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1화
“네? 없애 버리다니요?”
“그냥 오는 족족 불 싸 질러 버리라는 뜻이야. 여기서 더 엮이면 곤란해.”
단호한 내 말에 샤샤는 말없이 고개를 주억였다. 그러곤 힐끔, 남은 서신들을 건네며 조심스레 물었다.
“그래도 오늘 온 초대장엔 답장하실 거죠? 서재에 가서 종이와 펜을 가져올까요?”
“아냐, 그럴 필요 없어. 어차피 또 올 거야.”
“엥? 간단하게나마 답장을 보내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기분이 상할 수도 있고 또…….”
“샤샤, 입질 왔다고 바로 당기는 건 하수나 하는 짓이야. 나 같은 프로는 조금 다르지.”
“조금 다르다니요?”
“쟤들이 지금 내가 좋아서 연락했겠어? 그랬으면 진작부터 나를 초대했었어야지. 결국 바라는 게 따로 있다는 말이야.”
“그럼 혹시……!”
“우리 물건이 입소문을 타 버렸다는 거지. 고로 난 시기를 더 기다린다. 왜냐? 애가 닳게.”
나는 판결을 내리듯, 식탁 위를 두드렸다. 동시에 반짝이는 샤샤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역시 부인께서는 대단하세요! 어떻게 그런 엄청난 생각을 하시는 거예요?”
“이게 다 저 건너에서 검증된 판매 방식이랄까.”
나는 부러 어깨를 으쓱이며 찻잔을 기울였다. 머릿속엔 베일에 싸인 후원 관리자, 모디카에 대한 생각이 가득했다.
* * *
“부인, 저희 대체 어디 가는 거예요? 벌써 세 시간째라고요. 이제 해도 저물었는데, 그만 돌아가요.”
“그래 봤자, 헉헉. 저택 한 바퀴밖에 안 돌았어. 이참에 체력 단련한다고 생각해.”
후…… 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언덕을 올랐다. 가는 곳마다 인사가 끊이질 않았으나, 인사를 주고받은 대부분이 얼굴을 익힌 사용인들이었다.
“모디카가 누구야, 대체?”
“없는 모디카를 왜 여기서 찾으세요. 으으…… 부인 다리가 너무 아파요.”
“한 번만 더 돌자.”
“부인, 제발요……!”
굳이 말 많은 샤샤를 동행한 이유 역시 그 때문이었다. 모디카라는 이름을 처음 들어봤을뿐더러, 얼굴은커녕 간단한 외관조차 몰랐다. 즉, 무작정 홀로 나섰다간 사막에서 바늘을 찾는 격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더 갔을까, 두 사람은 갈림길에 섰다. 잘 정돈된 오른편과 달리 다소 어수선한 왼편에는 나무 울타리가 뜨문뜨문 박혀 있었다.
“여기가 원래 두 갈래였던가?”
나는 벅찬 숨을 몰아쉬며 힘겹게 말했다. 오래 걸어서인지, 다리는 물론 배까지 당겼다.
“여기가 공작님께 달라고 하신 산 입구잖아요. 오늘부터 울타리를 친다더니, 모디카가 고생이 많았네요.”
“뭐? 모디카?!”
“네, 모디카! 오늘 여기서 일한다고 했거든요.”
“그걸 지금 말한다고?”
“그러면 언제 말해야 하는데요……? 설마 지금까지 모디카를 찾으신 거예요?”
천진한 샤샤의 물음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치미는 울화를 꾹꾹 누르며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살벌한 내 미소에 샤샤는 흠칫, 어깨를 떨었다.
“혹, 혹시 무슨 문제라도?”
“샤샤 네가 좋아서 그렇지. 여기가 거기였구나. 내 농장. 거기다가 모디카가 여기에 있다고? 이런 우연이 있나. 하하하.”
“네! 근데 좀 많이 멀죠?”
“이참에 에드먼드한테 열차라도 만들어 달라고 해야겠네. 집에서 왔다 갔다 하는데 왕복 두 시간이면 웬만한 경기도 뺨치지 뭐. 열차 하나 만들어야 해.”
“으음~ 나무 냄새. 부인, 여기 너무 시원하고 좋아요!”
이어진 내 말은 듣지도 않은 채, 샤샤는 앞장서 숲속으로 향했다.
* * *
여긴 정말…… 무얼 상상하든, 그 이상이구나?
모디카를 마주한 지금, 머릿속에 든 생각은 하나뿐이었다. ‘식물 박사’라는 샤샤의 말에 색안경을 낀 게 문제였다.
지긋이 나이가 들었을 거란 예상은 완전히 빗겨 갔다.
‘몸이 굉장히 자유분방하네.’
다소 헐벗은 차림의 모디카는 한국 배우 마 씨를 연상시켰다.
“안녕하세요, 공작 부인.”
내성적이라던 샤샤의 말과 달리 모디카는 능숙하게 인사를 건넸다. 그러곤 본래 자리로 돌아가 망치와 같은 연장을 만지작댔다.
“와…… 꽃을 가꾸는 게 아니라 잡아 뜯을 것 같은데.”
나는 놀란 눈을 깜박이며, 샤샤를 바라봤다. 아무리 봐도 저 우락부락한 근육으로 꽃을 가꾼다는 건 예상 밖이었다.
“에이, 외관이 저래서 그렇지, 얼마나 세심한데요. 아버지였나, 어머니였나 두 분 중 한 분이 거인족이셨대요. 아마 랜돌프 저택에서 모디카가 제일 셀걸요?”
“에이, 그래도 캡틴은 에드먼드지. 사람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야. 물 근육일지도 모……!”
말과 동시에 모디카는 몸체만 한 울타리를 번쩍번쩍 들어 올렸다. 놀라운 광경에 다물린 입술이 절로 벌어졌다. 그사이 몸을 바짝 붙인 샤샤가 작게 속삭였다.
“노예 시장에 팔려 갈 뻔한 걸 공작께서 웃돈을 주고 데려오셨데요. 정말 다행이죠.”
“노예…… 시장?”
“네. 거인족이 흔치 않다 보니 암시장의 표적이 됐었나 봐요. 공작님께서 얼마나 좋은 분인지 알면, 사람들도 생각이 달라질 텐데…….”
예상과 다른 에드먼드의 행적에 나는 놀란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늘 차갑고 냉정하다고만 생각한 그에게서 누구보다 깊은 온정을 느꼈다.
“헤헤, 사실 저도 듣고 좀 놀랐어요. 아무튼 그렇대요! 그런데요, 부인……. 제가 이제는 정말 주방에 가 봐야 하는데 어쩌죠?”
“괜찮으니까 먼저 가 봐. 정 모르겠으면 아무나 붙들고 데려다 달라고 하지 뭐.”
“아니에요, 제가 모디카한테 부탁해 놓을게요. 그럼 전 부인께서 드실 맛있는 음식을 만들러 갈게요! 이따 뵈어요.”
샤샤가 사라지고, 숲에는 정적이 가득했다. 멀뚱히 선 나와 달리 모디카는 연신 바쁘게 손을 놀렸다.
“아, 숲 냄새가 참 좋네.”
나는 시답잖은 소리를 해 가며 주변을 빙빙 돌았다.
“아하하, 신경 쓰지 말아요. 그냥 공기가 좋아서.”
그 이후로도 모디카는 한참을 뚝딱거렸다. 간간이 내 위치를 살피기는 했으나 크게 관여하지 않았다.
“저기, 모디카라고 했던가요?”
나는 마른 입술을 달싹이며 조심스레 다가섰다. 피부 위로 전과 다른 경계가 고스란히 느껴졌으나 철판을 깔았다.
“네. 말씀하십시오, 부인.”
“여기서는 뭘 하고 있던 거예요?”
“보시다시피 울타리를 설치하고 있습니다.”
“아아, 울타리. 듣자 하니 식물 박사라던데. 후원도 관리하고.”
부러 모르는 척, 나는 단계적으로 접근했다. 딱딱하던 전과 달리 모디카의 시선이 조금은 유해졌다.
“박사라기엔 과분하고…… 남들보다 조금 더 알 뿐입니다.”
“그렇구나. 나도 식물에 관심이 많거든요. 혹시 그거 알아요? 라벤더! 여기 말로 하데스 꽃이었죠, 아마? 그게 향이 정말 좋은데 죄다 헌화용으로만 쓰더라고요.”
“하데스 꽃은 그 향과 색이 아름다워 편안함을 주죠. 고인의 안락을 빌며 시작한 게, 이제는 하나의 문화가 됐습니다. 저 역시 하데스 꽃에 대한 평판은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그러면 입구 왼편에 있는 분홍색 꽃은 이름이 뭐예요?”
나는 부러 후원에서 본 꽃들을 하나씩 주제로 꺼내며 모디카의 관심을 끌었다.
“아! 그건 모리모리라는 꽃인데 배탈이 났을 때, 한 입씩 먹으면 좋습니다. 하지만 약이라고 너무 많이 먹으면 그 또한 탈이 나니 주의해야 합니다.”
라벤더를 시작으로 대화는 물꼬를 텄고, 거대한 이두박근의 경계는 완전히 허물어졌다.
‘3대 500은 칠 것 같은데 굉장한 반전 매력이네.’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던 나는 오랜 우회 끝에 화두를 던졌다.
“그러고 보니, 후원에 못 보던 꽃이 있던데 혹시 봤어요? 꽃잎이 무지개색이던데, 방울 모양이고…….”
“흠흠, 글쎄요.”
말과 동시에 모디카가 마른 목을 긁으며 딴짓했다. 꾹 다물린 입매를 보아, 분명 뭐가 있어도 있었다. 나는 기세를 몰아 포위망을 좁혀갔다.
“모르시는구나. 모를 수도 있죠, 뭐. 식물 박사라고 다 알라는 법이 있나요?”
“아닙니다. 알고 있습니다.”
이어진 자극에 모디카가 까슬한 턱을 매만지며 진지하게 말했다. 우락부락 외모와 달리, 눈빛만큼은 따스함이 느껴졌다.
“오~ 역시 알고 있군요. 그건 대체 이름이 뭐예요? 전에 실수로 만지려다가 에드먼드한테 된통 혼났거든요. 많이 아끼는 건가 봐요.”
“아마도…… 위험해서 그러셨을 겁니다. 봅핍플라워라는 꽃인데 되도록 거리를 두시는 게 좋습니다.”
“아~ 봅핍. 팡팡, 뭐 그런 거구나. 그럼…… 물 같은 걸 조심해야겠네요?”
나는 반신반의하며 질문을 던졌다. 그와 동시에 꿀꺽, 모디카가 마른침을 삼켰다.
뭐가 있기는 있구나.
“에이~ 놀라기는, 원래 식물이라는 게 그렇잖아요. 전에 이틀 연속으로 물을 줬다가 뿌리가 썩은 거 있죠.”
나는 부러 샐쭉 미소 지으며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그 친구도 같은 원리입니다. 물을 많이 주면…… 본래의 특성을 헤칠 수도 있습니다.”
모렐루야……!
이어진 모디카의 말에 속으로 쾌재를 울렸다. 눈앞의 원흉을 이리 쉽게 없앨 수 있다니!
‘텃밭에 홍수를 내주마.’
방법을 모색한 나는 사악하게 웃었다. 순진한 모디카는 시커먼 내 속을 알 리가 없었고.
“식물에게 가장 좋은 영양분은 주인의 사랑과 관심입니다. 매일 아침, 안부를 건넨 텃밭에선 열매를 두 배 더 수확했거든요.”
관심도 없는 식물 배양 원리 따위를 이야기하며 눈을 반짝였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붉은 해가 뉘엿뉘엿 저물며 장관을 이루던 찰나였다.
“미유우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