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3화
“왜 자꾸 목소리가 들리지? 귀신이면 나오지 말고, 사람이면 더더욱 나오지 마라.”
나는 숨은 이를 드러내며 주변을 샅샅이 훑었다. 혹여 낯선 뭔가를 발견하지 않을까 등골이 서늘했으나 특이점은 없었다.
“쀼, 너도 들었지? 응? 대답해봐. 이거 혹시 나만 들려?”
도르륵, 도르륵.
답답한 나와 달리, 쀼는 태연히 쳇바퀴를 굴렸다. 훈훈한 온기가 퍽 마음에 드는 모양인지, 쀼는 까만 눈동자를 깜박이며 속도를 높였다.
“말 못 하는 짐승한테 화내는 거 아니야. 참자, 참아.”
휴, 낮게 한숨 쉰 나는 어기적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보이지도 않는 귀신보다야 당장에 필요한 것들을 찾는 게 급선무였다.
“이거 아무래도 설정의 냄새가 짙게 나는데.”
먼지 쌓인 책상에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소설책과 시집 따위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누가 보아도 설정인 듯한 그 모습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덜컹. 주변을 꼼꼼히 살핀 난 벽에 붙은 책꽂이를 살짝 흔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뒤쪽에서 묵직한 타격음이 났다.
“오, 원 샷 원 킬.”
나는 샐쭉 미소 지으며 몸을 숙였다. 좁은 틈 사이로 두툼한 무언가가 보였다. 툭, 치면 부러질 것 같은 팔목이 이럴 때는 도움이 됐다.
“내가 엄마 몰래 숨긴 아이돌 브로마이드만 수백 장이다, 이 말이야.”
어렵지 않게 서책을 손에 넣은 나는 망설임 없이 다음 행동을 이어 갔다. 서재 한편에 덩그러니 놓인 서랍장을 열고 손을 휘휘 젖자 역시나 무언가 걸렸다.
“음하하! 이게 바로 빙의자 버프? 꼭꼭 숨겨 놨을 줄 알았는데 별거 없네, 뭐.”
두 번째, 그리고 세 번째까지 찾아낸 난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어쩐지 뒤통수가 따가운 건 착각일 거로 생각하며 막힘없이 층계를 내려갔다.
“부인! 대체 어딜 다녀오시는 거세요? 후원에도 안 계시고, 응접실에도 안 계시고, 저랑 티모가 얼마나 찾았는지 몰라요.”
문을 염과 동시에, 낭랑한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의심 어린 샤샤의 시선이 몸 곳곳에 닿았으나 다행히 서재에서 가져온 고서적들은 찾지 못했다.
“그랬어? 다들 바빠 보이길래, 쀼랑 같이 산책이나 다녀왔지.”
나는 손에 쥔 케이지를 흔들어 보이며 태연히 답했다.
“아실지는 모르겠지만, 부인께서 잘못한 게 있으실 때면 유독 친절하게 구시곤 했는데…… 지금이 딱 그렇단 말이죠.”
저걸 그냥.
“나라고 맨날 그러겠니, 하하. 우리 샤샤는 참 쓸모없는 관찰력이 좋아.”
나는 솟구치는 분노를 애써 찍어누르며 환히 미소 지었다. 아래에선 제 불편을 토로하듯, 우리 밖으로 나온 밤송이가 “쀼쀼”거리며 울어댔다.
“목이 말라서 그런데 샤샤, 마실 것 좀 가져올래? 이왕이면 시원한 얼음물로.”
꿀꺽, 마른침을 삼킨 나는 서둘러 샤샤를 불러 세웠다. 그러곤 재빨리 들고 있던 케이지를 몸 뒤로 숨겼다.
“엥? 여름도 아닌데 얼음물이요? 춥지 않으시겠어요?”
“괜찮아. 이열치열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추울 때는 차가운 걸 먹어야 하거든.”
나는 부러 두 팔을 휘적거리며 호탕하게 말했다.
“그러다 감기에라도 걸리시면 저는 진짜 몰라요.”
이런 내 엉뚱함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던지라, 짧게 툴툴댄 샤샤는 의심 없이 자리를 비웠다.
문이 닫히고, 벌어진 잇새에선 절로 신음이 새어 나왔다. 한차례 숨을 돌린 난 곧장 쀼가 담긴 케이지를 뒤적였다.
얼음이 있는 창고까지 다녀오려면 적어도 20분은 걸리겠지만, 이미 의심을 산 이상 발 빨리 움직여야 했다.
“쀼쀼! 쀼!”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앙칼진 울음소리와 함께 쀼가 가시를 삐죽 세웠다.
“미안해. 하지만 숨겨 올 곳이 여기밖에 없었다고. 아량 넓은 네가 좀 이해해 줘.”
나는 부러 입술을 삐죽이며 불쌍하게 말했다. 엄밀히 말해 남의 영역을 침범한 것과 다름없으니 사과를 하는 게 맞기도 하고.
우렁찬 고성은 덤불 아래 숨긴 고서적을 모두 꺼낸 후에야 잠잠해졌다. 나는 곧장 자리에 주저앉아 가져온 것들을 펼쳤다.
“이 책은 아스탄 제국에서 최초로 시작되어…… 이 책을 받는 사람은 행운이 깃……!”
뜨문뜨문 아는 단어를 조합해 가며 내용을 읽어 가던 난 익숙한 흐름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아 놔, 행운의 편지도 아니고 행운의 책이야? 이딴 걸 소중하게 보관하는 얘는 또 뭐야? 보기보다 미신을 믿네.”
홀로 읊조린 나는 들고 있던 서책을 한쪽으로 밀어냈다. 그리곤 고민 없이 다음 책을 펼쳤다.
이건 또 뭐야.
빛바랜 표지 위엔 늘 보았던 라비스텔 언어 대신 생소한 언어가 쓰여 있었다.
[포화 속으로 : 갈래에 선 모든 이방인에게]
그리고 놀랍게도 머릿속에서 해석이 됐다.
“불 속성 마법은 물 속성 마법과 상극을 이루며 지속적인 관리와 단련이 필요하다.”
나는 누런 종이 위를 손끝으로 짚으며 내용을 읽어 갔다.
“마력은 사용하지 않을수록 쇠퇴하며, 마법사 스스로 한계점을 정확히 인지하는 게 중요하다. 수많은 마법사는 이로 인해 목숨을 잃었고 지금도 그 수는 줄지 않고 있다.”
그 외에도 책에는 마법을 사용하기에 앞서 주의해야 할 점과 마법사로서의 기본적인 소양 따위가 구구절절 적혀 있었다.
나는 무료한 시선으로 스르륵 책장을 흘렸다. 마지막 남은 페이지에 다다를 때쯤, 얇은 종이 위로 익숙한 이름자가 비췄다.
[너의 영원한 반려
요제프 헤슈턴으로부터]
* * *
저녁 식사를 앞둔 나는 애꿎은 샐러드를 뒤적이며 시간을 축였다. 평소라면 식전 수프까지 말끔히 비웠겠지만, 오늘만큼은 예외였다.
“괜히 찝찝하네.”
책 뒤편에 적힌 ‘요제프 헤슈턴’이라는 이름자를 마주한 이후, 괜히 남의 이야기를 훔쳐본 것만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애초에 몸의 주인과 달리 살기로 마음먹었으나, 훅 튀어나온 과거의 흔적은 묘한 죄책감을 주었다.
“부인, 무슨 고민거리라도 있으세요? 좋아하시는 고기를 마다하시고…….”
샤샤가 손에 든 과일 주스를 내려놓으며 걱정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생각할 게 많아서 그렇지 뭐.”
“그래도 식사는 하셔야죠. 잘 먹어야 기운을 차리신다고요. 저번처럼 쓰러지시기라도 하면, 이번에야말로 부인을 제대로 못 모셨다고 일자리를 잃게 될지도 몰라요. 애먼 저를 실업자로 만드실 생각은 아니시죠?”
“알겠어, 알겠다고. 하여간 잔소리는.”
“공작님께서는 오늘 중요한 약속이 있으셔서 많이 늦으실 거래요. 기다리지 말라고 하시던데요.”
“같은 방도 안 쓰는데 기다리기는, 뭘 기다려.”
“그건 다 공작께서 부인을 배려하느라 그런 거잖아요. 기력을 차리실 때까지 편히 쉬시라고.”
“배려 두 번 하다가는 독수공방으로 늙어 죽겠다고 전해.”
“오늘따라 유독 삐딱하시기는. 아! 그러고 보니 다음 주면 고대하던 티파티네요. 몇 분이나 올지 너무 기대되는 거 있죠.”
“리하프랑 릴리스를 제외하고 두어 명이나 더 오겠지, 뭐.”
나는 손에 들린 풀떼기를 깨작거리며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래도 그 두 분의 파급력이 엄청날걸요. 이참에 부인께서 만드신 크림을 써 봤는데 엄청 좋던데요? 이 정도 효과면 없어서 못 팔겠다, 싶더라니까요.”
“이미 입증된 물건이 차원을 건너왔으니까.”
“차, 차원이요?”
엉뚱한 내 말에 샤샤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으나 답을 해 주진 않았다.
‘이러다 요제프 그 자식이랑 엮이기라도 하는 건 아니겠지? 오징어는 진짜 싫은데.’
잠시 고민하던 난 애꿎은 포크만 입 안에서 굴렸다. 한결 복잡해진 상황에 나는 발을 동동 굴렀다.
“아 몰라, 몰라! 좋은 일 앞두고 죽상 쓰고 있으면 뭐 할 거야. 사람이 과거에 얽매이면 발전이 없는 거야. 미래를 봐야지, 안 그래?”
“그, 그렇기는 하죠?”
“이미 없어진 사람 생각해서 뭐 하겠어. 이젠 내 몸인데.”
한차례 짜증을 쏟아 낸 난 빈속을 채우려 연신 입을 놀렸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허기진 배는 좀처럼 채워지지 않았다.
* * *
에드먼드를 마주한 건, 나흘 뒤 식사 자리에서였다. 최근 침소를 따로 쓸뿐더러 헤슈턴과의 경합을 앞둔 지금, 그는 어느 때보다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유독 피곤해 보이는군.”
“아뇨, 어제 잠을 좀 설쳐서 그래요.”
나는 퀭한 얼굴을 비비적거리며 태연히 말했다. 연일 이어진 고난도 훈련에도 에드먼드는 흐트러짐 하나 없었다.
“체력이 떨어져서 그래. 든든히 먹어 둬.”
투박한 손끝이 잘 잘린 고깃덩어리와 구운 토마토를 접시에 놓았다. 곧이어 “흠흠.” 에드먼드가 마른 목을 긁으며 어색함을 떨쳤다.
‘이게 복지고 힐링이지.’
며칠째, 쳇바퀴에 짓눌리는 악몽에 시달린지라 입맛은커녕 눈을 뜨고 있는 것조차 고역이었다.
하지만 오늘도 열일하는 에드먼드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절로 웃음이 나오고 코 평수가 넓어졌다.
“고마워요.”
샐쭉 미소 지은 난 앞에 놓인 음식을 한입에 넣었다. 잔잔한 식사 자리를 이어가던 찰나, 에드먼드가 먼저 말을 붙여왔다.
“주말에 티파티가 있다고?”
“네. 일전에 헤슈턴 연회에서 만났던 리하프와 릴리스를 초대했어요. 그날 티파티에서 내가 만든 크림이랑 특급 수제청을 선보일 예정이거든요.”
“제법 자신 있어 보이는군. 그때 잡으러 간 자이언트 달팽이와 관련 있는 건가?”
“하여간 눈치는 백 단이라니까요. 누가 만찢남 아니랄까 봐, 잘생겼는데 명석하기까지 해.”
“그 난리를 쳤는데 모르는 게 더 이상하지 않나?”
“모를 수도 있죠, 뭐. 이게 바로 달팽이 점액을 이용한 재생 크림인데 바르는 순간, 그냥 끝장나요.”
나는 가지고 있던 재생 크림을 에드먼드의 피부에 덧바르며 자연스레 말을 이었다.
“아 참! 내일 페트라 언덕에 다녀올 예정인데 괜찮죠?”
“그러다 또 불곰을 맞닥뜨리고 정신을 놓을 생각인가?”
“그건 샤샤가 에이드를……! 아무튼 준비한 물량이 부족할 것 같아서 다녀와야 해요. 이참에 확인해 볼 것도 있고.”
예를 들자면 ‘불의 속박’의 재사용 여부라든지, 사기에 가까운 석궁 실력이라든지.
나는 힐끔, 눈치를 살피며 에드먼드의 답변을 기다렸다.
“당신이 내가 말린다고 해서 안 갈 리도 없고, 그렇게 하도록 해.”
안 된다며 펄쩍 뛸 거라는 예상과 달리 식탁 위에는 평화가 깃들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 삽시간 가까워진 에드먼드의 입술이 점차 범위를 좁혀 왔다.
“……!”
“그건 그렇고, 우리 합방은 언제쯤 다시 진행될 예정이지?”
곧이어 데구루루. 이어진 조각상의 도발에 나는 입에 든 토마토를 떨어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