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8화
순식간이었다. 강한 외력이 가느다란 내 팔목을 붙든 건.
“앗!”
몸 전체가 흔들리자, 입에서는 절로 앓는 소리가 나왔다. 하지만 놀라기도 잠시. 후들거리던 두 다리가 에드먼드에 의해 고정됐다.
‘뭐냐, 이 급발진은? 이렇게 훅 들어오면 내가 너무 좋지.’
얼떨결에 안기는 듯한 자세가 돼 버린 나는 두 눈을 깜박이며 시선을 맞췄다. 가까워진 거리만큼이나 에드먼드의 숨결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여보……!”
나를 향해 이글거리는 붉은 시선도, 약하게 짓씹은 남편의 아랫입술도, 저 멀리 저물어 가는 석양까지, 실로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키스해, 키스해!’
나는 한껏 부푼 마음을 잠재우며 두 눈을 살포시 감았다. 기다리는 이에게 복이 온다더니, 드디어 제 진심이 닿은 게 분명했다.
‘그래, 멜리사는 잊는 거야. 마법 그거 못하면 좀 어때, 안 쓰고 말지. 그냥 잊자.’
나는 조그마한 입술을 삐죽 내밀며 인고의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응당 닿아야 하는 것이 닿질 않았다.
‘뭐야? 대기 시간이 왜 이리 길어? 길어도 너무 길잖아.’
묘한 기시감에 슬쩍 감긴 눈을 떴다. 희미한 시야 너머로 가소롭다는 듯 미소 짓는 에드먼드의 얼굴이 보였다. 그러곤 벌떡! 느슨하게 꺾였던 허리가 원상 복구 됐다.
“아, 뭐야. 좋다 말았네.”
멀어진 거리에 자연스레 입맛을 다셨다. 눈 깜짝할 새에 적나라한 진심이 새어 나왔으나 아무렴 상관없었다.
‘오늘따라 밑도 끝도 없이 들이대길래, 이번에야말로 먼저 뽀뽀하는 줄 알았다고!’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에드먼드를 흘겨봤다. 그러곤 폭주 기관차라도 된 듯 다다다, 다음 말을 퍼부었다.
“이게 지금 뭐 하는 짓이에요!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잖아요! 이대로 내 머리가 깨지기라도 하면 어쩔 뻔했느냐고요.”
“그래서 잡아 줬잖아.”
“그게 더 문제거든요! 괜히 남에 허리를 잡아 가지곤 사람을 왜 설레게 하냐고요, 왜! 안 할 거면 여지를 주지나 말지. 아까부터 주지도 않을 거면서 흘리기는 왜 흘리냐고.”
“그놈의 헛소리는 하루라도 안 하면 입에 가시가 돋나?”
“그러니까 왜 자꾸 여지를 주냐고요. 이거 저쪽에서는 범죄예요, 범죄. 기각이라고!”
“그럼 머리가 터지든 말든 정말로 신경 쓰지 말아야 하나?”
“뭐라고요?!”
적반하장인 에드먼드의 반응에 나는 새된 신음을 토해 냈다. 그 역시 나름의 이유가 있는 모양인지, 미간을 구기며 목소리를 높였다.
“당신이야말로 지금 만지려던 게 뭔 줄은 알아?”
“그래 봐야 지가 꽃이지. 괜히 그런 무서운 표정으로 겁주려는 거 내가 모를 줄 알고요?”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군. 저거야말로 잘못 만지면 큰일 난다고.”
에드먼드가 답답하다는 듯, 넓은 가슴팍을 두드리며 시선을 돌렸다.
“거짓말. 할 말 없으니까 말 돌리는 거 봐. 대뜸 꼬셔대지를 않나, 갑자기 사람을 불러내지를 않나 이상하다 싶더라니, 그렇게 사람 놀리면 재밌어요? 진짜 웃긴다니까.”
이어진 반응에 어이없다는 듯 에드먼드가 혀를 내둘렀다. 그러곤 후, 작게 심호흡하며 타이를 느슨히 했다.
“이건 폭탄 제조용 꽃이야. 잘못 만지면 터져.”
“에에엑!?”
폭탄이라니, 실로 오금이 저렸다. 다물린 입술이 멋대로 벌어졌고 가뜩이나 큰 눈은 한계를 모르고 벌어졌다.
“그걸 왜 지금 말해요! 생긴 건 예쁘게 생겨서는, 아주 위험한 생물체네.”
나는 공백을 가릴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멀찍이 떨어졌다. 아무리 미남이 좋다지만 그것도 다 살고 봐야 했다.
“허, 어이가 없는 쪽은 나군. 겁도 없이 함부로 만지려 들더니, 지금 자기 혼자 살겠다고 거기 있는 건가?”
에드먼드가 작게 코웃음 치며 손가락을 추켜세웠다.
“세상천지 자기 집 뒷마당에 폭탄 제조용 꽃이 있는지 누가 상상이나 하냐고요! 그, 그리고! 이건 그냥 생존에 대한 인간의 본성이에요.”
괜한 민망함에 나는 자세를 바로 하며 덧붙였다.
“그렇다고 치자고.”
에드먼드가 혀를 끌끌 차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사이 뇌를 거치지 않은 내 입은 천진하게 움직였다.
“아니 근데, 이런 위험한 물건이 왜 여기 있어요?”
이어진 물음에 에드먼드의 시선이 낮게 흔들렸다. 그러곤 별일 아니라는 듯 무심히 말했다.
“누가 선물로 줬어.”
“다른 것도 아니고, 폭탄 제조용 꽃을 저렇게나 많이요?”
“그래.”
미심쩍은 답변에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유심히 살폈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으나 긴장감에 꿀렁이는 목울대를 보고야 말았다.
“누가요?”
“누구라고 하면 알기는 하고?”
묘하게 핵심을 벗어나는 걸 보아, 예쁘장한 겉모습 뒤에 엄청난 음모가 있는 숨은 모양이다.
‘설마…… 저걸로 황실을 다 터뜨려 버리려고?!’
불현듯 스친 생각에 입 안이 바짝바짝 말랐다. 지금의 에드먼드라면 모르겠으나, 원작 속 에드먼드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위인이었으니 말이다.
‘일단은 모르는 척하자.’
“당연히 모르죠. 그나마 공부해서 몇 명 아는 수준인걸요.”
“그래도 제법이던데. 마리포사를 알고 있을 줄은 몰랐거든.”
“대충 감으로 찍어 맞춘 거죠. 아무튼 그 꽃 준 사람 말이에요. 누군지는 몰라도 가까이 지내지 말아요. 어디 줄 게 없어서 저런 걸 준담?”
나는 부러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자리를 벗어났다.
* * *
산책에 이어 식사까지, 에드먼드와의 동행은 일사천리로 이어졌다. 간간이 티격태격하며 으르렁거렸으나 다행히 심기를 거스를 정도는 아니었다.
“부인께서 직접 만드신 딸기 생강차예요. 맛이 달콤한 게 일품이랍니다.”
곧이어 정돈된 테이블 위로 붉은 찻잔이 놓였다. 힐끔, 에드먼드의 눈치를 살피던 나는 조심스레 질문을 건넸다.
“맛이 어때요? 입에 맞아요?”
“나쁘지 않군.”
에드먼드의 칭찬에 나는 샐쭉 미소 지으며 눈을 맞췄다.
“역시 그럴 줄 알았어요! 오늘 티파티에서도 완전 인기 만점이었다니까요. 몇 번을 더 타 줬는지 몰라요.”
“그래서 이런 대단한 걸 두고, 나는 내쫓았다?”
“그건…… 당신이 옆에서 계속 귀찮게 구니까! 정신 사나워서 그랬죠. 그렇게 잘생긴 얼굴로 사람을 홀리는데 어떻게 집중을 하냐고요, 안 그래요?”
“듣기 좋은 변명이네.”
“아무튼 결론은 혹시 집에 남는 공간이 좀 있어요? 되도록 넓은 곳이면 좋겠는데.”
“남는 공간? 방이라면 차고 넘치지. 마침 집사가 돌아왔으니, 안 쓰는 방을 치워 두라고……!”
“아니 그런 거 말고 넓은 초원이라든가, 드넓은 대지라든가.”
“초원? 뭘 하려는 건데?”
“자연과 함께하는…… 힐링?”
“예를 들자면?”
엉뚱한 내 답변에도 에드먼드는 제법 진지한 태도로 임했다.
“엄, 굳이 예를 들자면…… 방목형 농장?”
“농장? 내가 알고 있는 그 농장 말하는 건가? 당신이? 왜?”
“아니, 지난번 자이언트 달팽이 말이에요. 이참에 걔들을 집에서 키우면 어떨까 싶어서요.”
“말이 되는 소릴!”
동시에 버럭! 에드먼드가 언성을 높였다. 그러곤 “후…….” 낮게 신음하며 끌어오르는 화를 진정시켰다.
“갑자기 농장이라니, 우리 현실 가능한 이야기를 해 보는 건 어떨까? 당신이 엉뚱한 건 익히 알고 있지만.”
“미친 소리로 들리겠지만 나는 제법 진심이에요. 뒤뜰에 폭탄 만드는 꽃도 있는 마당에 달팽이 농장이 뭐가 문제람?”
“클로엔.”
“내 말은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라는 거죠.”
“그래서 달팽이가 갑자기 왜, 왜 키우고 싶은 건데? 그 골칫덩어리를 키워서 대체 어디에 쓴다고. 혹시 그 크림인가 뭔가를 만들겠다는 건 아니겠지?”
“와~ 정답입니다.”
나는 부러 방긋방긋 웃으며 눈치 없게 말했다. 줄곧 여유롭던 에드먼드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으나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내 할 말을 이어갔다.
“아니, 이거 진짜 물건이래도 그러네. 다른 사람들이 알아차리기 전에 무조건 독점해야 해요. 봐 봐요, 이게 세계로 뻗어 나간다니까? 클로엔 랜돌프, 내 이름을 걸고 장담할게요.”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그럼 대체 뭐가 문젠데요? 달팽이가 사람들한테 피해를 준다면서요. 그러니까 필요한 우리가 키우자고요. 사람들은 당신 덕에 눈엣가시를 치워서 좋고, 나는 물건을 챙겨서 좋고, 당신은 좋은 일 해서 뿌듯하고. 유 해피, 아임 해피, 에브리바디 해피! 얼마나 좋아요.”
“……그래서 얼마나 필요한데? 아니, 얼마나 키울 생각인데?”
“음…… 최소 백 마리?”
“그놈의 백 마리, 백 마리! 현실적으로 백 마리가!! 후…… 백 마리면 적어도 만 평은 있어야 할 텐데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나?”
“요 앞에 산 하나 주면 되잖아요. 어차피 거기까지가 딱 우리 땅이라던데, 노는 땅 내가 좀 놀리면 되지 뭐가 문제예요?”
“거긴 기사단 새 숙소로 잡아 둔 터야. 달팽이나 키우려고 놔둔 곳이 아니라고.”
에드먼드가 이를 아득 물며 항변했다.
“일종의 투자라고 생각해요. 수익은 확실히 보장할게요. 내가 잘돼서 단원들 3층 건물 지어 주면 되죠.”
반대가 클 것이라 예상했던 만큼 나는 조곤조곤하게 내 의견을 이어 갔다. 어디서 사짜 냄새가 나지 않냐는 말소리가 들려오기도 했으나, 무시했다.
“나중에 아이템 뺏기고 땅 두드려 봤자 늦은 거라고요. 시장은 결국 발 빠른 놈이 살아남는 건데. 당신도 저번에 써 봐서 알잖아요. 얼마나 좋은지?”
이어진 내 설득에도 에드먼드는 요지부동이었다.
‘돈은 있을 만큼 있다 이거지?’
잠시 고민한 나는 멀쩡한 두 다리를 주무르며 태세를 바꿨다.
“에효효…… 당신이 정 반대하면 어쩔 수 없죠. 매일같이 이 가녀린 다리로, 언덕에 올라 직접, 채집해 오는 수밖에.”
“운동도 되고 좋겠군.”
“몸채만 한 활을 쏘겠다고 까불다가 산에서 구르기라도 하면……. 영원히 이 생활도 안녕인 거죠, 뭐. 레틴이 만들어 준 밥, 정말 맛있었는데. 오늘이 마지막일지도 모르겠네요.”
부러 눈을 크게 뜨며 버티자, 건조한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그 모습을 본 에드먼드가 미간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