 대체…….”
식당에 앉은 난 타버린 종잇조각을 떠올리며 추측을 이어 갔다. 마법도 마법이지만, 그 내용이 심히 거슬렸다.
[나도, 단원들도 지쳤어.]
직역해 보자면, 내 방문을 원하는 이가 멜리사 하나가 아닌 다수라는 뜻이었다. 더군다나 동료, 친구, 사람도 아닌 단원이라니.
“뭐 어디서 동아리 활동이라도 한 건가? 딱히 사회성이 있어 보이지는 않던데.”
몸 이곳저곳을 훑으며 몸 주인에 대해 평가하던 찰나, 낭랑한 샤샤의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어라? 저녁 시간까지는 조금 남았는데 벌써 내려오셨어요?”
“응. 방에 있자니 시끄러워서.”
“방에 혼자 계시는데 시끄러울 게 있나요……? 누, 누가 있는 것도 아니고 하하하.”
순간 샤샤의 낯빛이 희게 질렸다. 본래도 평범하지 않던 제 주인이었으나, 저럴 때면 더더욱 적응되지 않았다.
“샤샤, 너 혹시 마법 실제로 본 적 있어?”
“마법이요? 그걸 실제로 볼 일이 있나요. 공작님 정도면 몰라도, 저희 같은 사람들은 평생 가도 못 볼걸요?”
“왜? 영물도 있는데, 마법 정도는 엄청 흔한 거 아닌가?”
“에이! 또 큰일 날 소리 하시네. 마법 금지 국가에서 마법이라뇨! 몇 해 전, 마법사 대학살 이후로 모두 황실에서 관리하잖아요!”
“뭐? 대학살?!”
놀란 난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버젓이 마법을 보고 왔는데 대학살이라니!
“아…… 기억을 잃으셨죠.”
찻물을 따르던 샤샤가 다소 어두운 표정으로 말을 이어 갔다.
“밤이면 사람들의 비명이 끊이지를 않았어요. 막강한 황실 마법단과 기사단을 민간 마법사들이 어떻게 이길 수 있겠어요. 그때 죽은 숫자가 황실 고원을 다 채우고도 모자랐대요.”
“…….”
“그러니 마법에는 관심조차 주지 마세요.”
분위기에 압도된 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웃음기를 뺀 샤샤의 표정이 사뭇 낯설기도, 한편으로는 두렵기도 했다.
“헤헤, 제가 너무 진지했죠? 무서웠던 기억 중 하나라 그랬나 봐요. 아무튼 승인 없이 사용했다가는 쥐도 새도 모르게 잡혀갈지도 몰라요. 지하 감옥으로……. 앗! 수프를 올려 뒀었는데 깜박했네요.”
허둥거리던 샤샤는 서둘러 주방으로 사라졌다. 어쩐지 입 안이 바짝바짝 말랐다. 타는 목을 축이며 머릿속을 정돈했다.
“정리하자면 일반인들은 마법을 쓸 수가 없다는 건데. 그럼 뭐야? 황실 쪽은 아닌 것 같고…… 민, 민간 마법단? 와, 이러다 잘못 엮이면 진짜 뭣 되는 거잖아? 폭죽이고 나발이고, 죽으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그럴 수는 없지.”
아찔한 상상에 손사래 치며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그때였다.
“뭘 그럴 수가 없지?”
등 뒤로 울린 낮은 목소리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여……보?”
때아닌 에드먼드의 등장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바라봤다. 유독 마주치는 시간이 잦은 것이, 원래 공작이란 자리가 한가한 모양이다.
“요즘 안 바쁜가 봐요? 아침저녁으로 자주 보내요.”
가시 박힌 내 말에 에드먼드는 움찔했다. 머쓱한 듯 검지로 눈썹을 긁적이던 그가 퉁명스레 대꾸했다.
“바빴으면 좋겠다는 말로 들리는군.”
“그렇다기보다는 같이 먹으니 밥맛도 돌고 좋다는 말이죠.”
“그래.”
에드먼드가 짧게 답하며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어떻게 맨날 봐도 안 질리냐.
출구 없는 남편의 외모에 무장 해제가 되어 가던 찰나였다.
“근데 아까 말한 건 뭐지?”
훅 치고 들어온 질문에 손바닥이 축축했다. 나는 젖은 손을 비비며 물잔으로 뻗었다.
“아까? 내가 무슨 말을 했더라…… 모르겠네.”
회피한 시선과 달리 잔을 든 손이 조금씩 떨렸다. 머릿속엔 ‘마법 금지 국가’, ‘지하 감옥’ 따위의 단어들이 둥둥 떠다녔다.
“오늘 저녁 메뉴는 치즈를 곁들인 구운 채소와 단호박 크림 수프, 검은깨를 뿌린 오리 가슴살 구이입니다.”
그사이 식탁에는 준비된 음식들이 차곡차곡 놓였다.
“맛있겠는걸요, 레틴. 오늘 먹은 왕가의 눈…… 아니 국밥도 정말 맛있었는데 저녁 메뉴는 더 기대되네요.”
“만족하셨다니 다행입니다. 공작 부인께 꾸중을 들으면 어쩌나 준비하는 동안 걱정이 많았……!”
벅차오른 감정에 레틴은 소매로 눈가를 닦았다. 과도한 감수성이 퍽 부담스러웠으나, 나는 부러 레틴을 붙들며 시간을 끌었다.
“초대받은 부인들께서도 무척 좋아하셨답니다. 다음에도 부탁해요.”
훌쩍이는 레틴의 어깨를 토닥이며 미소 짓던 그 순간, 에드먼드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 * *
왜 저래 진짜, 먹다 체하겠네.
무슨 이유에서인지 에드먼드는 식사 내내 불쾌해 보였다. 가늘게 뜬 시선은 삐딱했고, 아득 문 입술은 누구 하나라도 씹어먹을 기세였다.
식탁 위에는 달그락거리는 식기 소리만이 오갔다. 헤슈턴과의 경합까지는 일주일. 기초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과연, 남은 시간 내에 폭죽을 만들 수 있을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저…….”
힐끔, 눈치를 살피던 나는 조심스레 말을 붙였다. 에드먼드의 붉은 동공이 소리 없이 나를 향했다.
저 얼굴로 폭탄이나 만들고 다니는 건 재능 낭비지.
잘생긴 얼굴에 흠집이라도 나면 어떻게 하려고.
막말로 에드먼드가 진짜 폭죽을 만들려는 걸지도 모르잖아?
나는 1퍼센트 남짓한 확률을 가슴에 품은 채 정면을 응시했다. 길어진 침묵에 답답한 듯, 에드먼드가 한쪽 눈살을 찡그렸다.
“왜 말을 하다 말지.”
“별건 아니고…… 그냥 좀 궁금한 게 있달까?”
“이번엔 또 무슨 엉뚱한 생각을 했나 들어나 보지.”
무심히 말한 그는 우아한 몸짓으로 고깃덩어리를 썰어 갔다. 그 모습이 어찌나 완벽한지,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기분이었다.
“오늘 점심 특식이 마음에 드셨는지, 부인들께서 여보 칭찬을 엄청나게 하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또 팔불출처럼 그랬죠? 저희 공작님은 외모와 지성 그리고 지도력과 힘을 겸비한 완벽한 남자라고.”
나는 부러 과장을 더해 가며 분위기를 풀었다. 예민한 주제인 만큼, 가장 편안한 상태에서 구렁이 담 넘어가듯 질문을 던질 생각이었다.
“하여간 오버는.”
늘 그렇듯 무뚝뚝한 반응이었으나, 내심 기분은 좋아 보였다. 미세하게 올라간 에드먼드의 입꼬리를 보며 나는 틈틈이 기회를 엿봤다.
“그래서 궁금한 게 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