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2화
언젠가 들어 본 듯한 괴상한 울음소리와 함께 무성하던 수풀이 홍해처럼 갈라졌다.
이게 다 무슨 일이야.
이어진 행렬에 나는 벌어진 입을 감출 수가 없었다. 흙투성이가 된 단원들 뒤로 밧줄에 묶인 자이언트 달팽이가 줄줄이 사탕처럼 늘여졌다.
“보나 마나 우리가 1등이지. 나랑 티베로가 잡은 것만 세 마리는 될걸.”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소리! 난 혼자 네 마리를 포획했다고.”
서로 제 몫을 으스대며 과시하던 단원들은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대번에 목숨을 끊던 기존 방식과 달리 흠집 하나 없이, 상대를 제압하는 건 퍽 어려운 일이었다.
“어라? 저기…… 공작 부인 아니십니까? 식사 시간이 다 되었는데 왜 여기 계시죠?”
눈썰미 좋은 멜빈이 멀찍이 선 클로엔을 발견했다. 그와 동시에 무료하던 붉은 동공에 활기가 돌았다.
“알아서들 정리해.”
에드먼드가 짧게 말하곤 목적지를 바꿨다. 길쭉한 두 다리가 허공을 가로지를 때면, 흐릿하던 클로엔의 얼굴이 점점 선명하게 변했다.
“여긴 어쩐 일이지? 아직 정리 중이라 어수선할 텐데.”
어느새 곁으로 온 그가 어색하게 말을 붙였다.
“아, 그게……!”
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주변을 훑었다. 언제 간 건지, 모디카는 이미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잠깐 산책 좀 하느라…….”
“여기까지?”
“뭐 걷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하하하. 그건 그렇고 저것들은 다 뭐예요? 설마 단원들 보고 달팽이 잡으라고 한 건 아니죠? 에이, 설……!”
“응. 오늘 훈련이었어.”
“미쳤어, 미쳤어! 가뜩이나 경합 준비 때문에 정신없는데, 왜 그랬어요. 나를 얼마나 민폐로 보겠냐고요!”
당연하다는 반응에 나는 발을 동동 구르며 나무랐다. 달팽이가 필요한 건 사실이었으나, 단원들을 동원할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다.
“단원들은 훈련해서 좋고, 당신은 필요한 걸 얻어서 좋고, 나는 훌륭한 남편 노릇을 해서 좋은데 뭐가 문제지?”
질문과 함께 에드먼드의 두 팔이 내 몸을 당겼다. 불현듯 가까워진 거리에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고 목소리는 떨렸다.
“아니, 그래도! 말이 백 마리지 진짜 백 마리를 잡아 오라는 말은 아니었다고요오오…….”
“그래서.”
이게 또 사람을 후리네.
고된 훈련 탓인지, 살짝 젖은 검은 머리칼과 은은히 풍기는 체향은 에드먼드 특유의 야성미를 극대화했다.
“안 예뻐해 줄 건가?”
이어진 남편의 도발에 모래성 같은 이성이 와르르 무너졌다.
내가 이러는 건 다 네 탓이다.
* * *
휘익- 탁!
흡사 뚫어뻥을 닮은 화살촉이 바람을 가르며 날아갔다. 그저 대충 시위를 당겼을 뿐인데
미유우우웅~!
커다란 자이언트 달팽이가 기우뚱, 균형을 잃으며 쓰러졌다.
“부인, 이번에도 명중입니다! 완전히 기절했어요!”
멀리서 대기 중이던 샤샤가 팔짝 뛰며 물개 박수를 쳤다. 나는 손에 든 석궁을 대충 둘러매곤 거대 콧물과의 거리를 좁혔다.
“먹이고 재워 줬으니 이제 은혜를 갚아야지, 달순아.”
등딱지에 붙은 화살촉을 힘주어 당기자, 뽁! 경쾌한 소리가 허공에 울렸다.
“으으, 부인 이건 언제 만져도 느낌이 별로예요. 적응될 법도 한데 늘 안 된단 말이죠.”
샤샤가 달팽이 점액질을 긁어내며 작게 투덜댔다. 보직을 변경해 달라는 말이었으나, 나는 회수한 화살을 거즈로 닦으며 심드렁히 대꾸했다.
“그게 다 돈이라고 생각하래도. 한 방울도 아까우니까 싹싹 모아 담아.”
“치, 만들어 두신 달팽이 크림이 응접실 창고에 한가득 쌓여 있잖아요. 뭘 얼마나 더 만드시려고…….”
“물량 없어서 허덕여 봐야 아~ 그때 부인께서 참으로 선견지명이셨구나, 할 거야? 응?”
“선견지명이 뭔지는 모르겠고, 대체 언제까지 서신들을 무시하실 건데요. 이러다 정말 소문이라도 나시면 어쩌시려고요.”
“그러니까 내일 잘해야지. 음식은 넉넉히 준비했지?”
“네. 얼마 전부터 신신당부하셨잖아요. 보낸 초대장은 두 장뿐인데 왜 음식은 10인분이나 준비하시는 건지, 저는 도통……!”
“됐고, 그거 얼추 다 했으면 저장고에 좀 다녀오자.”
나는 길어지는 샤샤의 잔소리를 뚝 자르곤 주변을 정리했다. 샤샤가 마지막 한 방울까지 알뜰히 긁어모으며 물었다.
“또 그 항아리를 뒤적거리시려고요?”
“오, 지니어스.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더니 놀라운 발전이다, 샤샤.”
“하루에도 몇 번씩 왔다 갔다 하시는데 그걸 모를 리가 있나요. 모르는 게 바보지.”
“담금주란 게 원래 정성이야, 정성. 다른 사람도 아니고 우리 그이 먹일 건데 소홀하면 쓰겠니? 오늘 그 진가를 발휘할 거니 기대하시라 이 말이야.”
“하지만 포도도 아니고, 야생 열매를 담가 먹는 건 정말 듣도 보도 못했는걸요. 그러다 진짜 탈이라도 나시면…….”
“달팽이 크림은 뭐 어디서 들어 본 적이 있고?”
“그건 또 그렇지만…….”
“안 죽으니까 걱정을 마세요. 아, 그래도 조만간 의사 부를 준비는 해야겠다.”
“의사요? 안 죽는다면서 의사는 왜 찾으시는데요?!”
“오늘에야말로 우리의 2세가 생길 역사적인 날이니까?”
“네에?!”
“어서 가자. 시간 없어. 모처럼 에드먼드랑 같이 먹는 저녁이란 말이야. 식사 전에 세팅하려면 지금 가도 빠듯해. 뭔 놈의 집구석이 이렇게나 큰지. 진짜 전용 열차라도 하나 만들어야지.”
놀란 샤샤를 뒤로한 채, 나는 홀로 산길을 내려갔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주변을 보며 홀로 “오~.”, “이야~.” 따위의 감탄사를 뱉기도 했다.
“그런데요, 부인.”
어느새 뒤따라온 샤샤가 말을 붙였다. 이제는 정말 귀가 터지는 건 아닐까, 걱정스러웠다.
“시답잖은 말 할 거면, 꺼내지도 마. 내 아이템에 대한 불신은 더더욱 용납 못 해.”
“에이, 그런 게 아니라 저희 공작님 말이에요. 정말 대단하지 않으세요? 어떻게 며칠 만에 이렇게 만드실 수가 있죠.”
“요즘 그이가 월급을 솔찬히 주나 봐. 부쩍 입에 발린 소리가 늘었다.”
“입에 발린 소리가 아니라 사실이 그렇잖아요. 저 우글거리는 달팽이 떼 좀 보시라고요.”
나는 흐린 눈으로 고개를 돌렸다. 괴상한 울음소리와 함께 나무를 뜯어 먹는 거대 콧물들의 모습은 나 역시도 적응하기 어려웠다.
“말이 백 마리지, 어떻게 단 3일 만에 잡아 오시죠? 농장도 그래요. 뼈대도 없었는데 얼추 자리를 잡아가잖아요.”
이어진 샤샤의 말에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샤샤의 말만 따라 에드먼드의 추진력은 실로 허리케인에 버금갔다.
고작 나무 울타리가 전부였던 달팽이 농장은 며칠 사이 모습을 제대로 갖췄다.
‘효과적인 관리를 위해선 일단 개별 우리가 필요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