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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남편과의 이혼을 거부합니다 (53)화 (53/107)

제53화

고왔던 이마에 실금이 생겼다. 이제 막 물이 오른 사교 판에 기어코 불청객이 나타났으니 기분이 좋을 리가.

‘이 오징어는 뭔데 자꾸 껴.’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요제프를 바라봤다.

“잠깐 나랑 이야기 좀 해.”

말과 동시에 눈으로 쌍욕을 퍼부었다. 단순한 남녀 관계도 아닌, 옛 약혼자란 전적도 있는 사이끼리 왜 이리 질척거리는지.

“보시다시피 제가 좀 바빠서.”

나는 미간을 일그러트리며 몸을 바로 했다. 그러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하던 설명을 이어갔다.

“그래서 이걸 바르고 머리를 만지시면 하루 반나절은 끄떡없다 이 말이죠. 오늘은 급히 준비하느라 조금밖에 못 가져왔지만, 조만간 티파티에서 물량을 더 풀어 볼게요.”

괜히 말을 섞어 구설에 오르느니 차라리 무시가 나았다. 명백한 거절 의사를 밝혔음에도 요제프는 우두커니 자리를 지켰다.

‘얼굴도 못생긴 게.’

에드먼드가 없는 틈을 타 온 걸 보면 그 저의가 분명했다. 다시 시작하자거나, 용서해 달라거나, 사랑의 밀회를 떠나자거나.

‘저걸 진짜 죽여 버릴까?’

쀼 역시 요제프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앙칼진 울음소리가 연신 귀를 찔렀다. 솟은 가시를 달래려 “쉬쉬.” 입소리를 냈으나 효과는 미비했다.

“랜돌프 부인. 잠시면 됩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이어진 호명에 나는 인내심이 바닥나고 있음을 느꼈다.

“클로엔.”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기어코 세 번째 호명이 들려왔다. 발갛게 달아오른 두 뺨이 핀 뽑힌 수류탄 같았다.

“요제프 헤슈턴.”

나는 이를 아득 물며 천천히 몸을 돌렸다. 저 건방지고 뻔뻔한 종자를 이번에야말로 조져주겠다고 생각하며.

‘너 아주 잘 걸렸다.’

마주 본 두 남녀의 온도 차가 극명했다. 주변에 몰린 시선 따위 개의치 않다는 듯 클로엔은 몸을 삐딱하게 세우며 껄렁한 태도를 유지했다.

“무슨 대단한 일이신지 이야기나 들어보죠.”

예상치 못한 반응에 요제프의 얼굴에 당황한 빛이 서렸다. 밀려드는 패배감에 요제프는 마른 입술을 짓이겼다. 그러곤 용기를 내 다음 말을 뱉었다.

“보는 눈이 많으니, 일단 자리를 옮기……!”

“아니. 자리 옮기면 댁이나 나나 상황이 더 이상해져요. 남의 여자 이름을 굳이, 세 번이나 부른 이유가 뭔지 어디 들어나 봅시다. 대외적으로.”

클로엔은 곧장 말을 자르고 받아쳤다. 상대조차 기본적인 예의를 지키지 않는데 굳이 예의를 지킬 이유가 없었다.

“할 말 없으시면 나는 자리로.”

줄곧 침묵하는 요제프를 향해 클로엔은 짧게 말했다. 이내 망설임 없이 몸을 돌리려던 차, 가녀린 손목이 외력에 의해 붙들렸다.

“이대로는 못 가.”

이어진 요제프의 말에 클로엔의 두 눈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언뜻 비껴간 사랑에 눈물을 글썽이는 듯 보였다.

하지만,

“후후…… 이게 정말 사람을 우습게 보네.”

낮은 독백과 함께 클로엔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돌아선 등 뒤로는 언뜻 검은 아우라가 솟구치기도 했다.

무시무시한 기세에 요제프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거렸다. 전쟁광이라 소문난 에드먼드의 멱살도 붙든 클로엔에게 요제프는 송사리나 다름없었다.

“야, 있잖아.”

삽시간에 가까워진 그녀가 먼저 운을 뗐다. 웃는 낯과 달리 마주 본 시선에는 살기가 득실거렸다.

“너 혹시 나보다 작위가 높니? 아까부터 말을 놓질 않나, 어디 한적한 데 가자고 꼬시지를 않나 왜 이렇게 까불지? 가만히 있으니까 사람이 쉬워 보여?”

훅 들어온 공격에 요제프의 입술이 한계를 모르고 벌어졌다. 클로엔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공격을 이어 갔다.

말이 안 통하는 놈에게는 팩트로 후려치는 게 관례다.

“우리 남편이 그렇게 우스운 사람이 아니에요. 아빠 돈으로 먹고사는 너랑 다르게 이 검 하나로 천하를 호령한 사람한테 이러면 곤란하지. 상도가 아니라고, 응?”

“너…… 지금 한 말들 진심이야?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

요제프가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당연히 진심이지. 개뿔도 없는 네가 좋겠어? 아, 그리고 말 나온 김에 이것도 얘기하자. 얼마 전에 너희 기사단 애들이 우리 기사단 단원한테 시비 건 거 알고 있지? 합의금도 아주 두둑이 가져갔는데.”

이어진 클로엔의 말에 요제프는 대답 대신 입술을 말아 물었다.

“그렇게 치사하게 굴 거면 차라리 대외적으로 한 판 붙던가. 주인을 닮아서 그런가, 하는 짓이 아주 양아치야?”

“클로엔, 나는 몰라도 내 단원들은 모욕하지 마. 네게 잘못한 사람은…… 나뿐이잖아.”

대치가 길어질수록 구경꾼들이 하나둘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대로는 안 좋은 소문만 무성해질 게 뻔했다. 힐끔, 주변을 살핀 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거 놔. 확 찢어 버리기 전에.”

살벌한 협박에도 요제프는 요지부동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괜한 오해만 커졌다. 이대로 메치기라도 해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클로엔.”

남편의 목소리가 들렸다.

포식자의 등장에 주변은 물에 젖은 듯 조용했다. 클로엔을 사이에 둔 두 남자를 보며 귀부인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물과 기름을 한데 놓는다면, 아마 이런 모습일 거라고.

흰 피부와 금색 머리칼, 구김살 하나 없는 푸른 눈동자는 귀공자 같은 요제프의 외모와 잘 어울렸다.

그에 반에 야생 그대로인 에드먼드는 바라보는 것으로도 오금이 저렸다. 어둠을 닮은 검은 머리칼과 붉은 눈동자, 오랜 전장 생활을 보여 주듯 거뭇하게 탄 피부.

비교적 선이 유려하고 날렵한 요제프와 달리 커다란 산처럼 우뚝 솟은 에드먼드는 그 자체만으로도 위협적이었다.

“내 아내에게 뭘 하는 거지, 요제프 헤슈턴?”

꾹 다물린 에드먼드의 입매에서 낮은 음색이 흘러나왔다. 화를 삭이듯, 꾹꾹 찍어 누른 목소리가 무거웠다.

“그저 지난 시간에 대해, 잠시 이야기를 나눴을 뿐입니다.”

조금 전 빌빌대던 모습과 달리, 요제프는 무감한 표정으로 되받아쳤다.

“굳이 내 아내의 손목을 붙들고 말이지.”

성큼 다가온 그가 반대편 손목을 붙들었다. 그러고는 소유를 과시하듯, 클로엔의 가는 손가락에 제 손을 끼워 넣었다.

에드먼드가 말했다.

“봐주는 건 그쯤 했으면 된 거 같은데. 헤슈턴 기사단은 기어이 선을 넘는군.”

“선을 넘은 건, 저희가 아닌 랜돌프 기사단이겠죠. 얼마 전, 그쪽 단원이 저희 단원 중 하나를 두드려 팼다죠?”

“먼저 시작한 쪽은 그쪽이라던데. 그렇게 분해할 거면 지지를 말았어야지. 남을 원망하기 전에 자신의 나약함을 탓하는 건 어때?”

“충고는 새겨듣도록 하죠. 굳이 이렇게까지 말하시는 걸 보면 랜돌프 쪽에서도 무서운 모양입니다. 저희가 작정하고 달려들기라도 할까 봐.”

요제프의 자극에 에드먼드가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러더니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원래 인간은 듣고 싶은 대로 듣는 법이지.”

“믿고 싶은 대로 믿기도 하고요.”

몰려든 인파에 요제프가 피식, 작게 코웃음 치며 어깨를 으쓱였다. 대외적인 자리에서 유독 저자세를 보이는 에드먼드를 의식한 행동이었다.

“그럼 전 랜돌프 부인과의 대화를 이어 가도 될까요, 공작?”

제 승리를 확신한 듯, 요제프가 고개를 빳빳이 들어 올리며 에드먼드를 응시했다.

“재밌군.”

피식, 짧게 조소한 그가 끼고 있던 검은 장갑을 느리게 벗었다. 이내 감정 하나 없는 서늘한 목소리가 허공에 울렸다.

“귀엽다고 봐줬더니 주제를 모르고 덤벼대는 꼴이 우습잖아.”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랜돌프 공작? 귀여워요? 내가?”

“아무래도 못된 버릇을 고쳐 줘야겠군. 그 오만한 입도 같이.”

낮은 경고와 함께 에드먼드가 손에 들린 장갑을 바닥으로 패대기쳤다. 유독 짙어진 붉은 동공이 분노로 이글거렸다.

“지금 우리와 전쟁이라도 해 보겠다는 겁니까, 공작?”

이에 질세라 요제프는 맞수를 놓았다.

“내 아내에게 추태를 부리는데 가만히 있을 수가 있나.”

한 수 물러날 것이란 예상과 달리 에드먼드는 잡은 손에 힘을 주며 제 소유를 강조했다.

“후회하실 텐데요?”

“질 것 같아 두려운 거겠지.”

“랜돌프 공작!”

이어진 도발에 요제프가 언성을 높였다. 그와 달리 에드먼드는 무표정한 얼굴로 요제프를 향해 다가섰다.

“조만간 정식으로 대결장을 보내도록 하지. 이참에 문제를 일으킨 단원들도 겨뤄 보게 하고.”

“기꺼이 받아들이죠.”

악에 받친 요제프가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이를 아득 물었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빈틈없이 준비해야 할 거야. 대외적으로 망신당하고 싶지 않다면 말이야.”

“지금 대헤슈턴가의 기사단을 무시하는 겁니까?”

“글쎄. 그건 결과가 알려 주겠지. 부디 이겨야 할 텐데.”

에드먼드가 어깨를 으쓱이며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이내 빼앗듯 요제프에게 붙들린 제 아내의 손목을 잡아챘다.

“이만 가지.”

말과 동시에 에드먼드의 몸이 입구로 향했다. 급작스러운 상황에 클로엔의 두 눈이 설명을 바라며 끔벅였으나, 에드먼드는 굳은 표정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마침내 입구에 다다랐을 때.

“그리고 한 가지 더. 부친을 생각한다면 서열부터 확실히 하는 게 좋겠군, 요제프.”

에드먼드는 오만방자한 요제프를 향해 경고했다. 네 아비의 목줄 또한 내가 쥐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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