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8화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꽃대를 꺾는 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으니까.”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나는 놀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테리샤 부인을 바라봤다.
“수확기에 접어든 봅핍플라워는 뿌리에 달린 열매만 자극하지 않으면, 터지지 않는답니다.”
말과 동시에 테리샤 부인의 두 손이 조심스레 흙을 파냈다. 곧이어 조그마한 열매 두어 개가 모습을 보였다.
휴…… 긴장이 풀린 두 다리가 휘청거렸으나 부러 자세를 유지했다. 그 모습이 재밌는 듯, 작게 코웃음 친 테리샤 부인이 수확한 열매를 내려놓았다.
“랜돌프 공작께서 단단히 주의한 모양이죠? 하긴 피우기 어려운 꽃인 만큼 귀히 다루는 게 만물에 대한 예의이죠.”
이건 또 뭔 말이야.
알 수 없는 말들에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갈팡질팡했다. 그사이 꽃다발을 엮은 테리샤 부인이 오색찬란한 무지개색 꽃잎을 흩날리며 말을 이었다.
“보아하니, 랜돌프 공작께서 경합 때 쓰려고 심어 둔 모양이네요. 봅핍플라워는 폭죽을 만드는 데에도 많이 쓰이니까요.”
“예? 아…… 아! 맞아요! 어렴풋이 그런 말을 했던 기억이 나네요. 그이가 폭탄 말고 폭죽을 만들겠다고 그랬었죠. 하하하.”
잠시 멈춰 있던 난 원래 그랬던 양, 맞장구를 쳐댔다. 덕분에 살의에 찬 공기가 한풀 꺾였다.
“오호호, 역시~ 오해가 있었던 거로군요. 선한 랜돌프 부부께서 아무 이유 없이 저런 걸 둘리가 없죠. 아무렴요.”
“저는 처음부터 아닌 줄 알았다니까요. 정식으로 황실 조사단에 의뢰해야겠어요. 공작 부부가 얼마나 사려 깊은지 모두 아시라고.”
“불꽃놀이라니, 상상으로도 낭만적이에요.”
김치전도 저렇게 빨리 뒤집지는 않을 거야.
금세 태도를 바꾼 귀부인들이 너도 나도 말을 보탰다. 당장 머리채 탈곡이라도 하고 싶었으나, 부러 참았다. 나는 시선을 돌려 꽃밭을 바라봤다.
‘저걸로 폭죽을 만들 수 있단 말이지?’
이제야 저 원흉을 없앨 가장 효과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을 찾은 게 분명했다.
* * *
“그럼 조심히들 가세요. 오늘 연회에 응해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어떻게 보답을 해야 할지…….”
저택 입구에 선 나는 작위적인 미소와 함께 한 사람, 한 사람 눈을 맞췄다. 그러곤 짝짝, 대기 중이던 사용인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틈틈이 취미 삼아 만들어 본 것들인데, 제 마음을 담아 아주 조금~씩 챙겨 봤답니다.”
나눠 준 상자에는 말린 과일과 쿠키 따위가 들어 있었다. 내용물을 확인한 귀부인들의 얼굴에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듣자 하니 머리카락을 고정하는 신묘한 물건이 있다던데, 헤슈턴 연회에 참석한 부인들께 주었다고…….”
함께 온 귀부인 중 하나가 용기 내 물었으나, 나는 부러 원하는 답을 내놓지 않았다.
“아……. ‘굳어라, 착착’을 말씀하시는 모양이군요. 재료 구하기가 워낙 까다로워서 이번엔 준비를 못 했지 뭐예요.”
진정한 품귀 현상이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 주마. 애덤 스미스 형이 내 모토다, 이 말이야.
보이지 않는 손, 가 보자고.
호호호, 나는 검은 속을 꼭꼭 감추며 선하게 웃었다. 그러곤 지금껏 숨겨 왔던 비장의 히든카드를 꺼냈다.
“대신에 제가 새로운 걸 만들어 봤는데…….”
실망했던 귀부인들의 두 눈이 다시금 반짝였다. 몰려든 시선에 나는 뜸을 들이며 다음 말을 망설였다.
“뭔데, 저렇게 뜸을 들인담? 저번에 줬던 ‘굳어라, 착착’인지 뭔지 꽤 괜찮던데.”
내심 기대되는 모양인지, 마차에 오르던 모리 부인이 말을 보탰다.
“얼굴이나 몸에 바르는 크림인데 효과가 제법 좋더라고요. ‘백옥의 비밀’이라고……. 이름처럼 백옥 같아지실 거예요.”
뒤이어 대기 중이던 샤샤가 상자를 들고 나타났다. 안에는 손가락 한 뼘 남짓한 작은 통이 사람 수만큼 담겨 있었다.
“아름다운 마님들, 여기 좀 봐 보시겠어요? 제 피부 정말 백옥같지 않나요?”
차분히 물건을 나눠 주던 샤샤가 미리 준비한 말을 꺼냈다.
“근데 제 피부가 원래 이렇지가 않았거든요. 이게 다 저희 랜돌프 부인께서 정성껏 만드신 크림을 쓴 덕분이죠. 보습과 영양이 얼마나 좋은지, 제가 이제는 다른 걸 못 써요.”
“어머, 어머. 얘 진짜 피부 좋은 것 좀 봐. 젊음은 다르니까.”
어느새 다가온 모리 부인이 관심을 보였다. 샤샤는 부러 매끈한 피부를 만지작대며 포즈를 취하기도 했다.
“말씀드렸다시피 이건 젊음의 문제가 아니라, 관리의 중요성이랍니다. 그런데 이 관리의 핵심이 뭐다? 바로 저희 랜들프 부인께서 만든 ‘백옥의 비밀’이다! 이거 하나면, 아기 피부? 시간 문제랍니다.”
다년간 갈고 닦은 샤샤의 화려한 언변에 순진한 귀부인들께선 속절없이 빠져들었다.
“이건 직접 사용해 보시고 느껴 보셔야 해요. 얼마나 좋은지, 온몸으로 아실 거예요.”
나는 미끼를 던졌고,
“오, 그렇단 말이죠? 랜돌프 부인께서 그렇게까지 말하니 무척 기대되는걸요?”
“솜씨가 좋다더니 과연 그 명성이 어떨는지, 이러다 줄 서서 사는 건 아닌지 몰라요~.”
반응은 예상대로였다.
* * *
딸깍. 방으로 들어온 나는 곧장 문을 잠갔다.
“부인! 옷 갈아입으셔야죠. 아까 보니 흙이 좀 묻었던데요!”
밖에서 샤샤의 잔소리가 들려왔으나 무시했다. 의자 한편에 걸터앉은 나는 미리 준비한 양피지와 만년필을 꺼내 들었다.
조그만 손이 하나, 둘 숫자를 매겨 가며 종이를 채워 갔다. 헤슈턴과의 경합까지는 불과 일주일 남짓한 시간이 전부.
[클로엔의 투두 리스트]
1. 폭탄 꽃, 열매 따기
2. 경합 전까지 피날레용 폭죽 만들기(남은 기한 일주일)
그리고 가장 중요한…….
3. 절대 걸리지 말기
나는 마지막 3번에 동그라미와 별표를 난무했다. 그러곤 말없이 적어 둔 종잇장을 응시했다.
“뭐 하나 쉬운 게 없네.”
1번도, 2번도 그리고 마지막 3번까지도 난이도 상중하 중 최상이었다. 어떻게 아무도 몰래 폭탄 꽃 열매를 딸 것이며, 수확에 성공한다 한들 이동과 보관이 문제였다.
나는 접어 둔 소매에서 둥근 열매 하나를 꺼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방 안 가득 화약 냄새가 퍼지는 불상사는 없었다.
“그보다 이걸로 어떻게 만들지?”
언뜻 콩 같기도 한 폭탄 열매를 손으로 굴리며 관찰했다. 까만 표면 위로 선명한 실금을 발견했을 땐, 나도 모르게 악다구니를 치기도 했다.
“역시 그냥 물 붓는 게 최선이려나……? 그래도 경합 마지막에 팡팡 터지면 간지도 그런 간지가 없을 텐데.”
나는 빈 머리를 긁적이며 고민했다. 용도를 알려 준 테리샤 부인께 물어보자니, 야심 찬 내 계획을 동네방네 떠드는 꼴이 될 것이다.
그렇다고 정원 관리사인 모디카에게 손을 벌리기엔? 에드먼드에게 내가 당신의 폭탄을 탐하고 있다, 선전 포고하는 격.
“어떻게 하냐, 진짜.”
잠시 고민하던 난 아래로 시선을 돌렸다. 예민하던 전과 달리 케이지에 든 쀼는 태연히 간식을 들고 있었다.
잠깐, 간식을 준 적이 없는데?
순간 공기가 서늘했다. 예리한 촉이 뒤통수를 때리고, 나는 곧장 몸을 숙여 케이지에 머리를 디밀었다.
말랑한 손바닥에는 까만 열매 하나가 들려 있었다. 위쪽에 난 선명한 실금을 보며 확신했다.
폭탄 열매.
“뫄아아……압!”
나는 터진 주둥이를 막곤 재빨리 케이지로 다가섰다. 그 순간 씨익, 열매를 든 쀼의 입가가 비스듬히 올라간 건 우연의 일치일 거다.
“훠, 훠이……! 이리 줘! 이리 내, 어서! 말 안 들으면 언니가 맴매할 거야!”
행여 터질까, 나는 엉덩이를 뒤로 쭉 빼곤 손을 뻗었다.
“쀼?”
타는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쀼는 동그란 눈을 끔벅거리며 귀엽게 울었다. 그사이 손톱만 한 발바닥은 조금씩 뒷걸음질 치며 거리를 벌렸다.
“너 지금 그 태도 매우 곤란해? 지금 네가 뭘 들고 있는지 모르는 것 같은데, 그거 건드리면 아주 다 X 되는 거야.”
그런 내 말을 깡그리 무시한 채, 쀼는 손에 든 열매를 입가로 가져갔다.
* * *
“오우…… 10년 감수했네.”
나는 따끔거리는 손바닥을 툴툴 털며 한숨을 내쉬었다. 반쯤 뒤집힌 쀼는 균형을 잡으려 연신 버둥댔다.
“쀼! 쀼쀼!”
열매를 뺏긴 게 적잖이 분한 듯, 발칙한 밤송이는 소리 높여 울었다.
“어떤 정신 나간 여편네가 이딴 걸 넣어 둔 거야.”
나는 탈환한 열매를 공병에 담으며 구시렁거렸다. 한차례 고비를 넘긴 난 투명한 유리병을 가만히 응시했다.
“쀼!!”
아래에선 성난 밤송이의 시위가 이어졌다. 나는 도톰한 입술을 손끝으로 톡톡 치며 고민했다.
“혹시 여기에도 구슬이 있나? 이거랑 바꿔치기하면 딱 맞을 것 같은데…… 이동도 편하고.”
와, 적잖이 똑똑했다.
불현듯 스친 생각에 나는 스스로 감탄했다. 빛나는 위기 대처 능력이 오늘도 날 살렸다며 자화자찬을 이어 가던 그때.
언제 놓고 간지, 모를 서신 한 통이 책 사이에 꽂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