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1화
“아이고, 머리야.”
지끈거리는 두통에 절로 앓는 소리가 나왔다. 반쯤 뜬 시야에는 어두운 방 안이 보였다. 너풀거리는 리본 장식과 향긋한 꽃냄새를 보아.
“내 방이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에드먼드랑 만난 것까지는 기억나는데.”
읏차, 힘주는 소리와 함께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시야가 몽롱했으나 머지않아 초점을 잡았다.
“얜 또 왜 여기서 자고 있어.”
밤새 간호한 모양인지, 간이 의자에 앉은 샤샤가 구부정한 자세로 잠들어 있었다.
설마…… 회귀?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곳에 처음 왔던 그 날이 떠올랐다. 불길한 기운에 어깨가 흠칫 떨리던 찰나, “쀼쀼.” 아래에서 익숙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와, 진짜 식겁했네.”
나는 곧장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철옹성이나 다름없던 에드먼드를 다시 공략해야 한단 생각에 순간 아찔했었다.
“많이 놀랐지, 너도?”
놀랐을 쀼를 달래고자, 자연스레 손을 뻗던 그때.
-네 몸도 아닌데 잘 좀 하지.
숲에서 들었던 건조한 목소리가 이명처럼 울렸다.
뭐냐, 이 기시감은.
“귀, 귀신!?”
빠르게 주변을 훑었지만, 있는 것이라곤 숙면 중인 샤샤와 쀼가 전부였다.
“아무리 그래도 영매는 오버지 진짜! 적당히 하라고 적당……!”
불시에 터진 함성에 나는 빠르게 입을 막았다. 듣지 못했는지 샤샤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진짜 굿이라도 해야 하나? 고증이 워낙 쓰레기라 잘 찾아보면 무당도 있을 것 같은데.”
나는 실없는 말을 해대며 빈 어깨를 털어 냈다. 오후에 있던 불곰 대치전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으나, 이내 생각하기를 멈췄다.
“아…… 너무 피곤하다. 지금은 일단 자고 내일 생각하자, 내일.”
나는 곧장 침대 위로 기어 올라가 이불을 추켜올렸다.
“쀼쀼!”
케이지에 달라붙은 밤송이가 창살을 팡팡 쳐댔으나, 삽시간에 몰려온 수마는 열린 귀를 닫게 했다.
* * *
“아…… 지루하다. 배부른 거위가 된 기분이야.”
벌써 며칠째인지 감금이나 다름없는 호화 생활이 이어졌다. 아침이면 과일과 빵 따위가 침대 위로 배달됐고, 점심에는 샐러드를 곁들인 간단한 구이 요리, 저녁에는 가벼운 수프와 죽이 침대에 놓였다.
“우리 액히는 뭐 하려나, 지금.”
쀼라도 있으면 무료함이 덜 했으련만, 온전한 휴식을 이유로 에드먼드는 그마저도 출입을 금지했다.
“수리수리 마수리!”
“아브라카다브라!”
“열려라, 참깨!”
“루삥뽕!!”
덕분에 혼자인 시간이 많아진 난 숨겨진 정체성을 찾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아니, 그때는 잘만 되더니, 왜 안 되는 거야.”
그런 나를 비웃듯, 정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그대로 주저앉아 발을 동동 굴렀다. 혹시 몰라 “불의 속박!”과 같은 중이병 대사도 외쳐보기는 했으나, 주변은 여전했다.
“대체 뭐가 문제인 건데.”
똑똑!
고민하는 사이, 출입을 알리는 노크 소리가 울렸다. 시간을 보아 에드먼드일 게 분명했다. 나는 곧장 흐트러진 주변을 정리하며 아무 일도 없었던 양, 침대에 누웠다.
문이 열리고.
“몸은?”
낮지만 듣기 좋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덤불에서의 불곰 소동 이후, 에드먼드는 매일 아침 찾아와 같은 말을 물었다.
대부분 건강에 관련된 시답잖은 질문이라는 게 흠이었지만, 챙김을 받는 것 같아 내심 기분은 좋았다.
“완전 괜찮아요.”
“어지럼증은?”
“조금 어지럽기는 한데, 여보가 뽀뽀해 주면 나아질 것 같기도 하고.”
“또 헛소리군.”
“헛소리도 이 정도 했으면 받아 줄 법도 한데 말이죠.”
에드먼드는 보란 듯이 무시하며 다음 질문을 던졌다.
“입맛은?”
“넘쳐서 문제죠.”
“마틴이 무리하지 말라더군.”
“어제도 그 말한 거 알죠?”
관심받는 게 좋기는 했으나 수일째, 같은 말을 듣고 있자니 귀에 딱지가 앉고 엉덩이에 가시가 돋는 기분이었다.
무엇보다 이렇게 허송세월 시간을 보내고 있다가는, 목숨 걸며 따 온 식자재와 달팽이 점액이 상하고 말 것이다.
“내 몸은 내가 더 잘 안다니까요. 이제 진짜 괜찮다고요. 검술 시합 전에 리하프와 릴리스도 초대해야 하고, 콧대 높은 귀부인들도 모셔야 한다고요.”
“이혼하자더니, 그게 다 무슨 소용이지?”
예상치 못한 답변에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긴장했다. 에드먼드가 이를 잘근 물며 다음 말을 이었다.
“지금 이야기한 것들, 모두 랜돌프 가문과 나를 위한 일들 아닌가?”
“그건……!”
“어차피 우리가 이혼하게 되면 다 소용없는 거잖아.”
“그건 당신이 자꾸 삐딱하게 구니까, 홧김에 저지른 거고요! 내 본심은…… 그렇지 않았다고요.”
“그날 내게 한 이혼 통보는 홧김에 한 실수였다?”
“굳이 정의하자면…… 그렇죠.”
“실수, 실수라.”
내심 신경 쓰였는지, 에드먼드는 같은 말을 입 안에서 굴렸다. 미안한 마음에 손끝을 비비적거리며 시선을 회피했다.
“퓨…… 미안해요.”
이어진 사과에 공작의 눈빛이 한결 더 짙어졌다. 멀찍이 거리를 벌리고 서 있던 에드먼드가 삽시간 가까워졌다.
“뭐가?”
커다란 그의 손이 아래에 있던 턱을 살포시 들어 올렸다. 잔잔히 이글거리는 붉은 동공과 시선을 맞추고 있자니, 절로 죄인이 되는 기분이 들었다.
“홧김이라도 그런 말은 하지 말아야 하는데…….”
“그런데?”
한동안 조용하다 싶더라니.
집요한 시선에 나는 말없이 입술을 짓이겼다. 최초 원인 제공자는 에드먼드였으나, 마지막 한 방을 날린 건 내 쪽이기에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사실 여부를 떠나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일단 비는 수밖에.
“이놈의 주둥이가 그걸 해 버렸네요……. 내가 죄인이에요. 정말 미안해요. 진심이에요!”
나는 부러 뒷말을 덧붙이며 강조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에드먼드 역시 져 줄 요량이 없어 보였다.
“또?”
낮게 조소한 그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되물었다. 나는 떨리는 두 손을 조용히 마주 잡았다.
‘또? 여기서 ‘또’라는 말을 한다고? 뭘 듣고 싶은 거지? 질문의 요지가 뭐냐고 이 잘생긴 놈아!’
이쯤 되니 그날 발현된 마법을 보고도 모르는 척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못 본 건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한 번씩 떠보듯 물어올 때면 절로 오금이 저렸다.
‘그래도 밑장은 남겨 두자.’
나는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정신을 집중했다. 여기에서 괜한 말을 꺼냈다간 앞으로의 생활이 위태로워질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진짜 마법사가 맞기는 한 건지, 스스로조차 판단이 어려웠다. 이런 와중에 ‘내가 마법을 쓰는 것 같아요.’ 따위의 추측성 발언은 여러모로 위험했다.
“경고판을 무시하고 위험한 곳에 들어간 것도, 내 불찰이에요.”
“그 말이 아닌데.”
“헙!”
훅 끼친 체향에 두 눈이 커다랗게 변했다. 한 뼘 남짓한 거리는 조금만 몸을 기울이면 입술이 닿을 듯했다.
이러면 나 또 설레잖아.
나는 몽롱한 표정으로 에드먼드와 시선을 맞췄다. 괘씸한 듯, 에드먼드가 낮게 으르렁대며 거리를 벌렸다.
“또 그런 식으로 이혼을 통보할 생각인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매듭을 확실히 지어야지.”
“아뇨! 그럴 리가요. 진짜 실수였다니까요. 앞으로는 절대, 절대 그럴 일 없을 거예요.”
나는 두 팔로 엑스자를 그려가며 강하게 부정했다. 숨 쉬는 조각상과 떨어져 살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사치고 죄악이었다.
내가 백번 천번 잘못했지, 암.
“믿어 보지.”
대답이 만족스러웠는지, 에드먼드가 짧게 조소하며 몸을 일으켜 세우려던 그때였다.
“힝, 역시 당신뿐이에요. 많이 놀라게 해서 미안해요.”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나는 껑충 뛰어올라 에드먼드의 목에 두 팔을 감쌌다.
“……!”
예상치 못한 상황에 거뭇한 피부가 붉게 달아올랐다. 나는 부러 못 본 척 시치미를 떼며 넓은 가슴팍에 머리를 비비적거렸다.
실로 좋은 욕구 충족이었다.
* * *
“부인과 이야기는 해 보셨습니까? 뭐라고 하시던가요?”
“미안하다더군.”
쏟아진 물음에 에드먼드는 시큰둥하게 답했다.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아리송한 에드먼드의 태도에 멜빈은 하루하루 피가 말랐다.
“그걸 묻는 게 아니잖습니까, 일전의 덤불 숲에서 똑똑히 보셨잖습니까, 부인께서 마법을 쓰시는걸!”
“그런데?”
“이대로 가만히 계실 겁니까? 부인께서 공작님의 눈을 피해 마법을 쓰신 겁니다. 지금까지 해 온 모든 게 연기였던 거라고요. 내내 기억을 잃은 척, 공작님을 속이고 기만했는데 화도 안 나십니까?”
멜빈이 가슴을 팡팡 두드리며 답답함을 토로했다. 에드먼드가 말했다.
“글쎄, 난 조금 생각이 다른데.”
“설마 그걸 보고도 부인을 믿으시는 건 아니죠? 분명히 저희 몰래 아메트린 마법단과 교류……!”
“애초에 마법을 쓸 줄 알았다면, 이렇게 허술할 리가 없어.”
에드먼드가 얼굴을 찌푸리며 말을 자르고 들어왔다. 그러곤 조금 전 보았던 황당한 장면을 가만히 떠올렸다.
‘수리수리 마수리!’
‘아니, 그때는 잘만 되더니, 왜 안 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