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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남편과의 이혼을 거부합니다 (49)화 (49/107)

제49화

돌아오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무언가 해냈다는 뿌듯함은 심장을 찌르르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나는 곧장 이 기쁜 소식을 에드먼드에게 전했다.

“조만간 우리 저택에 귀여운 손님들이 올 거예요.”

“손님? 나랑 한마디 상의도 없이?”

물음과 동시에 연회를 알리는 왈츠 선율이 장내에 울렸다. 에드먼드는 대답을 바랐으나, 나는 새초롬히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어라? 지금 노래 나오는데요.”

그러곤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든 무대 중심으로 손가락을 펼쳤다.

“어떻게 된 일인지 집에 가서 이야기하자고. 당신, 도망갈 생각하지 마.”

모르쇠로 일관하자 에드먼드가 엄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면서도 무대 중앙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거리낌이 없었다.

“이번에는 져 줄 생각 없으니까 단단히 각오하라고.”

“알겠다고요, 알겠……!”

계속되는 추궁에 건성으로 대답하며 앞서 나가던 그때였다. 삽시간 몰려든 인파로 인해 가녀린 두 다리가 크게 휘청였다.

‘진짜 사골이라도 우려먹어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뒤바뀐 시야 너머로 화려한 샹들리에가 보였다. 비상한 시작과 달리 비루한 마무리를 예상하며 눈을 질끈 감던 그 순간.

“제발 조심 좀 하라고 몇 번을 얘기하지?”

차디찬 대리석은 피했으나, 에드먼드의 질타는 빗겨 갈 수 없었다. 단단한 두 팔이 휘청이는 몸을 붙들며 낮게 일갈했다.

“마차 사고 때문에 뼈가 골았나 봐요.”

“할 말 없으면 마차 사고를 운운하는 거, 누가 모를 줄 알고? 이제는 안 속아.”

“어차피 계속 속아 준 거 오늘도 그냥 조금 넘어가 줘요.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이렇게 붙어 있으니까 좋기만 하고만.”

나는 부러 코끝을 찡긋거리며 애교스럽게 말했다. 그 모습을 본 귀부인들이 두 사람을 힐끗거리며 제들끼리 속삭였다.

“둘이 사이가 안 좋다더니, 꼭 그렇지도 않은 모양인데요? 부부 사이는 당사자가 아니고서야 모른다더니.”

“어디 눈에 보이는 게 다인가요. 요즘 쇼윈도 부부가 얼마나 많은데. 순진하시기는.”

“그래도 여기까지 나온 거 보면 발이라도 맞출 모양인데?”

시선을 의식한 듯, 에드먼드가 마른 목을 긁었다. 그러고는 보란 듯이 한쪽 팔을 뻗어 클로엔의 허리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 * *

수십, 아니 수백 번 맞춰 본 선율이었으나 마치 처음인 것처럼 가슴이 쿵쾅거렸다. 올곧이 저를 향해 있는 붉은 동공과 시선을 맞출 때면 이대로 심장이 터지지는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내가 저번처럼 밟아도 아무렇지 않은 척 연기해야 해요.”

괜한 어색함을 떨치려 시답잖은 농담을 건넸다. 그런 제 모습이 재밌는 듯, 에드먼드가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 정도 머리는 나도 있어.”

건조한 대답과 함께 커다란 그의 손이 허리에 닿았다. 그러더니 망설임 없이 품으로 당겼다.

“……!”

훅 끼친 열기에 클로엔의 뺨이 발갛게 물들었다. 크기도, 피부색도 다른 두 개의 손이 얽혀 들며 허공으로 뻗었다.

“오른쪽부터 천천히, 긴장하지 말고 연습한 대로만 해.”

낮은 울림을 시작으로 두 사람은 익숙하게 발을 맞췄다. 이따금, 어려워하던 구간이 있을 때면 에드먼드는 남몰래 속삭이며 헤매지 않도록 도왔다.

“열심히 하더니 곧잘 따르는군.”

“사심이 들어가서 그런가? 여보랑 이렇게 나란히 춤추는 거 로망이었거든요.”

“로망이랄 것도 많군.”

에드먼드가 짧게 조소하며 대화를 갈무리했다. 건조한 대답과 달리 잡은 손에 힘이 더해졌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살포시 미소 지었다.

음악은 어느새 클라이맥스에 다다랐다. 빨라진 선율만큼이나 손과 발이 바빴다. 그렇게 한참을 박자에 집중하는 사이, 옆에서 집요한 눈빛이 느껴졌다.

‘누가 이렇게 뚫어지게 사람을 봐? 선남선녀 처음 보나. 민망하게 정말.’

시선이 쏟아지니, 내심 기분은 좋았다. 누군가 내 완벽한 춤사위를 직관하고 있다는 말이었기에 숨겨 두었던 관종력이 샘솟았다.

나는 부러 보지 않는 척, 옆을 힐끔거렸다. 남 말하기 좋아하는 귀부인들이나 어린 귀족 자제들일 거라는 예상과 달리 시선이 닿은 곳엔 또래로 보이는 젊은 남자가 서 있었다.

‘뭐냐, 저 오징어 같은 건.’

완벽한 에드먼드와 달리 한없이 부족한 외관이었다. 뭐가 그리 놀라운 것인지, 남자는 넋이 나간 채 한동안 자리를 유지했다.

“저 미친놈, 추라는 춤은 안 추고 왜 저렇게 쳐다봐.”

집요한 시선에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작게 툴툴댔다. 곧이어 이야기를 들은 에드먼드의 동공이 느리게 굴러 옆쪽을 향했다.

그와 동시에 빠직, 주름 하나 없던 이마 위로 실금이 그어졌다. 일자로 뻗은 입가는 뒤바뀐 감정들을 고스란히 보여줬다.

“이제부터 조금 진하게 해 보자고. 연습이랑 실전은 달라야지.”

에드먼드가 낮게 읊조리며 몸을 붙였다. 가까워진 거리만큼이나 닿았던 숨결 하나, 스치던 냄새 하나까지 더욱 짙어졌다.

“에드먼드……!”

벌어진 잇새에선 자연스레 그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매번 거리를 두는 에드먼드를 향해 먼저 다가서고는 했으나, 이따금 브레이크 없이 다가올 때면 머릿속이 멍해졌다.

“부부 사이가 건재하다는 걸 보여 주고 싶다며. 이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어?”

그런 저를 희롱하듯, 에드먼드는 당장에라도 닿을 기세로 입술을 가까이했다. 삽시간에 나무토막이라도 된 것처럼 온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예……. 좋아요.”

이참에 그냥 날 가져도 좋고.

그렇게 음악이 끝날 때까지, 나는 반쯤 혼이 나간 상태로 에드먼드의 움직임에 맞춰 너풀거렸다.

* * *

“꺅! 부인, 두 분이 너무 진하셨던 거 아니에요? 옆에서 보는 제가 다 설레더라니까요!”

완전히 넋이 나가 버린 나를 향해 샤샤가 호들갑을 떨어댔다. 혹여 에드먼드에게 혼나지는 않을까 소리를 낮췄지만 온몸으로 흥분을 논했다.

“아마 구미호한테 홀리면 이런 기분일 거야. 이야……. 날 보고 이렇게 막 웃는데, 그냥 간이고 쓸개고 다 빼 주고 싶더라.”

“옆에 요제프 님이 계시는데도 눈길 한 번을 안 주시는 걸 보면 엄청 좋으셨나 봐요?”

“뭐? 누구?!”

말과 동시에 몽롱하게 풀려 있던 보라색 동공이 색을 찾았다. 그러곤 천천히 주변을 훑으며 에드먼드와의 거리를 확인했다.

약 100미터 남짓한 여백을 남긴 채, 에드먼드는 멜빈과의 대화에 집중했다. 이따금 미간이 구겨지는 걸 보아 퍽 심각한 이야기를 나누는 모양이었다.

“옆에 누가 있었다고?”

나는 목소리를 낮추며 샤샤에게 속삭였다. 행여 크게 대답하지 말라, 손가락을 입술 위에 가져다 대며 주의시켰다.

“요제프 님이요. 모르셨어요? 두 분이 춤추시는 내내 옆에 서서 동상처럼 계셨는데.”

“그럼 그 오징어가…….”

“네? 오징어요?”

“그래, 그 못생긴 애. 누가 그렇게 쳐다보나 했더니 걔였어?”

“못생겼다니요! 라비스텔 제일가는 미남 중 한 분이신데.”

“무슨? 다들 눈이 다 삐었나. 내 눈에는 우리 그이가 제일 잘생겼던데. 미남은 개뿔.”

팔짝 뛰는 나를 향해 샤샤가 곤란한 듯 얼굴을 구겼다. 그러고는 몸을 낮추며 작게 속삭였다.

“부인, 알겠으니 그만하세요. 나머지는 저희 둘이 있을 때 해요. 그래도 옛 약혼자이신데 예의를 지키셔야죠.”

“갑자기 왜 이래? 안 하던 내숭을 다하고?”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샤샤가 뒷말을 흐리며 미간을 찡그렸다. 그러더니 보일 듯 말 듯 미세하게 손끝을 세우며 정면을 가리켰다.

“오징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쯧, 나는 혀를 끌끌 차며 불쾌한 기분을 드러냈다. 샤샤의 말만 따라 굳이, 껄끄러운 옛 약혼녀에게 파티 초대장을 보내는 요제프의 의중이 치졸했기 때문이다.

‘그럴 거면 뺏기지를 말든지. 다 걸고 지킬 자신도 없으면서 어디 본처 행세야?’

삐딱한 자세를 유지하며 마주한 젊은 남자를 바라봤다. 하얗다 못해 멀건 피부와 굽실한 금발, 그 아래 자리 잡은 우수에 찬 푸른 눈동자까지.

‘저게 진짜 쓸모없이 아련하네?’

촉촉한 시선을 마주하고 있자니 온몸이 간질거렸다. 당장에라도 이곳을 뛰쳐나가고 싶은 나와 달리 요제프는 퍽 감성에 젖어 있었다.

“오랜만이군요, 클로엔.”

기어코 열리지 않길 바랐던 봉인이 풀려 버렸다. 한걸음 가까이 선 요제프가 입술을 잘근거리며 다음 말을 망설였다.

‘말하지 마. 아무 말도 하지 마. 오글거리는 소리 할 거면 네 방으로 돌아가!’

나는 목구멍까지 올라온 그 말을 애써 밀어 넣으며 사무적으로 웃었다.

“초대에 응할 줄은 몰랐는데…… 그것도 공작과 함께. 랜돌프가 종용하던가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말 그대로야. 랜돌프 공작이 널 협박하느냐 묻고 있어. 여기서 대답하기 어렵다면, 다른 곳으로 가자. 도와줄게.”

삽시간에 가까워진 요제프가 목소리를 낮추며 작게 속삭였다. 이어서 미처 다하지 못한 개소리를 끊임없이 쏟아 냈다.

“난 널 여전히 기다리고 있어. 클로엔, 네가 원하기만 한다면……!”

이런 미친놈이.

숨겨 둔 이빨을 드러내며 패악을 부리려던 그때였다. 등 뒤로 느껴지는 싸늘한 기운에 나는 하려던 말을 멈추고 뒤쪽을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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