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6화
“무슨 말?”
“왕가의 눈물인지 뭔지, 그 얼토당토않은 이야기 말이에요. 페르티 뭐시기가 먹었다는 그거 진짜냐고요.”
“본인 입으로 말했네,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라고.”
“에엑!? 그럼 다 뻥……!”
힐끔, 주변을 살핀 나는 눈치껏 소리를 낮췄다. 정말 대단한 음식이라도 된 양, 한 입 한 입 음미하는 귀부인들 앞에서 초를 칠 수는 없는 노릇이니.
“……뻥이라고요? 그렇게 구구절절 아무도 안 궁금한 티엠아이까지 설명해 놓고?”
“티엠아이? 그건 또 어느 나라 말이지? 제발 표준어를 사용해. 국문은 통 늘지를 않는다던데?”
“여기서 내 국어 실력이 왜 나오는 거죠? 됐고, 그래서 지금껏 한 말들이 진짜 다 거짓말이라고요?”
“글쎄.”
이어진 물음에 에드먼드는 먹지도 않는 음식을 휘적거리며 딴청을 부렸다.
“와…… 역시 얼굴이 무기라더니 무슨 헛소리를 해도 진짜 같구나. 하긴 이 얼굴로는 팥으로 메주를 쑨 대도 진짜지.”
“그건 또 대체 뭔 소리야? 팥으로 뭘 쒀?”
“그냥 내 간단한 한 줄 평이니까 못 들은 척해 줄래요? 사사건건 말하기도 적잖이 귀찮거든요.”
“당신이 표준어를 사용하면 된대도.”
“저 봐, 저 봐. 할 말 없으니까 또 말 돌리는 거. 아주 상습범이라니까? 그래서 진짜 거짓말이냐고요.”
“당연한 것 아닌가? 설마 이런 밍밍한 걸 왕족들이 먹을까.”
내 시야는 자연스레 오른편을 향했다. 누구보다 맛있게 먹고 있는 모리 부인을 보며 나는 작은 의문이 일었다.
“그럼…… 모리 부인은 대체 뭘 먹고 온 거예요?”
질문이 재밌는지, 에드먼드가 작게 코웃음 치며 뜸을 들였다.
“아, 혼자만 웃지 말고 뭔데요, 대체.”
“모리 부인은 황제 다음으로 허영심이 많기로 유명하다지?”
“와…… 그럼 척한 거라고요? 사별한 남편까지 팔아먹으면서? 진짜 소름.”
“아마도 그렇겠지. 애초에 없는 음식이니까.”
“알고는 있었지만, 정말 대단하신 분이네요. 역시 내 물고기가 될 자격이 있어요.”
“헛소리 그만하고 먹지. 식으면 맛이 덜……!”
“아니, 아니 나 아직 안 끝났어요. 그럼 대체 이 음식은 어떻게 알았어요? 설마…….”
빙의자?
미처 내놓지 못한 말이 목구멍을 간질였으나 부러 참았다. 괜한 무리수를 두고 자멸하느니 닥치고 있는 편이 신변에 이로울 거로 생각하며.
에드먼드가 말했다.
“어제 일이 온전히 기억나는 건 아닌 모양이야?”
“엄…… 어제 만든 피자에 대해선 굉장히 유감스럽게 생각해요. 하지만 이 자연의 섭리라는 게 거스를 수는……!”
“먹고 싶다며.”
“네?”
예상치 못한 답변에 나는 하던 말을 멈추고 정면을 응시했다. 짙어진 시선에 에드먼드는 콩나물을 뒤적이며 말을 이었다.
“흠흠, 어제 밤새도록 노래를 불렀잖아. 꼭 먹고 싶다고. 굳이 궁금하지도 않은 조리법까지 알려 주면서.”
“그래서 이걸 다…… 하루아침에 준비했다고요? 단순히 내가 먹고 싶대서?”
“만든 건 내가 아니라 레틴이지. 숙취에는 이게 최고라며.”
이어진 물음에 에드먼드는 심드렁히 말했다. 아닌 척, 무심한 태도를 보고 있자니 괜스레 골려 주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구래두~ 지시한 건 여보자나용. 로에니 속 뜨리지 말라구 구론 고에요?”
나는 양 검지를 꾹꾹 누르며 눈을 크게 떴다. 몹쓸 애교에 에드먼드의 미간이 깊게 팼다.
“갑자기 혀가 왜 그러지? 콩나물에 마비 효과가 있다는 건 못 들은 것 같은데.”
“여보 따랑에 마비가 됐나 봐용. 우움~ 오또카지? 이건 뽀뽀로만 풀 수 있는 곤데,”
“어제 먹은 술이 덜 깬 모양이군. 그대로 영영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할 말을 끝낸 에드먼드는 망설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월한 신체 조건은 자연스레 이목을 끌었고.
“다음 일정이 있는 관계로 여기까지 해야겠군요. 그럼 이만.”
에드먼드는 간단한 환영사를 남기곤 도망치듯, 연회장을 떠났다.
* * *
콩나물 국밥과 함께한 오찬은 성황리에 끝이 났다. 마지막 국물 한 모금까지 싹싹 긁어먹은 귀부인들은 너도 나도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이어진 2차 디저트 대첩에서도 반응은 비슷했으니, 그중 가장 인기가 좋은 것은 공작 부인 표 딸기 생강차였다.
“이 차는 대체 뭘 넣고 만든 거죠? 달콤하고 쌉싸름한 게 맛도 향도 너무 좋은걸요.”
“랜돌프에서 준비한 음식들은 하나같이 생소한데 훌륭하단 말이죠.”
귀부인들의 찬사에 내 어깨는 하늘 높이 올라갔다. 국밥으로 해장도 했겠다, 컨디션은 최상 중의 최상.
“제가 직접 수확한 재료들로 정성껏 준비했답니다. 입에 맞으셨으면 좋겠네요.”
“이 맛난 걸 클로엔이 직접 만들었단 말이에요? 솜씨가 제법인걸요.”
가만히 차 맛을 음미하던 테리샤 부인께선 기어코 칭찬 릴레이의 정점을 찍었고, 동시에 왼편의 귀부인들은 경쟁하듯 찬사를 쏟아 냈다.
“랜돌프 부인께서는 참으로 부지런하시군요. 저 고운 손으로 야무지기도 하지.”
“전 조금 감동했지 뭐예요. 돌아가신 어머니가 생각난달까?”
저 언니 오바 잘하네.
“호호호, 부인들께서 좋아해 주시니 기쁠 따름이네요. 밤새 고생한 보람이 있어요.”
힐끔, 눈치를 살핀 나는 부인들과 하나하나 눈을 맞추며 교감했다. 그러곤 가장 적당한 타이밍에 다음 말을 던졌다.
“돌아가실 때 조금씩 챙겨드릴 테니 사양 말아 주세요.”
입 벌려라, 샘플 들어간다.
옛말에 가랑비에 옷 젖는지 모른다고 했다. 제품은 확실하니 자연스러운 침투에만 성공한다면 그다음은 일사천리!
나는 부러 설설 웃어 가며 은은한 영업력을 펼쳤다. 순진한 부인들께선 이런 내 검은 속을 알 리가 없었고.
“어머, 젊은 부인께서 사려 깊기도 해라. 부부가 닮는다더니, 오늘 자리에서 공작 내외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네요.”
“그러게나 말입니다. 세간의 소문이 다 틀린 게죠. 공작 내외께서 이리도 친절하고 사랑 넘치시니, 주변에서 샘을 낸 것 아니겠어요~?”
흐름을 탄 귀부인들은 사려 깊은 공작 내외라 평가하며 칭찬을 쏟아 냈다. 샐쭉 미소 지은 난 타오른 열기에 보답하듯, 또 다른 화제를 던졌다.
* * *
“샤샤, 만들어 둔 수제청 딱 두어 번 먹을 정도로만 나눠 담고 나머지는 저장고에 넣어 둬.”
주방으로 온 나는 곧장 샤샤를 불렀다. 갑작스러운 지시에도 샤샤는 능숙히 움직이며 남은 공병 개수를 파악했다.
“오, 다행히 딱 열 개 있네요. 제가 예쁘게 담아 둘 테니, 맡겨만 주세요! 근데 두어 번 분량이면 무슨 맛인지도 모를 텐데, 정말 그 정도만 담아요?”
“응. 이게 다 내 영업 전략이랄까? 뭐든 퍼 주면 흔한 줄 안다니까? 연애도 그래. 감질나게 줘야 애가 타지.”
“헙, 그럼 합방을 거부하신 이유가……! 세상에, 부인께서는 정말 몇 수 앞을 내다보시는 거예요? 이럴 때마다 놀랍다니까요. 진짜 머리가 좋으신 건가?”
“뒤에 의문형이 붙은 게, 어째 칭찬이 아니라 욕 같다?”
“그, 그럴 리가요. 저는 늘 부인을 진심으로 존경한답니다, 하하. 손님들께서 기다리실 테니 일단 ‘쀼’부터 데려올까요?”
“아냐. 머리 좋은 내가 갈게.”
“에이, 오해시라니까요. 제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당황한 샤샤를 뒤로한 채, 나는 서둘러 위층으로 향했다. 방문을 엶과 동시에.
-가만두지 않을 거야.
와 같은 협박성 통보가 들려왔으나 개의치 않았다. 무서운 것도 하루 이틀이지, 매일같이 환청에 시달리다 보니 이젠 안 들리면 서운할 지경이었다.
“네네, 누구신지는 모르지만, 알아서 하세요. 저는 제 할 일을 하겠습니다.”
간이 부을 대로 부은 난 너스레를 떨어가며 케이지로 향했다. 곧이어 활기찬 울음소리와 함께 쀼가 창살에 바짝 붙었다.
“쀼!! 쀼!!”
특수 제작한 고슴도치용 파티 드레스와 화려한 머리 장식까지 찬 쀼는 어느 때보다 반짝였다.
“오구오구, 언니 보고 싶었쬬요. 어제 까칠한 오빠랑 자느라 힘드러찌? 드레스는 마음에 드러요?”
물음에 답하듯, 말랑한 발바닥이 창살을 팡팡 쳤다.
-이런 미친 #[email protected]&*%!
귓가엔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육두문자가 들려왔으나 나는 못 들은 척, 할 일을 이어갔다.
“쀼~ 언니랑 손님 맞이하러 가자. 오늘 언니한테 정~말 중요한 자리인 거 알지? 끝나고 나면 간식 많이 줄 테니까 제발 물지만 말자, 알겠지?”
한 손에는 케이지, 다른 한 손에는 간식 바구니를 든 나는 서둘러 테라스로 향했다.
“테리샤님, 이번에 다녀온 여행은 어떠셨어요? 후작님과 두 분이 다녀오셨다던데 이야기 좀 해 주세요~.”
여행 이야기를 해 달라는 낸시 부인을 기점으로, 안에선 두 여왕벌의 파벌 싸움이 이어졌다.
“뭐 특별할 것도 없었지만, 굳이 말을 해 보자면……!”
“특별할 게 없는데 굳이 뭣 하러. 바쁘신 분들 귀한 시간을 뺏으면 쓰나요, 테리샤 부인.”
“우리 모리 부인께서 샘을 내시는 모양이군요? 하긴, 혼자인 시간이 길 테니 이해합니다.”
“뭐, 뭐라고요?!”
저러다 머리채 잡지, 잡아.
미래를 예견한 난 심각한 얼굴로 입구를 맴돌았다. 그런 나를 비웃듯 테리샤 부인은 고고한 학처럼 제 할 말을 이어갔다.
“뭘 그리 발끈을 한담. 설마 이만한 농담으로 기분 상한 건 아니죠, 모리? 우리 사이에.”
샐쭉 미소 짓는 테리샤 부인과 달리 발갛게 물든 모리 부인은 얼음을 씹어 가며 화를 삭였다.
“아 참! 여러분 혹시 불꽃놀이라는 걸, 아시나요? 이번에 후작님과 펠라라는 곳에 다녀왔는데…….”
분위기를 탄 테리샤 부인은 능숙히 장내를 장악했다. 펠라의 기후, 문화 그리고 눈을 번쩍 뜨이게 할 놀라운 사실까지!
“추수철을 앞두고 펠라에선 큰 야시장을 열거든요. 불꽃놀이를 구경하는 일은 흔치 않은데, 이번에 시기가 맞았지 뭐예요.”
‘오호, 여기에도 불꽃놀이가 있단 말이지…….’
흥미로운 주제에 나는 조용히 숨을 죽였다. 머릿속엔 후원에 핀 폭탄 꽃이 둥둥 떠다녔다.
하지만 신은 진정 내 편이 아니었던가.
“오, 저기 클로엔이 왔군요!”
멀리서 나를 발견한 테리샤 부인이 알은체를 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